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질투는 나의 힘
"잘 들으세요, 한준 씨."
사뭇 진지한 표정의 이하원 팀장은 마치 특수부대 대원에게 미션을 설명하는 대장 같은 눈빛이었다. 덩달아 긴장한 나는 그의 말을 노트에 적을 기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준 씨는 일종의 스파이입니다."
"제가요?"
"잠복근무를 하는 형사라고 봐도 좋겠죠."
비장한 표정으로 안경을 밀어 올리며 이하원 팀장은 설명을 이어나갔다.
실제로 제이를 데리고 감독진과 배우들에게 인사를 돌리며 제이를 매니징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배우 담당 경력이 많은 매니저로 주 업무는 모두 그가 처리할 것이다. 결국 내게 분담되는 역할은 차량 운전이나 심부름 등의 잡일 보조이기 때문에 내게는 여유 시간이 생긴다.
"무조건 한설 씨 쪽으로 접근해서 유혹하세요."
"유, 유혹은 제가 무슨……"
이하원 팀장이 내 손을 꽉 잡았다.
"부디! 물불 가리지 말고 힘 써주십시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이 팀장님은 정말로 우리 설이가 엄청나게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전투적일 수가 없다.
나는 얼떨결에 동생을 유혹하는 미인 스파이 정도의 역할을 맡게 되었고, 얼마 후 이하원 팀장의 예상대로 조안율의 공석에 우리 설이가 들어갔다는 기사를 인터넷에서 읽을 수 있었다.
CF를 통해 얼굴을 알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되었던 슈퍼 루키 '한설'이 김조한 감독의 신작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로 스크린 데뷔한다. 한설은 이미 10대와 20대 사이에서 미모로 인기를 얻고 있는 신인 배우로서, 이번 작품을 통해 연기력을 확인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그는 방송 광고 페스티벌 CF스타상 신인 수상자로 선정되어 독특한 소감을 전해 화제가 되고 있다. 19일 CGP 방송 광고 페스티벌에서 한설은 관계자와 팬들에게 감사를 전하는 대신 '사랑해, 형.' 이라는 짧은 인사말로 소감을 끝내며 무대에서 내려왔다. 남다른 우애를 과시하는 한설의 소감으로, 그의 가족관계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며 SNS 검색어 순위에 '한설 형'이 올랐다.
이미 CF계의 블루칩으로 등극한 한설의 현재 광고 수입에 대해 전문가들은 10억 이상을 벌어들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아직 밝혀진 바가 없는 한설의 자세한 프로필에 대해 한설의 소속사 Scene entertainment는 여전히 비공개 중이며 영화 촬영이 끝나는 시점에 인터뷰가 공개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는 11월 개봉 예정이다.
기사 중간의 '사랑해, 형' 이라는 글자에 계속 내 눈이 맴돌았다.
사진 속에서 설이는 부드럽게 웨이브를 넣은 머리카락에 흰 니트를 입고 흰 면바지를 입어서 하얗고 복슬복슬한 강아지 천사 같다. 비슷한 기사를 여럿 찾았는데, 기사 내용은 복사 붙여넣기 수준으로 같았지만 기사마다 사진의 각도가 조금씩 다르고 설이의 표정도 미미하게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열다섯 장 정도의 사진을 모을 수 있었다.
저장한 사진들을 갤러리 안에서 확인하며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등 뒤로 누군가가 스윽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흠칫 놀라 뒤돌아보자, 눈을 가늘게 뜨고 내 휴대폰 화면을 노려보는 권영도 이사였다.
"어, 오셨습니까? 저 다음주부터는 장흥에 가는 일정이…"
"알아요. 하이레벨 제이 영화 촬영."
권영도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하며 나를 지나쳐 사무실 소파로 가 털썩 누웠다.
소속사 회장과의 식사 자리를 다녀온 참이었는데, 술도 마셨는지 낮부터 그에게서 양주의 묵직한 술내가 났다. 소파에 누워서 시나리오를 펼쳐 든 채로 읽고 있는 그의 얼굴도 술기운으로 불그스름했다.
"이사님, 이후에 스케줄 없으시면 집으로 모실까요? 좀 취하신 것 같은데."
"뽀뽀해주면 일어날게요."
"아…… 더 쉬고 싶으시면 저도 이쪽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권영도는 피식 웃더니 시나리오를 든 팔을 소파에 털썩 내리며 중얼거렸다.
"거절 한 번 정중하게 하네."
술이 많이 되기는 했는지, 느릿하게 소파에 일어나 앉는 동작이 굼뜨고 위태로웠다. 소형 냉장고에서 찬 생수를 꺼내 다가가 그의 손에 건네자 생수 병을 만지작거리며 투덜거렸다.
"……한설이 뽀뽀해달라고 하면 해줬을 거죠?"
당연하죠, 하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나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다. 보통 형제들은 우리처럼 살가운 사이가 아니며 우리처럼 자주 입을 맞추지도 않는다는 사실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권영도 이사는 이상한 오해를 하는 중이었다. 그의 앞에서 책잡힐 대답은 하지 않아야겠단 생각에 입술에 지퍼를 잠갔다.
그러나 권영도 이사는 대답 따위 듣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말 하면 내가 되게 가벼워 보이겠지만… 나 연애는 제법 해봤거든요."
처음 권영도 이사와 함께 일하기 전 예비지식을 얻기 위해서 검색해봤을 때, 권영도 이름 석자를 포털 사이트에 치자마자 가장 많이 접할 수 있었던 기사들은 전부 연애 기사였다.
정말 신기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과 연애설이 있었는데, 그 중 진실은 얼마나 될 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다른 연예인들보다 훨씬 연애 기사가 많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연상연하 상관없이 위아래로 열 살쯤은 거뜬히 뛰어넘었고, 성별도 국적도 제각각 이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인다는 듯 권영도 이사가 헛기침했다.
"뭐, 가십거리는 인지도에 비례하니까…… 알죠? 소문이 전부 다 사실은 아닙니다. 어쨌든, 연애 경력자로서 내가 눈치 챈 게 있는데 말이죠."
권영도가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췄다.
"한준 씨가 동생에게 갖고 있는 그 마음, 연애 감정입니다."
"……술주정이 특이하시네요."
권영도는 입술을 구겨 웃으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둘이 친형제 아니잖아요.”
“마, 맞는데요.”
“아아, 그래요? 그러면 한준 씨도 뭔가로 변신 가능합니까? 체격을 보면, 새하얀 말티즈 정도 되려나. 아니면 비숑입니까?”
“쉿! 누가 들으면 어쩌시려고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이사 사무실 안에는 권영도와 나 둘뿐이었다. 입안으로 쩝 소리를 내며 민망해서 뒷목을 긁적였다.
“두 사람은 친형제가 아니에요. 닮은 구석도 전혀 없고 말이죠.”
“그… 식성이라면 좀 닮았는데요. 피, 피부 하얀 것도… 머리카락 새까만 것도…”
“왜요. 눈 코 입 개수도 닮았다고 하시죠.”
어이없다는 듯 흘겨보는 권영도 이사의 반응에 할 말을 잃어서 우물쭈물 입을 다물었다.
권영도는 아이고, 술 취해서 몸이 무겁네, 하고 국어책 읽듯이 말하며 소파에서 일어나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리고는 내가 겨우 나보다 훨씬 큰 그의 몸을 지탱하자 기다렸다는 듯 내 어깨에 턱을 올리곤 두 팔로 내 등을 껴안아서 포옹하는 자세가 되어버렸다. 목 안으로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면서 그가 내 등짝을 손바닥으로 토닥토닥 두드렸다.
“아이고오, 미안합니다. 혼자 설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껴안아버렸네요.”
“……국민배우 맞으세요?”
내 의심에 권영도가 어깨에 올린 턱을 움직이며 킥킥대고 웃었다. 권영도에게서 양주 특유의 냄새와 함께 은은한 향수 냄새가 났다. 고급스럽고 독하지 않아서 기분 좋은 향이었다. 우리 설이에게서 늘 풍기는 비누 향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마음이 편안해지는 체향이다.
끈덕지게 들러붙는 것도 아니고, 그저 우정혁이 내게 가끔 어깨동무를 할 때 정도의 담백한 포옹이라서 그를 밀어내자니 너무 혹독하게 느껴졌다. 권영도는 느긋하게 숨을 내쉬면서 내 등을 꽉 끌어안았다가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내 어깨를 쥔 채로 마주 서서 말했다.
“한준 씨 은근히 카사노바 타입인 거 압니까?”
“제, 제가요?”
“밀어내지도 않고, 당기지도 않고… 그런데도 나는 자꾸 끌려가네.”
혼잣말처럼 기운 없이 중얼거린 그가 먼저 사무실 문을 열고 나섰고, 나는 차 키를 챙겨서 그를 따라갔다.
권영도는 오피스텔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잠들기 전, 잠꼬대 하듯 낮은 목소리로 내게 읊조리듯 조용히 말했다.
“한설은 당신에게 어쨌든 호적상 동생이고, 일반적인 형태의 사람이 아니고, 동성이기 때문에 어려운 존재에요. ……적어도 나는 동성이기만 하잖습니까? 장애물이 하나뿐인 내 쪽으로 와요. 잘 해줄게요.”
나는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려 들으며, 운전에 집중했다.
***
“이재희 님 촬영은, 지금으로서는 총 세 씬입니다.”
세컨드 조감독의 설명을 들으며 나와 제이는 숨을 죽여 고개만 끄덕였다.
막상 영화 촬영장에 도착하니, 세트의 규모가 어마어마하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모두 바쁘게 움직였다. 제이와 나만 빼놓고는 모두가 전문가였다. 제이와 나는 청심환을 반으로 나눠 먹은 상태였는데, 현장에 함께 온 김수희 매니저님께 그런 걸 배우에게 먹이면 어떡하냐며 잔뜩 혼난 상태라서 오히려 긴장과 기합이 더 들어간 상태였다.
“브레이크다운 시트 쪼개는 과정에서 좀 더 늘어난 건데, 슈팅 상황에 따라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더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그건 미리 말씀 드렸죠? 자세한 건 리허설 때……”
“감독님! 아트디렉터팀 연락 됐는데요!”
“아, 그래?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조감독은 인파 속으로 바람같이 사라졌고, 우리의 담임 선생님이나 다름 없는 김수희 매니저는 나에게 제이를 맡기고는 프로덕션 매니저라는 사람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어디론가 가버렸다. 연출 팀과 수많은 스텝들이 각자의 사명을 다하며 바삐 움직이는 사이에서 나와 제이는 덩그러니 남겨져서 눈만 깜빡이며 대기하는 중이었다.
제이는 ‘이재희’라는 본명이자 배우 활동 명이 적힌 간이의자에 담요로 몸을 만 채로 앉아서 눈만 굴리며 덜덜 떨었다. 간이의자와 담요는 물론 우리 쪽에서 챙겨온 소품이었다. 나는 거의 이삿짐 수준으로 벤의 트렁크와 좌석들을 가득 채워 왔는데, 상황에 따라 숙박을 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김수희 매니저님의 조언 때문이었다. 사실상 제이의 경우, 몇 씬을 찍느냐 보다 현장에 얼마나 오래 머물며 감독진과 눈도장을 찍어 인상을 남기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추워? 따뜻한 거 마실래? 커피, 녹차, 둥굴레차, 유자차 있어. 아, 코코아도.”
“와, 거의 별다방이네요. 준다방이 맞겠다.”
제이는 종이컵에 따른 녹차를 두 손으로 쥔 채로 날 올려다보며 겨우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그래도 형이 저랑 같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저 혼자였으면 울었을 것 같아요.”
누구 하나 우리를 신경 쓰지 않는 현장에서 낙동강 오리 알처럼 동동 떠서 우리는 서로를 의지했다.
그나마도 제이는 배우이기 때문에 이따금 세컨드 조감독이나 퍼스트 조감독, 조연출 팀의 부름에 왔다 갔다 바삐 불려갔고 의상을 맞춰보러 다니느라 바빴으니 결국 오리 알은 나 하나였다. 나는 제이가 없는 동안 제이의 물건들을 잘 맡아주는 것 이외의 쓸모는 없다고 봐야 했다.
이하원 팀장이 내린 ‘한설 유혹하기’ 미션이 없었더라도, 나는 현장에 도착해서부터 당연하게 눈으로 계속 한 사람을 찾아 헤맸다.
우리 설이 어디 있나… 머릿속에 계속 그 생각뿐이었다.
설이는 어릴 때부터 미아가 될 수 없었는데, 멀리에 있어도 그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다가 설이만의 아우라가 빛무리처럼 멀리까지 떨쳐왔기 때문에 굳이 설이를 찾아서 헤맬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둘러봐도 설이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아직 설이가 주변에 없다는 뜻이었다.
"저기, 죄송한데 혹시 배우 '한설'은 안 왔나요?"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묻자,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듯이 무표정으로 나를 지나쳐갔다. 한번 그렇게 무시 당하니까 누구한테 쉽사리 말을 걸 수 없어서 그냥 내가 두 발로 찾아 다니자고 결심했다.
영화 내용은 잘 모르지만, 어깨 너머 들은 바로는 스릴러물 같았다. 오늘의 촬영장도 별장과 그 뒤에 펼쳐진 산속이었고, 추격 신이 있다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꽤나 어두운 분위기의 영화인 것 같은데 아직 미성년자인 우리 설이가 이런 영화에 출연해도 되는지 의문이다.
주말에 가끔 알바 자리가 펑크 나면 집에서 설이와 단둘이 영화를 봤었다. 그때마다, 잔인하거나 야한 장면에서 내가 설이 눈가를 가려주곤 했다. 그렇게 곱게 길러온 설이가 첫 출연하는 영화여서 좀 더 밝고 행복한 내용이기를 바랐는데.
“어머, 왔다. 왔어.”
소품 팀으로 보이는 담당자들의 수런거리는 말소리에 나는 절로 표정이 밝아졌다. 설이구나! 이렇게 사람들이 들뜬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면 반드시 설이가 등장했다. 기쁜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자,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배우 하나가 거대한 조명 아래서 감독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설이가 아니네.”
주연배우인 강도우였다. 설이의 형 역할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마도 주인공인 모양이다. 허탈한 표정으로 강도우 쪽을 멀거니 바라봤다.
그래, 여기는 설이처럼 반짝거리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세계였지.
나도 강도우가 나온 영화는 본 적이 있다. 아마 무슨 상을 받은 유명한 작품이었던 것 같은데, 학교 시청각 실에서 시험 끝나고 할 일 없는 학생들을 모아놓고 영화를 틀어줬다. 그 영화에서도 강도우가 주연이었다.
확실히 잘생긴 이목구비였지만, 이미 그루 엔터테인먼트에 들어오면서 많은 연예인들을 봐와서 그의 외모가 딱히 놀랍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이십 평생 알고 있는 최고의 미모는, 이미 한 사람으로 정해져 있고 그건 넘을 수 없는 벽이다.
“누굴 그렇게 보는데.”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내 목덜미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발소리도, 기척도 못 들었다.
뒤돌아보자, 내가 그렇게 찾던 인물이 삐딱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삐친 것처럼 입술이 비죽 튀어나와있고, 하얀 얼굴에는 분을 발랐는지 평소와는 분위기가 좀 다르고 더 창백해 보이지만 메이크업 덕분에 묘하게 배우 분위기가 났다.
처음 보는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흰 하복 셔츠와 짙은 남색의 교복 바지 전반에 걸쳐서 누군가의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 순간 식겁했지만, 그게 촬영을 위한 의상이란 사실을 깨닫고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설이는 내 얼굴을 빤히 살펴보다가 내 시선이 머물렀던 강도우 쪽을 흘깃 바라봤다.
“……또 연상의 남자를 보고 있네.”
혼잣말하는 설이의 목소리에 짙은 질투가 묻어났다. 장난 치는 설이가 귀여워서 무슨 소리야, 하고 웃으며 습관적으로 설이의 뺨으로 손을 뻗었다가 아차 싶어서 등뒤로 손을 숨겼다.
주변에 보는 눈이 많다. 강도우를 향하던 시선들이 죄다 설이의 얼굴에 꽂혀 있는 게 느껴졌다.
“저기! 아! 안녕하십니까! 하이레벨 리더 제이라고 합니다! 배우 활동명은 이재희입니다! 마,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온 제이가 내 앞에 서더니 설이를 향해 우렁차게 인사했다. 주연 배우들과는 한참 전에 인사를 나눴는데, 설이는 지금 처음 만난 모양이었다. 제이는 연배 있는 명배우들을 대할 때보다 훨씬 활기 넘치는 표정으로 설이에게 바싹 다가갔다.
“저, 저… 팬입니다. 저 사파이드 워치랑 리볼리스 청바지도 샀어요. 처, 처음 CF 찍으셨던 음료수도 맨날 마셔요!”
설이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제이를 감흥 없는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감사합니다, 하고 작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내게 물었다.
“……한준 씨는, 이재희 배우님하고 같이 온 건가요.”
“아, 응. 아니! 아, 네에. 맞, 맞아요.”
어색하게 존댓말로 바꿔 대답하는 내 얼굴을 설이가 묘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까만 눈동자가 나를 담고 있다. 이런 얼굴일 때의 설이는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가 없다.
제이가 설이와 더 대화하고 싶은지 타이밍을 봐서 급히 끼어들며, 큰 소리로 말했다.
“맞습니다! 저 도와주시는 매니저 형인데, 엄청 다정하고 자상하고 착하셔요! 제 친형 같은 분입니다!”
설이는 무표정해 보이지만 한층 더 딱딱해진 눈빛으로 제이를 노려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래요. ……좋겠네요.”
제이가 네? 하고 되묻자, 설이는 순식간에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 표정에 잠시 놀랐다.
설이는 이런 식으로 웃는 아이가 아니었다. 이건 기쁠 때의 얼굴도, 내게 애교를 피울 때의 얼굴도 아닌, 내가 모르는 미소였다. 왜 설이가 웃는데 주변 온도가 내려간 것처럼 춥지?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헤헤거리고 있는 제이에게 설이는 웃는 얼굴로 조용하게 인사의 말을 건넸다.
“앞으로 잘 지내요, 이재희 배우님.”
다정한 그 인사가 잘 지낼 수 있으면 재주껏 잘 지내봐라, 하는 느낌으로 들리는 이유는 왜일까.
짧은 대화를 끝으로, 설이의 매니저인 것 같은 여자가 와서는 촬영장의 중심으로 설이를 데리고 가버렸다. 긴 머리카락을 동그랗게 동여 묶은 그 여자는 맵시 좋게 정장을 차려 입었고 높은 구두를 신었는지 설이보다 조금 작은 정도로, 나보다도 키가 컸다. 한 손으로는 설이의 팔을 잡고 반대편 손은 설이의 어깨를 감싸며 걸어가는 모습이 마치 설이의 보호자라도 되어 보인다. 누가 보면 설이 친 누나인 줄 알겠다.
“……뭘 저렇게까지 붙어 있어, 쓸데없이.”
혹시 저러다가 저 매니저가 설이한테 다른 마음 품는 건 아닐까? 어쩌면 벌써 설이에게 관심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자꾸 팔짱을 끼고 등을 쓰다듬는 것이다.
신 엔터테인먼트는 안되겠다. 아무래도 어떻게든, 설이를 그루 엔터테인먼트로 데려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