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 저 남자 집에서 자지 마요. (21/65)

21. 저 남자 집에서 자지 마요.

매끈한 가슴으로 흘러내리는 물기가 복근의 탄탄한 굴곡을 따라 미끄러졌다. 고르게 숨을 쉬어 흉곽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예술 작품으로 착각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몸매였다. 

나도 모르게 그 아름다운 몸에 시선이 가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설이…… 감기 걸리겠어!

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뭔가 덮을 것을 찾고 있는 사이, 스텝 하나가 크고 넓은 수건을 설이의 등에 걸쳐 주었다. 곧이어 작은 수건을 든 사람들이 설이의 머리카락을 비벼 말려주기 시작했다. 

내게서 시선을 거둔 설이가 유리관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는 감독으로 보이는 사람과 함께 화면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보며, 설이가 이제 사회인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강원도 산골에서 살던 시절에는, 설이가 아직 귀와 꼬리를 숨기는 것에 서툴러서 집에 누가 방문하면 바로 방안에 숨도록 교육시켰다. 그래서 예고도 없이 방문하는 이웃들이나 짐을 옮겨주는 우체부 아저씨의 발소리를 들으면, 설이는 바람처럼 사라져서 이불 속에 쏙 들어가 있곤 했다. 가끔 이불 밖으로 조그마한 꼬리 끝부분이 꼬물거리며 나와 있을 때는, 너무 귀여워서 한 입에 앙 물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겨우 참아야 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가족 외의 타인과 인사를 나누는 것조차 서툴던 아이였는데. 이제 감독과 의견을 나누면서 이따금 작게 웃기도 한다.

그런 설이의 모습이 신기해서, 내가 너무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준 씨, 뭐해요? 이쪽으로 와요."

내 팔을 잡아 끄는 권영도에게 이끌려 걸었다.

“……”

등 뒤가 따가웠다.

흘깃 돌아보자, 설이와 눈이 마주쳤다. 

물속에서는 파란 렌즈를 끼고 있었던 건지, 렌즈 한 쪽을 빼내던 설이가 양쪽의 색이 다른 눈동자로 이쪽을 쏘아보는 시선이 묘했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듯 살짝 찌푸린 미간에 흠칫했다.

아직 내게 화가 안 풀린 상태에서 날 만난 게 싫은 걸까.

설이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권영도와 윤여린이 앉아 콘티를 보며 조감독의 설명을 듣고 있고, 나는 짐 정리를 하면서 설이가 있는 뒤쪽에 신경을 두고 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설이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고 싶은데, 좀처럼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오랜만에 가까이에 설이가 있다는 생각에 집중이 흐려져서 자꾸만 손이 물건을 헛짚었다.

스텝 하나가 달려왔다.

"배우님, 유리관 산소통 정비하는데 10분 정도 소요 예정입니다."

그 곁을 지나가던 다른 스텝들이 물에 젖은 소품들을 옮기며 잡담하는 소리가 들렸다.

"근데 진짜 신기하지 않아? 저 사람, 한설.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숨을 참지."

"그러게. 폐활량이 잠수함 수준이던데. 사실은 인어 아니야?"

설이 이름이 나오면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그쪽을 향해 눈길이 갔다. 

멍하니 설이 이야기를 귀동냥으로 듣고 있으려니, 권영도 이사가 손가락을 부딪혀 딱! 소리를 냈다. 반사적으로 쳐다보자, 손짓을 까딱거리며 나를 불렀다.

……내가 자기네 집 진돗개라도 되는 줄 아나. 

짜증이 나서 입술을 비죽거리며 다가가자, 권영도가 내 귓가에 손바닥을 모아 댔다.

"이제부터 연기로 키스할 텐데, 진짜랑 어떻게 다른지 잘 봐요. 진짜 쪽은, 오늘 밤에 제대로 다시 알려줄 테니까."

"아, 저기… 굳이 차이점을 알고 싶지는……"

윤여린이 어머, 하고 손뼉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설 씨죠? 처음 뵙겠습니다, 윤여린입니다."

설이가 어느새 내 등 뒤로 다가와 있었다. 맨 가슴에 긴 가운을 걸쳤지만 머리카락은 아직 덜 말랐다. 

애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여기는 드라이기도 없나.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런데 나보다 설이의 표정이 더 굳어 있었다.

“……”

나와 권영도를 빤히 바라보던 설이가 천천히 뒤돌아 윤여린과 인사를 나눴다. 윤여린을 비롯해 그 옆에 붙어 서서 반짝반짝 호의적인 눈빛으로 설이를 올려다보고 있는 여자 스텝들의 시선만으로도 설이가 지금 얼마나 대중의 이목을 끄는 중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고작 광고 몇 편 찍었을 뿐인데 벌써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는 설이가 자랑스럽기도 하면서 어쩐지 내 것을 빼앗긴 듯한 못난 마음도 들었다. 설이는 내 동생일 뿐이지 내 소유물은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 나쁜 마음이 드는 걸까.

권영도가 씩 웃으며 설이 쪽으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이렇게 또 보게 되네요."

여유로운 미소로 권영도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이제는 후배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한설 후배님, 활약 잘 보고 있습니다."

설이는 권영도의 웃는 낯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심히 불쾌해하는 시선으로 빤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리며 감사합니다, 하고 작게 대답했다. 누가 들어도 형식적인 대답일 뿐, 권영도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게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내게 화가 나서 그럴 것이다.

"촬영 들어갑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외침에 권영도와 윤여린은 그럼, 하고 살짝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는 스텝이 이끄는 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들과 함께 온 팀원들이 모두 따라갔다. 나도 이제 그쪽으로 가야 하지만, 설이와 단둘이 남게 되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설이는 날 쳐다보지 않고 바닥을 내려다보며 우뚝 서 있었다. 

입이 바짝 말랐다. 지금이 아니면, 설이에게 말 걸 기회는 없다.

"저, 저기…! 설아.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는 거지? 거기 지낼 만 해? 집에는, 안 와……?"

내 목소리에 이끌리듯 설이가 고개를 들었다. 

나를 담은 까만 눈망울이 여전히 내가 아는 어린 내 동생 한설이다. 습관적으로 설이를 껴안기 위해서 팔을 뻗는데, 나보다 설이가 한 발 더 빠르게 움직였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난 것이다. 그 바람에 허공에 뜬 손을 멈칫, 들고 있다가 힘없이 내렸다.

그렇지, 남들 앞에서 껴안는 건 이제 안 되겠지. 애도 아닌데. 이제 연예인인데…….

설이가 고개 숙인 내게 손을 뻗어 덥석,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반지를 낀 내 왼손을 만지작거렸다.

"반지가 잘 어울리네요, 한준 씨."

"……어?"

내가 잘못 들었나. 설이가 나를 형이라고 부르지 않고 한준이라고 부른 것 같은데.

멍한 얼굴로 설이를 올려다봤다. 가지런한 속눈썹을 내리깐 채 설이는 여전히 내 손가락을 만졌다. 

그리고는 내 손가락 사이에 제 손을 끼어 깍지를 끼었다. 어릴 때 같아서 마음이 뭉클해졌다. 

설이가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촉촉한 눈망울이 꼭 어린 사슴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남자 집에서 자지 마요. 일주일에 5일은 저쪽 집에 가는 것 같던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아니, 저기, 설아. 왜 존댓말을……?"

당황해서 쳐다보자 설이가 입 끝을 올려 웃는다. 눈가를 살짝 접어서 눈 밑의 살이 도톰해졌다. 

개구쟁이 같은 표정이다. 장난을 치고 있는 건가?

주변을 둘러보자 사람들이 흘깃거리며 지나가는 게 보였다. 어쩌면 아직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형이라는 걸 알리지 않아서 타인인 것마냥 존댓말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신비주의 컨셉, 뭐 그런 회사 방침 때문이라면 어쩔 수 없지.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저, 설아, 너 집으로 들어올 생각……"

"지금은 안 돼요."

내 손을 놓아주며 설이가 미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손에 잡힐 듯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작은 금붕어처럼 설이는 내게서 조금 물러섰다. 다시 다가가서 그 손을 꼭 잡고 싶은 것을 참느라 주먹을 쥐었다. 목이 타서 침을 삼켰다.

"왜… 왜……?"

설이는 비밀을 말하듯 내 쪽으로 천천히 몸을 숙이며 내 귓가에 입술이 닿을 듯 가까이 속삭였다.

"내가 곧 데리러 갈게요. 그때는, 전부 다 가질 거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을 새도 없이 설이는 나를 한 번 더 바라보고는 미련 없이 뒤돌아서 걸어갔다.

훌쩍 커버린 설이의 등이 멀어져 가는 걸 바라보면서 나는 아쉬움에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결의에 찬 까만 눈동자를 보니 얼른 집에 돌아오라고 혼을 낼 수도 없었다. 이제 설이는, 정말로 어린아이가 아닌 모양이다.

"왜 이렇게 조용해요?"

"아… 운전에 집중하느라 그랬나 봅니다."

설이 생각에 빠져 있던 도중이라 그런지 목소리가 잠겼다.

매니저 형들까지 모두 보내고, 권영도와 함께 권영도의 오피스텔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내가 대부분 그의 오피스텔에서 묵고 있기 때문에 스케줄이 끝나면 이렇게 단둘이 돌아가는 때가 많았다. 로드 매니저 김형은 내가 들어와서 일이 한결 편해졌다고 기뻐했다.

"이제 그렇게 집중 안 해도 운전 잘 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다 맡기지."

권영도가 소유한 것 중에 그가 아끼는 축에 속하는 페라리 로마의 핸들을 쥔 채로 나는 살짝 웃었다. 처음에는 비싼 차를 운전한다는 생각에 바들바들 떨었지만, 내가 아무리 차 키를 반납하려고 해도 권영도가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일하기 위해서 차량이 필요하니까 에라 모르겠다 식으로 끌기 시작했다. 이제는 외제차나 소형 국산 차나 모두 똑같게 느껴졌다. 어차피 모두 내 것도 아니고.

권영도는 조수석에 앉아 흐음, 하고 내 옆얼굴을 살펴보더니 체어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한준 씨 동생은 대체 정체가 뭡니까."

"설이… 우리 설이요."

"네. 한설. 그 남자 말입니다. 느닷없이 데뷔하지 않나, 친형을 그렇게 대놓고 소유욕 담긴 눈으로 쳐다보질 않나."

권영도는 눈을 감고 잠꼬대하듯 중얼거렸다.

"……표범 같은 걸로 변하는 걸 보니, 사람은 아닌 것 같고."

끼이익!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나와 권영도의 머리가 앞으로 튀어나갔다가 되돌아오며 카 시트에 뒤통수를 통! 부딪혔다. 도로가 아니라 오피스텔 주차장으로 이미 들어온 상태였고, 앞 뒤로 차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다, 다치진 않으셨죠? 괜찮으세요?"

권영도는 뒷목을 잡으며 아이고- 길게 곡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고개를 양 옆으로 가볍게 비틀어보고는 씩 웃어 보였다.

"내가 뭐 그렇게 대단한 비밀을 말했다고, 브레이크 부술 정도로 놀랍니까."

제가 평생을 숨겨 온 엄청난 비밀인데요. 

나는 놀란 눈으로 권영도의 표정을 살폈다. 분명 권영도가 '표범'이라는 단어를 내뱉었다. 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려는 듯 권영도가 나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한설, 그 남자. 짐승으로 변하잖습니까. 새하얀 표범."

"이……이사님……그, 그럼… 그날…… 봤, 보셨……?"

"허!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걸, 한준 씨도 이미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권영도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흐트러뜨렸다.

"와, 내 생각보다 훨씬 둔하네요. 그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내 협박에 넘어왔지?"

“아… 어… 저기…”

권영도가 석고상처럼 굳은 나를 운전석에서 쫓아내고 스스로 운전해서 전용 주차석에 차를 들여놨다. 

차 키를 누르며 주차장 가운데로 걸어오는 그를 보며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권영도가 나를 지나쳐 엘리베이터로 향하면서 등뒤로 내게 말했다.

"어디 발설할 생각 없으니까 걱정 붙들어 매요."

눈치를 보며 엘리베이터 앞까지 그를 따라갔다.

"그런 것보다 내가 진짜 궁금한 건, 한준 씨가 나와 만나볼 생각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아……"

권영도는 뒤돌아 나를 바라보며 정장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진지한 눈빛을 했다.

"내 눈에 한준 씨는, 그 남자에게 마음이 있어 보이거든요."

"그 남자…… 누구요?"

권영도 이사는 진짜 모르겠냐는 듯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기울였다.

"한설이요."

"……네?"

황당해서 입을 벌린 채 잠시 가만히 있다가, 나는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이사님도 참, 설이는 제 동생인데, 무슨 말씀을!"

"아니라면 저야 좋죠."

"아니죠! 당연히 아니죠! 설이는 아직 애기에요."

권영도 이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야수로 변하는 백팔십의 덩치 큰 남자가 '애기'라……."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권영도 이사가 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자, 권영도는 옆자리 쪽으로 턱짓하며 안 타고 뭐해요? 하고 물었다.

"아, 저, 오늘 집에 가려고요."

"왜요."

"빨래도 밀려 있고… 냉장고에 상한 반찬들도 걱정되고……"

"내가 오늘밤에 제대로 알려주겠다고 한 것 때문이죠?"

권영도 이사가 씩 웃으며 물었지만, 나는 몇 초간 눈을 깜빡이며 멈춰 있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건가 곰곰이 생각하던 끝에 그제야 설이가 내 등 뒤에 서 있기 전에 권영도 이사가 귓속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아, 하고 소리를 내자 내 표정을 관찰하던 권영도 이사는 어깨에 힘을 뺀 채로 기운 없는 목소리를 냈다.

"것 봐요. 한준 씨는 이미 그 사람한테 신경이 온통 쏠려 있다니까."

"그건… 그냥, 동생이니까……"

"친동생에게 그렇게 집착하는 형은 없습니다. 물론 동생 쪽의 집착에 비할 건 아니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 공손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권영도는 내게 본인 차를 타고 가라고 했지만, 우리 동네에는 그렇게 값비싼 차를 댈 곳도 없었다. 영락없이 야외주차를 해야 하는데 요즘 비가 오는 날이 많아서 차마 밖에 둘 수 없어서 거절했다.

아니나 다를까, 일층 현관으로 올라오자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아… 나 우산 없는데."

내 혼잣말을 하늘이 들은 것처럼 빗줄기가 약해지더니 이내 그쳤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오피스텔 안으로 올라가서 권영도에게 우산이라도 빌릴 생각이었는데, 비 그치는 타이밍이 맞는 걸 보니 운이 좋았다.

권영도 이사에게 이미 설이의 비밀을 들킨 것은 예상 외의 일이었지만, 그래도 발설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가 믿음직스러운 성격이라서 라기보다는, 설이의 일에 크게 관심이 없는 듯한 태도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 마음의 짐은 덜어두었다.

버스에서 내려 동네 골목을 터덜터덜 걸어가면서 설이의 말에 대해서 생각했다.

'곧 데리러 갈게요. 그때는, 전부 다 가질 거니까.'

대체 그게 무슨 말이었을까.

설이가 갑자기 낯선 사람처럼 구는 건 무섭지만, 날 대하는 손길이나 눈빛은 여전히 부드럽고 다정해서 안심이 되었다. 아직까지 내게 화가 난 것은 아닌 모양이다. 

데리러 온다는 말은, 곧 집으로 돌아온다는 뜻으로 생각해도 될까? 

하지만 어딘지 어감이 달랐다. 게다가 전부 가진다니. 

"……뭘 전부 가진다는 거지?"

평소 물욕도 없고, 딱히 가지고 싶어하는 것도 없었던 아이가 갑자기 그런 말을 하니까 신경이 쓰였다.

"……내가 줄 수 있는 거라면 좋겠는데."

시무룩한 얼굴로 걸어가는 길목에 가로등 불빛이 나보다 한 발자국 먼저 하나씩 켜졌다. 마치 내가 걸어가는 길을 밝혀주는 것 같아서 포근한 기분이었다. 설이가 없는 집에 홀로 돌아가는 내 쓸쓸한 마음을 위로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설이 보고 싶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처럼 살랑거리는 밤바람이 현관문에 걸어둔 풍경을 가볍게 흔들었다.

수중에서 상체를 드러낸 채로 유유히 헤엄치던 설이의 촬영은 청바지 브랜드 광고였다.

여태까지 대표적인 하이틴스타를 내세우며 이미지화 해왔던 브랜드인 만큼, 설이의 인지도가 올라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며 이하원 팀장이 열변을 토했다.

요즘 나는 기획팀에 불려가는 일이 잦아졌다. 대부분 표면적으로는 그 용건이 그저 가벼운 커피 심부름이었는데, 막상 커피를 가져가면 이하원 팀장은 나를 붙잡아 앉혀두고서 설이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구구절절 하게 상세히 브리핑해주었다. 

사실 내가 궁금한 것은 설이가 잘 자는지 뭘 먹는지 하는 것들이었지만, 이하원 팀장은 ‘한설이라는 존재의 주가가 얼마나 높아졌는가’에 대해서 설명했다. 일단 나는 설이에 대한 이야기라면 뭐든 좋았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들었고, '우리 설이 진짜 대단하구나' 감탄하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하원 팀장은 안경을 손끝으로 추켜올리며 어느새 내 옆에 다가와 앉았다.

"그러니까 슬슬, 한준 씨 쪽에서 얘기를 꺼내보는 게 어떨까 싶네요."

"네? 얘기라면 어떤……"

심히 답답해하는 표정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이하원 팀장의 심산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눈치가 빠른 스타일은 아니었다.

"한설 씨 말입니다. 아무래도 형과 같은 기획사에서 일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아."

"혹시 위약금 때문에 주저하시는 거라면, 그건 차근히 풀어나가면 될 일입니다. 우리 쪽에서 그거 해결 못할 만큼 무능하지 않다는 거 아실 겁니다. 그리고 앞으로 배우 생활을 할 생각이라면 우리 그루 엔터로 오시는 게 훨씬 더 탁월한 선택이 될 것입니다. 신 엔터는 한설 씨 같은 인재를 이끌어줄 역량이 아직은 부족하다고 할 수 있는 신생 기획사입니다. 여러모로 아무래도 우리 쪽이……"

"저기,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설이가 제 말을 들을 것 같지가 않아서요."

특히 요즘은 내 연락을 일체 받지 않는다는 말을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해서 입을 다물었다. 

설이에 관해서는 내가 제일 잘 알고, 내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걸 당연시하며 살아왔는데 요즘에는 자신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말하면, 설이가 청개구리처럼 반대로 할 까봐 겁이 났다.

"아니, 그럴리가요? 그렇게 우애 좋은 형제분이시면서?"

"……죄송합니다."

더 할말이 없었다. 이하원 팀장은 기운이 빠진 듯 소파 등받이 털썩 기대어 앉았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내 쪽으로 몸을 숙였다.

"이번에 김조한 감독의 새 영화가 나옵니다.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 후보에 올랐던 김조한 감독 아시죠?"

어쩐지 유명한 분위기라서 아는 척 해야 할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이하원 팀장은 안심하며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번 작품 크랭크 인 임박한 시점에서… 조연 자리에 캐스팅되어 있던 우리 쪽 배우 하나가 마약 혐의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조안율 아시죠?"

이번엔 분명히 알고 있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권영도 이사 쪽으로 오기 전, 배우 조안율의 로드 매니저로 들어갈 계획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조연이어도 김조한 감독 작품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인데다가, 주인공 동생 역할로 꽤 비중이 큰 역할입니다. 조안율은 이미 그 역할 하기에 나이가 좀 있지만, 그래도 동안이고 지난 분기에 끝난 미니시리즈로 한창 화제가 되는 시점이라서 어떻게 운 좋게 캐스팅이 됐던 건데…… 아쉽게 됐죠. 공교롭게 딱! 지금 기사가 터진 것도 참 아리송한 일이지만 말입니다.”

그 얘기는 됐고, 이하원은 손을 내저으며 제 말꼬리를 스스로 잘라냈다.

“지금 그 공석에 들어갈 가장 유력한 후보가 한설입니다."

"우, 우리 설이요?"

"네. 정보에 의하면 거의 내정된 상태라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설이가 영화에 나온다니, 너무 신기하고 꿈만 같아서 벌써부터 영화관 갈 생각에 가슴이 간질거렸다. 커다란 스크린으로 설이의 얼굴을 보게 된다면, 그 놀라운 미모 때문에 아마 관객의 반 정도는 심장에 무리가 올 것이고 나머지 반은 사랑에 빠져버릴 것이다. 나도 모르게 자꾸 입이 벌어져서 손바닥으로 입가를 가렸다. 아무리 설이가 잘 되는 게 기뻐도, 나는 그루 엔터 소속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이 기회입니다. 영화 촬영 후에는 아마 한설 씨를 데려가려고 다른 기획사들도 안달이 날 게 뻔합니다. 그러니까, 저희는 일종의 미인계를 써보자는 겁니다.”

“미, 미인계요?”

이하원 팀장은 은밀한 눈빛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한준 씨와 한설 씨가 같이 살지도 않고, 바빠서 서로 얼굴 볼 일이 없어지면서 사이가 소원해졌다는 건 저도 아는 사실입니다.”

“아… 네에.”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게 사람 심리죠. 그래서 저는 한준 씨를 한설 씨 곁에 붙여 놓을 생각입니다.”

이하원 팀장은 내 손에 차 키를 쥐어주었다. 스마트 키에 열쇠고리가 달려 있었는데, 원래 용도는 하이레벨 공식 굿즈로서, 에코백에 걸려 있는 커스텀 굿즈였다. 고로 이 차 키는 하이레벨의 벤인 것이다.

“비록 조안율이 작품에서 빠지게 되었지만, 거기 조감독하고 인연이 있어서 하이레벨 제이를 카메오로 넣어주기로 했거든요.”

“네에…”

“그 작품에 제이가 참여하는 동안, 제이를 한준 씨가 케어하는 걸로 합시다. 아직 한준 씨가 한설 씨 친형인 게 보도되지 않았으니까 제이 쪽 스텝으로 들어가서 은근하게 접촉하는 겁니다. 그렇게 한설 씨와 최대한 자주 마주쳐서 소속사 이적을 설득해주세요.”

“네?”

“저는 한준 씨의 능력을 믿습니다!”

이하원 팀장은 내 손바닥에 자국이 날 정도로 차 키를 꾸욱 넣어주었다. ……아, 정말 자신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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