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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밀월 蜜月 (29/65)

29. 밀월 蜜月

지하철을 탈 것도 아닌데 지하철 역까지 걸어가는 건 처음인 것 같다.

설이와 내가 살고 있는 우리 오피스텔 건물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나갈 때에도 잠금 장치를 해제할 때에 비밀번호와 생체 인식이 필요해서 나다니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그래서 이사온 뒤로 설이하고 함께 외출할 때를 제외하고는, 혼자 집 밖으로 나오는 것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매번 채소와 생선, 육류를 경비실을 통해서 배달로 올려다 주기 때문에 식재료를 사러 마트에 갈 일도 없어졌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간밤에 끓여둔 쇠고기 미역국으로 설이 아침을 먹여서 오전 스케줄을 보내고 난 뒤에 부랴부랴 근교 호텔로 놀러 갈 짐을 쌌다. 그래도 설이가 스케줄을 끝내고 집에 오기 전까지 시간이 꽤 넉넉하게 남은 김에, 가까운 지하철 역에 갈 채비를 하고 문 밖으로 나선 참이었다.

"앗! 6001호 거주자님, 어디 나가십니까?"

바삐 걷고 있는데, 오피스텔 일층 프런트 앞에서 경비원이 급하게 따라 나왔다. 이사할 당시에 인사를 나눴던 터라 안면이 있어서 반가웠다. 처음 한 두 번은 집 근처 마트로 장을 보러 다닐 때마다 경비원 분들께 비타민 음료수를 건네드렸는데, 설이가 식재료 배달을 시키는 바람에 그렇게 인사드릴 일이 없어졌다.

"네, 잠깐 요 앞에… 오늘도 고생이 많으십니다."

꾸벅 인사하자, 나이대가 비슷해 보이는 그 경비원은 당황하며 나보다 훨씬 더 허리를 굽혀서 인사를 받아주었다. 코트 깃을 여미면서 문 밖으로 나서려는데 경비원이 다시 내 앞을 막아 섰다.

"저기! 오늘 외출은 오후 두 시로 알고 있습니다만……."

"어? 어떻게 아셨어요? 설이가 그래요?"

설마 우리 설이가 이제 다른 사람들하고도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건가? 싶어서 반색하며 묻자, 경비원은 앞주머니에 걸려 있는 무전기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두 분께서 오후 두 시부터 이틀 집 비우신다고 보고가 들어와서요, 이럴 경우 경비 단계가 올라가기 때문에 알고 있습니다."

"그렇구나. 정말 수고하시네요. 문 잘 잠그고 다녀올 테니까 너무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이번에야 말로 꾸벅 인사를 하며 경비원을 지나쳐서 자동문 밖으로 나서자, 바깥 쪽에 서 있던 경비원들이 꾸벅 인사했다. 지나칠 정도로 경비가 삼엄한 건 아닌가 싶다가도 우리 설이가 유명한 연예인이 되었으니 스토커라던가 그런 범죄는 예방해야 할 일이지, 싶어서 납득했다.

오피스텔 건물 밖으로 한 발자국 내딛자마자, 코트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설아! 지금 촬영 중인 거 아니야? 갑자기 왜 전화했어?"

"어디 가."

전화 받자마자 묻는 목소리에 응? 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도로에 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집과 다르게 주변 소음이 심해서 내가 밖에 있는 것을 설이가 알아챈 모양이었다. 코트 깃을 세워 찬 바람을 막으며 거리를 빠르게 걸어갔다. 장갑은 설이 것을 빌려 꼈더니 손가락이 한참 남을 정도로 컸다. 휴대폰을 귀에 더 바짝 가져다 댔다.

"추운데 형 혼자 어디 가."

설이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평소보다 더 낮게 느껴졌다. 사실대로 말하기는 부끄러워서 우물쭈물 거리다가 겨우 적당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냥… 바람 쐬러 나왔어."

말하고 나니 스스로 느끼기에도 이상한 대답이다.

그도 그럴 게, 우리 오피스텔 건물 중간 층에 실내 공원이 있는데 꽤 크고 잘 되어 있어서 산책을 위해 따로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햇살 좋은 날, 설이가 나를 실내 공원으로 데려가더니 산책 데려간 강아지에게 설명하듯이 "이제부터 답답할 때는 여기에 오면 되는 거야, 형." 하고 일러주었다. 층수가 높은데도, 거주자가 많지 않은지 실내 공원에서는 사람을 마주치는 일조차 드물어서 한가롭게 산책하기에는 꽤 좋았다.

하지만 사실, 지금은 볼 일이 있어서 나가는 거라.

지하철 역 입구에 멈춰 서서 나는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30분, 아니 20분 안에 다시 집에 들어갈 거야! 걱정하지 마, 설아."

작게 한숨 쉬는 소리가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알았어. 걱정되니까 빨리 집으로 돌아가, 형. 촬영 끝나고 바로 데리러 갈게."

전화를 끊고 나서,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계단을 내려갔다.

커뮤니티 공지에서 본대로 벽면을 쭉 이어서 설이의 광고 사진이 붙어 있었다. 광고판 앞에서 인증 사진을 찍는 여성들이 보이는 걸 보니, 다들 눈송이 분들인 모양이다. 꼭 설이의 팬이 아니더라도, 남녀노소 멈춰 서서 설이의 사진을 보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럴 수 밖에. 좋은 건 크게 볼수록 좋은 법이다. 아름다운 설이 얼굴이 지하철 역 계단 벽면을 쭉 이어서 붙어 있으니 이곳이 천국이며 극락이었다. 감격에 젖은 눈으로 커다란 사진 속의 설이 옆모습을 감상하는 도중에, 우연히 지나가는 커플의 잡담이 귀에 들어왔다.

"아, 얘 걔구나? 살인자 동생으로 나온 애. 한설?"

"응, 오빠. 한설 너무 잘 생겼지. 난 요즘 얘가 제일 잘생긴 거 같애."

"그래? 저런 얼굴은 배우 중에는 흔하지 않나?"

"아냐, 오빠. 한설 처음 광고 나왔을 때 독보적인 미남이라고 다들 놀랐었어."

"흥. 그냥 계집애 같은데. 이런 애들은 옛날부터 기생오라비라고, 재수 없는 얼굴이야."

"에이, 그건 아니다."

"아니긴! 한설 같은 새끼들은 어차피 뒤에서 호빠 같은 일 하다가 나온 걸 텐데……"

고개가 확 돌아갔다.

노려 보는 내 눈빛과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흠칫 놀랐다가 표정을 구기며 멈춰 서서 내게 턱을 내밀었다.

"뭐야, 뭘 꼬라 봐."

코트에서 뺀 주먹이 꽉 쥐어졌다. 파르르 떨리는 손에서 장갑을 벗어냈다. 장갑이 설이 것이니까 상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장갑을 접어 주머니에 넣어두고 천천히 되물었다.

"다시 말해 봐, 이 새끼야. 뭐가 어째? 호빠? 기생오라비? 재수가 없어?"

"뭐, 뭐야… 왠 미친놈이야……."

"오, 오빠, 우리 빨리 가자. 좀 이상한 사람 같애."

주춤주춤 뒷걸음 치는 커플 뒤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게 보였지만, 도통 화가 안 풀렸다.

"저렇게 잘 생기기가 어디 흔한 줄 알아!? 씨발, 그리고 호빠? 우리 순진한 애를 어디다 비벼. 설이 학교 성적을 네가 알기나 해? 지금 와주십사 하는 대학도 수두룩 빽빽이야! 진짜 뭣도 아닌 게 감히 우리 설이 욕을 해?!"

"아니, 근데 이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여자가 팔을 붙잡고 말렸지만, 얼굴이 시뻘개진 남자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덩치도 얼굴 크기도 나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하지만 그런 겉모습에 쪼는 성격이었으면 내가 여태까지 유달리 예쁜 동생 키우면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설이를 욕하거나 설이를 우습게 보는 것만은 가만 둘 수가 없었다. 설이가 내 유일한 자랑거리이기도 하지만, 우리 설이는 누구한테 욕 먹을 애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집안의 귀염둥이이며 요정이자 천사이자 순수함의 결정체를 모욕하는 건 큰 죄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이 남자는 내게 너무나 큰 모욕감을 주었다.

선빵을 날리자. 이런 덩치 큰 놈 같은 경우에는 먼저 한 대 빠르게 치고 빠져야, 그 다음부터는 놀라서 정신을 못 차리고 당하는 법이다. 손가락 뼈에 날을 세워서 주먹을 쥐고, 남자의 빈틈을 노리고 있을 때에 누군가가 불쑥 내 앞을 막아 섰다.

나보다 한참 작고 교복을 입은, 한 명도 아닌 세 명의 여학생이었다.

"그만 하세요! 아저씨가 이 오빠 괴롭힌다고 역무원한테 이미 신고했어요."

"이것들은 또 뭐야, 씨발 내가 괴롭히기는 뭘…"

"아저씨가 우리 한설 오빠 욕했잖아요! 유언비어 퍼트리는 것도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그거 형사처벌 될 걸요? 아까부터 동영상으로 다 찍었어요."

여학생 한 명이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고, 남자는 당황했는지 입만 뻐끔거렸다.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는 그 남자의 여자친구가 빨리 가자며 팔을 잡아 끌자, 남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우리를 노려보며 줄행랑을 쳤다. 소동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그제야 하나 둘씩 자리를 떴다.

인파가 흩어진 자리에 나와 여학생들만 남았다.

"저기, 괜찮으세요?"

"아… 네, 싸움 말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머쓱해져서 뒷목을 긁적거리며 그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생각해보니 보는 눈도 많은 지하철 역에서 설이 문제로 치고 박고 싸웠다가는, 기사가 날 게 뻔했다. 그랬다가는 오히려 설이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제때에 내 앞을 가로막아준 세 사람에게는 정말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여학생들은 저희들끼리 속닥거리다가 설이의 생일 광고가 붙어 있는 래핑 광고 벽면 쪽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리고는 한층 밝아진 얼굴로 내게 물었다.

"저기, 오빠도… 눈송이 맞으시죠?"

"네?"

"설국지색 눈송이 아니에요? 아까 그래서 싸운 거잖아요."

반짝거리는 세 여학생의 눈빛을 내려다보다가 아, 하고 입을 벌렸다. 커뮤니티에 뻔질나게 드나들었지만, 실제로 설이의 팬들을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벅찬 마음에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마, 맞아요. 저도 눈송이에요……."

방금 전까지 주먹 날릴 듯이 화냈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내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수줍은 소년이 되어버린 내 앞에서 세 여학생이 방방 뛰며 반가워했다. 기쁘고 부끄러워서 시선을 내리깔고 있으려니 남성 팬은 실제로 처음 만나본다면서 내게 궁금한 게 많다고 했다.

"오빠는 한설 오빠를 어쩌다 좋아하게 됐어요? 어떤 점이 좋아요?"

"와, 그거 진짜 어려운 질문이네요. 마치 우리가 왜 숨을 쉬나 지구는 왜 동그란가 물어보는 거랑 같은데, 음… 깊은 눈동자와 속 깊은 마음에서 시작해야 할 지 곧은 뼈대와 섬섬옥수 같은 손가락에서부터 시작해야할 지……"

"이 분 찐이네."

"그러게. 한설한테 진심이네."

여학생들은 나에게 더 물을 것도 없다면서 내 얘기를 채 5분도 다 듣지 않고도, 나를 눈송이로 인정해주었다. 우리들은 지하철 플랫폼까지 함께 내려가서 스크린도어를 점령한 설이의 생일 광고를 함께 감상했다. 플랫폼 광고판 옆에 나를 세우고 친절하게 내 휴대폰으로 인증 사진도 찍어주었다.

그들과 메신저 아이디를 주고 받고 나서 역 앞에서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역시 설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설이를 닮아서 착한가 보다, 생각하며 휴대폰을 다시 보니 설이에게서 부재중 통화가 와 있었다. 시간도 벌써 40분은 더 지나 있었다.

급하게 달려 오피스텔로 돌아오자, 아니나 다를까 현관에는 설이가 아침에 신고 나간 구두가 놓여 있었다. 헉헉 숨을 몰아 쉬면서 거실로 뛰어들어갔더니 창 밖으로 시선을 둔 채 나에게 넓은 등을 보이고 있던 설이가 내 쪽을 돌아봤다. 팔짱을 낀 설이의 표정이 어딘지 싸늘했다.

"20분 걸린다고 하지 않았어?"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위축되어서 시선을 피했다. 평소에는 좀처럼 화를 내는 일이 없기 때문인지 설이의 기분이 저기압인 게 느껴지면 움츠러들게 된다.

"아, 미안…. 일이 좀 생겨서. 너 그런데 왜 이렇게 일찍……"

저벅저벅 내 앞까지 단 번에 걸어온 설이가 나를 가득 끌어 안고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품에서 조금 놓아주고는 큰 손으로 내 뺨을 쓸다가 내 손가락을 잡고 만지작거렸다.

"이게 뭐야, 손이 차갑잖아. 속상하게."

"아…… 장갑 끼고 나갔었는데 올 때는 깜빡 했어."

설이는 내 손이 녹을 때까지 꼭 잡고 쓸어주면서 속눈썹을 내리깐 채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뭔가 할 말을 망설이는 듯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가급적이면 형 혼자 안 나갔으면 좋겠어. 내 마음이 너무 불안해."

신경정신과 주치의의 말을 전해 들을 것에 의하면, 요즘 설이의 마음 상태가 평온해진 것 같다고 한다. 그게 전부 내가 설이의 곁에서 서포트 해주기 때문이라는데, 아직은 내가 설이에게서 조금만 멀리 떨어져 있으면 다시 설이의 마음 상태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했다니 조심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설이가 침대에서 나를 곰 인형처럼 꼭 끌어안은 채로, 그런 말을 했었다. 

‘형이 내 곁에만 있으면, 나는 무서울 게 없어.’

그 말인 즉, 내가 곁에 없으면 세상이 무섭다는 뜻인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이래서야 내가 여린 내 동생을 도저히 혼자 둘 수가 없는 것이다.

"알았어, 이제 진짜 혼자 안 나갈게."

"응… 고마워, 형."

다시 여유와 미소를 되찾은 설이가 수줍게 미소 지었다.

스케줄이 예상보다 빨리 끝난 덕분에 설이와 나는 예약된 호텔로 빠르게 출발할 수 있었다. 강릉 쪽에 있는 호텔이었는데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신 매니저님이 주차장에 두고 간 차로, 내가 직접 운전해서 가기에 충분했다.

설이는 조수석에 앉아서 핸들을 돌리는 내 입에 아메리카노 빨대를 대주거나 과자를 한 알씩 넣어주었다. 따로 운전할 사람을 붙여주겠다는 말을 극구 거절하고 설이와 단둘이 가는 쪽을 택하길 잘했다.

생각해보면, 설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생활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둘이 놀러 가는 것이 처음이었다. 다른 집 애들은 친구들끼리 방학에 여행도 다니고 한다는데, 나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느라 그럴 짬이 안 났고 설이는 친구들과 놀러 가고 싶다거나 그런 얘기를 꺼내는 성격이 아니었다. 아마도 집안 형편에 부담이 될까 걱정되어서 그런 말도 못 꺼냈을 것이다. 우리 순둥이 설이를 어쩌면 좋을까.

생각에 빠져, 교통정체 중인 앞 차들을 글썽글썽한 눈으로 바라봤다.

"설아, 혹시 뭐 갖고 싶은 거 따로 없어? 형이 너 생일 선물로 주고 싶은데……."

"음, 나는 호텔 예약권이 선물인 줄 알았는데."

"맞아. 근데 이거 말고 따로 뭐 갖고 싶은 건?"

"형."

“응?”

“형이라고. 내가 갖고 싶은 거.”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설이의 아이 같은 미소가 눈부시다.

어릴 때부터 한결 같이 나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는데 예쁘지 않을 수가 없다. 달콤하게 속삭이며 응석을 부리듯 내 어깨에 머리를 비비는 설이가 너무 귀여워서 브레이크 대신 액셀러레이터를 밟을 뻔했는데, 신호가 바뀌어서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

"한준 님, 프레지던셜 스위트 룸으로 예약되어 있으시네요? 두 분을 방까지 모시겠습니다."

체크인을 하기도 전에 우리를 맞이한 종업원을 따라서 라운지를 가로질렀다. 자연스럽게 다가온 남자 종업원 두 명이 우리 짐을 대신 들어주었다. 호텔에 도착하기 전에 들른 휴게소에서는 선글라스를 낀 설이를 사람들이 힐금거리며 쳐다봤는데 라운지부터 한적하기도 했고, 아무도 설이를 쳐다보지 않았다.

"전면 창 씨뷰를 즐기실 수 있으며, 원하시는 시간대에 인피니티풀과 뷔페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저희 호텔에 계시는 동안 제가 두 분을 모시기 때문에 불편사항은 언제든지 말씀해주시면 된답니다."

친절한 종업원이 인사를 하고 나간 뒤, 응접실로 보이는 곳에 우리는 덩그러니 남겨졌다.

설이는 캐리어에서 내 짐부터 꺼내서 얌전히 정리해주고 있었다. 요 근래 본 모습 중에 가장 즐거워 보여서 내가 하겠다며 소일거리를 뺏을 수가 없어서 응접실 흔들의자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웰컴 드링크라는 것과 함께 쿠키가 접시에 담겨 있기에 아작아작 씹고 있으니 설이가 빙긋 웃으며 뒤돌아봤다.

"형 배고파? 우리 내려가서 뭐 좀 먹을까."

"어… 근데 여기서도 사람들이 너 쳐다보면 식사하기 불편하지 않겠어?"

"괜찮아. 식사도 하고, 구경도 하자. 수영장도 가고."

"응, 그러자."

나도 모르게 설레는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이런 곳에 놀러 온 건 처음이라서 뷔페에서 식사도 하고 주변 구경도 하고 수영장도 가보고 싶었는데, 설이가 싫다고 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넓디 넓은 호텔방 안을 기웃거렸다.

단 이틀 머무는 방이 이렇게 클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설이 생일이니까 이 정도는 해주고 싶다. 나무로 된 마루 바닥에는 왕실에나 있을 법한 금실로 짜인 카펫이 깔려 있고, 엄청나게 폭신한 소파는 대자로 누워도 될 정도로 넓어서 며칠 밤을 자도 등이 결리지 않을 것 같았다.

고풍스러운 유리 진열장 안에는 각종 양주와 음료 병이 들어 있었지만, 저걸 꺼내 먹으면 엄청나게 비싼 값을 물어야 한다는 것쯤은 나도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다.

"형, 이쪽으로 와봐."

"응?"

벽면 스위치를 눌러 커튼을 치자, 푸른 바다의 수평선까지 보이는 풍경이 침실 창으로 펼쳐져 있었다. 그 곁에 서 있는 설이의 모습까지 합쳐져서 절경이었다. 검게 빛나는 머리카락을 이마 위로 부드럽게 넘긴 설이가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홀린 듯이 다가가자 나를 제 앞에 세우고 꼭 끌어 안았다. 내 머리 위에 턱을 올린 설이가 내 가슴팍과 어깨를 한 손으로 감싸며 좋아? 하고 속삭였다.

단지 이 푸른 바다의 풍경이 좋은지 묻는 것 뿐인데, 설이 목소리가 왜 이렇게 섹시하게 들리는 걸까.

내가 미친 걸까. 심장이 제 멋대로 뛰는 게 당황스러워서 으응, 하고 얼버무리듯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설이가 등 뒤에서 나를 끌어안고 있는 바람에 설이의 손바닥에 내 심장 고동이 느껴질 지도 모른다. 민망해져서 설이의 품 안에서 벗어날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내 귓바퀴에 코끝을 비비면서 설이는 낮게 숨을 내쉬었다.

오전 촬영이 끝난 뒤에 샤워를 하고 왔는지 설이에게서는 깨끗하고 향긋한 비누 냄새가 흘러나왔다. 지고 있는 오후의 햇살이 부서지는 물결과 따뜻한 품, 부드러운 손길, 설이의 체향까지 모든 것이 너무나 황홀했다. 설이도 나처럼 지금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나를 감싼 설이의 손등을 쓸면서 나도 물었다.

"설이 너는? 너도 여기 와서 좋아?"

"……응, 최고야."

작게 부서지는 설이의 웃음소리에 귀 끝이 간지러웠다.

이대로 있다가는 이 간질거리는 긴장감에 내 심장이 물 풍선처럼 눌려 터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가까스로 설이의 품 안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설이는 손을 뻗어서 내 새끼 손가락을 살짝 쥐었다. 뒤돌아보자 햇살이 쏟아져서 설이의 미소 짓는 부드러운 얼굴 선에 부딪히며 반짝거리고 있었다.

어릴 때 독서감상문을 쓰기 위해 읽은 그리스로마신화 책에서, 태양에 너무 가까이 다가간 죄로 밀랍으로 붙인 날개가 다 녹아버려 추락하고 만 인간이 있었다. 만약 태양이 우리 설이 같은 모습을 한 존재라면, 나도 더 가까이 닿기 위해서 높이 높이 날면서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 지도 모르겠다. 

손을 뻗어 내 손가락이 보드라운 뺨에 톡, 닿았다. 햇빛이 눈부신 듯 느리게 눈을 감았던 설이가 내 손길이 닿자 생명이 담긴 조각상처럼 작게 웃으며 눈을 떴다. 그 찰나의 순간이 너무 감동적이어서 멍하니 입을 벌렸다. 설이가 제 뺨을 건드린 내 손을 마저 움켜쥐었다.

“누울까? 형이 원하는 만큼 만져도 괜찮아.”

내 귓가에만 들릴 듯이 조용하게 속삭이는 고운 미성에 마음이 녹아 내렸다.

바다에서 선원들을 유혹하는 세이렌의 유혹적인 목소리가 이런 느낌일까. 이미 내 이성을 실은 통통배는 설이의 목소리에 홀려 자초되기 일보직전이었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붉어진 얼굴을 창가 쪽으로 돌리고 설이의 손 안에서 빠져 나왔다.

“아하하… 무슨… 무슨 소리야…… 저, 라, 라운지 가서 밥 먹자.”

“응. 시간은 많아.”

설이는 고개를 내 쪽으로 기울이며 착하게 웃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이마로 흘러내려 눈 밑살이 도톰해지도록 웃는 설이의 눈가를 반쯤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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