34. 독점욕과 철통 보안.
아침이 밝아왔고, 설이는 부끄럼쟁이가 되어버렸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가도, 내가 고개를 들어서 눈이 마주치면 설이가 먼저 시선을 샥 피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수줍은 미소로 속눈썹을 깜빡이며 고개를 떨군 채 속삭였다.
"이제 정말… 어른이 된 기분이야."
새색시 같은 얼굴로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면서 실크 이불 위로 드러난 내 손을 쥐고는 내 손가락을 하나하나 소중하게 만지작거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나와 똑바로 마주보며 달콤하게 눈을 접어 웃는다.
"형의 남자가 될 수 있어서 기뻐."
물론 그런 설이의 모습은 커튼을 친 창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저 햇살보다 더 눈부시게 아름답고, 파릇파릇한 새싹들만큼이나 귀엽고 깜찍하기 이를 데 없지만, 나는 어색하게 웃는 게 전부였다.
그도 그럴 것이, 뜨거운 밤을 지새고 몇 시간 잔 뒤 일어났더니 온 몸이 하룻밤 사이에 너덜너덜해졌다. 거대한 설 표범에게 온몸을 밟힌 느낌이었는데, 생각해보면 그게 사실과 별반 다르지도 않은 것 같다.
밤새 핥고 깨물린 어깨는 욱신거렸고, 새벽녘에는 약간 미열도 있었지만 아침이 되자 다행히도 나아졌다. 허리 아래로는 삐그덕거리는 낡은 로봇이 된 기분이었다. 설이가 부드러운 쿠션을 허리에 끼워 나를 침대에 앉혀두고 베드 트레이에 조식을 올려와서는 내게 손수 떠먹여줬다. 프렌치토스트도, 과일도, 요거트도 전부 맛있었지만 내 모습은 요양하는 환자나 다를 바 없었다.
사이드 룸에서 설이와 식사를 하는 동안, 호텔 직원 분들께서 엉망이 된 침실과 메인 룸을 다 청소해주셨는데 나는 청소가 끝날 때까지 민망함에 문을 닫은 채 방 안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지난밤의 얼룩이 남은 시트며 바닥에 뒹구는 케이크와 각종 용품들을 치우면서 직원 분들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변태 진상이라고 욕이나 하지 않을까 싶었다. 크림이 묻은 카펫은 확실히 닦기 어려웠을 것이라 반성하는 마음을 가졌다. 나도 편의점 테이블에 껌 붙이고 간 놈들 그렇게 욕했었는데.
그 와중에 설이는 내 허리를 가만가만 주무르며 마사지해주었다.
“형, 어디 더 아픈 곳 있어?”
침대 옆자리에 함께 누워 다정하게 물어왔다. 얼핏 보면 형에게 안마해주면서 효도하는 동생의 모습이라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좀 달랐다. 거침 없이 옷 속으로 들어와 맨 살을 주무르는 손길에 지난 밤이 떠올라서 나는 자꾸 말을 더듬게 되었다.
"어, 어, 없는데? 다, 다, 괘, 괜찮은데?"
"아래는… 아프지 않고?"
자연스럽게 잠옷 사이로 슥 들어오는 손길을 반사적으로 막았다. 설이는 그런 내 저지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듯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여 나를 올려다봤다. 이제 우리 사이에 이런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잖아? 하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아침부터 손 잡는 것도 그렇게 수줍어하더니, 정작 맨 살을 만지는 데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아무래도 설이의 부끄러움 포인트는 나와 한참 다른 모양이었다.
"안 아파! 하나도! 설아, 형은 괜찮아!"
목소리가 잔뜩 쉬어버렸지만, 나는 최대한 건강한 미소를 지으며 설이의 손을 쥐어 끌어올렸다. 두 손을 마주 잡고 아하하, 어색하게 웃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설이는 싱긋 웃었다. 요 근래 가장 편안하고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내가 눈 뜨기 전부터 이미 씻고 있었던 설이는, 내게 잘 보이고 싶다며 반듯한 정장 바지에 와이셔츠를 차려 입고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이마를 드러냈다. 오늘따라 더 섹시한 분위기였다. 지난 밤의 여파로 내가 시들시들한 것에 비해서 설이는 그 어느 때보다 기운이 넘쳐 보였다. 역시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서 체력이 나와 다른 걸까.
"이렇게 보니까…… 새삼스럽지만, 내 동생 진짜 잘 생겼다. 응?"
설이는 침대 가에 앉아서 내 손을 장난스레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내 칭찬에 시선을 비껴 내리며 속눈썹을 가지런히 하고 수줍게 웃었다.
예쁜 애가 꾸미기까지 하면 그 매력은 당해낼 수 없는 법이다. 나는 설이의 뺨을 쥐고, 못 이기는 척 시선을 맞춰오는 설이의 고운 얼굴을 한껏 만끽했다. 짙은 잿빛의 셔츠와 가죽 벨트를 맨 정장 차림으로 금색 실크 이불 위에 삐딱하게 앉아 있는 설이의 모습은, 이대로 화보 촬영 중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나 혼자 감상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반면에 나는 후들후들 떨리는 몸으로 아침 샤워를 겨우 마쳤지만, 잔뜩 울어서 눈가가 부은 데다가 대충 드라이했더니 정전기가 올라서 머리카락마저 부스스했다. 그럼에도 설이는 날 보고 솜털이 보송보송 난 새끼 강아지 같다면서 내 얼굴에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
"참, 우정혁 그 놈 오늘 체크아웃 한다고 했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서 손뼉을 치며 말하자, 설이는 그래? 하고 빙긋 웃었다. 평소라면 저와 친하지 않은 우정혁 얘기에 입을 다물고 침묵했을 텐데, 오늘의 설이는 뭔가 달랐다.
"그럼 우정혁 선배하고 티타임이라도 함께 할까."
"어… 그래도 돼?"
"그럼."
설이는 흔쾌히 허락했다. 바로 전날까지도 서로 그렇게나 어색한 사이였는데, 갑자기 우정혁에 대한 설이의 태도가 한없이 너그러워진 것이 이상했지만 뭐, 어쨌든 둘이 잘 지낸다면 좋은 일이니까.
***
늘 그렇듯 우정혁은 세상 모든 것이 귀찮은 얼굴이었다. 내 연락에도 심드렁하게 대답하더니만 그 뚱한 얼굴 그대로 호텔 루프 탑 바에 먼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울리지도 않게 선글라스를 낀 채로 느슨한 흰 셔츠에 빛 바랜 청바지를 걸쳐 입고 있었는데, 아침부터 또 수영을 했는지 머리카락은 조금 젖어 있었다. 저 혼자 병 맥주를 시켜서 병째로 홀짝거리고 있다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손을 들었다.
로비에서부터 나를 안고 다니겠다는 설이를 겨우 말려서 설이가 내 어깨를 감싸고 부축해주는 것으로 타협했다. 어정쩡한 자세로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나를 보며 우정혁이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리고는 가늘게 뜬 눈으로 나의 거동을 빤히 바라봤다.
"먼저 오셨네요, 선배."
"어…… 그래."
여전히 둘은 무뚝뚝하게 한 마디로 인사를 끝냈는데, 우정혁은 평소와 다르게 설이의 얼굴을 오랫동안 쳐다봤고 설이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우정혁을 마주봤다. 아무 말도 안 하면서 두 사람은 무언의 대화라도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둘 다 무뚝뚝하게 살다 보니 텔레파시 능력이라도 생기는 모양이다.
우정혁의 맞은편 나무 벤치에 방석을 두 개 겹쳐 깐 뒤에 설이는 나를 그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는 내 옆에 앉아서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불렀다. 우정혁은 그런 설이의 얼굴을 내내 빤히 보다가 허! 하고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맥주 병이 벌써 반은 비어 있다.
"야, 너는 아침부터 술을… 네가 이렇게 망나니처럼 사니까 너희 부모님이 얼마나 걱정을 하시겠어. 넌 나랑 다르게 이제 스물둘인데, 정신 차려라. 우망나니. 그러다가 속 버려. 담배도 좀 작작 피고. 내가 다 너 생각해서…"
"목소리 왜 그러냐."
"……어? 뭐, 뭐가."
제 발 저려서 주먹을 말아 쥐고 헛기침을 하려니까, 설이가 종업원에게서 따뜻한 물을 건네 받아 내게 내밀었다. 설이의 도움으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니까 갈라진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크흠, 간밤에… 감기 기운이 조금 있어서."
내 대답을 듣고도 우정혁은 다리를 꼰 채로 앉아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독심술이라도 하는 듯한 눈빛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그 와중에 설이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내 입가를 조심스레 닦아주며 살뜰하게 나를 챙겼다. 내가 우정혁의 눈치를 보는 동안 설이는 메뉴 판을 펼쳐 종업원을 향해 물었다.
"허브 티 중에… 목을 무리하게 썼을 때 좋은 차가 뭐가 있을까요."
내 어깨를 손으로 감싸면서 말을 이었다.
"이왕이면 몸도 무리해서 피곤할 때 도움되는 차라면 더 좋겠는데."
설이의 질문에 직원은 매뉴얼 대로 찬찬히 블렌딩한 허브 티를 이것저것 추천해주었고 설이는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는 내게 뭘 마실지 의견을 물었는데 나는 아무거나 상관없다고 빠르게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내 얼굴이 조금 붉어졌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때쯤, 설이는 주문을 마치고 내 뺨에 손등을 가져다 댔다.
"형, 더워? 얼굴이 좀 뜨거운 것 같은데."
"아… 아냐."
우정혁은 우리의 대화를 들으며 작게 코웃음을 치더니 다리를 반대로 바꿔 꼬았다. 그리고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뒤에 병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설이는 내 어깨를 감싸고 있던 손을 스르륵 내려서 내 허리를 부드럽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고맙게도 옷 속으로 들어오진 않았다.
설이는 마치 다른 사람들은 다 의자나 책상 같은 무생물이고, 사람은 나 밖에 없는 것처럼 굴었다. 지난 밤을 떠올리게 하는 스킨십이 부끄러운 것도 문제였지만, 저 많은 사람들 중에 혹시라도 연예인인 설이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까봐 그게 걱정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불법적인 행위를 하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뭐 하나라도 꼬투리를 잡히면 기사거리가 되는 세상이라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설이에 대해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게 싫다. 본인들이 설이에 대해서 뭘 그렇게 잘 안다고.
그러나 내 걱정을 모르는지, 설이는 고개를 숙여 내게 눈을 맞춘 채 오직 나만 신경 썼다.
"앉아 있기 힘들지는 않아? 내 무릎 위에 앉아도 괜찮은데."
"서, 설아… 형 괜찮으니까 손 좀……."
옷 속으로 들어오지만 않을 뿐, 거의 온몸을 훑는 것과 다름 없는 농밀한 손길 때문에 자꾸만 밤의 단편적인 기억들이 떠올라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설이의 손을 잡아다가 내게서 떼어내며 헛기침을 해댔다.
종업원이 다가와서 우리 두 사람 몫의 티팟과 찻잔을 내려놓고 돌아갔다. 설이는 다도 수업에서 극찬을 받았던 예법 그대로 얌전히 차를 따라 내 앞에 찻잔을 곱게 놓아주었다.
소금기를 머금은 시원한 바람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고, 뒤로 넘긴 새까만 머리카락 몇 올이 바람에 흔들려 설이의 반듯한 이마로 흘러내렸다. 간밤에 내렸던 흰 눈이 맑은 아침 햇살에 녹아 사라지고 상쾌한 기운만 남았는데, 그 청량한 공기가 설이의 맑고 청초한 이미지와 너무 잘 어울렸다.
한 폭의 수채화 같이 아름다운 차 따르는 설이의 모습을 감상하며 입을 헤 벌리고 있으려니, 우정혁이 쯧쯧 혀 차는 소리가 나를 현실로 다시 데려왔다.
"아주 대놓고 광고를 하지 그러냐."
"어? 뭐가?"
티 세트와 함께 조그마한 그릇에 담겨 나온 아몬드 올라간 초콜릿을 설이가 내 입 속에 쏙 집어넣어 주었다. 그걸 우적우적 씹으며 쳐다보니 우정혁이 나를 잔뜩 한심해하는 눈길로 보고 있었다.
"왜, 뭐. 너도 초콜릿 줘?"
"……내가 한준 너랑 무슨 대화를 하겠냐."
하나 달라고 하면 줄 수도 있었는데, 우정혁이 거절하는 바람에 아몬드 초콜릿은 전부 내 입으로 들어갔다. 설이는 하나씩 내 입 안에 넣어주면서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우정혁이 주변을 흘깃거리다가 테이블 쪽으로 몸을 숙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야, 막말로 나는 너희가 둘이 간밤에 홍콩을 수십 번 갔다 왔대도 아무 상관 없거든?"
"뭐?"
"난 이미 면역이 돼서 너희가 호적을 합쳤대도 신경 안 쓴다고."
"무슨 소리야, 설이랑 나는 당연히 호적이 합쳐져 있지."
아우, 하고 소리치며 우정혁이 손에 쥐고 있던 선글라스를 테이블에 내동댕이쳤다. 선글라스 다리 쪽에 로고가 박혀 있는 것을 보면 저것도 꽤 비싼 걸 텐데, 하여튼 부잣집 도련님은 물건 귀한 줄을 모르는 게 문제다. 내가 쯧쯧 혀를 차자, 우정혁이 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설이는 얌전히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우리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그러니까 난, 너랑 네 동생이 연애를 한다고 해도 그렇구나, 할 수 있다고. 인마."
"……정말이야?"
찻잔 손잡이를 쥐고 있다가 떨어뜨릴 뻔 했다.
고등학교 다니면서 워낙 바쁘기도 했고, 내가 우리 설이 자랑하는 것을 묵묵히 잘 들어주는 녀석이 같은 반에 우정혁 밖에 없었기 때문에 친구라고는 졸업하고도 우정혁뿐이라 좁디 좁은 교우관계였지만, 역시 양보다 질이구나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우정혁은 대체 날 친구로서 얼마나 좋아하기에 그런 것도 이해해주는 걸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정혁도 친구가 나 밖에 없긴 했다.
"진짜 감동이다. 우정의 상징… 우정혁……"
감격으로 그렁그렁해진 내 눈망울을 쳐다본 우정혁이 집어치우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고."
날 보던 시선이 설이에게로 옮겨갔다.
"거기, 동생분. 나 따위 견제해봤자 불필요한 일이니까, 나 말고 주변을 좀 의식하는 게 어떻겠냐."
"무슨 견제?"
내 물음에도 우정혁은 대답하지 않고 설이만 쳐다봤다. 우정혁은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는데, 사실 우정혁이 이 세상에 맘에 들어 하는 게 그다지 없기는 했다. 설이는 내 뒷목을 손가락으로 가만가만 쓰다듬고 있다가 부드럽게 눈을 접어 웃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선배는 이해심이 참 깊네요. 예전부터 우리 형에게는 과할 정도로 배려도 많으신 것 같고."
"아 됐다, 됐어. 골 때리는 놈. 내가 괜한 참견을 했다 그래. 항복이다."
우정혁은 설이가 칭찬을 해주는 건데도 질렸다는 듯 한숨을 내쉬더니, 흰 냅킨을 펼쳐 전장의 패배자처럼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 뒤로는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조금 나눴고, 우정혁은 체크아웃하기 전에 심드렁한 얼굴로 "너네 애 낳으면 얘기해라. 돌잔치에 금반지 들고 갈 테니까." 하고 이야기했는데, 나는 별 실없는 농담을 한다며 웃었지만 설이는 고맙습니다, 하고 깍듯이 인사했다.
남은 하루는, 호텔 방 안에서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구르면서 지냈다. 내가 설이의 영화 데뷔작을 몇 번씩 재탕해서 보면서 캐러멜 팝콘을 주워먹는 동안, 설이는 내 허리며 다리를 정성스럽게 마사지 해주었다. 간식을 먹은 뒤에 낮잠을 자고 일어나자, 착한 내 동생이 적당한 온도로 거품 목욕까지 준비해주었다.
만약 또 욕조 안에 같이 들어가려 하면 이번에는 맨 정신이라서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설이는 욕조 밖에 앉아서 내가 씻는 것을 거들어줄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꽤나 민망해서 나는 거품 안에 최대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설이는 셔츠 손목 단추를 풀어 팔을 걷어 붙였다.
"혹시 안 쪽에 남았을 수도 있으니까, 내가 빼낼게."
"아, 아니, 아니, 정말 괜찮은데…!"
이상한 곳을 더듬는 손길이 너무 다정해서 더 부끄러웠다.
목욕이 끝난 뒤에는 보송보송한 가운으로 나를 꽁꽁 감싸서 끌어 안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는 내 뒷목에 코를 비비며 킁킁대고 냄새를 맡았다. 강아지의 콧잔등 같은 그 간지러운 촉감에 킥킥대며 웃고 있는데, 설이가 등뒤에서 행복에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가 좋은데…… 형 데리고 멀리 도망갈까."
진심으로 고민하는 듯 뜸을 들이며 생각에 잠겨 있기에 나는 설이를 달래며 전원을 꺼두었던 설이의 휴대폰을 켜주었다. 신 매니저님에게서 이런저런 보고 메시지가 많이 와 있었다. 휴가에서 돌아오면 바로 확인 부탁한다는 것만 해도 두 건이었다.
그 중의 하나가 드라마 컨텍에 관련된 것이었는데, 우리 설이가 로맨스 드라마 주인공이 된다는 사실이 잔뜩 기대되어서 어떤 작품으로 선택할 거냐고 물어보며 자꾸 치댔더니 설이는 아예 시놉시스와 트린트먼트 자료들을 내게 건넸다.
"형이 골라. 형이 하라는 걸로 할게."
유순하게 눈을 깜빡이며 말 하는 것이 예뻐서 뺨에 몇 번이나 뽀뽀를 해줄 수 밖에 없었다. 인터뷰와 방송 출연 여부에 관해서도 내가 하라는 대로 하겠다며 내 품에 안겨서 어리광을 부렸다. 솔직히 설이가 이렇게 예쁘게 굴면, 그 누구도 녹아 내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동생한테 몸과 마음을 다 내어줄 수 있냐고 누군가 호통치며 말한대도 나는 맞설 거리가 충분히 있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저 밤하늘 같은 눈동자로 길고 섬세한 속눈썹을 깜빡이며 도톰한 입술로 형, 하고 낮게 부르는데 그걸 어떻게 외면할 수가 있느냔 말이다.
“응, 응, 그래. 형이 골라줄게. 형이 다 해줄게.”
우정혁은 설이가 골 때리는 놈이라며 제멋대로 구는 별종이라는 듯이 늘 말하지만, 그건 다 설이가 얼마나 순한 어리광쟁이 인지 몰라서 하는 소리다.
***
집으로 돌아와서도 설이의 어리광은 점점 더 심해졌다. 이제는 침대에서 그냥 껴안고 자는 걸로는 만족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내가 먼저 잠든 척 하고 있으면, 내 등을 끌어안고 간지럽게 여기저기 입을 맞추며 제 체취를 남기는 짐승처럼 잔뜩 나를 괴롭히고서야 겨우 잠들었다.
게다가 출근할 때 현관에서 입맞춤을 하지 않으면 스케줄이 아무리 바빠도 절대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데, 그것도 짧게 끝나는 담백한 뽀뽀가 아니라 현관문이나 벽에 나를 밀쳐놓고 숨이 턱턱 차올라 모자랄 정도로 나를 몰아세워 키스했다. 보통 다들 굿 모닝 키스를 그렇게까지 격하게 하고 사는 걸까?
'준이설이님, 이거 보셨어요? 요즘 오빠 졸 귀여워요.'
지하철 역에서 내 싸움을 말려줘서 친해진 설국지색 눈송이 두 사람 중에 설바설님이 메시지로 링크를 보내왔다. 커뮤니티의 한 게시글 이었는데, 설이가 벤을 타고 아침 일찍 스케줄을 위해 나갔다가 몇 번씩이나 우리 오피스텔 쪽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것이 찍힌 사진들이 올라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스토커처럼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니며 찍은 것은 아니었고, 벤에 오르기 전에 촬영장 근처 맛 집에서 포장한 음식을 들고 있는 사진과 오피스텔 방향으로 되돌아가는 벤의 뒷모습이 찍힌 사진들이었다. 전부 같은 날 찍은 사진들이기 때문에 설이가 하루에 몇 번이나 집에 되돌아왔다가 다시 스케줄을 가는 중이라는 것을 누구라도 추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설이는, 둥지에 먹이 나르듯 계속 집으로 음식을 사다 날랐다. 엄청나게 뚱뚱한 마카롱이나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크림이 잔뜩 들어간 도넛 같은 디저트 종류도 있었고, 매 끼니 때마다 따끈한 철판요리나 한우 세트 같은 것을 자꾸 실어다가 가져왔다.
내가 집에서 혼자 대충 차려먹어도 되는데, 요즘 따라 유난스럽게 더 나를 챙겼다. 허니문 호텔에서 생일을 보내고 난 뒤로 설이의 이런 행동이 더 심해진 것 같은데, 행복해하는 얼굴로 이것저것 싸 들고 현관으로 들어서는 설이 모습이 귀여워서 차마 이러지 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재난대비 음식저장고 채우는 중 아님?'
'내가 보기에 우리 설 오빠 지금 새신랑이야.'
'한설, 집 안에 꿀단지 숨겨놨나 봄.'
집에 숨겨진 그 꿀단지 입장에서 팬들의 추측들이 민망해져서 커뮤니티 창을 닫고 나왔다.
한동안은 온몸이 뻐근하고 말 못할 곳이 아팠지만, 며칠 지나니 괜찮아져서 본격적으로 대청소를 하고 집안 정리를 시작했다. 설이는 그런 건 본인이 휴일에 할 테니까 나한테는 그냥 쉬기만 하라고 하는데, 늘 꾸준히 일을 해왔기 때문에 집 안에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은 좀이 쑤셔서 체질상 더 힘들었다.
내 일이라고 해봐야 청소와 빨래, 그리고 설이 밥 챙겨주는 것뿐인데 사실 그건 일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집 안에서 일거리를 찾아내서 쓸고 닦고 치워댔다. 의자를 밟고 올라가서 거실 유리 벽면을 닦고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벽면도 유리여서 폐 신문지를 구겨 뽀득뽀득 닦아내고 있던 때에 휴대폰에 진동이 왔다. 화면에 뜨는 이름은 '권영도 이사님'이었다.
"뭐해요?"
국민배우 타이틀에서 내려온 적이 없는 대스타라던데, 내게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거나 메시지를 보내서 뭐하냐고 묻는 걸 보면, 권영도 이사도 이제 점점 들어오는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닌가 싶어서 걱정이었다. 연예인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지만, 자꾸 용건도 없이 전화를 걸어오는 걸 보면 심심한 게 분명했다. 스캔들이 끊이지 않는 양반이 그렇다고 아직까지 내게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밥은 먹었어요?"
설이가 물어다 준 한우를 배터지게 잔뜩 구워 먹은 데다가 식후 디저트로는 마찬가지로 설이가 두고 간 망고 케이크를 먹었다고 메뉴까지 세세히 알려주자 권영도는 '아주 철통 보안이네.' 하고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커피는 아직 안 마셨죠. 본사로 나올래요?"
"어… 저 이따가 설이 오면 밥 먹여야 하는데요."
"가정주부입니까?"
"뭐, 생활매니저 겸 형이라서 별반 다르진 않은 것 같네요."
한숨을 푹 내쉰 권영도가 내게 졌다는 듯이 목소리를 낮췄다.
"금방 보내줄 테니까 본사로 나와요. 나하고 일하는 동안 내 차에 두고 간 물건이 있으니까 돌려줄게요. 본인 것은 가져가야죠."
"아, 제가 두고 온 물건이 있었나요? 그럼… 지금 갈게요."
갑자기 설이 담당 매니저로 바뀌는 바람에 정신이 없어서, 내가 몰던 권영도 이사의 애마에 짐을 두고 왔을 수도 있다.
어차피 저녁 반찬거리를 다 준비해주었기 때문에 두어 시간 정도는 외출해도 여유가 있었다.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다가, 설이에게 나갔다 온다고 말해둘까 잠시 고민했다. 그렇지만 금방 집에 돌아올 건데 괜히 바쁜 애한테 연락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현관 문 안쪽 도어록을 해제하고 집 밖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