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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비밀 데이트 (25/65)

25. 비밀 데이트


눈 앞에 천사가 있다.

자다가 깨어나서 처음 마주한 풍경치고는 너무 성스러워서, 혹시 내가 지난밤 지나친 음주로 인해서 세상을 뜨게 된 것은 아닌가 싶었다. 미색의 부드러운 커튼이 바람에 살랑거리고 햇살을 등지고 내 쪽을 향해서 누운 천사의 얼굴은 곱디 고운 도자기 같아서 혹시라도 내가 숨을 크게 쉬면 깨질세라 입을 막고 감상을 시작했다.

은은하게 미소 짓고 있는 입술의 완벽한 형태와 꽃잎 같은 예쁜 빛깔은 신이 숨결을 불어넣어준 증거 같았다. 게다가 나는 저 입술이 얼마나 부드럽고 감미로운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형으로서 부도덕한 일인 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고르게 숨을 내쉬는 설이의 뺨은 아직 보드라운 솜털이 나 있다. 조각도로 세밀하게 세공해서 깎아낸 듯한 콧날과 소담스럽게 생긴 콧볼, 감고 있는 눈두덩이의 고르게 뻗은 새까만 속눈썹까지 어느 하나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투명하리만치 순도 높은 다이아몬드를 인간으로 형상화시킨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 것이다. 머리카락이 가리고 있는 이마에 흰 밴드가 붙어 있어서 속상했지만, 그 상처까지도 설이의 얼굴에는 병약하고 여리여리해서 지켜줘야 할 것 같은 순정만화 그림체 같은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내 동생, 정말 잘 생겼구나.

새삼 느끼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설이의 잠든 얼굴에 빠져 있을 때, 잠든 줄 알았던 설이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눈을 감은 채로 설이가 조용하게 입술을 열었다.

"다 봤어?"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면서 천사가 스르르 눈을 떴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짙은 회색의 빛깔이 도는 설이의 새까만 우주 같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숨이 턱 막혀왔다. 예쁜 얼굴로 이렇게 행복한 미소를 지을 때면, 내가 가진 것도 아닌 나라를 팔아서 설이에게 다 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설이가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과 귀를 쓰다듬듯이 만지작거렸다.

"형 내 얼굴 보는 거 좋아하잖아."

"아… 하하, 잘 잤어?"

오랜만에 설이에게 아침 인사를 할 수 있다는 것에 감격스러운 기분이었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내 얼굴을 찬찬히 훑어본 설이가 입끝을 한 쪽만 올린 채로 쓰게 웃었다.

"글쎄. 술주정뱅이 때문에 잘 못 잤을 지도."

"어어, 내가 어제 좀 마셔서… 내가 주정 부렸어? 피곤하게 했구나?"

안 그래도 다쳐서 아픈 애를 자는데 옆에서 발로 차거나 심한 잠꼬대를 한 건 아닌가 싶어서 초조해졌다. 설이는 잔뜩 미안해 하는 내 얼굴을 빤히 보다가 즐거워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귀여워서, 참기 힘들었을 뿐이야."

어쩌면 우리 설이는 말도 참 예쁘게 한다. 밤새 주정 부린 형이 민망할 까봐 도닥여 주는 설이의 배려에 마음이 녹아 내렸다. 이렇게 얼굴도 눈빛도 마음도 전부 예쁜 설이라서 데뷔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공식 팬클럽 회원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나는 것이다. 솔직히 이하원 팀장이 예전에 말했듯이, 나 혼자 독점하고 집에서 보기에는 너무 아까울 정도로 천사 같은 아이인 것은 맞았다. 나도 설이 팬클럽에 들고 싶어서 사이트에 회원 가입을 해 놓았는데, 팬들이 많이 모여서 설이 얘기를 하는 커뮤니티는 따로 있어서 시간이 나면 그쪽에도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

"설아, 다친 곳은 다 괜찮아? 머리 아프진 않고?"

"나보다 형이 걱정인데. 일어나 봐."

"응? 나야, 뭐……"

설이의 부축을 받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앉은 순간, 눈 앞이 핑 돌았다. 돋보기 안경이라도 쓴 듯이 초점이 맞지 않아서 설이 얼굴이 눈앞에서 회전하며 빙글빙글 돌았다. 게다가 속이 울렁거리고 거북해서 헛구역질이 나왔다. 이게 숙취구나.

설이가 내 뺨을 찬 손바닥으로 쓸어주면서 쯧쯧 혀를 찼다.

"약하고 마실 것 가져올 테니까, 좀 더 누워 있어."

"우윽… 설이 너… 쉬어야… 하는데."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 설이가 웃었다.

"난 이게 쉬는 거야."

역시 그때 아버지가 산에서 아기 천사를 데려온 것이 분명하다.

가볍게 씻은 뒤, 나를 이불로 잘 감싸 놓고 방 밖으로 나가는 설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또 한 번 감탄했다. 설이를 어릴 때부터 가까이에서 보면서 사는 내 인생은 알고 보면 로또 당첨 수준이다.

내가 쉬는 동안 혹시라도 누가 방해하면 안 된다면서 친절하게 방문을 밖에서 잠그고 간 설이 덕분에 누가 찾아오지 않아서 마음이 편했다. 복도에서 바쁘게 움직이며 일하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리지만, 노크해도 문이 잠겨 있으니 대답할 필요도 없다.

설이의 체취가 남아 있는 침대 시트에 그대로 다시 털썩 누워서 얼굴을 비비며 쉬고 있다가 흘깃 선반 쪽을 보았다.

"참… 어제 전화가 왔었던 것 같은데."

배터리가 간당간당 하게 남은 휴대폰 잠금을 해제하고 보니, 부재중 번호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술을 마시기 전에 이하원 팀장님과 통화를 했던 것이 마지막 기록이었고, 그 뒤로는 통화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내 기억에 휴대폰에 계속 진동이 오고, 설이가 내 전화를 받는 것 같았는데…….

"에이, 착각했나 보네."

생각해보면 잠금이 걸려 있는데 어떻게 설이가 나 대신 전화를 받았겠어.

휴대폰을 다시 선반에 던져 놓고, 설이가 방으로 돌아올 때까지 잠시 더 눈을 붙였다.

***

"그러니까 한설 씨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는 거죠?"

"넵."

할 말이 없어서 고개 숙인 내 앞에 이하원 팀장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고 팔짱을 낀 채로 마주 앉아 있었다. 설이의 촬영은 결국 사고 이후로 진행되지 않았고, 이미 그 전에 찍어둔 것이 작품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이는 나와 함께 하루 더 쉰 뒤에 촬영장에서 돌아가게 되었다.

숙소에 머무는 동안, 설이는 내게 죽을 떠 먹여주고 숙취 약을 때마다 먹이고, 두통을 이완시켜 준다며 목과 어깨 마사지를 해주면서 나를 토닥토닥 재워주었다. 

사실 경미하나마 사고에서 부상을 얻은 것은 설이 쪽이었기 때문에 반대로 내가 설이를 간호해줘야 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돌봐주는 설이의 표정이 재미 있는 놀이라도 하는 듯 보여서 간호를 받으면서도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쏘맥의 숙취는 내게 너무 강렬했다.

이하원 팀장은 안경을 밀어 올리며 다시 한 번 확인하듯 천천히 물었다.

"그러니까 한설 씨와 하루 종일 단둘이 방안에서, 침대에 앉은 채로 떠먹여 주는 밥을 먹으면서도, 그 좋은 절호의 기회 속에서, 소속사 이적 문제에 대해 단 한 번도 떠보듯 제안할 생각을 못했다는 거죠? 신 엔터 매니저가 태워주는 벤을 타고 돌아와서 지금 여기 앉아 있는 순간까지도, 제가 묻기 전에는 그 생각을 전혀 못했다는 거네요?"

"그…… 넵."

변명의 여지가 없어서 입을 다물고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린 채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이하원 팀장은 스스로 다시금 생각해봐도 어이가 없는지 작게 웃었다가 고개를 홀로 끄덕였다.

"뭐, 됐습니다. 무사히 돌아오신 것만으로도 다행이니까요."

얼굴은 무척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말만은 예의 바르게 하는 걸 보면 이하원 팀장님은 제대로 사회인이었다. 나는 그가 묻는대로 촬영 현장 분위기나 설이를 맡은 신정아 매니저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했고, 이하원 팀장은 다시 설이를 끌어들일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 진지하게 내 이야기를 들으며 아이패드에 무언가 열심히 적어내려 갔다.

"음, 그래요. 그래도 제가 생각한 계책이 먹히기는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던 계기였습니다."

"네? 팀장님의 계책이 뭐였는데요?"

이하원 팀장이 나를 빤히 보며 대답했다.

"미인계요. 한준 씨를 앞으로는 더 적극적으로 활용해볼 생각입니다. 한설의 눈에 계속 띄게 만들어서 스스로 이쪽으로 오도록 유도하는 것이 전체적인 작전의 흐름입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미간에 주름이 잡힌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일정을 정리하며 브리핑하는 이하원 팀장의 얼굴을 보니 장난은 아닌 것 같아서 웃지 않고 들었다.

"한설 씨에게 보낼 때는, 으음, 샵에도 보내고 한준 씨를 미리 케어 해야겠습니다. 옷도 새로 입히고 스타일링을 시켜야 할 텐데, 한설 씨가 어떤 취향인지를 잘 모르겠네요. 그건 좀 더 연구해봐야겠지만, 이쪽에도 전문가들이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를 그 미용실에…? 옷을… 아니, 왜요?"

"빠른 눈치와 판단, 전략, 제가 가진 유능함이 어떤 건지 보여드리죠. 잘 해봅시다, 우리."

어쩐지 사악해 보이는 미소로 이하원 팀장이 내 손을 잡고 악수했다. 얼떨결에 마주 잡고 흔들었지만, 눈치와 판단과 전략 같은 것은 죽을 쑤려 해도 없는 내 입장에서는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말들뿐이었다.

쾅! 소리를 내며 회의실 문이 열리면서 거의 동시에 번쩍거리는 가죽재킷에 가죽바지를 입은 권영도가 들어왔다. 정신 없이 주변을 둘러보는 눈빛이 매섭다. 누군가를 급히 찾는 듯한 시선인데, 옷차림과 분위기 때문인지 빚 받으러 온 사채업자 같은 인상이었다.

험악한 눈길이 내게 꽂혔다. 저벅저벅 빠른 걸음으로 내게 걸어온 권영도가 내 어깨를 꽉 쥐었다.

"너…!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눈을 크게 뜨고 마주봤지만,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걸 봐서 권영도가 사람을 착각한 건 아닌 듯 했다.

"저기, 이사님, 뭐 때문에 이러시는지… 갑자기 반말은 왜……"

"사람을 이렇게 걱정시키고!"

어깨를 구부려 나를 품에 와락 끌어안는 그에게서 가쁜 숨소리가 느껴졌다.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몸에서 열기가 느껴진다. 절대 나를 놓지 않겠다는 듯 내 등을 두 팔로 묶듯이 감싼 그의 품 안에서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이하원 팀장이 이 상황을 설명했다.

"이사님이 사고 소식 듣고 걱정 많이 하셨습니다. 장흥으로 바로 달려간다는 걸 겨우 막았어요. 잡지 촬영도 있고, 스케줄이 연이어 있어서요."

"아…"

나를 품에서 놓아준 권영도가 머쓱한 표정으로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걱정 끼쳐 드려서… 죄, 죄송합니다."

"사과하라는 게 아닙니다."

한숨을 깊게 내쉰 권영도가 뭔가 퍼뜩 생각났는지 내게 버럭 소리 높였다.

"전화는 왜…! 아니, 그건 됐어요."

짜증 섞인 표정으로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혼잣말로 욕을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무척이나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인 것 같아서 눈치를 보고 있자, 권영도가 어깨에 힘을 빼며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일단 나 옷부터 갈아입고, 내 집으로 갑시다. 어차피 제이랑 영화 촬영 끝났으니까 다시 내 직속 생활 매니저로 복귀해야 하지 않습니까."

"아, 그 일 말인데요."

이하원 팀장이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손바닥을 뻗으며 끼어들었다.

"제가 따로 한준 씨에게 맡기고 싶은 업무가 있어서 말입니다. 이사님 스케줄에서 한준 씨는 한동안은 빼주셔야 할 것 같아요."

권영도는 눈썹을 밀어 올리며 그게 뭡니까, 하고 물었지만 대답을 듣기도 전에 회의실에 노크를 하고 들어온 스타일리스트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촬영이 끝나자마자 바로 달려왔기 때문에 의상 반납이 늦어져서 애가 타는 모양이었다. 할 수 없다는 듯 권영도는 대화를 더 이어나가지 못하고 문밖으로 나서면서 내게 "어디 가지 말아요." 하고 경고하듯 삿대질을 하며 힘주어 말했다.

"가기는 내가 어딜 간다고……."

나를 본 뒤 안심했는지 권영도의 기분이 조금 나아진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어떻게든 설이를 빨리 이쪽으로 데려오고 싶은데, 설이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저 내 욕심일 뿐일까.

***

영화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의 제작발표회는 영화관에서 진행되었다.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집 근처 역 건물 안에 있는 영화관밖에 가본 적이 없어서, 같은 브랜드 영화관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큰 관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초등학생 시절, 어린이날 기념으로 어머니께서 우리 형제를 데리고 서울 근교 영화관에서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여주셨던 것이 내 처음 기억이었고, 아마 우정혁과 설이와 셋이서 나란히 앉아 무료관람권으로 액션 영화를 봤던 게 마지막일 것이다. 

그날 영화를 보는 내내 설이는 차가운 표정으로 내 손을 꼭 쥐고 있었고, 반대편에 앉은 우정혁은 심드렁하게 팝콘을 씹어 먹었는데, 두 사람 가운데 앉아 있으려니 어쩐지 한기가 들어서 매우 추웠던 기억이 났다. 그래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단둘이 손잡고 걸을 때 설이의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져서 있었다.

그때는 당연히, 우리 둘이 오랫동안 함께 살 줄 알았는데.

"형도 엄청 떨리죠? 팬들도 와 있다는데, 배우 분들이랑 무대 인사 하는 거 처음이라 못 웃을 것 같아요."

제작발표회에 가기 위해서 새벽부터 샵에 가서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는 동안, 제이는 퉁퉁 부은 얼굴을 가라앉히느라 호박즙을 내내 빨아먹더니 대기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화장실부터 찾아 다녔다. 긴장되어서 잠을 잘 못 잤다더니 안약을 넣어도 눈의 충혈이 아직도 심했다. 손바닥이 너무 차가워서 옆에 앉아 꾹꾹 누르며 지압을 해줬더니 제이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왜?"

"아뇨, 준이 형도 이렇게 꾸미니까 진짜 예쁘구나, 싶어서요. 우리 새 멤버라고 발표해도 믿겠어요."

"무슨… 너 그렇게 아부 떨어도 나 아무것도 못 줘. 지압도 오래 못해줘, 힘 딸려서."

"아부 아니에요! 저 빈말 못해요, 형."

샵에서 드라이를 해준 내 머리카락을 살짝 손끝으로 만지며 제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했다. 피식 웃어주자, 제이도 그제야 겨우 얼굴에 웃음기를 띠었다.

제이를 백업해주려고 가는 줄 알았던 샵에서, 김수희 매니저님이 나를 다짜고짜 제이의 옆 의자에 앉혔을 때까지도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어리둥절해져 있었다. 샵의 직원들이 내게 달라붙어서 얼굴에 뭔가를 잔뜩 발라주고 머리를 감겨주고 나를 꾸미고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이하원 팀장의 그 '계책'이라는 게 떠올랐다. 

나를 잔뜩 꾸며서 설이 앞에 보여준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지만, 그래도 돈 받고 하는 일에는 토를 다는 게 아니라고 배웠다.

제작발표회가 시작되고, 무대 인사에 제이가 불려간 동안 나는 지정좌석에 앉아서 무대를 향해 박수를 치고 청중들과 함께 있었다. 앞쪽에는 전부 카메라를 세팅한 기자들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중간쯤 되는 지점에 앉을 수 있었다. 내 앞쪽으로는 초청된 팬들이 앉아서 사진과 글씨가 쓰여진 판넬 같은 것을 흔들며 입을 막고 소리를 질렀다.

사회자가 감독과 배우들을 차례차례 소개할 때마다 그들이 소리지르는 성량의 크기에 따라 인기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는데, 주연인 강도우 차례에 가장 반응이 좋았고 그 다음으로는 우리 설이였다. 유명한 배우들이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설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 때문인지 모르지만 강도우는 계속 설이의 어깨를 친다거나 등을 두드리며 스킨십을 이어갔고, 그럴 때마다 팬들이 숨 넘어갈듯 소리를 질렀다.

"그때 한설 씨가 다쳤다는 소식 듣고 너무 놀랐거든요. 다들 자다가 깨서 달려가고, 난리도 아니었죠."

강도우가 눈썹 끝을 내리며 진지하게 말하자, 다른 배우가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김조한 감독님 열정이야… 세상 사람들 다 아는 열혈감독이시니까, 그런데 한설 씨도 굳이 또 찍어야겠다면서 감독님하고 합심해서 그 새벽에 산 오르는 걸 보고 기겁했어요. 진짜."

강도우가 설이의 어깨를 치며 웃자, 설이는 그저 미미하게 웃는 듯 마는 듯 한 미소를 지었다. 김조한 감독은 질세라 새벽 산속에서의 촬영의 힘든 점이며, 그 사고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다. 나는 그들의 그 감쪽같은 연기에 입이 딱 벌어졌다.

설이와 내가 부둥켜 안고 낭떠러지로 떨어진 그 사고에서 강도우는 얼굴도 들이밀지 않았을뿐더러, 촬영지에서 훨씬 더 떨어진 곳에 따로 숙소를 두고 있었다. 강도우와 함께 그날 사고에 대해서 떠들고 있는 저 배우는 촬영장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다.

김조한 감독의 열정에 대한 에피소드가 내내 이어지고, 나는 관중 속에서 홀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런 거짓말쟁이들과 함께 일하는 직업을 설이가 계속 하게 둬도 괜찮은 걸까. 속물들한테 우리 착한 설이가 나쁜 물들면 어쩌나.

"저기, 이거 드세요."

내 뒷자리에 앉은 사람이 불쑥 뭔가를 내밀었다. 내 옆자리는 제이의 매니저들 자리였고 공교롭게도 양쪽 다 비어있었기 때문에, 뒷자리의 그 목소리는 나에게 용건이 있는 게 확실했다. 

흘깃 돌아보자, 제이의 얼굴이 박힌 플랜카드를 든 여성팬이었다. 내게 건넨 것은 마찬가지로 제이의 사진이 들어간 스티커가 붙어 있었는데, 쿠키가 들어 있는 조그마한 틴 케이스였다. 먹을 것을 주면 마다하는 성격은 아니어서 반사적으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속삭였다.

"어… 잘 먹겠습니다…"

게다가 우리 제이의 팬인 것 같아서 친밀감도 느껴졌다. 웃으며 눈인사를 하자, 마찬가지로 제이의 사진 스티커가 붙은 사탕 봉지도 건네 받았다.

"데뷔 꼭 하실 거예요. 응원할게요!"

"……에?"

어떤 오해를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주먹을 쥐어 파이팅을 외치는 반짝반짝한 눈길에 감사합니다, 라고 대답하는 수 밖에 없었다. 간식을 두 손 가득 든 채로 다시 무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에는 이미 무대 인사가 끝나가는 중이었는데 다음 순서는 영화 감상이었다.

안타깝게도 제이는 다음 스케줄이 있어서 영화를 보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했다. 그건 제이의 매니저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이하원 팀장은 "동생분이 처음 찍은 영화니까 관람까지 하고 오세요." 하면서 내게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무대에서 박수를 받으며 내려간 배우들은 아마 앞쪽 자리에 앉아서 영화를 보게 되는 것 같았다.

양 옆쪽 자리가 빈 채로 영화관 불이 꺼졌다.

두근두근 떨리는 가슴으로 불 꺼진 스크린을 보며 기다리고 있는데, 어둠 속에서 내 옆에 불쑥 누군가가 다가와 앉았다. 어차피 비는 자리인데 누구든 앉아도 상관 없지, 싶어서 스크린에 펼쳐질 설이의 얼굴을 상상하며 앞만 보고 있을 때 옆에 앉은 누군가가 손을 뻗어 팔걸이를 넘어와 내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스크린이 밝아지며 이미 영화는 시작되었다. 모두가 앞을 보며 집중하고 있는 조용한 순간이라, 나는 헉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뻣뻣하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어?"

쉿, 하고 손가락을 입가에 댄다.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예쁜 입술이 너무도 낯익었다.

어두운 색상의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던 설이는, 흰 얼굴을 캡모자로 눌러써 가린 채 내 옆에서 비밀스럽게 웃고 있었다. 모자 챙 사이로 흘깃 보이는 새까만 눈망울이 장난스럽게 웃고 있다. 마치 인기 연예인과 밀애를 즐기는 비밀 연인이 된 것처럼 심장에 찌릿 전기가 올랐다.

"오늘 왜 이렇게 예쁘게 하고 왔어."

응? 하고 되물으며 내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설이 너한테 예쁘게 보이려고.

그게 사실이기는 하지만,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서 스크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바보 같이 "영화 보자" 하고 속삭이는 게 전부였다.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깍지를 끼는 설이의 긴 손가락의 촉감에 심장 뛰는 속도가 급속으로 빨라져서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이래서야 꼭, 첫 데이트하는 소년 같잖아.

옆에 동생을 앉혀두고 이렇게 긴장하는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는 중반부에 도달했지만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아서 재미있는지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설이가 등장하는 부분에서는, 정말 연예인이 되었구나 싶어서 감회가 새롭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스크린 속 설이가 다른 배우를 향해 대사를 치고 웃거나 놀라거나 뛰거나 넘어지는 모든 모습이 하나하나 다 감동적이었다.

아무래도 설이는 조연이기 때문에 두 시간 정도의 러닝타임에서 도합 20분도 나오지 않았지만, 국제영화제 같은 데에서 이걸로 충분히 상을 받고도 남을 것이다. 신인상은 물론이고 내 기준으로는 주연상, 조연상, 할 것 없이 모든 상을 다 줘도 충분할 연기였다.

흐뭇한 마음으로 영화에 집중하고 있는데, 옆에서 설이가 큰 몸을 구부려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내 오른손을 쥐고 만지작거리며 내 어깨에 제 머리를 꾸물거리며 비벼댔다. 그야말로 애교 부리는 커다란 짐승의 모습이었다.

아, 우리 설이 귀여워서 어쩌지.

심장이 저릴 정도로 행복해서 설이의 손가락을 꾹 쥐고 있는데, 간지러운 입술이 귓가에 와 닿았다. 

“저기요, 한준 씨. 우리 영화 끝나기 전에…… 같이 나갈래요?”

몰래 나가서 데이트해요,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절로 고개가 끄덕였다. 영화관 안이 너무 더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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