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한설이 가장 원하는 것
"어떡하죠? 저… 한설 배우님한테 반말해야 돼요…."
제이가 덜덜 떨면서 시나리오를 쥔 채로 나를 올려다본다. 제이는 연습생 때부터 꾸준히 연기 수업도 받아온데다가 아역배우로 하이틴 드라마에 잠깐 출연한 경력도 있다고 하는데,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반면에 설이는 주연 강도우와 독대하는 장면에서도 편안한 표정이었다. 배우나 감독, 그 누구와 대화를 나눠도 무덤덤해 보였다.
"저 계속 NG내면 어떡하죠? 한설 배우님이랑 친한 척해야 하는데 어떡하죠?"
"어차피 둘이 한 살 차이 아니야? 편하게 해, 제이야."
내가 알기로 우리 설이가 열아홉, 제이는 열여덟이다. 학교에서 만났으면 설이가 제이보다 선배였겠지만, 연예계 데뷔로 따지자면 제이가 선배다. 촬영장 내에 십대 배우는 딱 둘 뿐이라서, 둘이 친하게 지내면 좋을 것 같다는 건 내 생각일 뿐인 모양이다. 둘 다 착해서 잘 맞을 것 같은데.
"근데요, 준이 형. 한설 배우님이랑 아는 사이에요?"
"아……뭐… 음……"
"좋겠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비슷하네요?"
"그, 그렇네."
우리 형제는 외자 돌림이거든.
제이는 순수하게 빛나는 눈빛으로 계속 설이를 쳐다봤다. 다른 명배우들도 많은데, 아무래도 설이에게 꽂힌 모양이었다. 사실 광고 영상 속에서도 멋지지만, 설이를 실물을 보고 나면 반하지 않을 수가 없다.
"형, 저 이제 니키 그 새끼 안 좋아하려고요."
"어?"
여전히 멀리에 있는 설이에게 시선을 둔 채로 제이가 조용하게 말을 이었다.
"그 새끼는 정말 여자를 너무 밝히고… 정신도 못 차리고…"
"아, 니키 이번에는 열애설 인정했더라?"
"네. 빼박 증거가 있어서……"
제이가 씁쓸한 눈길로 나와 눈을 맞추곤 쓰게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동경의 눈빛으로 턱을 괜 채 설이에게 시선을 보냈다.
"전 이제, 한설 배우님에게 제 마음을 걸어보렵니다."
"…어? 진짜?"
"네, 그리고 저분도 아까부터 자꾸 이쪽을 쳐다보시는 게, 저한테 조금 관심 있으신 것 같아요."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는 제이의 표정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차마 설이와 계속 눈이 마주치는 게 나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설이는 촬영 중간중간 쉬는 타임마다 눈으로 나를 찾아서는, 나와 제이가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가늠하는 듯 가늘게 뜬 눈으로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제이가 목소리를 더 낮추며 내가 귓속말했다.
"근데 그거 아세요? 한설 배우님, 사실 엄청난 명문가 자제래요. 소문에는 HS그룹 회장 증손자라는 말도 있대요. 사실 연예인은 취미 생활로 하는 거고, 나중에는 가업을 이을 건데 HS가 엔터 사업 확장하려는 큰 밑그림이래요. 이거, 찌라시로 안 거라서 거의 확실한 정보에요."
"그… 그렇구나."
내 동생이 워낙 부잣집 도련님같이 귀티가 흐르는 외모다 보니까 별 소문이 다 난다.
"그리고요, 수상 소감으로 '사랑해, 형.'이라고 말한 게 사실은 본인 형한테 하는 말이 아니래요."
"그, 그럼?"
"소문에 의하면 한설 배우님은 외동아들이라 형은 없고요, 연상의 애인이 있어서 애인한테 하는 말인데 들키면 안 되니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래요. 사실 누가 봐도 사랑고백 같았잖아요?"
"그랬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제이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속삭였다.
"근데 그 연상의 여자가 윤여린 선배님이래요."
"엥?"
"윤여린 선배님께서 예전에 스윗지로 활동하셨잖아요. 그때부터 사귀었대요."
"……그러려면 적어도 열여섯, 열일곱쯤이라는 건데?"
"그러니까요. 오래 만난 거죠."
내가 알기로 그루 엔터 소속 배우 윤여린과 설이는, 지난번 특수촬영장에서 처음 만나서 인사를 나눈 사이였다. 연예인이 되면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기도 하는 구나.
"이재희 님! 이재희 배우님!"
드디어 무한 대기 중이던 제이를, 퍼스트 조감독님이 불렀다.
수다 떠느라 긴장이 풀렸는지 제이는 '제가 말한 정보, 다 비밀이니까 형만 알고 있으세요!' 하고 당부하고 떠나갔다. 비밀이고 뭐고, 제이와 귓속말을 나누는 나를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는 저 배우 한설에 대한 그 모든 뜬소문에 나는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제이의 대사는 "야, 너 어디가?" 와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 있냐?" 가 전부였지만, 정말 계속해서 NG를 냈다. 극중에서 힘든 일을 겪었는지 창백하고 싸늘한 얼굴의 설이가 지나갈 때 제이가 설이를 붙잡고 대사를 해야 하는데, 설이의 팔을 붙잡는 제이의 손이 덜덜 떨고 있거나 대사의 타이밍이 어긋났다.
감독이 한숨을 내쉬고, 조연출 감독 중 한 명이 다가가서 조언했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스텝들이 주변 배경을 재정비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잠깐 5분 정도 쉬는 타이밍이었다. 나는 얼른 다가가서 빨대를 꽂은 생수를 제이에게 건넸다. 그런 나를 옆에서 흘금 보고 있던 설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나도 목마른데."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설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 우리 설이가 목마르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설이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나뿐인 모양이다. 정말 통탄할 일이다.
아니, 대체 신 엔터 사람들은 뭐 하는 거야? 애가 목말라서 힘들어하고 있는데, 우리 가여운 설이는 물 한 모금도 못 마시고!
바짝바짝 애가 타서, 설이에게 뭘 먹여야겠다는 생각에 아이스박스 쪽으로 쪼르르 달려가는데 아까 봤던 설이의 매니저가 카페 캐리어를 들고 나타났다. 그 여자 매니저가 캐리어에서 꺼내서 설이에게 건네는 건, 새까만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애한테……!"
"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무슨 볼일이냐는 듯 돌아보는 여자 매니저와 눈이 마주쳤다.
"……아, 아뇨. 아직 미성년자인 배우 분께 커피를 드리는 건 좀…… 카페인은 몸에 좋지 않잖아요. 하하."
"음, 네에."
여자 매니저는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듯한 표정과 네가 무슨 상관이냐는 눈빛으로 날 본 뒤, 등을 돌렸다. 빨대를 꽂은 아메리카노 테이크 아웃 컵이 결국 설이의 손에 쥐어졌다.
“저기요!”
나는 목소리를 높여서 다시 그 여자 매니저를 돌려세웠다.
"그, 그것보다는 주스를 드리는 건 어떨까요. 마, 마침 제가 포도 주스를 갖고 있는데, 어, 왠지 우리 한설 배우님 좋아하실 것 같고……"
과즙 100%가 들어간 유기농 주스 팩으로, 내가 어릴 때부터 가끔 설이에게 먹이던 것이다. 당연히 설이는 늘 이걸 잘 마셨고, 그 중에서도 특히 포도 맛을 좋아했다. 얼떨떨한 표정의 여자 매니저는 내가 내미는 것을 안 받기가 뭐했는지 포도주스를 건네 받으며 감사합니다, 하고 어색하게 인사했다.
꺼내는 김에 복숭아 맛 주스 팩도 있어서 제이에게 주려고 꺼내두었다. 아직 조연출과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제이를 기다리느라 복숭아 맛 주스 팩을 든 채로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나를 빤히 바라보던 설이가 내 쪽에 시선을 둔 채로 여자 매니저에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 저것도, 지금 저분이 들고 계신 것도 내가 마시고 싶어요."
여자 매니저는 설이의 요구에 복숭아 맛이 좋은 거냐며 당장 사람 시켜서 사오겠다고 설이를 달래는 것 같았지만, 입술이 비죽 나온 설이는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이렇게 예고 없이 땡강 피울 때의 설이를 잘 알았다. 뒤돌아서 설이 쪽에 다가가 복숭아 맛 주스 팩도 고스란히 넘겨주었다.
"아, 저기, 정말… 죄송하게 됐네요."
이런 일이 여태 없었는지, 여자 매니저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녜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비록 제이 몫의 주스가 없어졌지만, 설이 입에 들어가는 거라면 사실 뭐든 다 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복숭아 맛 주스 팩에 빨대를 꽂아 어느새 쭉 빨면서 설이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히 포도 맛 주스 팩도 손에 꼭 쥐고 있다.
"저는 한설 배우 총괄 매니저, 신정아라고 합니다."
손을 내미는 신 매니저와 악수를 하며 통성명을 이어나갔다. 알고 보니 꽤 서글서글하고 성격 좋은 사람인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설이가 주스를 다 마시고 빈 팩을 버릴 곳을 찾고 있기에 얼른 손을 뻗어서 내가 빈 팩을 가져갔다. 그리고 주머니에 넣어둔 손수건을 꺼내 설이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설이는 내 손수건을 가져가는 대신, 자연스럽게 내 쪽으로 턱을 내밀었다. 나는 손수건으로 설이의 입가를 꼼꼼히 닦아냈다. 누구 동생인지 어쩜 이렇게 예쁠까 하며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자, 신 매니저가 놀란 말투로 혼잣말을 했다.
"별일이네. 스타일리스트가 얼굴에 손 대는 것도 그렇게 싫어하시더니……."
우리 설이가 남 손을 잘 안 타는 성격이기는 하죠.
어릴 때부터 하도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경계심을 길러주려고 했는데, 그게 이제는 아예 설이의 성격이 되어버린 것 같다.
"촬영 재개합니다!"
설이가 다시 중심으로 불려갔다.
조언을 들은 덕인지 제이는 떨거나 대사를 씹지 않고 제대로 촬영을 해냈고, 감독도 만족한 것 같았다. 서늘한 눈빛의 설이가 그 장면의 분위기를 제대로 살렸기 때문에 제이는 대사 한 마디를 더 얻어서 촬영이 더 길어졌다.
"신인 같지가 않네요."
김수희 매니저님이 내 곁에 팔짱을 끼고 선 채로 중얼거렸다.
"첫 작품인데다가 스케일이 크고, 역할 비중도 작지 않아서 신인이라면 이럴 때 떨지 않는 것만도 어렵거든요. 그런데 저 배우… 배짱도 좋고 재능도 있네요. 게다가 독보적인 마스크까지…… 크게 되겠어요."
캐스팅 매니저로 시작해 오래 일해왔다는 김수희 매니저의 공신력 있는 칭찬을 듣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졌다.
사실 설이가 여태 공부만 해와서 그렇지, 요리며 청소며 집안일도 끝내주는 데다가 운동신경도 좋아서 체육대회 때만 되면 종목마다 설이 데려가려고 쟁탈전을 벌였다는 소문도 있었다. 머리 좋은 우리 설이가 진심으로 연기를 하면, 명배우 자리는 따 놓은 당상이다.
"이 팀장님이 왜 그렇게 목을 매는지 알겠네."
김수희 매니저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잘 해봐요, 하고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나는 스파이였다. 제이의 매니저인 척하고 이 현장에 들어와서 설이를 신 엔터에서 빼오는 것이 나의 역할인 것이다. 그것도 제이가 출연하는 씬을 촬영하는 기간 안에 미션을 끝내야 하는 것이니까 이제 내게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여태 넋 놓고 있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초조해졌는데, 하필이면 제이의 마지막 씬이 끝나버렸다.
"컷! S# 21로 넘어갑니다!"
제이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내 곁에 돌아왔다.
가까이에 본 배우 한설의 눈빛이 얼마나 멋졌는지, 슛 들어갔을 때의 표정 변화가 얼마나 드라마틱했는지, 피부 결도 너무 고와서 숨 쉬는 조각상인 줄 알았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컷이 떨어지고 나서 제이가 허리 숙여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말하자 설이가 '네' 하고 대답했다는 부분을 얘기할 때에는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보통 그럴 때에는 똑같이 수고하셨다고 말하면서 인사를 해줘야 하는 거 아닐까.
다행히도 제이는 그런 설이의 태도가 예의 없게 느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수고했고, 일단 쉬고 있다가 SNS에 올릴 사진 찍어서 컨펌 받자. 이따가 장면 더 끼워 넣어 줄 수 있는지 감독님이랑 얘기 좀 해볼 테니까 너무 긴장 풀고 있지 말고."
김수희 매니저가 제이를 내 곁에 앉히며 말했고, 제이는 빠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쉴 때 다른 배우 분들 연기하는 거 잘 봐둬. 도움 많이 될 테니까."
제이가 빠진 뒤에도 촬영은 이어지는 중이었다. 카메오이기 때문에 전체 대본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내용의 흐름을 알고 있는 제이의 말에 의하면, 지금 촬영 씬은 결정적인 장면이라고 했다.
주인공인 강도우가 친부모를 살해한 존속살해범이라는 것을 동생에게 들키는 부분으로, 영화 전체로 봤을 때에 반전에 속하는 내용인 것 같았다. 산속에서 증거를 발견해서 가지고 내려오던 동생 역의 설이가 형인 강도우와 마주치는 장면이었다.
모두가 숨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설이가 산에서 내려오는 입구 쪽에서부터 빠른 걸음으로 뛰어내려왔다. 정신 없이 나무로 된 다리를 건너다가 발을 헛디뎌 털썩 넘어졌다. 나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내며 입을 막았지만, 촬영장의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보기만 하고 있는 걸로 봐서는 넘어지는 행동까지 모두 연기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설이 무릎 찧어서 아프겠네, 하는 잡생각이 자꾸 끼어들어서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설이는 넘어진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지 않고 넋이 나간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겨우 나무 기둥을 쥐고 천천히 일어섰다. 얼굴과 목덜미가 온통 식은땀에 젖어 있고, 흰 교복셔츠의 군데군데가 산에서 나뭇가지에 긁혀 다친 것마냥 피로 젖어 있어서 그게 분장인 줄 알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기운을 잃은 듯 터덜터덜 다리 위를 걸어오던 설이 앞에 강도우가 서 있었다.
"늦게 다니지 말랬잖아. 길을 잃었나 해서…… 걱정했어."
다정한 강도우의 대사에 설이가 고개를 들어 강도우를 바라본다. 여태까지 함께 자라며 의지해온 친형이 부모님을 죽인 범인임을 알게 된 동생의 연기를 해야 한다. 그 순간 설이는 대사 한 줄 없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강도우를 바라봤다. 텅 빈 눈동자에는 눈물이 어렸지만 흐르지는 않았다.
충격과 두려움보다도, 여태까지 믿어왔던 형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동생의 눈빛은 소중한 걸 잃어 버린 사람의 허망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로써 장면은 끝이 났지만, 감독은 컷을 하지 않고 그대로 몇 분을 더 이어갔다.
설이의 눈에 고인 눈물이 떨어지기 직전에 감독은 격양된 목소리로 컷! 하고 외쳤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와… 하고 넋 나간 탄성을 내질렀고 감독이 박수를 치며 극찬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설이 중심으로 바뀌고 있었다. 강도우가 다가가서 설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뭔가 이야기했고, 일사 분란하게 움직이는 스텝들 사이에서 감독이 흥분한 목소리로 조감독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설이가 제 역할을 무척 훌륭하게 해내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뿌듯한 마음과 함께 설이가 내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이제 더 유명해지고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지면, 설이에게 주스를 건네거나 입을 닦아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내가 아니어도 전문가들이 설이를 잘 챙겨주겠지.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잠시 저녁 식사 시간이 주어졌다. 도시락을 싸오려고 했더니 김수희 매니저님이 그럴 필요 없다고 만류한 이유를 알겠다. 야외촬영인데도 불구하고, 푸드 트럭이 와서 뷔페 식으로 대량의 식사를 준비해 차려주었다. 배우들과 촬영 스텝들의 수가 많기도 했지만, 식사량은 그에 두 배는 더 되는 것 같았다.
잡채와 김밥부터 육회까지 없는 게 없을 정도였는데 제이는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면서 탄수화물이 아닌 반찬과 과일 조금을 거의 새모이만큼 떠와서 깨작거리며 먹었다. 내가 보기에는 충분히 마른 몸매인데다가 키에 비해서는 좀 더 쪄도 보기 좋을 것 같은데, 아이돌의 체중관리는 더 혹독한 모양이다.
"저는 체중 감량 때문에 그렇다 치고, 준이 형은 왜 이렇게 조금 드세요?"
"나 잘 먹고 있는데?"
"에이, 저쪽에 보니까 그릴에 구운 양고기 같은 것도 있던데요. 그런 것도 좀 팍팍 드세요!"
"괜찮은……"
"이리 오세요, 형. 제가 어디 있는지 알려드릴게요."
포크를 쥐고 있는 내 손목을 잡으며 제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등 뒤에 어느새 다가와 서 있던 설이가 내 손목을 빤히 내려다 보았다. 제이가 환하게 웃으며 한설 배우님! 하고 외쳤지만 설이의 시선은 내 손목에 박혀 있었다.
"……양고기는, 그 특유의 냄새를 한준 씨가 싫어해서 안 드시는 거 아닐까요."
설이는 차분하게 말하며 제이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끔뻑거리는 시선으로 제이가 아… 하고 말을 흐리는데, 설이는 매몰차게 제이를 무시하며 나에게 다가와 수줍게 접시를 내밀었다.
"한준 씨 좋아하실 만 한 걸로 골라 왔어요. 저랑… 같이 먹어요."
설이가 내민 접시 위에는 내가 좋아하는 제육볶음과 육회, 그리고 케이준 샐러드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 많은 음식 중에서 딱 내 취향에 맞는 것만 골라 담아와서는 고운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고 수줍게 웃는 얼굴이 너무 예뻐서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 때문에 땀과 피에 너무 젖어 있어서 샤워를 했는지 보송보송하게 마른 머리카락과 뽀얀 얼굴로 편한 셔츠를 걸친 설이의 모습은 내가 알던 평소의 설이 같았다.
벙 찐 얼굴로 옆에 서 있던 제이를 흘깃 바라보며 설이가 젓가락을 들다 말고 아, 하며 말했다.
"방금 정지철 선배님께서 오셔서 인사 드리고 오는 길인데, 배우님도 가셔서 얼굴 비추고 일찍 인사 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지금 트레일러 뒤쪽 세트 장에 계셔요."
"아아!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제이는 새모이만큼 먹던 것도 내던지고 설이가 말한 쪽을 향해서 냅다 달려갔다.
설이는 제이가 떠나고 나자 한결 부드러워진 시선으로 내 옆에 앉아 젓가락질했다. 우아한 손짓으로 육회를 집어서 내 그릇에 덜어주며 어서 먹어, 하고 속삭였다. 예전처럼 둘이 오붓하게 집에서 식사하는 기분이 들어서 가슴이 찡해졌다. 주변에서 흘깃거리는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설이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주변 모두가 투명인간이고 나밖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내게 시선을 둔 채로 식사를 이어나갔다.
"아, 여기 있었네."
신 엔터의 신정아 매니저가 설이를 보고 다가왔다가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내게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설이에게로 금방 고개를 돌렸다.
"식사 마치면 숙소로 들어가기 전에 감독님하고 잠깐 더 얘기해야 할 거에요. 일단 먹고 있어요, 내가 다시 올게."
"네."
설이는 얌전히 대답했다. 신 매니저는 내게도 맛있게 드세요, 하고 인사하고는 바삐 사라졌다.
아직 촬영 씬이 많이 남은 설이는 근처 숙소에서 자고 가는 모양이다.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제이와 함께 돌아가게 될 것이다. 제이의 촬영 분이 늘어났다는 소식도 없으니, 이대로 설이와 다시 멀어지게 된다.
지금은 이렇게 예전처럼 가까이 붙어 앉아 식사하고 있지만 이것도 곧 신기루처럼 사라질 일이라고 생각하니 급격하게 우울해졌다. 음식물이 목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포크를 내려 놓고,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생수를 몇 모금 삼켰다.
"저, 음…… 설아."
나지막이 부르자, 설이는 고개를 들어서 나를 마주봤다. 까만 눈동자에 긴장한 내 얼굴이 비쳤다.
"그…… 있잖아, 우리 회사 지하 식당에 이틀에 한 번 꼴로 특선 메뉴가 바뀌는데 되게 맛있다? 그게 저기, 신 엔터테인먼트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 우리 회사는 무료로 식사할 수 있어. 특히 삼계탕이랑 뚝배기 불고기가 되게 맛있어. 유기농 요거트도 매끼마다 같이 준다?"
내가 혼신의 힘을 다해서 그루 엔터의 자랑을 늘어놓는 것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설이가 피식, 작게 웃었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이가 말했다.
"좋겠다."
긍정적인 대답이었다. 먹힌 건가? 내 유혹이 제대로 먹혀 들어간 건가?
나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누가 들을 까봐 설이에게만 들리도록 조그맣게 속삭였다.
"설이 너…… 우리 기획사로 오, 올래?"
우리 설이는 착해서, 금방이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착하게 그러겠다고 대답해줄 것이다.
내 소망이 섞인 기대와 다르게 설이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생수를 열어 한 모금 음미하듯이 마셨다. 그 느린 동작에 애가 탔다. 바로 응, 하고 대답해주면 안 되나?
설이는 흐음, 하고 낮게 숨을 내쉬더니 다리를 꼬고 앉아서 내 쪽에 가깝게 턱을 괘고 나를 빤히 바라봤다.
"한준 씨."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설이가 씩 웃었다.
"내가 그루 엔터로 간다면, 뭘 해주실 건가요."
"……어?"
얼빠진 소리를 내는 내 얼굴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며 설이는 짓궂은 표정으로 눈가를 접으며 미소 지었다.
"어떤 특혜가 있을지 알고 싶은데요."
"아……"
생각 못한 설이의 반응에 나는 머릿속이 정지되어서 바보 같이 입만 벌린 채로 멈춰 있었다. 내 머릿속에서 조그마한 이하원 팀장이 툭 튀어나와서 '물 불 가리지 말고! 뭐든 준다고 하십시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하고 채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고뇌를 아는지 모르는지 설이는 무척 느긋한 동작으로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면서 내 표정을 관찰하다가 입을 열었다.
"정 그렇게 저를 데려가고 싶으시다면, 적어도 제가 가장 원하는 게 뭔지는 파악하셔야 할 것 같네요."
그렇죠? 하고 되묻는 목소리가 너무 달콤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재빨리 머릿속으로 설이가 원하는 것에 대해서 떠올려 봤지만, 이제 소속사도 생기도 인지도를 얻은 데다가 원래부터 나보다 가진 돈이 많았던 설이가 지금 원하는 게 뭔지를 생각해낼 수 없었다.
내가 대답을 내놓기를 잠시 기다리던 설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히, 힌트 좀……."
내가 간절한 표정으로 설이를 바라보며 힌트를 구걸하자, 설이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맛있는 식사 정도는 신 엔터테인먼트에도 있어요. 그러니까, 유일하게 그쪽에만 있는 걸로 유혹을 하셔야 되겠죠?"
오히려 더 알쏭달쏭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사실 나도 말단사원이기 때문에 그루 엔터테인먼트에 있는 독보적인 장점이 뭔지는 알 수 없었다. 미리 이하원 팀장에게 설이가 이적했을 시의 혜택에 대해서 상세히 물어볼 걸 그랬다.
후회막심인 상태일 때에 멀리서 누가 설이를 불렀다.
설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테이블 위에 주먹 쥐고 있던 내 왼손의 손등을 감쌌다가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허리를 숙여 내 귓가에 속삭였다.
"계속 고민해보세요. ……그래도 정 모르겠으면 내가 알려줄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