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최고의 생일 선물
<설국지색> 커뮤니티에 들어가보니 이미 팬들은 설이 생일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지하철 플랫폼 광고판에 설이 사진과 함께 생일 축하 멘트를 삽입하는 모금도 받는 중이었다. 스크린 도어 이미지 조명뿐만 아니라 벽면 래핑 광고까지 한다고 하는데, 평소에 지하철을 탈 일이 있어도 광고판에 관심이 없어서 몰랐지만 그런 곳에 연예인 사진도 집어넣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밖에 소속사로 보내는 주문제작 케이크와 선물을 모아서 발송하거나 직접 전달하기 위한 모임도 있었다. 일단 나도 지하철 광고판 총대의 계좌에 후원금을 보내두었지만, 그거야 설이 팬으로서 당연한 일이고 나는 형으로서 좀 더 특별한 선물을 준비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는 중이다.
"흠, 마땅한 게 떠오르질 않아서 말이야."
"…그걸 나한테 묻는다고 답이 나오겠냐?"
우정혁은 휴대폰 너머로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전화할 때마다 한국에 있는 걸 보면, 이 자식 유학을 아예 안 간 거 아니야? 의심이 들었지만 부잣집 도련님께서 유학을 가든, 여행을 가든, 집에서 놀 든, 내 알 바는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도 거의 백수나 다름 없는 놈이었고, 국제전화로 통화를 할 때에도 어디 낚시를 가 있거나 호텔 수영장에 있을 때가 태반이었다.
설이가 그루 엔터테인먼트로 온 뒤로, 우정혁처럼 나도 거의 집에서 노는 수준이라 할 말은 없지만.
"근데 고민되기는 하겠네. 이제는 운동화를 사줄 필요도 없을 거고, 휴대폰 같은 것도 원하면 수십 대를 살 수 있을 거 아냐? 엄청 유명해지셨던데."
"그러니까……."
설이와 다시 같이 살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우정혁은 축하해줬었다. 내가 듣기에도 내 목소리가 들떠있었으니 우정혁에게도 기쁘게 들리는 게 당연했다. 어쩌다 다시 동거하게 된 거냐고 묻기에 설이가 소속사를 이적해온 것과 그 조건, 설이의 진료 확인서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당연히 설이의 소속사 이적 이슈가 기사화된 이후였고, 우정혁이 누구한테 소문 낼 성격도 아닌데다가 친구도 나밖에 없으니까 우정혁을 믿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참 듣던 우정혁은 불쑥 내게 물었다.
"그… 진료 확인서라는 게 믿을 만 한 건가?"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야, 됐다. 됐어. 너도 좋으면 된 거지."
우정혁은 질렸다는 듯 얼버무리며 혼잣말을 하더니 다시는 그 화제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우정혁은 신경 줄이 튼튼한 놈이라서 섬세한 우리 설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우정혁에게 가슴 아픈 과거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워낙 몸과 마음이 무쇠 같은 녀석이라 걱정은 없다.
마음이 유리 같은 우리 설이가 걱정이지.
"자, 봐봐. 여기가 침실이고, 안쪽으로 복도가 있는데 들어와 보면, 이게 파우더 룸이라는 거래."
"잠깐, 잠깐!"
촬영지에서 설이가 자주 화상 통화를 걸어와서, 나도 페이스 타임이라는 것에 꽤 익숙해졌다. 그래서 새 집 자랑도 할 겸 우정혁에게 휴대폰 카메라 화면을 비춰서 집 안을 보여주며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우정혁의 외침에 나도 우뚝 멈춰 서서 화면을 다시 내 얼굴로 비췄다.
"왜? 너무 빨라? 집이 넓어서 이렇게 안 하면 다 못 보여줘."
우정혁은 설마, 하는 시선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 왜 침실이 하나냐? 저 거대한 침대 위에 베개가 왜 두 개나 있지…?"
"그야, 설이하고 나하고 한 침대에서 같이 자니까 그렇지."
우정혁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심각한 얼굴로 제 머릿속 정보를 업데이트하더니 되물었다.
"그 놈이랑 같이 잔다고? 너네 원래 살던 집에서는 그래도 각방 쓰지 않았냐?"
"그랬지."
"그 좁아터진 집에서도 각자 방이 있는데, 이 넓디 넓은 집에서 왜 방을 같이 쓰냐?"
나는 한숨과 함께 우정혁을 훈계하기 시작했다.
"너 아까 내 말 뭐로 들었어. 설이가 혼자 지내다 보니 불면증이 생겼다니까? 잘 때도 옆에서 내가 토닥토닥 재우고 그래야 겨우 잔단 말이야. 안 그래도 스케줄이 바빠서 수면 시간도 들쑥날쑥 인데, 한 시간을 자더라도 형인 내가 옆에서 지켜줘야 할 거 아냐?"
"……그게 정말 '형'의 역할인 건 맞는 거냐."
우정혁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또 손을 내저으며 됐다, 됐어, 나만 머리 아프지, 하고 화제를 돌렸다. 가끔 보면 우정혁은 말을 하다 말고 딴 이야기로 새버리는 버릇이 있다. 나하고 얘기를 하다 보면 늘 머리가 아프다면서 화상 통화 속 우정혁이 담배를 꼬나 물었다. 길게 연기를 내뿜던 우정혁이 창가 화분을 하나씩 소개하는 내게 물었다.
"근데 너 집들이는 안 하려고? 나 이번 주 내내 한국이니까, 휴지라도 사 들고 갈게."
"휴지는 무슨, 너 정도 되면 한우세트는 사 와야지."
"나 돈 없다. 아버지가 나보고 이따위로 할 거면 카드 못 풀어준대."
어째, 맨날 놀기만 하는 것 같더라니, 혀를 쯧쯧 차다가 나는 불쑥 생각난 것에 입을 벌렸다.
"아! 어쩌면 집들이 안 될지도."
"왜."
"일단 설이한테 너 와도 되는지 물어봐야 해. 설이가 요즘 정말 예민해지기는 했는지, 집에 누구 데려오는 거 싫다고 하더라. 그루 엔터 식구 중에 설이랑 영화 같이 찍은 제이라는 애도 오고 싶어 했는데, 설이가 안 된다고 단칼에 자르더라고. 그래도 너는 오래 봤으니까 아마 될지도 몰라. 설이한테 허락 받고 나서 말해줄게."
"허락……."
우정혁이 휴대폰 너머로 한숨 섞인 웃음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혼잣말을 또 중얼거린다.
"어쩐지… 진료 확인서 같은 걸 내민 이유가 있네……. 너 아주 코 꿰였다."
"어?"
"인마, 내가 집들이 못 가는 게 문제가 아니야. 너 그러다 아예 집에 감금되겠어. 벌써부터 허락 받는 꼴이 딱 그렇네. 전부터 예사놈은 아니다 싶었는데, 미래가 아주 훤하다."
우정혁이 중얼거리고 있는 사이에, 부재중 통화 알림이 화면에 비죽 드러났다. 바로 메시지도 왔다.
'누구랑 그렇게 통화해? 5분 뒤에 도착 예정.'
"야, 나 전화 끊어야겠다."
"왜."
"지금 설이 집에 거의 다 왔나 봐. 오늘 마지막 인터뷰 촬영이 신사동 쪽인데, 금방 끝난다고 해서 같이 갔다가 한강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둘이 밥 먹기로 했어."
내가 스스로 느끼기에도 말하는 목소리에 웃음이 너무 헤프게 들어갔다 싶었는데, 우정혁은 깊은 한숨과 함께 "그래, 데이트 잘 하고, 그래도 너네 결혼식 때는 불러라." 라며 또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끊었다.
뭐라는 거야, 미친 놈이.
내가 주차장으로 바로 내려가도 되는데, 설이는 꼭 직접 오피스텔로 올라와서 현관문 앞까지 나를 데리러 오기 때문에 5분 뒤에 도착 예정이라는 것은 설이가 현관문을 열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의미했다. 허둥지둥 드레스 룸으로 달려 들어가서, 설이의 옷들과 마주보고 있는 왼편의 내 옷 중에서 설이가 사다 준 파란 스웨터에 면바지를 골라 입었다. 양말을 다 신자마자 현관문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우정혁 선배랑 통화했어?"
나를 보자마자 설이가 등 뒤에서 와락 껴안으며 하는 첫마디였다.
어떻게 알았어? 하고 물었더니 그저 웃는다.
하긴, 인간관계가 좁디 좁은 내가 연락하는 상대라고 해봐야 한정적이다. 얼마 전에 편의점에서 같이 알바 하던 수아 누나가 설이 나오는 영화를 봤다면서 인증사진을 보내준 메시지와 우정혁과의 통화를 제외하면, 설이와 그루 엔터 사람들 연락이 전부였으니.
***
"멋지게 차려 입으셨네요?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환하게 웃으며 운전석에서 나를 맞이하는 신정아 매니저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며 벤 뒷좌석에 앉았다.
원래는 나름대로 매니저로 일하면서 내가 직접 운전을 할 때가 아니면 조수석에 앉던 버릇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설이가 나를 데려다가 뒷좌석의 제 옆자리에 앉혔다.
"형 뒷모습 보면서 가는 건 너무 쓸쓸해."
슬픈 얼굴로 말하는 설이를 꼭 껴안으며 다시는 조수석에 앉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 바람에 운전하는 신 매니저님 옆자리는 언제나 스타일리스트인 새미 누나가 앉았는데, 오늘은 의상 픽업 때문에 조수석이 비었다.
신정아 매니저는 신 엔터테인먼트 소속으로 있을 때에도 경력과 능력을 인정 받아서 알아주는 인재였다고 하는데, 신인 배우인 설이를 따라서 그루 엔터로 따라올 필요가 있었을까 늘 궁금했다.
촬영장 대기실에 신정아 매니저와 단둘이 앉아 있던 날, 넌지시 물어봤더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재미있어서요. 유능하고 인기 많은 배우들 많이 보조해봤지만, 한설처럼 색다른 사람은 없었거든요.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의 느낌? 그런 면이 참 흥미로워요. 원래 일이라는 건, 재미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혹시라도 설이의 정체를 들킨 건 아닐까 의심의 눈초리로 살펴본 결과,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신 매니저는 그저 설이를 성장이 기대되는 '특이한 청년'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설이가 설 표범으로 변하는 모습을 실제로 보지 않는 이상 어떻게 눈치 채겠어.
"참, 한설 씨한테 드라마 대본 몇 개 들어왔어요. 제 느낌에는 거의 다 웰메이드인데, 한설 씨는 어떤지 모르겠어요."
"우와아, 영화도 신기했는데 드라마로 또 설이를 볼 수 있다니! 전 뭐든 너무 좋네요."
헤헤, 웃음이 나서 옆을 보자, 다리를 꼬고 앉아 턱을 괜 채로 설이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는 이렇게 꼭 심드렁한 표정으로 내 얼굴만 빤히 바라보는 게 설이의 습관 중 하나였다. 어릴 때는 ‘형아, 나하고 놀아’, ‘형아, 나랑 얘기해’ 하고 질투하듯 조급한 표정으로 내 팔을 잡아 끌곤 했었는데 이렇게 의젓해진 걸 보니까 정말 세월이 실감 난다.
신 매니저는 나를 만날 때마다 마치 유치원에 아이 보낸 학부모에게 선생님이 가정통신문 써서 보내듯이 요즘 설이의 근황을 전해주었다. 내가 설이 형이라는 걸 알게 된 후로 늘 그랬는데, 그게 나는 못내 고맙고 믿음직스러워서 신 매니저에 대한 신뢰감이 계속 쌓이는 중이었다.
"눈송이 분들이 오전 촬영장에 커피 차 보내주셔서, 스텝들까지 모두 커피랑 간식 먹었어요."
"눈송이요?"
"아, 설국지색 분들 애칭입니다. 한설 씨가 그렇게 불러주진 않지만, 자체 내에서 애칭을 만드셨나 봐요."
"그렇구나. 눈송이, 귀엽다."
나도 그러면 눈송이구나, 한 눈송이, 하는 생각에 키득키득 웃음이 났다. 물론 커피 차 빌리는 모금에도 작지만 내 돈도 포함되어 있었다. 커뮤니티 내에서 후원이나 모금을 하는 곳에는 자주 들어갔지만, 친목이나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에는 성인인증도 필요한데다가 성별이 여성이어야만 받아줬기 때문에 나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댓글로 눈송이라는 단어를 봤어도 그게 팬클럽 애칭인 줄 몰랐다.
운전하는 신 매니저와 한참 이야기 꽃을 피우는데, 따분한지 옆에서 잡지를 넘기던 설이가 끼어들었다.
"형, 그거 알아? 설 표범은 겨울이 발정기래."
지나가듯 하는 말이 뜬금 없어서 으응? 하고 되묻자, 여전히 잡지에 시선을 둔 채로 설이는 이어 말했다.
"12월에서 3월 사이에 상대를 찾아서 교미한다고 하는데… 딱 이맘때네. 설 표범은 태어난 지 3년만 되어도 이미 성체인가 봐. 인간으로 치자면 이미 어른이라는 뜻이겠지."
나를 빤히 보면서 말하기에 대체 뭘 읽고 있는 거야, 싶어서 잡지 겉 표지를 보니 네셔널지오그래픽 월간지였다. 전부 영어로 적혀 있는 걸 봐서 영문판인 모양이다. 설이가 어릴 때부터 워낙 명석하고 수재이기는 했는데, 이런 잡지를 영어로 읽는다는 게 신기해서 "설아, 그걸 다 영어로 읽을 줄 알아?" 하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검지로 문장을 가리키며 읽는다.
"Having a lifelong companion is the best gift for them."
와… 우리 설이 영어 발음 좋다. 감탄하느라 입이 떡 벌어졌다.
영어를 발음하는 낮은 설이의 목소리는, 숲 속을 지나는 바람처럼 상쾌하면서 감미롭다. 설이의 목소리에 홀랑 빠져있다가 겨우 정신 차리고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평생의 반려를 맞이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최고의 선물이다.'라는 뜻."
"아…"
설이는 잡지를 탁, 덮어 조수석 등받이 수납함에 꽂아 넣더니 팔걸이에 걸친 내 손을 잡아다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다른 무엇보다도 반려를 맞이하는 게, 최고의 선물인가 봐."
"그렇구나."
"응. 설 표범에게는 다른 걸 고민할 필요 없이, 평생의 연인만 있으면 그게 선물이겠어. 그렇지?"
"그… 그렇겠다."
설이에게 잡힌 손을 빼내서 무릎 사이로 숨겼지만, 새까만 눈동자는 회색으로 은은하게 빛나며 어두운 곳을 지날 때에도 내게 고정된 채였다. 눈으로 뭔가 메시지를 전하듯 끈질기게 내 얼굴을 바라보는 설이의 시선에 목 뒤로 침 삼키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다.
이제 곧 촬영장에 도착이라는 신 매니저의 말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
“한설 씨, 포즈 좋아요. 눈빛도 좋습니다. 그대로 한 번 더 갈게요.”
스튜디오에서 잡지 촬영을 하는 설이를 지켜보는 건 기뻤지만, 조명 속에서 포징하는 설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소속사 이적이며 이삿짐 정리다 뭐다, 하는 사이에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설이가 내게 뜬금없이 '연인'이 되어달라고 말했었지.
한번 떠오르자, 그 일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부표처럼 내 의식 속을 둥둥 떠다녔다.
“오늘 한설 씨 컨디션이 좋네요! 역시 형님이 옆에 있어서 그런가 봅니다.”
신정아 매니저가 내 곁에 다가와 커피가 든 종이컵을 내밀었다. 여전히 내 시선은 촬영 중인 설이에게 가 있었지만, 옆자리에 앉는 신 매니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신 매니저님, 설이가 일 하는 걸 힘들어한다던가 사람들 만나기를 어려워하거나, 그러지는 않나요?"
"전혀요. 초짜 신인인데 이 정도로 깡다구 있고 멘탈 강한 사람 처음 보는걸요."
"…그래요?"
신정아 매니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하고 바로 대답했다.
"보통, 감독이나 촬영 관계자들이 텃세 부리는 경우가 많아요. 게다가 한설은 데뷔하자마자 바로 뜬 경우니까, '거만해질 까봐' 라는 타이틀 내세워서 거칠게 다루는 사람들도 있어요. 앗…… 그렇다고 손찌검하는 건 아니니까 표정 푸세요. 형님."
신정아 매니저가 어색하게 웃으며 나를 달랬다.
설이는 내 쪽으로 시선을 둔 채로 고개만 기울이며 포즈를 바꿨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나른한 표정만 지어도 그림이 되었다. 나야, 설이가 숨만 쉬어도 예뻐 보이니까 촬영 일은 잘 모르지만, 신 매니저의 말에 의하면 저 표정과 고개의 각도까지 전부 계산되어 있는 거라고 했다. 그런 것도 다 재능이고 머리를 써야 하는 거라서, 설이가 타고난 배우인 거라며 칭찬했다.
"그런데 한설은 자신을 향한 어떤 멸시의 태도나 질투, 도발 그런 것에 일체 반응을 하지 않아요. 그래서 상대가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게 되죠. 그런 게 뭐랄까… 오뚝이 같은 스타일이라기 보다는, 그냥 애초에 사람에게 관심이 없어 보여요. 타인에 대해 신경 쓰질 않으니까, 그런 걸 다 간단히 무시할 수 있는 것 같은 느낌이죠."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고요? 그럴 리가요! 설이가 얼마나 섬세하고 예민한데요! 제가 피곤해하거나 우울해하면, 금방 알아채고 애교 부리는 다정한 아이에요. 사실 설이처럼 마음 따뜻한 애가 없답니다?"
"아, 하하… ‘선택적 관심’이기는 하지만, 형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게 맞겠죠. 형님이 더 잘 아실 테니까요."
신 매니저는 설이 칭찬에 시동을 거는 나를 진정시켰다. 그나저나 설이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긴데, 나중에 설이한테 누군지 조심스럽게 물어봐서 목록이라도 작성해야겠다. 내가 직접 가서 엎어버릴 수도 있고 너무 못된 사람이라면 설국지색 커뮤니티에 몰래 폭로해서 다 같이 시위라도 할 생각이다.
"맞다! 신 매니저님, 저기 혹시 설이가… 요즘 뭐 갖고 싶다고 말한 거 없었나요?"
"글쎄요. 한설 씨가 저한테는 사적인 얘기를 거의 안 해서."
"생일이라 뭘 좀 해주고 싶은데, 설이한테 지금 필요한 게 뭔지 모르겠어서 고민이거든요. 뭘 갖고 싶어하는지도 모르겠고… 협찬이며 선물이며 집에도 잔뜩 쌓여 있어서 생필품이 부족한 것 같지도 않고."
신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이 쪽을 흘깃, 바라봤다.
"음, 그렇죠. 지금으로서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걸 선물하는 게 가장 좋겠네요."
"돈으로 살 수 없는 거요?"
내 머리로 생각해봤자 그런 건 손 편지 정도인데, 글 쓰는 재주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왕이면 설이한테 도움이 되는 것을 선물하고 싶었다. 게다가 나는 지금, 내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돈이 많은 순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돈도 좀 쓰고 싶다. 내 월급과 설이가 주는 용돈으로 삼촌댁에 넉넉하게 돈도 보내드리고 있고, 대출도 다 갚았다. 이제부터 들어오는 돈은 모두 적금과 저금으로 모으기 시작했고 설이가 원한다면 값비싼 구두나 가방, 옷 같은 것도 거뜬히 사줄 수 있었다.
신정아 매니저가 시원스레 정답을 내 놓았다.
"네, 아마 휴식 아닐까요? 데뷔 이래로 계속 바쁘게 보냈으니까요. 틈 날 때는 학교도 가야 했고 시험 공부 하느라 이동 중에도 책 펼쳐보고 그랬거든요. 요즘은 그나마 학교를 안 가도 된다지만, 전보다 스케줄이 더 바빠져서 수면 시간도 줄이는 실정이었으니까요."
"그렇죠. 두 시간 자고 일어날 때는 얼마나 가슴 아픈지…… 근데 휴식을 제가 어떻게 줄까요?"
가방에서 아이패드를 꺼내 전용 펜으로 꾹 꾹 눌러 열심히 들여보던 신 매니저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생일 당일 오전에는 뺄 수 없는 스케줄이 있지만, 오후부터 해서 이틀 정도는 뺄 여유가 있을 것 같은데, 두 분이 어디 호캉스라도 가시면 어떨까요? 드라마 컨텍 들어가기 전에 쉬어야 할 테니까 지금이 딱 적기네요."
"그, 호캉스라는 게 어딘데요? 해외죠? 거기 설이가 좋아할까요?"
"하하! 형님이랑 가는 거니까 당연히 좋아하겠죠. 그리고 호캉스는, 호텔로 바캉스를 떠난다는 말이라서 멀리 안 가도 됩니다. 제가 괜찮은 곳으로 골라볼게요. 호텔 예약권을 선물로 하면 되겠네요."
내 고민을 단번에 해결해준 신 매니저에게 거듭 감사의 인사를 하는 도중에 누군가가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촬영을 끝낸 설이가 메이크업도 지우지 않고 내 앞에 와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렇게 예쁘게 웃어?"
경계의 눈초리로 신 매니저 쪽을 바라보는 설이의 시선에 신 매니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무죄를 증명하듯 두 손바닥을 펴 보였다.
"아무것도요! 수고하셨습니다. 한설 씨, 이제 옷 갈아입고 형님 분이랑 레스토랑 가셔야죠?"
달래는 듯한 신 매니저의 말투에도 한참 경계를 풀지 않던 설이가 내 손목을 쥔 채 메이크업 룸까지 나를 데려갔다. 눈을 감은 채 메이크업을 지우는 도중에도, 마치 내가 어디 도망가기라도 할 것처럼 내 손목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곁에 우정혁이 있었다면 혀를 쯧쯧 차면서 또 비꼬는 말을 했겠지만, 내게는 설이의 이런 모습까지 어미를 따라다니는 새끼 오리 같아 보여서 마냥 귀엽고 안쓰러웠다. 결국 탈의실까지 날 데려가서 옷을 벗기에 갈아입은 셔츠 단추를 내가 손수 잠가주었다. 그제야 설이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
너른 창으로 한강의 밤 풍경이 펼쳐지는 레스토랑은, 마치 우리 두 사람만을 위한 공간처럼 손님이라고는 설이와 나뿐이었다. 종업원들은 오직 우리 두 사람을 위해서만 음식을 서빙하고 유리잔에 물이 빌 때마다 조용히 다가와서 채워 주었다. 여유로운 재즈 음악이 흐르는 레스토랑 안은 약간 어두워서 창 밖의 한강이 더 잘 보였고, 넓은데도 불구하고 아늑한 분위기였다.
설이가 부야베스라는 이름의 해물스튜를 내 앞 접시에 덜어내 주었다. 쫄깃한 관자구이를 뺨 가득 물고 있던 나는 설이에게서 커다란 스푼을 빼앗아서 설이의 앞 접시에 홍합과 새우를 가득 올려주었다.
“나 그만 주고 너도 많이 먹어, 설아. 이거 치즈 가루 올라간 파스타도 맛있다.”
“응, 고마워.”
설이는 수줍게 웃으며 앞 접시에 덜어준 스튜를 한 스푼 떠 먹고 와인을 마셨다. 이제 우리 설이가 성인이라서 술도 마실 수 있다는 게 퍽 신기하게 느껴진다. 옛날에는 정말 조그마한 꼬마였는데.
와인을 마실 일이 없어서 그다지 즐기지는 않지만, 조명에 비치는 붉은 와인과 잔을 기울여 마시는 설이의 흰 조각 같은 얼굴이 무척 잘 어울렸다. 미모로 사람을 홀려서 피를 빨아 먹는 매혹적인 뱀파이어 같은 역할도 우리 설이한테 무척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런 작품 시나리오 들어오면 꼭 해보라고 추천해야지.
“근데 설아, 여기… 손님이 너무 없다. 그치.”
“그러게.”
설이가 조용히 웃는다.
모르긴 몰라도 이렇게 큰 건물이면, 자릿세만 해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권리금 꽤나 주고 들어왔을 텐데, 장사가 이렇게 안 돼서 어쩐담.
안타까워서 속으로 혀를 쯧쯧 찼지만 장사의 그런 속사정에 대해서는 관심 없는 듯 설이는 냅킨을 접어 내 입가를 닦아냈다. 스튜가 묻어 있었던 모양이다.
와인과 함께 나온 멜론 조각 위에 조그마하고 얇은 햄과 치즈가 뿌려져 있었는데, 짭조름하니 너무 맛있어서 와인 한 모금에 다 먹어 버렸다. 설이가 손가락 부딪혀서 딱 소리를 내자 종업원이 다가왔고, 손짓하자 빈 나무 도마를 가져가더니 다시 멜론 조각에 햄이 올라간 것이 나왔다.
열심히 입과 손을 놀리는 나에 비해서 설이는 와인만 조금 마실 뿐, 식사하는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우적우적 양 뺨 가득히 집어넣고 먹다가 머쓱해져서 설이를 올려다보았다.
“더 안 먹어? 맛있는데.”
“나는 형 먹는 모습 보는 게 더 좋아.”
고개를 기울여 다정한 눈웃음을 지으며 설이가 이번에는 맨 손으로 내 입가를 닦아냈다. 또 묻어 있었구나. 부끄러워져서 얼굴을 붉혔다.
휴대폰에 진동이 와서 꺼내보니 신정아 매니저였다. 레스토랑에 도착하기 전에 신 매니저님이 후보로 보내준 호텔 중에서 룸 개별 편백나무 욕조탕이 있고 조식이 맛있다는 곳으로 골랐는데, 예약이 완료되었다는 메시지였다. 바코드가 찍힌 예약권이 함께 도착했다.
씨익,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나는 설이를 쳐다봤다.
“설아, 형이 너 생일 선물로 뭘 좀 준비했는데…… 네가 좋아할지 모르겠다.”
“난 형이 주는 건 뭐든 다 좋아.”
너그러운 미소와 함께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달래주는 설이는 천사가 틀림 없다. 나는 더 참지 못하고, 휴대폰의 호텔 예약권 화면을 들이밀어 보여주었다.
“우리 텔캉스 갈 거야, 설아!”
“텔캉스?”
“응, 너 요즘에 너무 바쁘고 못 쉬는 것 같아서 준비했어. 호텔에서 이틀 동안 우리 둘이 편하게 놀면서 지낼 거야. 모레 오후에 너 스케줄 끝나고 나면 출발하는 걸로 했어. ……어때, 맘에 들어?”
긴장한 표정으로 설이의 눈치를 살피는데 새까만 눈동자가 호텔 예약권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뺨이 볼록해지도록 귀엽게 웃었다.
“너무 좋아, 형. 내가 정말 바라던 거야.”
예약된 룸 이름이 ‘Honeymoon’인 게 조금 마음에 걸리지만 그런 건 뭐, 상관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