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한준의 수호천사 (19/65)

19. 한준의 수호천사

꽈배기 모양으로 휘감긴 이불을 다리 사이에 낀 채로 잠들어 있다가 깨어났다. 

남의 집 소파에서 이렇게 숙면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잘 잤다. 일터에서 쪽잠 자던 습관 때문인지 어디에서든 잘 자는 편이다. 눈 떠보니, 권영도 이사가 날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아침이라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았다. 하품을 하면서 뻗친 머리를 쓸어 내리고 있으려니, 권영도 이사가 팔짱을 낀 채로 픽 웃었다. 그는 벌써 샤워까지 마치고 상쾌한 얼굴로 머리가 젖은 상태였다.

“손님방에서 자라고 했더니, 결국 여기서 잤네요.”

“네… 그렇게 폐를 끼칠 순 없죠…….”

“고집 센 건 알아줘야겠습니다.”

폭신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커튼으로 가려진 통 유리창 쪽을 바라보니 햇살이 비쳤다. 지난밤의 비바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조용했다. 

설이는 잘 잤을까. 하필이면 처음으로 혼자 재우는 날이었는데, 간밤에 천둥번개까지 내리쳐서 놀라지는 않았을지 걱정이었다. 겁도 많고 마음이 여린 아이인데.

권영도에게서 빌린 티셔츠와 트레이닝 복 바지는 내 것보다 훨씬 커서 목덜미와 허리춤이 헐렁했다. 티셔츠 사이로 드러난 쇄골 부근을 벅벅 긁고 있으려니 권영도 이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준 씨, 엄청 둔감한 성격이네요."

졸린 눈으로 올려다보자, 권영도는 자신의 뒷머리에 뚝 뚝 흐르는 물기를 수건으로 닦아내며 옆쪽 소파에 걸터앉았다. 평범한 동작마저 우아하게 보이는 걸 보니 연예인은 역시 뭘 해도 다른 모양이다. 권영도는 나와 눈을 맞추며 비밀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한준 씨에게 관심 있다고 말했던 건 기억합니까?"

"아, 네… 뭐…"

말만 한 게 아니라 입술 박치기 하셨던 것도 기억하는데요. 

몽롱한 정신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권영도는 유쾌하게 웃으며 테이블에 올려 두었던 생수를 내게 건넸다.

"내가 흑심 품고 달려들면 어쩌려고, 잠기는 문도 없는 거실에서 그렇게 편히 잡니까? 나 그렇게 좋은 놈으로 보였어요?"

장난스러운 목소리였다.

나는 생수 뚜껑을 따서 단 번에 벌컥 벌컥 반쯤을 마신 후에 손등으로 입가를 닦아냈다.

매력적인 미소를 띈 권영도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 나는 어깨를 긁적였다.

"그러실 분 같지는 않지만… 만약의 사태에는 저도 반격해야죠. 묶인 거 아닌 이상에야, 저도 팔다리 멀쩡하고 나름 힘 좀 쓰거든요. 그런데…… 진짜 절 보고 그럴 마음이 드세요?"

진심으로 신기해서 물었지만, 권영도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목젖이 보일 정도로 크게 웃어댔다.

삐쩍 마르고 멋진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는데다가 희멀건 한 멸치일 뿐인…… 경험도 없는 남자 놈인데 말이다. 이런 날 보고 욕정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아서 물었을 뿐인데, 너무 대놓고 웃으니 민망해졌다. 

권영도 이사는 겨우 웃음이 잦아들자 눈가를 닦아냈다.

"하하… 아, 그럼요. 충분히 그럴 마음 듭니다. 씩씩하고 믿음직스러운 점도 좋네요. 이 팀장이 스카웃했다던데, 포상이라도 주고 싶을 정도에요."

칭찬이라는 건 언제나 듣기 좋은 법이니까 머쓱해져 조용히 웃었다.

"오늘 오후에 본사 들어가서 회의 잠깐 하고, 광고 촬영 있어요. 스케줄 관련해서는 김지훈 매니저한테 듣고, 일단 나갈 준비 합시다."

"네에."

바로 씻고 나와 어제 입었던 옷을 다시 입고 머리를 말리면서 휴대폰을 확인해봤지만 설이에게서는 여전히 연락이 오지 않았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한참 등교 준비할 시간이니까 바쁘겠지.

설이가 걱정되는 마음 한 편으로는, 서운한 생각도 들었다. 형이 이렇게 걱정할 것을 뻔히 알면서 연락 좀 먼저 해주지. 원래는 늘 먼저 보고하고 연락해서 신경 쓸 일도 없게 만드는 착한 동생인데, 요즘 들어서 사춘기라도 된 것 마냥 잘 토라지는 것 같다. 돌발행동도 가끔 하는 것 같고.

하긴, 생각해보면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크는 아이’라니 그게 더 이상하다. 지금까지 설이는 너무 신기할 정도로 착하고 순한 아이였고, 남들 다 삐뚤어진다는 중학교 이학년 때에는 오히려 나를 도와서 우유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겠다며 매달렸다.

“형 혼자 새벽에 배달 다니다가 누가 납치라도 하면……”

“아하하! 설아, 너 별 걱정을 다 한다. 누가 나를 납치해?”

서로 거의 다 아는 사람들이 사는 좁은 동네에서 그럴 일도 없거니와 나를 데려가서 어디에 쓰냐며 웃었지만, 설이는 막무가내였다.

“걱정돼, 내가 형이랑 같이 다니면 안 돼?”

“안 돼. 설이는 내 몫까지 코오 자고 더 크자. 형 부탁 들어줄 거지?”

“……응.”

설이가 고생하는 건 절대로 허락할 수 없었고, 착한 설이는 내 뜻을 따라주었다.

그 뒤로, 나는 가끔 골목길에서 나를 뒤따라오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그럴 때마다 흠칫 놀라 뒤돌아보기는 했지만 아무도 없었고, 내 착각이었을 지도 모른다. 진짜 어디서 괴한이라도 튀어나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생긴 망상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몇 번이나 그림자를 목격했다.

“누, 누구세요? 거기 누구 있어요?”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오히려 새벽마다 느껴지는 그 의문의 그림자는, 두렵지 않고 의지가 되었다.

누군가가 나를 지켜주는 것 같은 포근한 느낌을 받았다. 배달 자전거 바퀴가 고장 났던 날은, 맨션을 돌며 우유를 배달하고 내려오면 자전거가 온전하게 고쳐져 있기도 했다. 깜빡 잊고 한 집에 우유를 놓지 않아서 허둥지둥 되돌아가보면, 잊은 줄 알았던 집의 우유 주머니에 얌전히 우유가 담겨 있기도 했다. 

어쩌면 우유의 요정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었을까. 우리 설이가 눈의 요정인 것처럼 말이다.

***

"준 군, 시간 날 때 운전 연습 좀 해둬야겠어요."

"아, 네!"

촬영장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로드 매니저 김형이 간이 의자를 옮기고 있던 나를 불러 세워 말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키를 꺼내 건네줬는데, 평소 김형이 몰고 다니는 벤이 아니라 권영도 이사의 개인 소유 차량 중 하나였다. 차 키 아랫부분에 박혀 있는 로고가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이, 이거… 비싼 차 아닌가요?"

"그렇지. 근데 영도 형님이 개인 스케줄 운전은 준 군을 시키고 싶은 모양이에요."

"저 이거 운전하다가 살짝 범퍼만 스쳐도 빚더미 오를 거 같은데요……."

"하하, 그 형님 그렇게 쪼잔한 사람 아니니까 걱정 하지 마요."

김형은 내 등을 팡팡 치며 말했지만, 아무래도 부담스러워서 권영도 이사에게 직접 차 키를 반납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내 사정에 빌릴 만한 렌터카 하나 가져다가 운전 연습을 해놓고 나서야 겨우 한 번 몰아볼까 말까 한 비싼 차였다.

주머니에 넣어둔 차 키에 신경을 쓰며 간이의자를 촬영장 안쪽까지 옮겼다.

권영도 이사는 촬영을 위해서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촬영장 안의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이는데 혼자 멀뚱히 서 있으려니 민망해서 기웃거리고 있자, 나를 발견한 스타일리스트 누나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준 군! 미안한데 바쁘지 않으면 이것 좀 옮겨줄래?"

"네!"

옷걸이에 걸린 채로 한번에 반으로 접힌 옷 뭉치는 어림잡아 서른 벌 정도였다. 박스 안에 담겨 있어서 그대로 들어 옮기면 되지만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몇 걸음 못 가서 옷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헥헥거리고 있는데 주머니에 진동이 왔다.

설이구나! 

기쁜 마음으로 휴대폰을 꺼냈지만 화면에 뜨는 것은 담임이었다.

"한준, 너 지금 일하고 있냐? 어디냐?"

"왜 당연한 걸 물어보세요. 저 이제 나름 직장인입니다. 아 참! 쌤, 설이 오늘 기분 안 좋을 수 있으니까…"

"한설 오늘 등교를 아예 안 했다, 이 놈아. 어떻게 된 거냐. 어?"

"……네?"

담임은 휴대폰 너머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한설이가 학교를 안 왔다고. 그리고는 아까 전화를 해서는, 자퇴를 하겠다는데 이게 무슨 말이냐. 어?"

"……무슨, 무슨 말씀이세요. 설이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내가 묻고 싶다, 이 놈아. 네가 동생 잘 설득해서 데리고 와라. 알겠냐?"

전화를 끊고 나서 잠시 멍한 기분이었다. 재빨리 설이에게 전화를 해봤지만, 받지 않았다. 그나마 휴대폰이 꺼져 있지는 않았다. 그저 내 전화를 받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말도 없이 외박한 내게 삐친 것이다. 그래서 학교도 안 가고 자퇴하겠다고 반항을 하는 중인 것이다.

그래, 청소년 때 한 번쯤은 그렇게 일탈할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심장이 빠르게 뛰어댔다. 내가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설이가 낯설다. 

우리 설이는 이렇게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아이가 아니었다. 여태까지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날 놀라게 한 적이 없었는데.

"준 군! 그거 빨리 옮겨야 하는데, 빨리 좀 움직일 수 없을까?"

"아… 네, 네… 죄송합니다……."

정신이 살짝 나가 버렸다.

옷 상자를 든 채로 터덜터덜 걷는데, 이미 초점이 나가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던 뱀 덩굴 같은 전깃줄에 발이 걸려버렸다.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듯 넘어졌고 옷 상자를 손에서 놓쳤다. 얼굴이 바닥에 닿아 쿵, 소리가 나고 순간 별이 보일 정도로 어지러웠다. 그리고 내 몸 위로 길다란 조명 하나가 기울어지는 것을 보며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

그러나 내 몸 위로 떨어져야 했을 스탠드 조명이 나를 비껴 옆으로 쓰러지며 쿠당탕 소음을 냈다.

사람들이 수런거리며 내 곁으로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일 쳤다는 생각에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눈을 떠보니 옷가지가 쓰러진 상자에서 몽땅 튀어나와 바닥이 엉망이었다. 조명 장치의 부품이 어느 부분인가 부서져 내 곁에 조각나 있었다.

"바… 방금 봤어?"

"어, 뭐지? 어떻게 쓰러지던 게 공중에 멈춰서 반대편으로 기울어지지?"

"귀신 있는 거 아니야? 이게 어떻게 저쪽으로 쓰러져?"

스탭들의 대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아무도 선뜻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넘어지면서 무릎을 다쳤는지 절뚝거리며 일어났다. 일단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부터 상자에 빠르게 집어 담기 시작했다. 스탭들이 쓰러진 조명 장치와 그 곁에 세워두었던 촬영 기기들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멀리서 스탭 총책임자가 뛰어왔다.

"야, 너 뭐 하는 새끼야!"

옷 상자를 바닥에 둔 채 일어서서 고개를 숙였다. 책임자는 숨을 헐떡이며 악을 썼다.

"어디서 정신 빠진 새끼가 와가지고 말썽이야, 촬영 망치려고 작정했어?! 너 어디 소속이야!"

"……죄송합니다. 파손된 것에 대해서는 제가 변상을…"

"너 저게 다 얼마짜린 줄 알아!? 너 같은 새끼 몸 팔아도 못 사, 이 새끼야!"

"정말 죄송합니다."

책임자는 이미 잔뜩 화가 난 상태였는지, 촬영장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너 같은 새끼는 짐만 될 뿐이고, 사회 악이라는 말까지 나왔지만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괜히 반발해봤자, 이 상황을 더 심화시킬 뿐이라는 것을 다년 간의 알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게다가 명백히 내가 실수한 상황이었으니 납작 엎드려도 시원찮을 판이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욕 먹고 혼나는 상황도 아르바이트 초반에 간간히 있어 왔기 때문에 익숙했다. 게다가 머릿속으로는 설이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지에 대한 걱정뿐이어서 그 호통이 잘 들리지도 않았다.

"대체 변상 액수가 얼마입니까?"

곁에 다가와 내 어깨를 감싸며 권영도가 물었다. 조용한 물음이었지만, 그 목소리에 권위가 느껴졌다.

놀라서 고개를 들자 권영도는 차분한 표정으로 책임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영도 씨, 이건 그러니까… 액수보다는 훈육 차원에서……"

"얼마나 비싸기에 사람 몸값보다 비쌉니까, 어디 들어나 봅시다."

권영도가 등장하면서부터 주변은 싸할 정도로 조용해졌고, 내게 욕설을 퍼붓던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내 어깨를 감싼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잘못을 했더라도 이런 식으로 사람을 몰아세우는 법은 없습니다. 게다가 다친 사람인데, 괜찮은지 먼저 물어보는 게 정상 아닙니까?"

권영도의 말에 나는 그제야 시선을 내려 핏물이 동그랗게 젖어 드는 내 바지의 무릎 부분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넘어지면서 바닥의 튀어나온 설치물에 찧었던 모양이다. 몸을 숙인 권영도가 무릎 아래로 손을 넣어 나를 양손으로 번쩍 들었다. 순식간에 그에게 안긴 자세가 되자, 깜짝 놀라 눈이 크게 뜨였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도 나와 다르지 않았다. 오직 권영도만이 굳은 표정으로 여전히 책임자를 노려볼 뿐이었다.

“저, 그게…”

"변명은 나중에 듣고, 일단 다친 사람 치료부터 해야겠습니다. 김 감독님! 촬영 아까 말한 대로 시작하겠습니다."

수런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나를 안은 채로 걸어가며 권영도가 내게 속삭였다.

“괜찮아요, 이런 일도 있는 겁니다.”

그 목소리에 안심이 된 것인지 눈가가 뜨거워졌다. 나도 이런 일은 많이 겪어봐서 별일 아니라는 거 안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살아계셨더라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어린 아이가 된 것처럼 겨우 무릎 조금 다친 나를 안아 들어주는 권영도에게서 보호 받는 기분을 느꼈다. 나와 같은 성별에 그렇게 크게 나이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내게 없는 어른 남자의 믿음직함이 있었다.

조용한 차 안에서 김형이 찾아준 구급 상자를 열고, 권영도는 뒷좌석에 나와 나란히 앉아 내 얼굴에 남은 생채기들을 소독약으로 닦아내주었다. 직접 하겠다는 내 말도 무시하고 집중해서 살살 약을 발라주는 그의 모습이 자상해 보였다. 바지를 걷어 올리게 하고는 무릎의 시퍼런 멍과 상처를 심각하게 바라봤다.

"이건, 병원을 가봐야겠는데요. 건드리면 아프죠?"

"감사합니다. 아까… 괜히 저 때문에 촬영장 분위기 이상해졌네요."

"그 인간이 원래 성격이 좀 못됐거든요. 한준 씨가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안심하라는 듯 웃어주며 권영도가 소독약에 젖은 커다란 면봉으로 내 무릎을 조심스레 건드렸다.

내가 표정을 찡그리면 잠시 멈췄다가 다시 발라주었다. 그런 그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자, 권영도는 내 무릎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약을 바르며 물었다.

"왜요, 지금은 좀 내게 마음이 생겼습니까?"

진지하게 말해서 오히려 더 장난스럽게 느껴지는 그의 물음에 피식 웃음이 났다.

다른 건 몰라도 권영도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상처에 밴드를 붙이고 나서, 나는 염치 없지만 권영도에게 부탁해야 할 게 있었다.

"사고 쳐 놓고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저… 집에 잠깐 다녀와도 될까요?"

"아파서 그래요?"

"그게 아니라… 동생이 학교를 안 갔다고 해서, 혹시 집에 있는 건지 확인 좀 하고 싶어서요."

권영도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데려다 주겠다는 그를 만류하며 촬영은 어쩌냐고 묻자, 권영도는 결국 로드 매니저 김형에게 부탁해서 나를 집까지 태워다 주었다. 그것도 거절해야 맞는 일이겠지만, 설이에 대한 걱정 때문에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대신 이 신세는 나중에 꼭 갚아야겠다고 다짐했다.

***

"설아! 설아, 집에 있어? 나 왔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며 정신 없이 설이를 찾았다. 모든 방 문을 열어 젖혔지만 설이는 없었다.

그나마 내가 안심했던 것은 교복과 가방, 평소에 신는 컨버스 화도 함께 없어져있다는 것이다. 학교에 갈 준비를 하고 나갔다가 중간에 다른 곳으로 샌 모양이었다. 어쩌면 학교 뒷동산의 나뭇가지에라도 올라가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오늘 집에 오면 잘 타일러서 왜 자퇴하려고 했는지, 들어보자. 갑자기 외박한 것도 사과해야지. 아마 설이는 내가 잘 설득하면 다시 내 품에 안겨서 유순하게 얼굴을 비비며 내 말을 들어줄 것이다. 

우리 설이는 착한 아이니까. 귀여운 내 동생이니까.

그때, 휴대폰에 진동이 왔다. 설이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우리 관계가 달라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

다치지 말고 밥 잘 먹고 잘 있어, 형.’

“……무슨,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짧은 메시지였지만 ‘잘 있어’ 라는 부분이 심상치 않았다. 나쁜 생각은 하고 싶지 않지만, 그건 마치 떠날 때의 인사 같았다.

바로 설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 눈물이 가득 차 올라서 눈 앞이 뿌옇게 번졌다.

“정말…… 가출한 거야?”

믿을 수 없어서 몸이 휘청거렸다. 식탁을 짚으며 겨우 지탱하여 서 있다가 무심코 식탁 위를 보았더니 새로 사다 놓은 듯 소독용 솜과 연고, 밴드 등이 가지런히 식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꼭 내가 다친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이.

이럴 때는 경찰서에 신고해야 하나? 휴대폰으로 위치추적 같은 걸 해서 찾아줄 수 있겠지? 어디 나쁜 아이들하고 몰려다니는 건 아닐까. 위험한 사람들 꼬임에 넘어가서 그들이 가출을 유도한 거라면 어떡하지. 일단 담임 선생님께 전화를 해야 하는 걸까. 아니, 외삼촌에게 알려야 하는 걸까. 하지만 오늘 저녁에라도 설이가 바로 집에 돌아올 지도 모르는데, 어른들께 폐만 끼치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한 번도 사고친 적 없는 동생의 가출 때문에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어느새 나는 식탁 아래에 주저 앉아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거실 밖이 어두워졌고 저녁이 되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 동안 휴대폰에 연락이 많이 왔지만, 내 컨디션에 대해서 물어보는 권영도 이사의 메시지와 쓸데 없는 전화들뿐이었다.

설이는 결국 늦은 밤이 되어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선잠에 들었다.

***

설이의 방 구석에 접어둔 이불 위에 엎어져 웅크린 자세로 잠들어 있다가 전화 벨 소리에 깨어났다. 벌써 창 밖은 밝아 있었고 시간은 오전 아홉 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결국 설이가 가출한 것이 확실해졌다. 나는 믿을 수 없어서 황망한 얼굴로 휴대폰을 꺼냈다.

전화를 건 사람은 기획팀 이하원 팀장이었다. 도저히 일하러 나갈 컨디션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단 하루 쉬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일단 온 전화는 받아야 했다. 

어쩌면 어제 내가 촬영장에서 사고친 것 때문에 연락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기운 없는 목소리가 나갔다. 

“네, 팀장님. 저 한준입니다. 저 어제 죄송한……”

“한준 씨!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처음 듣는 그의 흥분한 목소리에 말문이 막혔다. 늘 단정하고 예의 바른 태도로 일관하던 이하원 팀장이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젠장,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한준 씨를 먼저 포섭한 것도 다 차근차근 준비 중인 계획이었는데, 지금 이게 대체 뭡니까? 정말 황당해서 말도 안 나오네요. 일이 이렇게 진행될 거라면 저한테 한 마디 언질이라도 주셨어야 그게 예의 아닙니까?”

“저, 팀장님. 지금 무슨 얘기를 하시는 건지 전 도통 모르겠는데요. 제가 뭔가 또 실수라도…”

“오늘 소식 들었습니다. 하, 정말! 신 엔터에 한설이 들어가다니요.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네?”

“한준 씨 동생 한설, 신 엔터테인먼트하고 계약했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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