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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문 잠그고 기다릴 거야? (27/65)

27. 문 잠그고 기다릴 거야?

설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당연히 이하원 팀장님과 자주 가던 회의실로 향하던 나를 행정 매니저 희철이형이 붙잡아 세웠다. 그리고는 회장실까지 통하는 유일한 안쪽 엘리베이터에 나를 태웠다.

그루 엔터테인먼트에서 일하면서, 회장님께서 계시다는 최 고층의 회장실에 올라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 같은 일개 사원이 회장님을 만날 일은 대형 사고를 쳐서 물의를 일으킨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예 없을 것이다.

본사 건물 가장 위층 버튼을 나 대신 눌러주면서 희철이 형이 볼멘소리를 했다.

"너 배우 한설이랑 친형제라면서? 말도 안 해주고, 서운하다. 인마."

"아니, 저…"

"하긴, 너 처음 왔을 땐 한설 데뷔 전이기는 했지. 아무튼 꼭 데려와라."

희철이 형의 배웅을 받으며 엘리베이터 문은 닫혔고, 최고층에서 문이 열리자 복도는 고요했다.

노크를 한 뒤에 회장실 문을 열었을 때, 내 쪽에서 뒷모습이었지만 뒤통수만으로도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가 우리 설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동그란 뒤통수가 유난히 예쁘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부드럽고 까만 머리결과 곧은 목뼈, 흰 뒷목까지, 모든 조합이 이렇게 멋진 사람은 내가 여태까지 봐온 중에는 우리 설이 뿐이기 때문이다.

한 박자 늦게 이하원 팀장과 박궁선 회장님의 얼굴이 보였다.

"회,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한준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이쪽으로 앉아요."

박궁선 회장은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볼 때보다는 훨씬 인자해 보였지만, 고위급 인사로서의 묵직한 분위기가 느껴져서 절로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가까이에 앉아 있는 이하원 팀장도 평소보다는 긴장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흘깃, 나를 돌아보며 미소 짓는 설이의 얼굴은 평소처럼 온화했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즐거워 보였다.

주춤주춤 다가가서 긴 테이블을 가운데 둔 채로 마주 앉은 회장님과 설이의 사이에 앉았다. 이하원 팀장의 바로 옆이었다. 이하원 팀장이 회장님 쪽에 더 가까웠고, 나는 설이 쪽에 더 가까웠다.

멋지게 정장을 차려 입은 설이의 넓은 어깨와, 흰 얼굴, 짙은 녹색의 넥타이가 무척 잘 어울렸다. 서양 어딘가의 귀한 집 자제들이 다닌다는 명문 학교의 교복 같아 보이기도 했고, 거대 기업의 젊은 간부 같은 모습이기도 했다. 새파란 청년답게 푸릇푸릇하면서도, 위엄이 느껴졌다. 부드럽게 뒤로 넘긴 머리와 반듯한 이마가 드러나서 어딘지 섹시한 분위기까지 더했다.

거의 두 달 만에 보는 설이의 얼굴을 멍하니 홀린 듯 보고 있자, 이하원 팀장이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이제 이적 얘기를 계속 해볼까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하원 팀장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어색한 표정이었지만, 안경 렌즈 너머의 눈빛에는 설렘이 엿보였다. 설이를 데려오라며 그렇게 나를 닦달하더니, 고대하던 순간이 온 것이다.

박궁선 회장은 내가 오기 전 이미 하고 있던 이야기를 이었다.

"지금 한설 군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자면… 신 엔터와 일하고 있지만, 신 엔터를 산하에 둔 모회사 클라이맥스 사와 추후 전속계약을 할 예정이었고, 신 엔터와의 계약은 올해 말에 만료가 된다는 건데, 왜 그렇게 짧게 계약했지요? 보통 그래도 3년은 두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리고 지금으로서는 클라이맥스에서 한설 군과의 재계약을 서두를 테고, 신 엔터와의 첫 계약 때와는 다르게 훨씬 더 좋은 대우를 받게 될 텐데 왜 갑자기 우리 그루 엔터로 오겠다는 건지 궁금하군요."

박궁선 회장은 느긋해 보이는 얼굴로 찻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설이는 편안한 표정으로 내게 한참 시선을 두고 있다가 박궁선 회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첫 계약 당시, 제가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법적 보호자인 삼촌의 허락이 필요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모델과 배우로 활동하는 것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고, 삼촌께서는 제가 학업과 병행 가능한 정도로 일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당시 클래이맥스에서는 모의 오디션 후, 저를 신 엔터 쪽으로 넘겼습니다. 신 엔터와는 제가 성인이 될 때까지의 활동을 계약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게 삼촌의 뜻이기도 했고, 성인이 된 후에는 제 스스로 결정이 가능할 테니 그때에 다시 클라이맥스 쪽으로 옮기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 엔터가 곧 클라이맥스로 인수합병 될 거라는 얘기가 떠돌던 지난 해에 비해서 신 엔터가 너무 커져 버렸고, 신 엔터는 이제 클라이맥스와 떨어져 경영권을 따로 가진 큰 회사가 되었습니다. 신 엔터는 저와 계속 계약을 이어나가고 싶어하고, 클라이맥스에서는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옮겨오기를 종용하는 분위기입니다. 재계약을 앞두고 그 두 회사 사이에서 머리가 너무 아프더군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이죠."

설이는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는 듯 눈을 감고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사슴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운 눈동자를 뜨며 샐쭉 웃어보였다.

"그래서 업계 가장 크고 든든한 그루 엔터테인먼트 쪽으로 뿌리를 두는 게 마음 편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앞으로 계속 배우 생활을 이어나가려면, 아직 음원 사업에 더 열중하는 신 엔터보다는 그 편이 더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게다가 그루 엔터에는… 제가 원하는 게 있거든요."

설이가 테이블 밑으로 팔을 뻗어 무릎 위에 있던 내 손을 꼭 움켜 잡았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지만, 설이의 시선은 박궁선 회장 쪽을 향한 채였다. 내 손등을 쓸어 어루만지는 설이의 손바닥이 솜털처럼 보드라워서 심장까지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뭐, 계약 만료 후에 저희 쪽과 재계약을 하는 거라면 문제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계약상 일 년 뒤 모회사와의 재계약이 예정된 상태였다고 해도, 사실상 구두 계약일 뿐이고 그런 건 판 변호사님과 얘기해보면 크게 문제될 거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오후에 판 변호사님 오기로 했습니다."

이하원 팀장이 속사포처럼 빠르게 이야기하자, 회장님은 깊게 생각하는 표정으로 느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설이는 테이블 아래서 내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슬그머니 설이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고 할 때마다 조금 힘주어 내 손을 잡아대니, 회장님과 팀장님 눈을 피해서 얌전히 손을 빼낼 수가 없었다. 나는 진땀이 나는데, 설이는 여유롭게 웃으며 이따금 나와 눈을 맞췄다.

그런데 우리 설이, 이 진지한 상황에 왜 이렇게 즐거워 보이지? 그루 엔터에 원하는 게 뭘까?

박궁선 회장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자세한 계약 조건에 대해서는…"

"아까 말씀 드린 것으로 충분합니다."

설이는 담백하게 대답했다. 회장님과 팀장님이 조용히 눈을 맞추고 있다가, 불시에 두 사람의 시선이 내 쪽으로 모아졌다. 진지한 그들의 표정에 묵묵히 듣고만 있던 나는 당황해서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저, 저를 왜 보시죠…? 제가 뭔가 잘못이라도…?"

"그러니까 한설 씨의 말은, 매니저 한준과의 독점 계약이 유일한 이적 조건이라는 거죠?"

이하원 팀장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의심을 품은 목소리로 물었다. 설이는 네, 하고 짧게 대답했다. 망설임도 없었다.

"한준 씨가 현재 맡고 있는 타 소속 연예인들과의 업무를 일체 종료한 뒤, 저의 매니징 업무만 맡는 것을 원합니다. 제 오피스텔에서 함께 거주하며 제가 지시하는 업무를 이행하고, 제 생활 매니저로서 저를 백업하는 역할로 한준 씨를 독점 계약하고 싶습니다. 만약 그루 엔터에서 한준 씨에게 저 이외의 다른 연예인과의 업무를 지시하거나 강요할 경우, 이 계약은 깨지게 됩니다. 그게 저의 이적 조건입니다."

이하원 팀장은 다시 한 번 박궁선 회장과 눈을 맞춘 뒤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서 한설 씨가 말하는 조건은, 저희 쪽에서 충분히 맞춰줄 수 있는 쉬운 조건입니다. 한준 씨가 현재 배우 권영도의 생활 매니저로 일하면서 가끔 하이레벨 그룹의 백업도 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누군가의 전속으로 매니징해 본 경험이 없어서 아직은 견습 단계에 있는 매니저이기 때문에… 한설 씨가 원한다면 계약 후 바로 실행 가능합니다. 한준 씨가 싫지 않으시다면요."

내 쪽을 잠시 쳐다보기는 했지만, 어차피 내 의사는 물을 필요 없이 오케이라는 걸 안다는 듯 이하원 팀장은 다시 설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적 조건이 비교적 가볍게 느껴져서 말입니다. 정말 이걸로 괜찮은 건지… 물론, 저희 쪽으로 이적하시면 배우 생활에 후회 없도록 해드릴 겁니다. 그렇지만 저희 쪽에 더 바라는 게 있다면, 더 말씀해주셔도 됩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설이는 내 손을 겨우 놓아주고는, 아직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는 이하원 팀장과 묵묵히 고민하는 박궁선 회장의 앞으로 서류를 꺼내 놓았다. 그리고는 여태까지 보였던 태도와 다르게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실, 제가 지금 그루 엔터테인먼트로 이적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이것 때문입니다."

설이가 내민 서류는, 환자 명에 '한설'이라고 적혀 있는 신경 정신과 진료 확인서였다. 진단명에는 불면, 우울, 공황장애 등의 병명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놀란 내가 벌떡 일어나기 전에, 이하원 팀장이 진료 확인서를 가져다가 심각한 표정으로 읽었다.

"으음… 약물 처방을 권유 받았지만, 내원 당시 보호자가 동행하지 않아서 진료에 제한이 있었군요."

설이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섬세한 속눈썹 아래로 반짝이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데뷔한 이후로 갑자기 대중들의 관심이 쏟아지고, 저를 돌봐주던 하나뿐인 가족과 떨어져 지내면서 불면증에 시달렸거든요. 저도 바빴지만, 제 가족이… 회사일로 바빠서 집에 잘 들어오지도 못하고……. 심적으로 제가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가 최근에야 심각해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약물치료도 도움이 되겠지만 궁극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하면 차후 병증이 더 심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치의와의 상담 끝에 특단의 조치를 내린 것입니다."

설이는 슬픈 표정으로 나를 한 번 보았다가 다시 테이블로 시선을 내렸다.

"어쩌면 이런 저의 이적 조건이 다소 이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한 매니저님도 저보다는 대배우 권영도 님을 매니징하는 것이 커리어에 더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저는 하나뿐인 저의 가족과 함께 살면서 곁에서 계속 도움을 받아서 정신적인 안정을 취하고 싶은 것뿐입니다. 그게 제 작은 바람이고, 앞으로 배우 생활을 잘 이어나갈 원동력이 될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믿습니다. 한준 씨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목 안쪽이 꽉 조이는 듯한 느낌과 함께 가슴 속에 누가 뜨거운 불을 지핀 듯이 활활 타올랐다. 눈가가 빠르게 젖어 들면서 눈 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나는 참지 못하고 주먹을 쥔 채 벌떡 일어섰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왜 싫겠어! 설아, 형은… 형은 널 위해서라면……!"

뜨거운 눈물이 뺨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입술이 부들부들 떨려서 더는 말을 잇기가 힘들었다.

설이가 이렇게 마음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줄도 모르고, 나는 그루 엔터에서 일하면서 돈 벌어서 설이를 키울 생각뿐이었다니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애가 이렇게 외로워하는 줄도 모르고……!

여태까지 늘 그랬듯이 나는 설이 하나만을 바라보면서 설이를 위해 살아왔는데, 그런 설이가 행복하지 못하다면 다 소용 없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나에게 티슈를 건네며 이하원 팀장이 내 어깨를 눌러 앉혔다.

"자, 자, 진정합시다. 이제라도 서로 마음을 알았으니 잘 된 거죠. 안 그렇습니까, 회장님?"

"음…… 그렇지요. 계약은 한설 군이 성인이 되는 닷새 뒤에 바로 체결하는 걸로 합시다. 클라이맥스와의 계약 만료 일에 대해서는 차일 판 변호사와 다시 얘기해봅시다."

박궁선 회장은 일어서서 여전히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가녀린 설이와 악수를 한 뒤, 회장실을 먼저 나섰다. 이하원 팀장은 회장님을 따라 나서면서 나에게 좀 진정한 뒤에 나오라며 내 어깨를 다독였다.

둘만 남은 공간에서 나는 여전히 뺨을 적시는 눈물을 손등으로 거칠게 닦아냈다.

나 같은 게 설이의 형이 될 자격이 있을까?

그 동안 설이의 마음이 아픈 줄도 모른 채로 형 역할에 소홀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설이가 '하나뿐인 가족'이라고 나를 지칭한 것에 대해서도 속이 상했다. 설이의 오피스텔에 갔을 때, 어둡고 지나치게 넓은 공간에 설이가 혼자 지내는 게 쓸쓸하고 무섭지 않을까 생각도 했으면서 이렇게까지 설이 마음이 외로울 거라는 건 왜 몰랐을까? 

내 쪽은 쳐다보지도 못한 채, 소파에 앉아서 고개를 모로 꼬고 있는 설이의 뺨을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감쌌다. 어쩔 수 없이 나를 올려다보는 설이의 청초한 눈동자가 아기 사슴처럼 연약하고 선해 보였다. 눈물을 꾹 참으며 설이에게 차분하게 물었다.

"설아, 형이랑 떨어져 지내는 게 힘들었어? 내가… 일하느라 너한테 소홀해서 슬펐어?"

"………"

대답 없이 설이는 시선을 내리깔며 길게 뻗은 속눈썹을 내보였다. 부드러운 꽃잎 같은 입술이 굳게 다물어진 채로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애가 타서 설이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이제 형이랑 같이 지내자. 밥도 해주고, 늘 설이 곁에 있을게. 응? 전처럼… 아니 전보다 더 형이 설이한테 잘 할게. 약 같은 거 먹지 말고, 형이랑 같이 이겨내 보자. 나만 믿어, 설아."

"……정말 그래 줄 거야?"

뺨을 쥔 내 손목을 감싼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설이가 순수한 아이처럼 새까만 눈동자를 깜빡이며 물었다. 기대감에 은은하게 반짝이는 설이의 눈동자는 별들이 수놓아진 밤하늘보다도 훨씬 아름답다. 나는 눈물이 흐르지 않고 툭툭 떨어질 정도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이는 보드라운 뺨을 내 손바닥에 비비며 행복에 젖은 얼굴로 눈을 감았다. 달콤한 목소리가 내게 속삭였다.

"내가 집에 돌아올 때마다 형이 집에서 나를 맞이해줄 거야?"

"그럼, 당연하지! 내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바랐던 대답이라는 듯 환하게 웃으며 설이가 눈을 떴다. 눈동자에 우울한 빛이 깃들어 있었다.

"……권영도나 이재희 같은 사람들이 우리 둘만의 공간에 오는 건 싫은데."

"으응? 그 사람들이 왜 와. 설이랑 형 집인데."

"정말 우리 둘만 있는 거야?"

"그럼!"

설이가 내 두 손목을 꽉 잡으면서 천천히 되물었다.

"다른 사람은 오지 못하게, 우리 둘만 있을 수 있게… 문 잠그고 기다릴 거야?"

"당연하지! 형이 문 단속 잘 하고, 아무도 못 오게 할게. 우리 설이만 기다릴게."

그제야 만족한 듯 웃으며 설이가 내 두 손을 제 뺨에서 떼어내고, 앉은 자세 그대로 제 앞에 선 나를 꼭 끌어안았다. 내 가슴팍에 고개를 묻은 채로 허리를 끌어안은 설이에게서는 은은한 비누 향이 났다. 설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도 그제야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눈물도 어느새 멎어 있었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그냥 집에서 설이를 기다리는 거라면 내가 평생 해온 일인데. 우리 설이는 어쩜 이렇게 바람이 소박할까.

"그, 두 분… 얘기 다 하셨으면 내려오시죠. 회장님이 한설 씨 태워다 드리라고 차 부르셨거든요.“

언제 돌아와 있었는지 이하원 팀장이 문 앞에 서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대체 이게 무슨 광경이야, 싶은 얼굴이었는데 생각해보면 이하원 팀장은 나와 설이가 함께 있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사실상 우리 형제에게 이런 포옹은 일상이고, 고등학교 동창 우정혁의 경우에는 우리 형제의 더한 애정표현도 많이 봐왔지만, 일반적으로는 낯설 수 있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재빠르게 내 품에서 설이의 어깨를 밀어내며 떨어졌지만, 아쉬운 듯 설이의 표정이 변해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설이를 끌어안고 다독이고 싶었지만 회장실에서 그러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다음 주에 설이가 그루 엔터와 계약하게 되면, 설이와 다시 같이 살게 될 테니까 그때는 마음껏 애정표현도 하고 설이의 외로웠던 마음을 달래줘야지.

***

배우 한설의 소속사 이적 소식이 이슈가 되는 것과 동시에 루머가 떠돌았다. 찌라시로 나돈 적이 있던 배우 윤여린과의 열애설이 다시 물 위로 떠오른 것이다. 그루 엔터 소속 배우 윤여린은 아이돌 그룹으로 활동하던 시절, 클라이맥스 산하의 또 다른 자회사 클립 엔터테인먼트에서 전속계약을 체결하고 활동했었는데, 아이돌 그룹이 해체되고 계약이 만료되면서 배우로 활동 전향하며 그루 엔터테인먼트와 손을 잡은 케이스였다.

'배우 한설, 애인 윤여린 따라 신 엔터 버리고 그루 엔터로 이적!'

이상한 헤드라인 기사들이 떴음에도, 이전에는 윤여린과의 연애설에 사실 무근 기사를 냈던 신 엔터가 이번에는 침묵했다. 그루 엔터에서는 루머성 기사에 대해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나섰지만, 신 엔터에서 말이 없자 사람들은 그 소문을 믿는 모양이었다.

"우리 설이가 중학생일 시절부터 윤여린 씨하고 사겼다는 소문을 사람들이 믿는다는 게 너무 어이 없어요. 참 나, 순수한 저 눈망울을 보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죠? 우리 설이 이제 겨우 스무살이라구요!"

"하하, 그만 열 올리세요. 뭐…… 사람은 여러 모습이 있는 거니까요."

이하원 팀장은 뭉뚱그리듯 대답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왠지 모르지만 이하원 팀장은 설이가 그루 엔터테인먼트로 옮겨온 이후로 설이를 어려워하는 분위기였다. 권영도 이사에게도 편하게 대하면서 왜 그렇게 설이를 어려워하는지 모를 일이다.

"짐은 오전에 다 옮겼다고 하던데, 다 잘 도착했습니까?"

휴대폰을 왼쪽 어깨와 귀 사이에 낀 채로 나는 네에, 하고 대답했다. 당장 입을 옷부터 정리 중이었다.

"이삿짐 옮겨주는 분들이 엄청 신속하시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살던 집이라 짐이 꽤 많았는데 금방 다 옮겨 주셨어요. 저는 원래 살던 집에서 다시 설이랑 살아도 괜찮았는데……."

"그건 한설 씨가 반대했습니다. 지금 옮긴 곳은 보안이 확실하고 경비가 삼엄해서 안전하기는 할 겁니다."

아직 이삿짐을 다 풀지 않아서 휑하게 넓은 오피스텔 안을 둘러보며 나는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건물 안으로 진입하려면 패스워드와 지문 인식을 하는 문을 두 번이나 지나야 했다. 건물 내 엘리베이터도 지문 인식으로 움직여서 아무나 들어올 수 없었다. 이렇게 넓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까지 있으며 방이 여섯 개나 되는 집이 과연 우리 두 사람에게 필요할지 모르겠지만, 이하원 팀장의 말에 의하면 스텝들이나 매니저들이 자고 갈 게스트 룸도 필요한 데다가 드레스 룸이 크게 구비되어 있어야 해서 고른 곳이라고 했다.

권영도 이사의 집도 이렇게까지 넓진 않았는데.

전체적인 인테리어는 밝고 부드러운 크림색이었다. 내가 예전에 권영도 이사의 집과 분위기를 비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던 설이가 오피스텔을 고를 때에 그런 부분도 신경을 쓴 모양이었다. 냉장고와 세탁기, 건조기 등의 가전기기도 전부 새것이었고 모두 값비싸 보이는 모양새였다.

"저기, 팀장님… 이런 집은 월세가 얼마나 돼요? 그걸 저희가 감당할 수 있을까요?"

조심스러운 내 물음에 휴대폰 너머에서 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하, 그건 한준 씨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닌 것 같네요. 아무튼 권영도 이사님하고도 이야기 끝났습니다."

"아."

"한준씨하고 얼마나 정이 드셨던 건지, 한준 씨 못 내놓는다고 그렇게 고집을 피우시더라고요."

이하원 팀장의 웃는 목소리에도 나는 어색하게 네, 하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설이는 신 엔터에서의 마지막 업무가 로케이션 촬영이라서 타지에 있었고, 거기에서 촬영을 마치면 바로 이삿짐을 옮긴 새 오피스텔로 오는 스케줄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난밤까지 집에서 혼자 지내면서 이삿짐센터에 맡길 수 없는 귀중품이나 통장들, 어머니 유품들을 대강 추리고 있었다. 

밤 늦게 권영도 이사님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갑자기 설이 쪽으로 담당을 변경하게 된 게 미안한 마음에 전화 받기가 망설여졌었다.

권영도 이사는, 뜬금없는 말을 했다.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한설은… 위험한 남자입니다. 당신에게 언젠가 큰 상처를 줄 수도 있어요. 이건 질투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한준 씨를 걱정해서 용기 내어 하는 말입니다. 부디 내 옆에 있어요. 내가 당신을 보호하는 방패가 되어주겠습니다. 무엇으로부터든, 내가 지킬게요."

설이를 욕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울컥 화가 났고, 나는 권영도 이사에게 "그런 말 하실 거면 끊습니다." 하고 차갑게 말한 뒤에 휴대폰 전원을 아예 꺼버렸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비록 그 내용이 설이에 대해 부정적인 말이기는 했어도 권영도 이사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설이에 대해서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너무 차갑게 굴었나 후회가 밀려왔다.

"권영도 이사님이 한설 배우를 무척 좋게 봤나 봐요. 임의성 치프 매니저를 한설 씨에게 붙여주고 싶어하더라고요."

"아, 그래요?"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어요. 신 엔터에서 한설 씨 담당했던 신정아 매니저가 우리 쪽으로 오겠다고 했거든요. 워낙 실력자라서 우리야 두 손 들고 환영이고요. 한설 씨 사람 끄는 매력이 어마어마한 건 알아줘야겠어요."

이하원 팀장은 흐뭇한 말투로 설이가 저녁부터 오피스텔로 들어올 거라는 소식을 전하며 전화를 끊었다.

아직 신 엔터테인먼트와의 업무가 조금 남아 있고 계약도 꼬인 부분이 있어서 설이도 변호사님과 자주 연락을 하는 것 같았지만, 그런 복잡한 회사 간의 사정은 내가 전부 알 수 없는 것이다.

로케이션 촬영지에서 자주 화상 통화를 걸어오는 설이에게 계약에 관해 걱정하는 말이라도 꺼내면, 설이는 졸리고 피곤하다며 내게 자장가를 불러달라고 조르기 일쑤였다.

아무튼 그것보다 내게 더 중요한 일은, 코 앞으로 다가온 설이의 스무 살 생일이었다.

"아…… 뭘 해주지? 뭘 해줘야 설이가 좋아할까."

성인이 되는 해니까, 기억으로 남을 만큼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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