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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태초의 두 사람 (30/65)

30. 태초의 두 사람

부드러운 쇠고기가 큼지막하게 들어 있는 토마토 스튜를 접시 가득 두 그릇이나 먹었다. 굴라쉬라는 이름의 스튜라고 하는데, 처음 먹어 보는 내게는 색다른 갈비찜처럼 느껴졌다. 나중에 설이에게 만들어주려고 소스 맛을 음미하면서 먹다 보니 목까지 그득하게 차서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운 정도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맛있어?"

테이블 반대편에서 설이는 턱을 괜 채 나를 바라봤다. 일찌감치 식사를 끝내고 탄산수를 조금씩 마시고 있었다. 쇄골이 보일 정도로 느슨하게 목이 파인 티셔츠를 입은 채 부드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설이의 모습은, 그 자체가 화보였다.

음, 분위기 있는 커피 광고나 포근한 이불 광고에도 어울리겠네.

주변 테이블이 비어 있고 한적한 데다가 곁에 다른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설이는 평소 집안에 있을 때처럼 표정이 편안하게 풀려 있었다. 그래 봤자 타인이 보기에는 평소와 별 다른 점이 없어 보이겠지만, 내 눈에는 그 작은 변화도 보였다. 설이가 이 휴가에 만족하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이 났다.

웃고 있는 내 입 속으로 포도 알이 쏙 들어왔다.

"음, 씨가 없어서 먹기 편하네? 배불러도 자꾸 들어간다."

"많이 먹어."

설이는 내 쪽으로 포도 알을 하나 더 집어 들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아- 하고 입을 벌려서 받아 먹었다.

왼쪽 창가로 노을 지는 바다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밥 먹고 쉬다가 수영장에 가서 놀 생각이다. 그런 뒤에 룸으로 돌아가면, 케이크와 와인이 도착해 있을 것이다. 신 매니저님에게 미리 부탁해둔 이벤트였는데, 설이의 스무 살 생일을 기념하는 것이니만큼 호텔 측에서 더 특별한 서비스를 준비했다며 내게 기대해도 좋다는 말을 남겼다.

와인 잔에 담겨 나온 복숭아 맛이 나는 음료를 홀짝이며 만족스러운 포식으로 한숨이 나왔다.

"아아, 설이 네 생일인데 어째 내가 더 호강하는 것 같다?"

"형이 좋으면 나도 좋아."

귀엽고 착한 내 동생, 대답도 얼마나 예쁘게 하는지.

기분이 좋아져서 손을 뻗어 설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내 손을 잡아채서 만지작거리던 설이가 내 손가락에 보드라운 입술을 댄 채로 나를 바라봤다. 눈동자에 은은한 빛이 감돌았다.

"형, 우리… 방으로 일찍 올라갈까?"

설이의 말에 뭔가 대답하고 입을 여는 순간, 우리 테이블 옆을 지나가던 남자 한 명이 우뚝 멈춰 섰다.

그 남자의 모습이 내 시야 끝에 걸려서, 우연히 그쪽으로 눈길을 준 나는 앗! 하고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내 반응을 보는 것과 동시에 내 손을 쥐고 있던 설이도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앗."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의 그 남자는, 우리를 먼저 발견한 주제에 나보다 더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다. 나와 설이를 눈짓으로 번갈아 쳐다보며 그 특유의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 쪽 눈썹을 축 내린 채 눈가를 찌푸린 그 남자를 향해 내가 반갑게 인사했다.

"이게 누구야! 네가 여기에 왜 있어?"

벌떡 일어난 내가 다가가자, 우정혁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오른팔에 걸치고 있던 제 카디건을 왼팔로 옮기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더니 제 머리를 자학하듯 잔뜩 헝클어뜨렸다.

"……내가 할 말이다. 너희야말로 왜 여기 있냐."

심드렁한 말투로 대답하며 우정혁은 내 팔에 이끌려서 억지로 우리 테이블에 남은 의자에 앉았다. 원형 테이블인 덕에 나와 설이의 중간에 끼어 앉은 형태가 되었다. 우정혁은 이 자리가 불편해서 죽을 것 같다는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믿는 종교도 없는 주제에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며 “저한테 왜 이러세요” 하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선배."

"어, 그래."

설이가 다정한 목소리로 싱긋 웃으며 예의를 갖춰 인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정혁은 설이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게다가 그렇게 한 마디 나눈 걸로 두 사람의 인사는 끝이었다. 도통 더 이야기를 이어나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얼굴들이었다. 한두 번 본 사이도 아닌데 둘이 좀 친하게 지내면 좋으련만, 서로 성격이 너무 달라서 영 잘 안 되는 모양이다.

우리 설이는 수줍음이 많고, 우정혁은 사교성이 없는 편이지.

설이가 새까만 눈동자로 빤히 바라보고 있자, 오랜만에 보는 설이의 눈부신 외모에 적응이 안 되는지 우정혁은 뻣뻣하게 몸을 내 쪽으로 돌린 채로 설이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우정혁, 이게 얼마 만이냐. 너 왜 호텔에 있어? 한국에 있는 그 새를 못 참고 놀러 나온 거냐?"

"집에서 하도 잔소리를 해서 출국 때까지 여기 머무는 중이다."

"와, 돈 많고 삐뚤어진 사춘기 소년 같다."

우정혁은 반가움에 생글생글 웃고 있는 나와 내 뒤쪽의 설이를 번갈아가며 가만히 응시하다가 픽 웃었다. 뭐야, 왜 그렇게 기분 나쁘게 웃는데, 하고 팔뚝을 툭 치자 우정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결국 허니문까지 왔구나 싶어서."

"어? 아, 하하… 여기 호텔 이름이 좀 민망하지?"

"됐다. 됐고, 난 그만 가던 길 가련다."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우정혁의 바지자락을 붙잡았다. 놓으라는 듯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몸을 휘적휘적 움직이는 우정혁을 붙잡고 늘어지며 나는 우정혁을 졸랐다.

"야, 우리가 언제 또 만나겠냐. 설이랑 나랑 이제 수영장 갈 건데, 너도 같이 가서 놀자."

"……아, 나 그냥 방에서 쉬고 싶은데."

우정혁은 내 물음에 설이 쪽을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설이는 아무 말 없이 입 꼬리를 올린 채 미소 짓는 표정이었는데도 우정혁은 흘깃거리며 설이의 눈치를 봤다.

혹시 설이가 이제 연예인이 되어서 부담스러운 걸까.

"너 맨날 쉬는 백수 놈이 뭘 또 쉬어. 같이 놀자, 설이 생일이란 말이야."

통화를 자주 하는 편이기는 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로는 우정혁이 외국을 들락날락하기도 했고 나도 바빠서 차분히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눈 것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예전에는 매일 보면서 수다 떨던 사이였는데 이렇게 우연히 만나 인사만 하고 보내주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그리고 생일이란 게 원래, 복작거리고 축하해주는 사람도 늘어나면 훨씬 기쁜 법이니까.

"그러세요. 선배."

설이가 우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딱히 일정 없으면, 같이 가시죠. 형이 이렇게 바라잖아요."

눈웃음을 지으며 설이가 예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부탁하자, 우정혁은 뒷걸음질 쳤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더니 나를 보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내가 너 때문에 미치겠다, 한준…' 하면서 알 수 없는 소리를 해댔다.

"에이, 자식. 튕기기는. 사실은 우리랑 같이 놀게 돼서 기쁜 주제에!"

"하…… 그래. 그런 걸로 하자."

우정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고, 라운지를 벗어나가면서 설이는 착한 얼굴로 내 손을 잡으며 웃었다. 우정혁은 손을 잡은 우리 두 사람과 한 발자국 떨어진 뒤에서 따라오며 한숨을 폭폭 내쉬었다.

***

"감동적이지 않냐? 우리 설이 너무 멋지지. 이거 이대로 영화 만들어도 한 편의 아름다운 스토리가 될 것 같아. 나중에 기획사 팀장님 만나면 한 번 제의해볼까 싶어. 물론 주연은 우리 설이로 하고. 내 동생처럼 아름답게 헤엄칠 수 있는 배우가 또 없을 테니까. 어떠냐?"

"흐음, 저게 무서워하는 게 있다고……. 믿기 어렵네."

우정혁은 칵테일을 한 모금 홀짝 마시더니 선 베드에 머리를 기댔다. 깍지 손을 낀 팔을 목 뒤로 넘겨 느긋하게 누웠다. 나는 우정혁의 팔을 툭툭 때리며 그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아니, 어릴 때는 물을 무서워했었는데 지금은 아니라니까?"

"하긴. 저걸 보고 누가 물 공포증이라고 생각하겠냐."

우정혁이 턱짓을 한 쪽을 같이 쳐다봤다. 유유히 헤엄쳐서 저 끝까지 간 설이가 내 시선을 느끼고는 내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내가 마주 손을 흔들어주자, 설이가 멀리에서 다시 물 속에 잠겼다.

경계선이 없는 것처럼 끝없이 물이 밖으로 흘러 넘치는 야밤의 수영장은 처음 와봤기 때문에, 어디 신화 속 신들의 궁전에라도 온 것 같은 기분이다. 그도 그럴 게, 수영장 아래로 이어지는 듯한 밤바다의 풍경이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물결 위에 굴절되는 조명 불빛들과 선율이 고운 잔잔한 음악, 그리고 완벽하게 근육이 갈라진 몸매의 설이가 헤엄치고 있는 모습이 어우러져서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온도 조절을 잘 해놨는지 물 안도 따뜻한데다가 밖에 있어도 가운을 걸치면 그리 춥지 않았다. 그런데도 설이는 수영복 위에 가운을 걸친 나를 비치 타올로 둘둘 감아놨다. 무슨 극성이냐는 듯 우정혁이 눈살을 찌푸리고 봐도 설이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설이의 수영하는 모습을 좋아해서 설이의 우아한 몸동작을 구경하고 있는 동안, 우정혁은 내 옆 선 베드에 누워서 나의 동생 자랑을 들어주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저놈이 어릴 적에 계곡에 빠지는 사고로 물을 무서워하게 됐는데 네가 '수영하는 모습 참 멋졌는데' 라고 한 마디 하는 바람에, 저놈이 널 기쁘게 하기 위해 노력해서 물 공포증을 이겨냈다, 이 말이잖아."

"어. 설이 수중 광고도 찍었잖아. 청바지 광고. 너도 티브이에서 봤을걸?"

"알지."

우정혁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늘게 뜬 눈으로 수면 위로 떠오른 설이를 바라보며 우정혁이 혀를 쯧쯧 차내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래, 뭐. 상대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게 사랑이긴 하지."

"판타지?"

나에게로 고개를 휙 돌린 우정혁이 선 베드에서 몸을 일으켜 앉으며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는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목소리를 낮추면서 속삭였다.

"너 말이다,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냐."

"뭐가?"

"저놈이 늘 네가 보고 싶은 모습만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 해본 적 없어?"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네 동생은 말이야, 모든 것을 능숙하게 잘 해내고 인기도 많지만 그럼에도 탈선 한 번 하지 않고 네 말은 잘 듣는 모범생이었잖아. 네가 원하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도 비현실적이고… 모든 점에서 또래 애들이랑은 확연히 다르잖냐."

"그거야……."

내 동생은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니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우정혁은 제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저 멀리 설이가 헤엄치며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라면 의심해볼 것 같은데. 내가 보는 그 사람의 모습이 허상이거나, 아니면 이 모든 현실을 꿈으로 바꾸기 위해서 그 사람이 무던히 노력하고 많은 걸 조작하고 있다거나… 둘 중 하나로."

"조작…?"

"그냥, 나라면 그럴 것 같다는 얘기지."

씩 웃는 우정혁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물결을 가르며 참방거리는 소리가 가까이 들려왔다.

유유히 헤엄쳐 온 설이가 우리 발 밑 쪽 수영장 입구에 멈춰 섰다.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깊게 숨을 내쉰 뒤, 수영장 턱에 두 팔을 올렸다. 그리고는 촉촉하게 젖은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꼬리를 늘였다.

"혀엉, 이제 이리로 오면 안 돼? 설이는 형이랑 놀고 싶은데."

아, 어쩌면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우정혁이 꺼낸 복잡하고 이상한 의문 같은 것은 금새 잊어버리게 만드는 애교였다. 나는 내 몸에 둘둘 말린 비치 타올을 전부 풀어내고 가운을 벗어 선 베드에 던져 두었다.

"그래, 가자!"

수영장에 뛰어들기 전에 우정혁에게 우리 짐을 지키고 있으라며 단단히 일러두었다. 뭐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우정혁은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기 우리 셋 밖에 없구먼, 뭘 지켜."

불만인 듯 중얼거리기는 했지만 우정혁은 설이와 내 휴대폰과 키 카드가 담긴 방수 팩, 가운 등을 주섬주섬 주워서 간이 테이블에 올려주었다.

기분 좋은 정도로 데워진 수영장 물에 발을 집어넣자마자, 설이가 내 허리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아 조심스럽게 나를 물 안에 들어오도록 도왔다. 나도 수영은 좀 하는 편인데, 생계 형 수영이랄까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라 어릴 적에는 친구들에게 개헤엄이라며 놀림을 받았었다. 그래서 마치 물 안에서 태어나 자란 인어처럼 우아하고 아름답게 움직이는 설이를 볼 때마다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나를 끌어안은 채로 바다 수평선이 보이는 인피니티풀의 끝까지 부드럽게 헤엄쳐 간 설이가 물이 흘러 넘치는 투명한 벽 앞에 나를 세우더니 등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맨 가슴이 내 등에 바로 닿아서 흉곽이 움직이는 것마저 선명하게 느껴졌다.

"해 지고 나면…… 형이랑 둘이서만 놀고 싶어."

투정부리듯 은밀하게 속삭이는 게 귀여워서 키득키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춥지 않은데 설이는 내 어깨에 손바닥으로 물을 담아 몇 번이나 끼얹어주었다. 머리카락 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설이의 콧날을 타로 흘러내렸다. 조금씩 빛깔이 바뀌는 물 안쪽의 조명이 하얀 얼굴을 물들이고 있었다. 주황빛에서 푸른빛으로 바뀐 조명 때문에 설이의 얼굴이 푸르게 보였다.

어린 시절, 물 속에 빠진 설이의 입술도 그랬었다.

"설아, 너 어릴 때 계곡에서 사고난 그날, 기억하지? 소풍 갔던 날 있잖아."

"…응."

"슈퍼마켓 하던 집 김수영, 걔가 설이 너 바위에서 미끄러졌을 때 같이 있었지? 나 걔랑 꽤 친했었는데."

갑자기 떠오른 그날에 대해 생각하느라 밤바다의 어둑한 수평선 너머에 시선을 둔 채로 멍해져 있었다. 설이는 아무 말 없이 내 등 뒤에 서 있었다.

"김수영이 그때 이상한 말을 했어. 너를 구해주려고 손을 잡았는데, 설이 네가 김수영 손을 뿌리쳤다고."

"……"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설이 네가 그랬을 리가 없잖아. 위험한 상황에서 도와주는 손길을 누가 뿌리쳤겠어. 그런데 그 뒤로도 몇 번이나 김수영은 나 만날 때마다 자길 믿어달라고 했었지. 왜 그랬을까?"

"…글쎄."

등 뒤에 서 있기 때문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설이는 나를 더 바싹 끌어안았다. 미지근한 물보다도 훨씬 뜨거운 설이의 체온이 젖어서 미끄러워진 피부를 통해서 내게 느껴졌다.

"김수영이 나한테 그랬었지. 설이 네가 연기하는 거라고…… 내가 너에게 속고 있는 거라고. 참, 이상한 애야. 그럴 수가 없는데."

"그게 진짜라면, 형은 어떡할 거야?"

"어?"

등 뒤의 설이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나와 눈을 맞췄다. 어둠에 번들거리는 설이의 새까맣고 촉촉한 눈동자가 내 눈을 빤히 들여다봤다.

"내가 연기하는 거고, 형이 내게 속고 있는 거라면… 나를 싫어할 거야?"

"…어?"

잠시 멍해져서 설이의 질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나는 어깨를 흔들어 설이의 가슴팍을 가볍게 치며 웃었다.

"무슨 그런! 장난치지 마. 설아."

"……응."

설이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한 박자 늦게 새까만 눈동자를 반쯤 접으며 웃어 보였다.

선 베드 쪽에서 우정혁이 "나 먼저 간다!" 하고 소리쳤다. 자그마한 우정혁이 두 팔을 뻗어 흔들며 출구 쪽을 향해 뒷걸음질로 걸어가고 있기에 반사적으로 그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야, 같이…!"

그때 설이가 내 손목을 가볍게 쥐었다. 그리고는 등 뒤에서 내 허리를 깊이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나보다 저 선배가 더 좋아?"

물기에 젖은 몸의 촉감과 속삭이는 목소리가 간지러워서 어깨를 파드득 떨었다. 우리 둘을 놔두고 우정혁은 이미 사라졌고, 설이는 젖은 머리카락을 내 뒷목에 비비며 웅얼거렸다.

"이제 나랑 둘이서만 있자, 형. 내 생일이잖아… 응?"

"그, 그래. 그러자."

설이의 손등을 도닥거리며 대답했지만, 우정혁이 떠나고 나니 편안하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둘만 있게 되면 오늘은, 내가 여태껏 외면해왔던 것을 직시해야만 할 것 같은 이상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

"아, 이건 그…… 뭔가 좀… 분위기가 다르지 않나?"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올라온 룸 안에는, 이미 예약해두었던 이벤트대로 방이 꾸며져 있었다. 설이의 스무 살 생일을 기념하는 케이크와 와인이 자그마한 크래커에 과일과 치즈가 올라간 예쁘장한 음식들과 함께 차려져 있었고, 그건 내가 원했던 것이 맞았다.

하지만 흰 침대 시트 위에 흩뿌려진 새빨간 장미 꽃잎들이 침대에서 안쪽 폴딩 도어를 넘어 나무 욕조 안까지 가득했다. 게다가 흰 침대를 수놓은 장미 꽃잎은 중간쯤에 커다란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분명 로맨틱한 연출이기는 했는데, 그게 어쩐지 신혼 여행 온 커플들을 위한 이벤트처럼 야릇한 분위기를 풍겼다. 따로 향 같은 것을 피웠는지 은은하게 달콤한 향도 났다.

게다가 우리는 인피티피풀이 있는 층에서부터 객실 전용 엘리베이터를 탄 채로 올라왔기 때문에 잠옷에 가운을 걸친 편안한 홑겹 차림이었다.

설이는 나보다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와서 침대를 덮은 붉은 장미 꽃잎을 하나 주워서 유심히 내려다봤다. 설이의 머리카락은 아직 다 마르지 않아서 촉촉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속눈썹을 깜빡이며 부드러운 시선으로 꽃잎을 바라보던 설이가 미소 지었다.

“……날 위해서 준비해준 거야?”

흰 뺨이 살짝 볼록하게 올라와서 아이같이 웃는 얼굴이었다. 침실의 은은한 조명에 반짝이는 눈동자가 벅찬 감정으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어색한 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찬찬히 둘러보자, 침대 곁 콘솔에 하트 기둥 모양의 은은한 파스텔 톤 향초들이 주르륵 늘어선 것이 보였다. 그 옆에는 바구니가 놓여 있었는데, 별 사탕 같은 모양의 입욕제와 누가 봐도 부부 용품으로 보이는 물품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저런… 저런 게 여기 대체 왜 있지?

당황스러운 마음에 목 뒤로 침을 꿀꺽 삼키는데, 설이가 다가와 나를 끌어안으며 “기뻐.” 하고 속삭였다.

그래, 네 마음에 들었으면 된 거지, 싶어서 그저 덩치 큰 설이를 마주 끌어안고 그 넓은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주었다. 어차피 축하 이벤트라는 게 사실 거기서 거기인데다가 보통 형제끼리 이런 고급 호텔에 놀러 오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착각했을 수도 있다.

새하얀 눈꽃이 가득 피어 있는 것처럼 섬세하게 꽃잎을 재현해낸 케이크를 보니 감탄이 새어 나왔다. 꽃 안에 이슬이 맺혀 있는 것까지 표현해내서 이게 케이크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부케 꽃다발로 충분히 착각했을 것이다. 설국지색 팬들이 선물해준 삼 단짜리 레터링 케이크도 예술품 그 자체였지만, 순결하고 맑은 흰 색의 꽃잎 케이크도 설이에게 아주 잘 어울렸다. 눈 덮인 산에서 만난 우리 설이와 꼭 닮은 걸 선물하고 싶어서 백방으로 알아보고 케이크 디자이너 선생님에게 특별히 부탁했던 보람이 있다.

“이제 소원 빌고 촛불 후 불어야지. 응?”

설이는 침대에 마주 걸터앉아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트레이 테이블을 그대로 침대 앞까지 끌고 와서 긴 초 두 개를 케이크에 꽂았다. 촛불을 켜고 나서 벽면 스위치를 눌러 방 안의 조명을 최대한 어둡게 낮춰 두었다. 작은 촛불들과 향초의 어른거리는 불빛에 비치는 우리 두 사람의 얼굴이 장난스럽게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다. 꼭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 같았다.

눈을 감은 설이의 얼굴에 길게 속눈썹의 그림자가 늘어졌다.

아주 짧은 시간, 나는 설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내가 이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생각했다. 핏줄이 이어진 것도 아닌데, 똑같은 사람인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나는 그 누구보다 설이가 좋았다. 모든 걸 다 주고 싶을 만큼.

후욱, 촛불이 두 개 다 꺼졌다. 멀리서 향초가 일렁이며 움직였다.

조금 더 어두워진 방 안은 포근한 동굴 속 같았다. 태초의 단 두 명뿐인 사람처럼, 세상에 우리만 남은 것처럼.

“나 이제 성인이야, 형.”

설이가 내 손을 잡았다. 긴장이라도 한 듯 손끝이 조금 차가웠다.

“나를 위해서…… 어디까지 내어줄 수 있어?”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성큼 가까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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