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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동생 아닌 남자 (20/65)

20. 동생 아닌 남자

따사로운 햇빛에 물결이 반사되는 아름다운 해변, 모래 위에 한 청년이 앉아 있다.

청년의 옆얼굴에 포커스가 잡힌다. 섬세한 속눈썹과 어딘지 아득한 눈길, 깎아 내지른 절벽 같이 아찔한 콧날과 얇은 꽃잎 같으면서도 육감적인 입술. 혹시 그래픽으로 만든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청년이 입술을 살짝 벌려 한숨을 내쉰다.

하아-…

바닷바람이 그의 이마를 살짝 덮고 있던 검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올리고, 청년은 음료수 캔을 들어 한 모금 마신다. 그리고 부드럽게 미소 짓는다.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 당신의 위로가 되어 줄게요.'

화면에 이온음료의 로고가 찍히면서 광고는 끝난다.

"저… 저게 대체…… 서, 설이가……"

전광판을 올려다보던 나는, 장을 봐가지고 오던 비닐봉지를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인도로 사과 한 알이 도르르 굴러 가는데도 잡을 생각도 못한 채 입 벌리고 서 있었다. 내 곁에 멈춰선 여학생은 설이의 음료 광고가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휴대폰을 가로로 뉘여 전광판을 동영상으로 찍고 있었다.

그러니까 서울 한복판 강남대로 옥외 전광판에 전송되고 있는 저 음료수 광고의 모델이 내 눈에만 보이는 게 아닌 것이다. 정말 우리 설이가 연예인이 되어서 광고에 나오고 있었다.

그 뒤로 몇 번이나 광고를 봤지만, 그래도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한설 씨가… 저 마스크로 저렇게 웃기도 하는 군요……."

이하원 팀장은 배가 아픈 듯 아랫배를 감싸 안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실제로 이하원 팀장은 설이의 데뷔 소식 이후로 만성 위염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왠지 모르게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흰 죽을 쑤어다 주었다.

이하원 팀장은 내가 그루 엔터에서 일하고 있는 한, 언젠가 설이를 그루 엔터로 영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설이가 세상에서 가장 예쁘게 웃는 모습도 알고 있고, 설이가 연예계에 뜻이 전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는데… 설이가 데뷔해버릴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알고 있는 설이의 모습이, 한설이라는 아이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내게 못내 큰 충격을 주었다. 늘 얌전하고 말 잘 듣고 공부 잘하고 단 한 번도 탈선한 적이 없던 착한 내 동생이, 내게 어떤 상의도 없이 이렇게 큰 결정을 내렸다는 것에 밤새 잠을 못 이루는 요즘이었다.

게다가 설이는 아직도 내 연락을 받지 않고 있었다.

터덜터덜 권영도의 오피스텔로 올라가서 밥을 차리고 있었는데, 이하원 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준 씨, 지난 번에 말씀하신 거 알아봤는데요."

"아, 네!"

"확실히 서류상으로 한설 씨가 미성년자인 것은 맞지만, 계약 당시 보호자와 함께였다고 합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설이 보호자인데, 대체 누가…"

"정한위 님이라는 남자분이 함께 왔고, 보호자가 맞던데요."

"아."

외삼촌……!

이하원 팀장은, 미성년자인 설이가 어떻게 혼자 기획사와 계약을 맺었는지 모르겠다는 내 말에 신 엔터테인먼트에 딴지 걸 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했는지 눈을 빛내며 잽싸게 튀어나갔었다. 하지만 설이의 보호자가 나라는 생각에 갇혀 있었던 것은 나뿐이었다. 실재적으로 설이의 법적 보호자인 외삼촌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이런 식으로 확인 받고 나니 허망해졌다. 나는 설이의 형이자 부모가 되어 주고 싶었는데, 나로서는 역부족이었던 걸까.

"그리고 한설 씨는 몇 개월 후에 어차피 성인이 되기도 하고요, 계약상 문제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하원 팀장은 한껏 아쉬워하는 목소리로 전했다.

외삼촌에게 전화를 걸어 봤지만, 외삼촌은 설이가 당연히 내 허락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하고 계셨다. 설이는 연예계 활동을 하면서도 학업에 소홀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외삼촌을 안심시켰던 모양이다.

실제로 담임 말로는 설이가 시간 날 때마다 학교에 나와서 학업 일수를 채우고 있다고 했다. 대신 설이가 올 때마다 구경 오는 타 학교 학생들이나 다른 학년 아이들이 복도에 붐벼서 통제가 되지 않는다며 담임이 한탄을 했다. 결국 위쪽에서 지시가 내려와서, 시험 볼 때에만 찾아와 상담실에서 혼자 격리 시험을 치르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고 한다.

"준아, 아마 설이는 네 걱정보다 훨씬 더 잘 해나갈 거다. 준이 너는, 이제 네 생각만 해라."

외삼촌은 나를 따뜻하게 다독였다. 

여태까지 나 모르게, 설이가 외삼촌 앞으로 몇 번이나 돈을 보내드렸다고 했다. 외삼촌은 아직 어린 네가 무슨 돈이냐며 펄쩍 뛰셨지만, 그래도 설이는 꾸준히 외삼촌께 감사의 인사와 함께 소정의 용돈을 드렸고 설이가 티브이 광고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그 금액이 더 높아졌다고 했다.

"이제는 그 녀석이 제 앞가림도 하고 밥벌이하는 걸 봤으니까, 앞으론 다 받아야겠다."

외삼촌은 민망한지 웃으면서 그런 말을 했다. 여태까지 설이가 준 돈은 쓰지 않고 모아두었으니, 내게 찾아가라는 말도 말하셨다.

"그건… 삼촌이랑 가족 분들을 위한 돈이잖아요. 설이 마음이니까, 받아서 삼촌 쓰세요."

내가 모르는 설이의 모습이 생각보다 많았다. 나는 형이라는 놈이 여태 뭘 하고 있었던 걸까. 

설이 마음 하나 모르고, 설이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어떤 아이인지, 도통 아는 게 하나도 없다.

***

설이는 15초짜리 음료 광고 하나로 화제가 되었다.

설이가 화면 속에서 들고 있었던 그 음료가 동종업계 매출 1위를 찍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름 없는 신인 광고 모델에 대해 인터뷰하고 싶어 하는 매체들이 넘쳐났지만, 그 어디에도 설이는 출연하지 않았다.

"일단 시작은 신비주의 컨셉으로 가는 거죠… 정공법이네요, 그 자식들……."

이하원 팀장은 이를 갈았다. 여전히 그는 위염에 시달렸고, 나는 괜히 이하원 팀장의 눈치가 보였다.

권영도 이사는 집에서 쉴 때는 거의 티브이를 틀어놓는 습관이 있었는데, 내가 가사일을 하는 동안 티브이에 설이 광고가 나오면 "또 나오네요." 하고 나를 불렀다.

이미 몇 천 번도 더 봐서 픽셀 하나하나 눈에 새겨져 있었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걸레를 들고 혹은 국자나 튀김용 젓가락을 들고 거실로 도도도 달려갔다. 권영도 이사와 함께 설이의 광고를 보면서 나는 두 팔을 부들부들 떨었다. 전율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대체 누구 동생인데 이렇게 잘 생긴 거야? 어떻게 짧은 광고 안에서 이다지도 완벽한 눈빛 연기와 표정 변화를 보여줄 수 있는 거지? 알고 보니 우리 설이 연기 천재였네.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미인이란 게 바로 이 얼굴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 

바닷가 배경이나 얇은 물빛 셔츠도 너무너무 잘 어울려서 광고를 볼 때마다 숨이 멎을 것 같았는데, 유튜브 광고 영상 아래 달린 댓글들을 보니 이미 숨 멎은 사람이 몇 백 명이었다. 이런 식으로 설이가 인류의 반을 없앨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건 악당이나 하는 짓이겠지만, 어쩌면 설이는 악역도 잘 해낼지 모른다. 누구보다 천사 같은 아이지만, 그렇기에 악역을 맡는다면 또 엄청난 파급력이 있겠지.

"……한준씨, 광고 끝났어요. 어떻게 매번 그렇게 처음 본 것처럼 집중해서 봅니까?"

권영도 이사는 감탄하며 내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 그냥 신기해서요…….”

"하긴. 갑자기 동생 얼굴이 티브이에 나오면 신기하긴 하겠죠."

나는 다시 조용히 부엌으로 돌아가서 냄비 속 브로콜리 수프를 저었다. 권영도 이사는 생각보다 늘 가볍게 식사하는 편이었는데, 아마도 체형 관리를 위한 것인 모양이었다. 새로 작품 들어가기 전에는 샐러드로 식사를 때워서 내가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소파에 길게 늘어진 권영도 이사가 내 쪽을 향해 말했다.

"아아, 참. 이번에 하이레벨 제이로 거의 확정됐던 광고도 신 엔터 한설에게 넘어갔더군요."

"……그, 그렇습니까?"

"네. 스포츠 시계 브랜드 광고."

으아, 우리 설이 또 얼마나 잘 어울리려나.

국자를 왼손으로 바꿔 쥐고 오른손으로는 쿵덕거리며 뛰는 가슴 위를 꾹 눌렀다. 스포츠 시계 광고라니, 말만 들어도 상상이 되었다. 우리 설이가 또 스마트한 이미지가 얼굴이며 눈빛 전체에 퍼져 있어서 시계 같은 광고에 찰떡으로 잘 어울릴 게 뻔했다. 사정이 안 좋아서 값비싼 시계를 사준 적도 없었는데, 설이가 팔목에 차고 있으면 중저가 브랜드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빛나 보일 수가 없었다.

그 사람들은 어쩌면 그렇게 설이에게 딱 어울릴 광고만 선점했을까? 신 엔터테인먼트가 일을 잘하네.

“그러고 보면 한준 씨, 요즘 나 없어도 여기에서 자는 날이 많은 것 같던데.”

“아, 이사님이 그래도 된다고 하셔서…… 밤에는 집에 갈까요?”

눈치가 보여서 슬쩍 물어보니 권영도 이사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뇨, 난 한준 씨가 여기 있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집에 안 들어가도 동생이 뭐라고 안 하던가요?”

“아…… 네. 괜찮아요.”

웃으며 대답했지만, 정말로 내가 웃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설이는 내게 마지막 메시지를 남긴 뒤로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완전한 가출이었다. 

이하원 팀장에게 듣기로는, 신 엔터테인먼트 쪽에서 어떤 식으로 계약을 했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숙소도 제공하고 있을 거라고 했다. 그쪽에서 제대로 보호받고 있다면 안심이지만, 그래도 하루 이틀 뒤에는 설이가 집에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 설이는 집에 오지 않았고, 설이가 없는 집에 들어가는 게 싫어져서 권영도 이사의 집에 묵고 가는 날이 더 많아졌다. 권영도 이사는 퇴근했을 때 거실에 불이 켜져 있고, 내가 소파에서 티브이를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즐거워했다.

혼자 집에 쓸쓸히 남아 있는 일은 누구나 외로운 법이다. 그런데 나는 설이를 두고 외박했으니, 이런 벌을 받아도 싸다.

“흠. 그럼 동생하고 연락은 자주 합니까?”

“…….”

“그렇게 죽고 못 사는 형제 같았는데, 신기하네요.”

권영도 이사는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날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보내는 메시지에도 답장을 보내지 않고, 전화도 일절 받지 않으면서 설이는 내게 계속 꾸준히 돈을 보냈다. 설이가 나에게서 완전히 떠나가지 않았다고 믿을 수 있는 연결고리는 통장에 쌓이는 돈이 전부였다. 지금의 나는, 그걸로라도 위안을 삼는 중이었다. 

담임에게서 설이가 지금 학교에 있다는 제보를 받고 부리나케 학교로 달려가면, 이미 설이는 떠난 뒤였다. 마치 해와 달처럼 설이는 내가 가는 곳마다 이미 거쳐간 뒤 자취를 감췄다. 꼭 나를 피하는 것 같아서 슬프지만, 그래도 나는 형이니까 설이의 화가 풀릴 때까지 힘내야지.

***

“한준, 나 지금 한국 왔다. 이번에는 이 형님께서 한달 체류하다가 런던 돌아갈 생각이다.”

“유학간 놈이 왜 이렇게 자주 돌아와? 너 영국에서 그냥 놀고 있지. 솔직하게 말해 봐.”

부잣집 도련님의 삶을 내가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우정혁은 잊을 만 하면 먹을 것을 잔뜩 사 들고 한국에 돌아왔다. 그리고는 한량처럼 어슬렁거리며 동네를 돌아다니고 놀다가 다시 영국으로 출국하기를 반복했다. 게다가 심심하면 국제전화를 해서는, 시시콜콜한 날씨나 동네 강아지 얘기를 하곤 했다. 아무튼 우정혁도 더럽게 할 일 없고 더럽게 친구 없는 녀석이다. 그런 우정혁이 거의 유일한 친구인 나도 딱히 뭐랄 것 없지만.

“야, 근데 티브이 틀었더니 네 동생 나온다.”

“아… 어어.”

“면세점에서 광고 봤을 때는 이 세상에 도플갱어가 진짜 있나 보다 싶었는데, 아무리 봐도 저거 한설 아니냐?”

우정혁의 전화를 받으며 촬영장 근처 카페에서 커피 심부름 중인 내 앞에도, 설이의 얼굴이 찍혀 있는 스크린이 보였다. 카페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백화점 벽면 스크린에 환히 웃고 있는 설이의 얼굴이 스쳐지나 갈 때마다 가슴이 후벼 파는 듯이 아팠다. 마치 결별 후에 전 애인이라도 그리워하는 느낌이라서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우습지만 ‘설이의 저 예쁜 미소도 원래는 나만의 것인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되어버리곤 한다.

“근데 네 동생 놈이 연기를 좀 하긴 한다. 그 차갑고 무뚝뚝하던 얼굴로 화면에서 웃으니까, 난 좀 소름 끼치더라.”

“아, 용건이 뭔데. 나 일하느라 바빠.”

손에 들고 있던 진동 벨이 울려서 캐리어에 담긴 커피를 찾으러 가며 휴대폰을 어깨와 귀 사이에 끼웠다. 권영도 이사와 함께 촬영하는 또 다른 신인 여자 배우, 그리고 매니저 형들과 스타일리스트 누나들의 커피까지 총 여덟 잔이었고 내 몫까지 아홉 잔의 커피가 담긴 캐리어를 끙끙대며 들고 걸었다. 우정혁은 내 짜증스러운 목소리에 멈칫하더니,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거, 직장인이라고 되게 유세 떠네. 그냥 오랜만에 한국 왔다고 전화해봤어.”

“삼 개월이 오랜만이냐? 지난주에도 전화했잖아, 뭘 자꾸 연락해. 하여튼 백수가…”

“너 왜 이렇게 저기압이냐. 뭐, 네 동생이 스타 되겠다고 너 버리고 떠났냐? 집에도 안 들어오고 그래?”

“……우정혁 너 진심 사주팔자 공부해봐라. 주역, 그런 거 있잖아. 너 영국에 있을 놈이 아닌 것 같아.”

“뭐래. 한준 너는 동생 관련된 일에만 그렇게 늘 진심이잖아. 목소리 들어보니까 엄청 우울하네.”

“하아, 나 담배 피울까 싶다.”

“돈 아까워서 그거 피우겠어?”

“그건 그래. 쓸데없는 데에다 돈 쓰지 말아야지.”

전화를 끊고 나서, 커피를 모두 조수석에 옮겨 싣고 차를 몰았다. 숲길을 따라 10분 정도 들어가자 오늘의 촬영장이 나왔다.

주차 후, 양손으로 커피를 잔뜩 든 채로 촬영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서울 외곽의 스튜디오는 엄청나게 큰 규모의 건물로 지어져 있었다. 안쪽에는 홀이 네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고, 건물 밖에는 특수 촬영을 위한 거대한 수영장 같은 곳도 구비되어 있었다. 주차장을 지나면 별채와 야외 촬영을 위한 세트장도 여러 곳 세워져 있어서 자칫 길을 잃기 쉬웠다.

게다가 오늘 촬영이 있는 팀이 한 두 곳이 아니라서 사람들과 촬영소품에 부딪히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지난 번과 같은 실수는 두 번 다시 없어야 한다. 이제 장소 이동이나 잡일에 제법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아직 헤매는 일 투성이였다.

“준 씨! 여기에요!”

신인 배우 윤여린이 복작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활기차게 손을 뻗어 흔들었다. 원래는 타 소속사의 아이돌 그룹으로 오래 활동하다가 그루 엔터테인먼트로 이적하여 배우 활동을 시작한 윤여린은 이미 지지도 높은 연예인인데도 불구하고 소탈했다. 나보다 세 살 많은데도 쉽게 반말을 하거나 하대하지 않는 것으로 이미 얼마나 인간성 좋은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콜드브루 드신다고 했죠? 생각보다 오는 길이 막혀서… 얼음이 조금 녹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유, 그런 거 상관 없어요! 영도 선배님 오시면 제가 드릴게요. 다 테이블에 놓으세요.”

나를 도와 테이블에 테이크아웃 컵을 하나씩 옮겨놓던 윤여린이 메이크업 스텝 누나에게 커피를 건넸다.

“언니. 그래서 저쪽 언제 끝난대요? 아무래도 시간 좀 걸리겠죠?”

“모르겠어요. 이사님 말로는 한 시간 내외래요.”

“진짜? 수중 촬영이라 딜레이 꽤 될 줄 알았는데. 그쪽도 신인이라면서요.”

“응, 그렇기는 한데, 앞쪽을 예상보다 꽤 빨리 찍었대요. 우리 스탠바이 30분이라던데.”

“와… 운 좋네. 나 일주일 째 두 끼 고구마 반 개 먹었어요. 너무 힘들다.”

윤여린은 이미 안쪽에 수영복을 입고 있어서 겉으로는 가운을 걸친 채였다. 그 위에 긴 점퍼까지 돌돌 감아 김밥 같은 모양새였다.

실내의 대형 유리관 같은 물 속에서의 키스 신이 있었다. 권영도와 윤여린의 수중 키스 신으로, 유명 아이돌 그룹의 뮤직비디오에 들어가는 장면인 것 같았다. 잘은 모르지만, 무척 중요한 촬영이었고 쉽지 않은 촬영이라는 것은 문외한인 내 예상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촬영장으로 향하는 내내, 권영도 이사는 콘티를 내려다보다가 나를 흘금거리며 “이런 건 전부 연기이며, 마음이 전혀 담기지 않은 키스입니다.” 하고 내게 반복해서 해명하듯 말했다. 아무리 고개를 끄덕여도 자꾸만 같은 말을 하기에 “힘드시겠어요.” 하고 대답했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이제 이동해야겠는데요.”

권영도 이사가 윤여린과 마찬가지로 가운을 걸친 채로 파우더 룸 쪽에서 걸어 나왔다.

복도를 걸어서 반대편에 있는 특수 촬영장 지하로 넘어가야 해서, 나는 짐들을 잔뜩 짊어지고 권영도의 스텝들을 따라 걸었다. 앞쪽에서 걷던 권영도가 아차, 하고 멈춰 서더니 뒤돌아 내게 귓속말 했다.

“갑자기 만나는 걸 수도 있겠네요. 마음의 준비 해둬요, 한준 씨.”

“네?”

“동생 만날 준비.”

수중 촬영장 안으로 얼떨결에 따라 들어가자, 스포트라이트가 강하게 비추는 대형 유리관 안에 한 남자가 들어 있었다.

물이 가득 차 있는 그 유리관 안에서 부유하고 있는 남자가 유리 벽으로 손을 뻗으며 눈을 떴다. 새파란 눈동자. 마치 숨을 쉬고 있지 않은 것처럼 전혀 괴로워 보이지 않는 흰 얼굴, 물결 속에 흔들리는 부드러운 머리카락과 판판하게 드러난 상체와 청바지만 입은 채로 부드럽게 헤엄치는 그 청년의 모습은 마치 신화 속의 인어 같았다. 유려한 몸의 곡선과 손과 다리를 움직이는 동작이 너무 아름다워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컷-! 한설 씨, 이제 나옵시다!”

감독의 소리치는 목소리에 움찔 어깨를 떨며 나는 정신을 차렸다.

유리관 옆쪽 계단으로 헤엄쳐 가 천천히 수면 위로 올라오는 그를, 주변 스텝들이 위쪽에서 잡아주었다.

하아… 하아, 숨을 고르며 젖은 머리카락을 뒤쪽으로 넘긴 청년이 내 쪽을 바라본다. 

나는 배우의 얼굴을 하고 있는 설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 낯선, 동생이 아닌 남자의 얼굴이었다.

“서, 설아……”

목이 메고 눈물이 울컥 솟았다.

분명히 나에게 시선을 둔 채, 설이는 젖은 입술로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심장이, 전에 느껴본 적 없는 요상한 느낌으로 쿵쾅대며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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