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까. (24/65)

24.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까.



"한준 씨는 여기에 버리고 철수합니다."

"네? 저를요?"

김수희 매니저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는 옆에서 우리 두 사람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제이의 촬영 분량은 결국 늘어나지 못한 채 끝났고, 만약 촬영이 더 늘어난다면 계속 하이레벨 그룹 스케줄을 이쪽으로 뺄 수 있게 조절해둔 상태였지만, 이제는 돌아가서 앞으로 있을 공연 무대 연습과 소속사 내에서 만드는 하이레벨 예능 방송 촬영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김수희 매니저님은 제이와 미련 없이 돌아가지만, 나 혼자 영화 촬영장에 남으라는 것이다.

"기획 팀장님 지시입니다. 한준 씨는 여기 남아서 자신의 미션을 완수하세요."

"하지만 저는, 따로 차도 없고, 여긴 산속 별장인데… 저 혼자 어떻게 돌아가라고……"

김수희 매니저가 친절하게 웃었다.

"그것도 능력이죠."

이렇게 잔인할 수가, 황당해서 입을 벌린 날 두고 모두들 떠날 준비를 마쳤다.

벤을 타고 떠나가지 전, 제이는 눈물 어린 얼굴로 내게 손을 흔들면서 '리얼 버라이어티 쇼 찍는 연습이라고 생각하고 힘내세요!' 라고 말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평생 그런 걸 연습할 필요가 없는 일반인이었다. 

벌써 밖은 어두워졌는데, 당장 잘 숙소도 없었다. 이하원 팀장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받지 않았다.

영화 촬영이 처음이라서 덜덜 떨고 있는 제이를 내가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김수희 매니저가 벼랑 끝에서 혼자 떨어져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키워야만 연예계에 적응할 수 있게 된다며 제이를 너무 감싸주지 말라고 했었다. 그 말을 듣고 연예계는 야생이구나, 생각했지만 그게 일개 짐꾼인 나에게도 적용되는 방식인지는 몰랐다. 

"그루 엔터 쪽이시죠? 여기서 뭐해요?"

촬영 중에 얼굴을 익힌 미술 팀 스텝이었다. 종이컵에 담긴 믹스커피를 후루룩 마시며 그는 내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것도 없는 휑한 주차장이다. 내가 운전하고 왔던 벤이 멀리 사라지는 걸 보며 혼자 멀뚱히 서 있는 내가 이상해 보였던 모양이다.

"아, 저기, 오늘 촬영은 이제 끝인 거죠?"

그가 휘휘 고개를 저었다.

"그럴 예정이었는데, 김조한 감독님이 필 받았나 봐요. 한 시간 뒤에 산속에서 추가촬영 있어요."

"……한 시간 뒤면 새벽인데요?" 

"네, 한설 배우 단독 촬영인데, 산에서 내려오는 장면이요."

"그건 아까 찍지 않았나요?"

"그러니까 추가 촬영이죠."

싱겁다는 듯 웃는 미술 스텝을 따라 걸어가며 자연스럽게 스텝 사이에 섞였다. 어차피 많은 일꾼을 필요로 하는 현장이라서 나 하나가 끼어있건 없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이왕 이렇게 혼자 버려진 거, 끝까지 남아서 설이 촬영하는 거 지켜보자. 가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설이가 말했었는데, 나중에 내가 없어졌다는 걸 알면 쓸쓸해할 테니까.

"저기, 우리는 한설 촬영하는 거 못 보나요?"

정신 없이 짐을 옮기며 잡일을 하다 보니, 세트장 앞에서만 왔다 갔다 하는 중이었다.

내 옆에서 땀을 닦고 있던 남자가 '이 사람 누구였지' 하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면서 대답했다. 

"예. 지금 저쪽에서 찍는데, 최소 인력만 간추려서 갔어요.“

남자가 턱짓하는 쪽은 꽤 멀었다. 어둠이 내린 산 중턱에서 조명으로 추정되는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 늦은 시간에 어린 애를 데리고 위험하게 산에 들어가다니, 다들 정신이 있는 거야?

아무래도 탐탁지 않아서 표정이 굳고 미간이 빡빡해졌다. 새벽이라 날도 추워지는데, 설이의 의상은 교복 하복이라서 반팔 셔츠였다. 설이가 산속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잠깐 휴식을 취하는 중인 스텝 무리에서 슬그머니 빠져 나와 산속으로 올라가는 나무 다리를 건넜다. 설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산 중턱 쪽에서부터 조명이 멀리까지 비췄기 때문에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어두운 산길이어도 곧 적응이 되어 조금씩 위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쉼 없이 산을 오르다 보니 이마와 목덜미, 등까지 죽 땀으로 젖었다. 숨이 차서 무릎을 쥐며 잠시 몸을 굽혀 쉬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더니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가파른 언덕 쪽에 사람들이 모여있다.

"한설 씨! 가능하면 더 옆쪽으로, 나무 기둥에 매달려봐!“

확성기로 감독의 목소리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사람들 등뒤로 다가가 뒤통수들 사이로 고개를 내밀어보자, 조명과 카메라들, 사람들이 온통 한 곳을 중심으로 집중하고 있다.

교복을 입은 설이는 땀과 피에 젖은 채로 길게 뻗은 거대한 나무기둥 옆에 서 있었다.

나무에 표식처럼 흰 천 조각이 묶여 있는데, 설이가 그걸 발견해서 풀어내는 장면인 것 같았다. 천 조각은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어서 팔다리가 긴 설이가 손을 뻗어도 겨우 닿을 듯 말듯 한 정도의 높이였다. 주변 바위에 발끝을 걸치고 올라가 나무 기둥을 감싸 안고서 힘껏 팔을 뻗어야 하는 모양새였다.

김조한 감독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설이를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 놓는 그의 작업 방식이 마음에 안 든다. 특히 지금처럼 새벽에 내린 비가 그대로 살얼음처럼 얼어 있는 산은 함부로 오르는 게 아니었다. 나무 아래쪽에서 여러 사람이 혹시라도 설이가 떨어지면 받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었지만, 자칫 발을 헛디뎌 방향을 잃으면 어디로 굴러 떨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지! 좀 더! 아슬아슬하게!”

악마의 속삭임 같은 감독의 우렁찬 확성기 소리에 눈가를 찌푸리고 있을 때였다.

파삭,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설이의 몸이 단번에 언덕 아래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설아…!“

그 밑이 낭떠러지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내 몸이 먼저 움직였다.

사람들을 밀치며 발끝으로 튀어 설이의 몸을 와락 껴안았다. 어디에 부딪히거나 떨어지더라도 설이를 감싸 안고 있으면 내 몸이 먼저 바닥에 닿을 것이다. 설이의 넓은 등을 꼭 끌어안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추락은 순식간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머릿속으로 내 삶의 즐거운 한 때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는데, 어떤 장면이든 전부 설이가 있었다. 나를 쳐다보는 설이의 눈빛 안에서 내가 가장 행복해 했구나. 그래, 그렇다면 설이와 함께하는 마지막이 내겐 행복한 죽음이겠지.

죽음까지 각오한 그 순간, 추락이라고 하기에는 상념의 시간이 너무 길다는 걸 깨달았다.

"……어?“

스르르 눈을 떠보니, 절벽 아래로 이어지는 커다란 노송나무의 묵직한 나뭇가지 사이였다. 나는 설이의 가슴팍에 안겨 있었고 설이는 한 손으로 내 허리를 감아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나뭇가지를 밀어 지탱한 채였다.

어둠 속에서 날 껴안은 설이의 숨결이 느릿하게 느껴졌다. 눈을 뜬 설이가 내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형, 다친 데 없지?"

"서… 설아. 너 피가……“

흰 이마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울컥 눈물이 솟았다. 손을 뻗어서 얼굴을 감싸주고 싶었지만,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떨어질 수 있었다. 설이의 팔과 다리가 나무 기둥을 밀어내 겨우 중심을 잡고 있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설이의 가슴팍 위에 안긴 자세로 눈물만 줄줄 흘렸다.

설이가 작게 웃으며 내 등을 감싼 손으로 조심스레 등허리를 쓸었다.

“괜찮아, 울지 마. 다 괜찮아.”

언제 이렇게 믿음직스러운 남자로 자랐을까. 어쩌면 설이는 늘 이렇게 커 있었는데, 내가 외면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눈을 감고 겨우 울음을 그치려고 노력하는 내 머리에 입을 맞추며 설이는 만족스러운 듯 느릿한 숨을 내쉬었다. 나는 왜 이 순간, 저 입술에 입맞추고 싶은 걸까.

"찾았습니다!  여깁니다!“

누군가가 소리치는 소리와 함께 웅성거리며 다가오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어서 구조되기만 기다리고 있는 그때, 설이가 손가락에 힘을 주어 내 등을 강하게 꽉 끌어안았다.

……이대로 아무도 못 찾았다면 좋았을 텐데.

"뭐?“

내가 되물었을 때는 이미 구조대원들이 우리를 끌어내려주기 위해서 올라오고 있었다. 안전하게 바닥으로 옮겨질 때까지, 나는 머릿속에 메아리처럼 울리는 설이의 속삭임을 멍하니 떠올렸다.

***

"가벼운 찰과상 정도라니, 정말 다행입니다! 우리 촬영 팀은 무엇보다 배우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조감독이 당황한 듯 엄청나게 빠르게 말을 뱉어냈다. 나는 벽에 등을 걸치고 침대에 반쯤 누운 설이의 옆에서 조감독을 쏘아보며 입술 안으로 욕을 우물거리며 참는 중이었다.

설이와 나는 구조된 후 바로 근처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내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고 설이는 이마를 살짝 긁힌 상처와 팔다리에 약간의 생채기가 전부였다. 엑스레이 촬영까지 전부 해보았지만 골절 이상은 전혀 없었고, 근육이 놀라 움직이지 않는 부분도 없었다.

일단 휴식을 취하는 게 좋겠다고 하면서도 의사는 어떻게 이렇게 다친 곳이 없느냐며 신기해했다. 꽤나 높은 곳에서 떨어졌고, 다행히 낭떠러지 아래로 가기 전에 큰 나무가 옆쪽으로 길게 뻗어 있어서 그 사이에 안착한 덕분이겠지만, 그래도 어떻게 멀쩡할 수가 있느냐며 몇 번이나 감탄했다. 입원이나 여타 치료가 필요하지 않아서, 소독과 연고만 바른 뒤 바로 숙소로 돌아왔다.

"배우의 안전을 생각한다는 사람들이, 그 험한 산길에서 이 새벽에 촬영을 합니까? 그것도 아직 스물도 안 된 어린 애를 데리고?"

"그, 그건… 안전 장치를 다 설치한 상태였지만 운이 안 좋아서……"

"운이요? 운에 기대야 할 정도면 안전 장치가 아니지 않나요? 전문가들 맞습니까?"

"물론 불미스러운 사고가 생긴 건 죄송스럽게 생각하지만… 아니, 근데 아까부터 대체 누구십니까? 한설 배우 매니저분은 지금 김조한 감독님하고 계실 텐데?"

"지금 내가 누군지 그게 중요해요? 애가 이렇게 얼굴을 다쳤는데!"

"죄, 죄송합니다. 일단 이후 촬영에 대해서는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쉬시면서……“

조감독은 노크를 하고 들어온 스텝이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기쁘게 대답하며 인사를 한 뒤에 방 밖으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나는 그가 사라진 문 쪽을 씩씩거리며 노려보다가 내 뺨을 간질이는 손길에 다시 설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 많이 놀랐지? 내가 괜히 뛰어 들어서… 나 때문에 더 다친 거 아니야? 내 무게까지 지탱하느라… 팔 아프지는 않아?“

설이는 이마에 난 상처를 흰 밴드로 붙인 채라서 그런지 얼굴이 파리하니 아파 보였다. 속상해서 눈물 어린 눈길로 뺨을 쓸어주자 설이가 피식 웃었다.

"무겁기는. 나 구해주려고 뛰어든 거잖아. ……기뻐.“

우리 착한 설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내 눈가를 설이의 손가락이 쓸고 지나가며 닦아주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촬영은 중단되었지만, 어차피 추가 촬영이었기 때문에 더 촬영할 필요는 없는 모양이었다. 김조한 감독과 신정아 매니저가 방 안으로 들어와서 설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잠시 방 밖으로 나와 있었다.

새벽 두 시를 조금 넘은 시간에 이하원 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고가 났다는데,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와, 소식통 엄청 빠르시네요.“

복도 벽에 기대 서서 사고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크게 다친 부분이 없다는 말에 진심으로 안도한 목소리를 내며 호응하는 이하원 팀장의 태도에 내 마음도 한결 누그러졌다. 감독이나 촬영팀, 모두에게 화가 난 상태였는데 그래도 내 편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나도 모르게 훌쩍이는 소리를 내자, 이하원 팀장이 휴대폰 너머로 나를 다독였다.

"고생하셨습니다. 두 분 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고요."

"네……."

"이후에 한설 씨 촬영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곁에서 지켜보고 싶다면 더 있어도 좋고, 그만 돌아오고 싶다면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미션에 대해서는, 한설 씨가 괜찮아질 때까지 일보 후퇴합니다."

"저는 더 있다가 갈게요. 감사합니다.“

통화를 마친 뒤에 뺨이 잔뜩 젖어 있다는 걸 깨닫고 소매로 전부 닦아냈다.

설이가 다치는 것도, 잘못되어서 내가 죽게 되는 것도, 전부 두려웠다. 그런데 죽는 것 자체보다는 이대로 설이를 영영 못 보게 될 까봐 그게 가장 무서웠던 것 같다. 죽음보다도 그리움이 더 무섭다는 것을, 가족을 잃을 때마다 선명하게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 계셨네요.“

신정아 매니저가 고개를 내밀었다. 울고 있던 얼굴이 들킬 까봐 빠르게 고개를 돌렸는데, 부드럽게 웃는 목소리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다 들었습니다. 형님이시라고요."

"어…… 설이가 그래요?"

"네, 어쩐지! 저 까칠하고 손 안 타는 고양이 같은 한설이 한 매니저님 앞에서는 너무 부드러워져서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다른 사람한테는 얌전하게 웃어주면서도 발톱을 숨기고 있는 눈빛이거든요."

"우리 설이가 고양이 같나요?“

나도 모르게 킥 웃음이 났다. 눈가가 부어 있는 것이 창피했지만, 우리 관계를 들킨 건 오히려 속이 후련했다.

"그럼요. 정확히는 고양잇과의 야생동물 같달까. 아무튼, 한설 배우가 한 매니저님과 같은 방에서 머물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침대가 넓긴 하지만 한설 배우 방은 원 베드라서 트윈 베드로 된 저희 남자 스텝 방으로 모시려고 했는데, 한설 배우가 극구 싫다고 그러네요. 형님 분을 꼭 본인 방으로 오게 하래요."

"아……"

"사이가 참 좋은 형제시네요.“

신 매니저가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는데, 왠지 모르게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참, 아까 안정제 처방 받았던 게 듣는지 한설 배우는 잠들었어요. 지금 스텝들 다 모여서 한 잔 하고 있다는데, 괜찮으시면 저랑 같이 그쪽에 합류하실래요?"

"아, 저는……"

"컨디션이 안 좋으시면 어쩔 수 없지만요. 저는 꽤 놀랐던지 맥주 한 잔 정도는 해야 잠이 올 것 같아서요. 같이 한 잔 하시면서, 한설 배우 어릴 때 얘기 좀 들려주시면 좋을 텐데."

"그, 그럴까요?“

설이가 잠들어 있는 방 문을 흘깃 바라본 뒤에 신 매니저를 따라 나섰다. 잠들어 있는 설이 곁에서 뒤척이면서 잠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맥주 마시면서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게다가 설이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니! 언제나 환영이다.

***

"……래서 말이죠, 우리 애가 처음 나간 대회에서 금상을 탔다니까요? 믿어지세요? 아니, 피아노 학원을 한 번도 보낸 적이 없는데… 그냥 혼자 연습해서…… 그렇게 잘 친다는 게…?“

딸꾹질이 나와서 입을 막고 있자, 신 매니저가 친절하게 내 앞에 따뜻한 물을 놓아주었다. 물을 한 모금 마시면서 주변을 둘러보자 이미 테이블이 군데군데 비어 있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조연출의 스텝 한 명은 테이블에 엎어진 채로 잠들어 있었다.

몇 시인지 알 수 없지만 꽤 시간이 흘렀다는 것만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눈 앞이 어질어질하고 주변 잔상이 흐려져 보였다.

"어… 다들… 어디 가셨지……?"

"내일 오전 촬영이 있는 팀들은 일찍 파했습니다. 이렇게 말술로 마셔도 다들 귀신 같이 일어나서 일하는 게 참 신기하다니까요. 그래서, 한설이 형님 때문에 피아노를 배웠다고요?"

"어… 음…  저 때문이라기보다는…… 제가 멋있다고… 피아노 잘 치는 사람 멋있다고 했더니… 근데, 새까만 그랜드피아노 치는 설이가… 얼마나 멋있었는지 아세요? 뭐랄까, 음악의 신 같아서……"

"흐음, 그래요. 악기 다루는 재주도 있었다니, 이건 작품 할 때 도움이 꽤 되겠어요.“

신 매니저는 빈 맥주병 사이에서 조그마한 수첩을 꺼내두고 메모하며 중얼거렸다. 분명 처음부터 같이 마시기 시작했는데 신 매니저는 하나도 안 취한 것 같아 보였다. 물론 중간부터 맥주가 너무 싱겁다는 느낌이 들어서 소주를 조금씩 타 먹기 시작했던 내 탓도 있지만, 주변이 자꾸 흔들거려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지진인가? 아니, 꼭 파도 치는 바다 위에 통통배를 탄 기분이었다. 목 마르니까 한 잔만 더 마실까.

코 앞의 맥주병을 쥐는데 빈 병이었다.

"어… 비었네…… 신 매니저님… 우리 한 잔 더……"

"이제 그만 마시는 게 좋겠네요. 벌써 소주까지 도합 다섯 병을 혼자 다 드셨어요."

"어… 어쩐지… 좀 어지럽……“

눈꺼풀이 어찌나 무거운지 눈이 절로 감기는데, 내 옆에 무언가가 툭 부딪쳤다. 아니, 부딪힌 게 아니라 쓰러지는 내 몸을 누군가가 부축한 것이다. 내 어깨에 닿는 미지근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촉감은 꼭 설이의 것처럼 큰 손바닥이었다. 눈 앞이 가물가물 잠에 빠져들 것 같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설이 목소리가 가까이에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렇게 될 정도로 마시게 두면…"

"…게 아니라 형님 분께서……“

설이와 신 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중간 중간 필름이 끊기는 것처럼 소리가 잘렸다.

몸이 공중에 붕 뜨고, 한숨 쉬는 소리가 얼굴에 가까이 들려왔다. 이미 눈이 감겨서 캄캄한 어둠뿐이지만, 누군가가 나를 안고 조용한 곳을 걸어가는 발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온다.

단단하고 따뜻한 품 안에 들어 있자 기분이 좋아서 배시시 웃음이 났다. 익숙하고 기분 좋은 체향이 느껴지는 가슴팍에 뺨을 비비면서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하아… 가둬둘 수도 없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기분 좋게 느껴졌다.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한데.“

초조한 듯한 설이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멀게 느껴졌다. 아직이라니, 무슨 시간이 필요한 거지?

몽롱한 머릿속에 의문이 들었다가 무의식의 밀물에 쓸려가며 다시금 사라졌다.

폭신한 침대 위에 몸에 뉘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취할 때까지 마셔본 게 얼마만이냐. 온 몸이 시트 위에 가라앉는 것 같은 기분이 만족스러웠다.

나한테 처음 술을 가르쳐준 것은 편의점 사장님이셨는데, 그때도 절제하면서 취하기 전까지만 마시라고 배웠기 때문에 취기가 들기 시작하면 더 마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를 말리는 사람도 없었을뿐더러 우리 설이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안주거리 삼아서 마시니까 술이 너무 달아서 혀에 착착 붙는 느낌이었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었다.

우리 설이가 좀 귀엽고 좀 멋있어야지.

"뭐가 그렇게 좋다고 웃어.“

내 뺨을 툭 건드리는 손길과 함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꿈인지 아니면 현실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취했지만, 어쨌든 내 곁에 설이가 함께 누워 있는 기분이 들어서 나는 마냥 행복했다. 

내 뺨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사라지더니 등허리를 쓸어주었다. 부드럽고 기분 좋아서 점점 더 깊은 잠에 빠져들어갈 때쯤, 그 간지러운 손길이 점점 내려와서 내 허리춤 사이로 들어갔다.

어어, 거기로는 가면 안 되는데…… 청바지와 내 속옷 사이에서 간지럽게 방황하던 손가락이 내 맨 살로 파고들어서 허리와 엉덩이 골이 이어지는 부분을 손톱 끝으로 갉작거렸다.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어서 옆으로 몸을 돌리며 나는 항의하듯이 그러지 마, 하고 말했다. 그러나 잠결이어서 입술이 움직이지 않고 웅얼거리는 소리가 나오는 것 같았다. 

내 입술 위에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이 쪽, 닿았다가 떨어졌다.

“왜, 싫어?”

간지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고, 그 숨결이 귀 끝에 닿아서 어깨를 파드득 떨자 작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싫다기 보다는… 싫은 건 아닌데…… 이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표현하려는 말이 잘 안 나오자 얼굴이 찌푸려졌다.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내 미간을 부드럽게 문지르는 손길이 기분 좋아서, 나는 다시 평온하게 숨을 내쉬며 몽롱한 기분에 취했다.  

내 엉덩이와 포근한 이불 사이에 깔린 휴대폰이 진동하는 게 느껴져서 억지로 눈을 떴지만, 다시 눈이 스르르 잠겼다. 내 등줄기를 쓸고 있던 손가락이 바지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가는 걸 느꼈다.

휴대폰 진동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길 반복했다. 누군가가 내게 계속 전화를 걸고 있는 모양이다. 이 팀장님일까, 우정혁인가, 바쁜 일이면 받아야 하는데 도저히 눈이 떠지질 않는다.

“음…… 죽여버리면 딱 좋겠는데.”

설이가 그 다정하고 예쁜 목소리로 무서운 말을 중얼거리는 걸 보니, 이건 분명히 꿈이다. 원래 꿈이라는 게 현실과 반대되는 일이 일어나곤 하니까. 내 허리를 꽉 껴안은 설이가 내 머리꼭지에 입을 맞춘 채로 가까이에서 전화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 씨, 당신이 뭔데… …한테 왜 자꾸 전화하냐고 묻잖아. …뭐… 하는 건가? ……하, 재밌네. 어디 계속…… 봐. …테니까.”

귓불을 만지작거리는 뜨거운 손가락과 이마에 닿는 부드러운 입술, 싸늘한 목소리의 부조화가 내가 있는 곳이 꿈속이라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게, 우리 설이는 수줍음이 많아서 타인과 이야기를 오래 나누지 못해서 그렇지, 남에게 함부로 나쁜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렇게 옷 속으로 들어와서 아랫배에서부터 가슴을 끈질기게 만져대는 농밀한 촉감의 손가락이 우리 설이 것일 리가 없으니까.

안 돼…… 그렇게 만지지 마……

술기운에 딱딱해진 내 젖꼭지를 잡아 비트는 손길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잠결에 내 목에서 나오는 소리는 고작해야 신음에 가까운 숨소리 정도였다.

“으응… 흐……”

하아, 뜨거운 한숨이 귓속으로 느껴졌다. 겨우 내 옷 속에서 빠져 나온 뱀 같은 손길이 이내 내 등을 토닥거리며 일정하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내가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까.”

목덜미에 닿는 작은 진동 같은 그 목소리가 질문으로 끝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 의미를 알기에는 의식이 몽롱했고 대답을 하기엔 지나치게 졸렸기 때문에 그대로 잠에 깊이 빠져들었다. 날 껴안은 손바닥이 이상할 정도로 뜨겁다는 것이, 잠들기 전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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