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 연인이 되어줘 (26/65)

26. 연인이 되어줘


설이가 말하는 데이트라는 게 이런 거라면, 평생 하고 싶다.

보송보송한 분홍빛 솜사탕을 뜯어 돌돌 말아서 설이의 입에 쏙 넣어주었더니 사르르 눈웃음을 짓는다.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지나가며 설이를 쳐다보고 수군거렸다.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어도 귀티가 나는 걸 숨길 수 없는 모양이다. 사실 데뷔 전에도 설이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시선들이 많았기 때문에 내게도 그런 사람들의 관심과 집중이 익숙하지만, 이제 설이는 연예인이기 때문에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주변을 의식하게 된다.

사람들을 곁눈질 하고 있는 사이, 이번에는 설이가 솜사탕을 뜯어 내 입에 넣어주었다.

"한준 씨, 나랑 하고 싶은 거 있어요? 다 하게 해줄게."

테이블에 팔을 걸치며 가까워진 얼굴이 싱긋 웃는다. 내가 설이 팬이었으면 숨이 멎었을 앵글이었다. 사실 나라고 해서 심장이 안전한 상황은 아니기 때문에 헛기침을 하며 몸을 뒤로 뺐다.

"크흠, 설이 너는? 형이랑 하고 싶은 거 있어?"

"많지. …이것저것."

새까만 눈동자에 진득한 눈빛이 깃들어서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해 버렸다. 요즘의 설이는 배우가 되어서 그런 건지 눈빛과 웃음이 한층 더 고혹적이어서 마주보고만 있어도 멍해졌다. 샵에서 드라이해서 보드랍게 붕 뜬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예쁘네, 하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달콤하게 가라앉는다. 눈가를 찡그리며 씩 웃는 설이가 내 뺨을 손등으로 쓸었다.

"……형 예쁘게 꾸민 거, 다른 사람들이 보는 건 싫은데."

질투하는 아이처럼 입술을 비죽 내민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가슴이 찡 했다.

반짝거리는 설이를 영화관 스크린과 티브이와 인터넷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어쩐지 아깝고 질투 나는 내 마음도 같기 때문에 비실비실 웃음이 났다. 설이가 내미는 음료수 컵 빨대를 입에 물고 커피를 쪽 빨아 마시다가 나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게… 있기는 한데, 정말 다 하게 해줄 수 있어?"

흘깃 올려다보며 눈치를 보는 내게 설이는 부드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그러면 지금 너 사는 숙소 같은 데에 한 번 가보고 싶어. 그리고 너한테 형이 밥도 지어 먹이고 싶은데… 무, 물론, 부담스러우면 안 된다고 해도 괜찮아! 나는 그냥 궁금해서… 잘 지내나… 어떤 곳인가, 혹시 너무 춥거나 어둡거나 그런 건 아닌가… 해서…"

말할수록 목소리가 작아지는 게 스스로도 느껴져서 우물쭈물 입을 다물고 말았는데, 설이가 내 손을 잡았다. 나를 일으켜 세워 가게 밖으로 잡아 끄는 설이의 뒷모습이 너무 훤칠하다. 나는 가게에 남아서 설이를 흠모하듯 쳐다보고 있는 소녀들과 똑같은 눈빛으로 설이의 등판을 바라보며 걸었다.

얼마 만에 설이를 위해 장을 보는 건지, 대형 마트에서 카트를 잡아 끄는 손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설이가 내게서 카트를 빼앗아서 큰 키를 구부려 카트 손잡이에 몸을 걸쳤다.

"형이 만든 계란말이 먹고 싶네, 된장찌개도."

설이의 그 말 덕분에 나는 거침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설이와 솜사탕을 나눠 먹고, 설이를 데리고 마트에서 장을 보고, 함께 돌아가서 설이에게 먹일 밥을 짓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최고의 데이트 코스였다. 나는 절로 콧노래가 나와서 무슨 노래인지도 모를 음을 흥얼거리며 채소 코너에서 파와 애호박을 살펴보았다. 아무래도 귀에 익어서 생각해보니 하이레벨 신곡이었다.

설이는 내 한 걸음 뒤에서 카트를 밀며 따라오다가 콧노래에 귀엽다는 듯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끔 설이가 형인 나에게 동생답지 않게 어른스럽게 굴며 나를 귀여워할 때가 있는데, 그것마저도 내게는 다정한 애정표현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만족스러웠다.

우정혁은 그럴 때면 "너보다 어린 동생 놈이 머리를 쓰다듬는데 그렇게 고양이처럼 가르릉거리고 있으면 어떡하냐."하고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곤 했었다.

장 봐온 마트 비닐 봉지를 들고 오피스텔 엘리베이터에 타면서 행복감에 나는 비실거렸다.

"이러니까 꼭 예전으로 돌아온 것 같다. 맨날 이렇게 너한테 밥만 해줬으면 좋겠다."

"……그건 좀 곤란한데."

"응?"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설이가 내리며 뒤쪽을 돌아봤다.

"나는 형한테 다른 것도 잔뜩 받고 싶거든."

그게 뭐냐고 물어보려고 했지만, 다리가 한참 긴 설이의 발걸음이 나보다 훨씬 빨라서 뒤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나는 설이가 해달라고 하면 뭐든지 다 해줄 자신이 있었다.

설이가 내 곁에만 있어준다면, 정말 뭐든 다 할 텐데.

오피스텔은 지나칠 정도로 넓고 휑하니 아무것도 없었다. 새까만 벽지와 어두운 바닥이 이어져서 전체적으로 묵직한 분위기의 집이었다. 거실로 추정되는 허허벌판에 널찍한 소파마저도 검은 가죽 재질이었고, 부엌은 넓고 쾌적했지만 모델 하우스처럼 생활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일랜드 식탁 위에 설이가 올려 놓은 비닐 봉지에서 재료들을 꺼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서 지내는 거야? 밥은, 해 먹기는 하고?"

"음, 밀키트를 줘서 그걸로 식사를 하거나 보통 단백질 셰이크 같은 걸 마셔."

"……아이고."

우리 설이 이러다가 굶어 죽겠네.

안 그래도 식탐이 거의 없는 데다가 보기 좋게 적당히 마르고 탄탄한 몸매를 유지하는 편인데, 필요 이상으로 애한테 다이어트 식단을 시키는 건 아닌지 우려가 되는 바였다. 미간에 잔뜩 주름이 진 채로 채소와 생선을 헹구어 닦아내는 내 뒤에서 예전처럼 허리를 끌어안으며 내 머리꼭지에 코끝을 비빈 설이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좋다."

그 낮은 속삭임은 짧은 한 마디였지만, 설이가 어떤 기분인지 내게도 마음이 전해져서 나도 뺨이 볼록해지도록 깊게 미소를 지었다.

계란말이에 시금치도 넣고 비엔나 소시지도 넣어 여러 가지 버전을 만들기 위해서 재료를 손질하며 고등어를 굽고 된장 찌개에 물을 올리는 와중에 설이는 아일랜드 식탁에 앉아서 턱을 괜 채로 나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배고프지? 금방 해줄게."

"천천히 해도 괜찮아. 그냥 좋아서 보고 있는 거야."

설이의 말에 가슴이 뭉클해져서 뒤돌아 눈을 맞췄다. 싱긋 웃는 설이의 미소에 세상을 다 가진 듯 해서 힘차게 계란을 풀어냈다.

설이가 내 뒷모습을 한참 보다가 뭔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중에 같이 살 때는, 에이프런 사둬야겠다. 입혀 놓으면 보기 좋겠어."

"응? 뭐라고?"

"된장찌개 너무 맵지 않게 해달라고."

"그럼!"

설이는 내가 만든 음식을 식탁 위로 옮겨주고 밥 공기에 밥을 퍼 담았다. 마주 앉은 식탁은 낯설었지만, 그래도 설이가 살고 있는 집이라고 생각하니까 내게도 금세 집처럼 느껴졌다.

방금 만든 계란말이를 집어먹는 설이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의 한숨이 길게 새어 나왔다. 고등어 구이의 살코기를 발라내어 설이의 수저 위에 올려주자 착하게 잘 먹는다. 두부를 듬뿍 넣은 된장찌개가 설이 입 속으로 들어가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배불러서 내 젓가락이 자꾸 멈춰 있자, 이번에는 설이가 고등어 가시를 발라내어 내 밥공기에 얹어주었다.

"근데 너 여기 혼자 살기에 너무 넓지 않아? 밤에는 무서울 것 같은데."

"음, 글쎄."

"권영도 이사님 집도 여기랑 평수는 비슷할 것 같은데, 거기는 그래도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밝은 편이거든. 그 집은 커튼이나 가구들이 다 크림색이나 흰색이어서 좀 더 편안한 기분이야. 거기도 짐이 적은 건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채광도 꽤 좋고…"

"흐응, 그래?"

설이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 집이 마음에 들어? 거기서 그 남자하고 살고 싶어?"

얘가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주보자, 설이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이럴 때의 설이는 고요한 밤바다 같기도 하고, 서늘하게 벼린 칼날 같아서 섬뜩하면서도 아름답게 느껴진다. 애가 워낙 조용한 편이라서 조금만 화난 표정을 지어도 이렇게 분위기가 차가워졌다.

나는 적극적으로 두 손을 내 저으며 해명했다.

"그런 뜻이 아니지! 설아, 형은 그냥 이사님 집은 비슷한 크기여도 밝고 분위기가 부드러운데, 여기는 좀 어두워서 설이 네가 혹시 혼자 무서울 까봐 그러는 거야, 내가 이사님이랑 살고 싶다는 말은 아냐! 형은 사실 설이랑 같이 살고 싶지! 여기서 같이 살아도 좋고! 아니면 다시 전처럼 집에서 같이 살아도……"

너무 속마음이 보였나 싶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설이는 이제 나랑 살고 싶은 마음이 없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니까 내 말은, 설이 네가 원하기만 하면… 내가 여기서 어둡지 않게 불 켜두고… 바, 밥도 미리 해놓고… 기다리고 그러면… 좋으니까……."

말할수록 너무 내 생각만 하는 것 같아서, 고개를 들어 설이와 눈을 마주보는 게 겁났다. 

자꾸만 같이 살자고, 이적해서 그루 엔터로 오라고, 내 고집만 부리는 것에 질렸으면 어떡하지. 설이한테 미움 받고 싶지 않은데. 그럴 거라면 차라리 설이랑 평생 같이 못 살더라도 그냥 이렇게 가끔씩 얼굴 보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는데.

설이는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앉아 있다가 손을 뻗어서 내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힐끔 시선을 들어올리자 부드러운 표정이다.

다행이야, 나한테 아직 질린 건 아니구나.

"형은 나하고 이렇게 같이 사는 게 좋지? 예전처럼. 같이 밥도 해먹고, 한 집에서 단둘이."

고개가 빠르게 끄덕여졌다. 간절해서 눈가가 뜨거워졌을지도 모른다.

"그게 형이 가장 바라는 거야?"

이번에도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설이는 비밀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손등을 검지 끝 지문으로 슥슥 쓸면서 간지럽게 만들었다.

"오늘은, 프리뷰야. 미리 보기."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몰라서 눈빛으로 응? 하고 되묻자, 설이는 반지를 낀 내 손가락을 손톱 끝으로 긁으면서 한 박자 쉬며 말을 골랐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단 한 가지만 들어주면, 오늘 보여준 프리뷰처럼 매일매일 같이 지내고 같이 밥 먹을 수 있어. 물론 원하는 대로 소속사도 이적할 거야. 이적 조건은 그루 엔터테인먼트에서 원하는 것을 다 맞춰줄 생각이야. 신 엔터에서의 페널티 비용도 내가 부담할게. 아마 그루 쪽에는 다시는 없을 계약 조건이 될 거야. 그리고… 형이 하는 말은 뭐든지 다 따르는 착한 설이가 될게."

내 손을 꼭 잡으면서 설이가 한층 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니까… 이 모든 걸 다 줄 테니까, 형은 내 부탁을 하나만 들어주면 돼. 그게 조건이야."

설이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다 보인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침을 꼴깍 삼키면서 나는 잠시 대답할 시간을 벌었다. 설이가 하는 말은, 확실히 전부 나에게 너무나도 유리한 조건이다. 이하원 팀장의 미션도 클리어 되는 것과 동시에 내가 간절히 원하는 한집살이도 가능하고, 설이가 내 말을 잘 듣는 착한 동생이 되겠다는데 이것보다 더 좋은 일이 또 있을까?

하지만 이 모든 것과 맞바꾸는 단 하나의 부탁을, 과연 내가 들어줄 수 있을지 두려웠다.

그래, 까짓 거, 고금리 대출을 받아서라도 다 해주자.

"그… 부탁이 뭔데?"

마음을 다잡고 물었을 때, 설이는 진지한 얼굴로 그 예쁜 꽃잎 같은 입술을 열었다.

"내 연인이 되어줘."

……뭐?

사고회로가 정지되고 내 영혼이 잠시 가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인 것처럼 설이가 정신 차리라는 듯 내 손을 더 꽉 쥐었다. 눈을 마주보자, 현실도피는 꿈도 꾸지 말라는 듯한 단호한 태도로 다시 말했다.

"형이 나의 하나뿐인 연인이 되어줬으면 해."

멍하니 올려다보자 설이는 부드럽게 살랑거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그것도 두 달 뒤의 이야기지만. 법적으로 내가 성인이 되어야만 형이 인정해줄 것 같아서. 법이나 사회통념 같은 그런 거 꽤 챙기잖아, 형은."

설이는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하는 듯 피식 웃으며 내 손을 놓아주었다.

설이의 손길이 닿았던 반지의 하얀 보석 알맹이가 반짝거리며 은은하게 빛났다. 다들 이게 다이아몬드 같다고 했었지, 연인에게 프러포즈할 때에나 선물하는 비싼 그 다이아몬드라고.

혹시 설이가 나는 모르는 요즘 애들의 장난 같은 걸 내게 치고 있는 건 아닐까? 내 반응을 보려고 날 놀리는 건지도 몰라, 일말의 기대를 하며 흘깃 눈치를 봤지만 설이는 그저 미소 짓고 있을 뿐이지 눈빛만큼은 진지했다.

설이는 지금 내게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지만 일단 나는 주먹을 꽉 쥐며 입술을 말아 넣었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아, 안 돼. 설아. 그건 아니야. 그건… 안 되는 거야."

당황한 티를 내고 싶지 않았지만 자꾸만 말을 버벅거렸다. 내 거절에 상처 받진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설이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테이블에 턱을 괜 채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흐음, 하고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마치 내 반응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태도였다.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설이는 조금 기운 없는 눈빛으로 긴 속눈썹을 내게 보이며 시선을 떨구었다.

"그렇겠네, 형한테는 내가 그냥 동생이니까."

당연한 소리를 하면서 왜 우울해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설이의 슬픈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위로할 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저기, 형은 꼭 그, 그런 게 아니더라도 늘 우리 설이 곁에 있을 거고… 응 그렇지, 만약 설이가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죽도록 좋아하는 사람을 찾으면, 그… 연인이 된다는 게 어떤 건지 이해할 수 있을 텐데… 어…그때까지 형이…"

"죽도록 좋아하는 사람, 이미 찾았는데 뭘 또 찾아."

설이는 농담하지 말라는 듯 웃었다. 그러나 웃는 눈빛이 무표정으로 되돌아왔을 때에는 너무 새까맣고 차가워서 나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 떨었다.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지나갔다.

무언가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통 유리로 된 창 밖으로 싸락눈이 내리고 있었다. 비가 조금 내리기는 했었는데 빗줄기가 어느새 차갑게 얼어서 비가 되었다. 갑작스럽게 흩날리는 눈발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다시 설이를 보았더니 설이는 계속 내 얼굴에 시선이 꽂혀 있었다.

입술에 침을 축이며 나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어, 어쨌든 설아, 이건… 아니야. 네가 지금 뭘 착각해서, 그, 그럴 수 있어. 아직 어리니까…… 형은 괜찮아. 그러니까 못들은 걸로 하고… 음, 저기, 이적 문제는 다음에 다시…"

어색한 상황에서 나를 구원해주듯 주머니에서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권영도 이사님이라고 저장된 이름이 휴대폰 화면에 떠 있었다. 잠시 설이의 눈치를 봤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조용한 공간이라서 권영도 이사의 목소리가 휴대폰 밖으로 새어나가 설이에게도 들리고 있었다.

"어디에요. 나를 이렇게 버려두고, 직무유기 아닙니까? 나 쉬는데, 오랜만에 한준 씨가 만든 밥 좀 먹어 봅시다. 빨리 집으로 와요."

나보다 일곱 살 많은 남자가 어리광이라도 부리듯 말꼬리를 느리게 끌면서 애원하고 있었다.

픽 웃는 소리에 설이를 쳐다보니 제 귓불을 잡아당기면서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설이의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았다는 것을 차디찬 공기로 느낄 수 있었다.

"그, 금방 갈게요."

전화를 끊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둥지둥 거리는 꼴이 스스로도 우스웠지만, 아무래도 설이에게 이상한 제안을 받은 뒤라서 정신이 없었다. 빨리 설이 앞을 벗어나서 수런거리는 머릿속과 마음을 진정시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설아, 저기… 나 그만 가야겠다."

"………"

설이는 대답 없이 일어서서 현관으로 종종걸음 치는 나를 천천히 따라왔다. 현관문이 어떻게 해도 열리지 않아서 낑낑거리고 있자, 설이의 긴 팔이 내 머리 옆으로 뻗어와서는 간단하게 잠금 해제 버튼을 눌러주었다. 민망해져서 얼굴이 붉어진 채로 나는 설이의 시선을 피하며 우물거렸다.

"그… 바, 바빠도 끼니 대충 때우지 말고, 음, 다음에 또 봐."

설이는 현관문을 나서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저 문이 닫히기 전까지 현관 앞에 우뚝 서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원래부터 무표정한 편이기 때문에 웃고 있지 않을 때의 설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투명한 빛을 내는 설이의 까만 눈동자에 회색 빛이 감돌기 시작하면, 왠지 모르게 주변 기온이 급격히 달라지는 듯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나한테 난데없이 연인이라니, 대체 설이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며 눈을 질끈 감았다. 찬 공기에 열기를 식히면서 싸락눈 속을 빠르게 걸어갔다.

이하원 팀장의 예언과도 같은 말이 그대로 실현되었다. 영화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가 개봉된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이미 채널을 돌릴 때마다 설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대중의 이목이 집중되었을 때, 신 엔터테인먼트에서는 설이의 프로필을 공개했다.

설이와 함께 자라온 나로서는 너무나도 익숙한 설이의 삶이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모양이었다. 내게도 설이에게도 너무나 가슴 아픈 가족사이지만, 부모님 두 분이 일찍 세상을 떠나신 것과 형제가 단둘이 열심히 살아온 것을 안타까워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학교 생활 중에 찍힌 사진들도 인터넷을 떠다녔는데 하나 같이 반응이 좋았다.

설이의 팬클럽 <설국지색> 커뮤니티에 가입했더니, 설이의 스케줄을 상세히 알 수 있었다. 팬클럽에서 촬영장에 조공으로 넣는 도시락과 간식, 옷 같은 것도 사진으로 빠르게 업데이트되고 있어서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요즘은 자기 전에 씻고 누워서 설국지색 커뮤니티에 한참 머무는 게 내 취미였다. 설이가 수능 시험장에 들어가는 뒷모습이 찍힌 사진도 거기서 구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설이의 학교 성적과 좋은 머리가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미 연예인이 된 마당에 대학에도 꼭 가라고 말하면 설이가 스트레스를 받을 까봐 아무 말도 못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수능 시험도 보러 가는 걸 보니 마음이 놓였다.

담임에게 전화를 했을 때에는, 설이가 워낙 바빠서 학교 나오는 일수도 턱없이 적고 상담은커녕 얼굴 보기도 힘들다고 하셨었다. 아마 대학 진학은 영 생각이 없어진 모양이라고 무척 아쉬워하셨는데, 그래도 일단 수능이라도 보고 나면 기회가 있을 것이다. 

‘내 연인이 되어줘.’

그 말을 들은 뒤로는, 설이에게 연락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설이도 뒤늦게 생각해보니 그게 잘못된 발언이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한 집에서 사는 것도 아닌데, 이대로 어색한 관계가 이어지면 연락 자체가 끊어질 까봐 두려워졌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터무니 없는 부탁을 들어주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 되는 거고.

……어떡하지.

오랜만에 쉬는 날이라 설이가 없는 설이 방에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보며 설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휴대폰에 진동이 왔다. 이하원 팀장이 내게 바로 전화를 거는 일이 최근 들어서 많아지기는 했지만, 휴일에도 연락해서 일을 시키는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네, 팀장님. 한준입니다.”

“지금 바로 본사로 오십시오. 바로 오세요, 택시 타고 바로!”

“무슨 일인데요, 갑자기 왜 그러세요?”

“한설이 왔습니다. 그루 엔터 본사에 지금 한설 씨가 와있다고요.”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이하원 팀장이 격양된 목소리로 연이어 말했다.

“한설 씨가 그루 엔터로 오겠답니다! 그런데 조건이 좀 특이해서…… 아무튼 지금 바로 오세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