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그 남자랑 왜 키스했어.
가로등 불빛 아래 흰 몸체를 드러낸 그 짐승은, 바닥에 쓰러진 남자의 가슴을 발톱을 내어 밟은 채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등선을 따라 길게 이어져 바닥에 끌리는 긴 꼬리에는 내가 익숙하게 봐온 매화꽃 모양의 고리 무늬가 수놓아져 있었다.
"서… 설……"
입이 벙긋거리며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거대한 흉통을 들썩이며 쉬익, 위협의 소리를 내는 것은 새하얀 표범이었다. 으르렁거리며 찡그려진 눈가에 회백색의 눈동자가 일순 푸른 빛으로 물드는 것을 보고, 나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 앉았다.
심장이 미친 듯 쿵쾅거리며 뛰었다. 흙 땅을 짚은 내 손이 벌벌 떨려왔다.
완벽한 짐승 형태의 설이를 본 적은 있지만, 그건 설이가 아주 어릴 때였다. 덩치 큰 고양이 정도로 착각할 수 있을 수준의 어린 설 표범의 모습만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설이는 이제 곧 인간의 나이로 성인이 될 정도로 몸이 커졌으니, 만약 짐승의 형태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모습 역시 성체가 될 것이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다시 설이가 표범의 모습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십 년 가까이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덮쳐진 채로 바닥에 널브러진 권영도 이사는, 가슴을 압박하는 거대한 물체로 인해서 숨을 쉬기 버거워서 켁켁거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산소 부족으로 붉게 달아오르고 있다.
그 짐승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채 금방이라도 권영도 이사의 목을 물어뜯으려고 하는 중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설이의 거대한 몸통을 와락 끌어안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안 돼! 설아, 안 돼. 진정해, 제발. 응?"
내가 껴안고 있는 것이 설이의 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거칠게 숨을 쉴 때마다 들썩이는 표범의 생명력과 척추를 따라 도드라지는 뼈대가 털가죽으로 전해져 오자 소름이 돋았다. 내 목소리가 떨리고 있어서 남의 목소리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짐승의 모습이라서 내 말을 못 알아 들으면 어쩌지?
순간 물어 뜯겨 내팽개쳐질 걱정까지 했지만, 내 말에 거친 숨결이 점점 가라앉았다. 그리고 팔 안 가득 안고 있던 거대한 털 짐승의 몸통이 한 순간 훅 부피가 줄어드는 걸 느꼈다.
"설아……"
겨우 눈을 떠보니, 내 팔이 감싸 안고 있는 것은 설이의 얄쌍한 허리였다. 싸늘한 눈빛의 설이가 여전히 화를 가라앉히지 못한 냉담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괴로운 숨소리에 밑을 보니, 설이가 운동화 발로 권영도 이사의 가슴팍을 짓눌러 밟고 있는 상태였다.
헉, 놀라서 설이를 그의 몸 위에서 끌어냈다.
만취했던 권영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제 목덜미를 감싼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대체… 무, 콜록……"
그의 목 안에서 쇳소리 같이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괜찮으세요? 이사님, 숨… 숨 쉬어지십니까?"
바로 다가가 권영도 이사의 상체를 일으켜 세우는데, 술기운 탓인지 일어나 앉는 것이 버거워 보였다. 벤치에 겨우 기대며 머리를 감싼 채 눈을 감고 있는 것을 보니 두통이 있는 모양이었다.
근처 약국은 문을 닫았겠지? 병원으로 가야 하나? 그러면 가서 뭐라고 해야 하지?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그 와중에 혹시라도 설이가 폭행했다는 증거가 될 까봐 권영도의 와이셔츠에 묻은 거대한 흙 발자국을 털어냈다. 엉망이 된 셔츠 위에는, 운동화 밑창의 자국도 남아 있었다. 집이 근처니까 옷이 더러워서 세탁해다가 드리겠다고 할까, 너무 수상해 보이려나.
그런 내 속도 모른 채, 등 뒤에서 설이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형이 저 남자하고 키스했어."
이를 갈며 새어 나오는 그 목소리에서는 뜨거운 질투가 느껴졌다.
"……나를 두고."
절로 한숨이 났다.
사실 그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나는 키스를 '당한 것'이고, 엄밀히 말하자면 방금 전의 그건 뽀뽀에 가까웠다. 설이는 내 숨이 모자랄 정도로 입 안을 잔뜩 핥고 혀도 잘근잘근 깨물었던 주제에, 잘도 이걸 키스라고 명명했다.
권영도 이사의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휴대폰이 흙투성이가 되어서 내 발 아래 진동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소동에 떨어진 모양이다. 화면에 김지훈이라는 반가운 이름이 떠서, 내가 전화를 받아 놀이터의 위치를 알렸다.
놀이터로 온 로드 매니저 김형은 권영도 이사를 부축하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준군, 이사님하고 싸웠어요?"
말하면서도 김형은 내가 이사님과 몸싸움을 벌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내 눈치를 살폈다. 어색한 웃음으로 무마하면서 내가 할 말을 고르고 있는 도중에 김형은 살기가 느껴지는 등 뒤의 설이와 눈이 마주치더니 흠칫 몸을 굳혔다.
"어, 저기… 제 동생이고요…… 마침 지나가다가 도와, 도와 줘서… 아, 아무튼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이사님 얼른 데려가셔서 쉬게 하시는 게……"
"그렇지. 먼저 갈게요. "
정신 없는 와중에도 매니저의 역할을 철저히 해내며 김형은 권영도 이사를 등에 업고 벤으로 갔다. 그를 뒷좌석에 안전하게 태우도록 도운 다음에 다시 놀이터 안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설이는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격한 형의 모습을 보여줄 차례였다. 팔짱을 낀 채 설이를 마주 노려보다가 먼저 돌아섰다.
"한설, 일단 집에 가서 얘기하자. 따라 와."
***
강하게 나가긴 했는데, 막상 집에 와서 여전히 매서운 눈빛을 하고 있는 설이와 마주 앉으니 설이를 휘어잡을 자신이 없어졌다. 그래도 형으로서 혼내야 할 건 제대로 혼내야만 했다.
길게 숨을 내쉰 뒤에 설아, 하고 불렀더니 다행히도 나를 쳐다보기는 했다.
"너, 그 표범 모습으로는 마음대로 변할 수 있는 거야?"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여태까지는 그냥 변하지 않았던 것뿐이라는 거지?"
이번에도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설이를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한설, 너 귀랑 꼬리만 나오는 것도, 여전히 자유자재로 되는 거지. 조절 못하게 된 거 아니지."
"………"
대답 없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것을 보니, 정답이다.
예쁘다고 어리광을 너무 받아주다 보면 이런 일도 생기는 법이다. 뭔가 마음에 안 들면, 이런 식으로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 모양이다. 사랑 받기 위해서 잔꾀를 부린다는 것 그 자체로도 이미 내 눈에는 귀여워 보이는 게 사실이지만, 그런 식으로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설이는 평범한 인간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 속에 섞여서 잘 융화되어 살아가는 방법을 익혀야만 하는 것이다.
"너 그렇게 함부로 달려들어서 이사님 크게 다치셨으면, 진짜 어떡하려고 그랬어? 설이 네 맘에 안 든다고 해서 그렇게 막 다치게 해도 된다고 생각해? 형이 너 그렇게 가르쳤어?"
"……왜 그 남자랑 키스했어."
"지, 지금 네가 질문하는 시간 아니잖아. 한설."
당황하면 지는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눈빛과 기세에 밀려서 말이 더듬어졌다.
"그 남자가 좋아? 나만큼 소중해졌어?"
아무래도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꾸 대답도 회피하고 말대꾸하는 태도는 잘못 되었다는 생각에 불쑥 화가 났다.
"한설! 남을 해치면 안 돼!"
"……"
삐딱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설이의 시선은 불손했지만, 수려한 눈매에 빠져 들어 그저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그게 바로 문제였다. 설이는 지나치게 아름답고 비현실적으로 순수하게 나를 사랑해주는 존재라는 것.
"…형한테 해가 되는 인간에게는 그래도 돼."
"한설!"
나를 빤히 올려다보는 새까만 눈동자를 마주하면, 혼낼 기운이 쏙 빠지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짐승으로 변해 타인을 공격하는 행위를 그대로 놔둘 수는 없는 일이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나는 표정을 굳혔다.
"또 이런 일이 있으면, 나 다시는 너 안 볼 거야. 알았어?"
내 꾸지람을 듣고 나서 설이는 고개를 숙인 채로 중얼거렸다.
"……그 남자 때문에 형은 나를 안 볼 수도 있는 거구나."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설이는 내 대답은 들을 생각도 없는지 조용히 일어나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늦은 밤까지 설이의 방 앞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설이가 나오면 말을 걸어보려고 했지만, 그대로 잠들었는지 방 안의 설이는 조용했다.
***
설이와 화해하지 못해서 찜찜한 기분으로, 일단 출근을 해야 했다.
행정 팀에 따로 전화를 해봤지만 퇴사에 관련해서는 나를 데려간 권영도 이사와의 상담이 먼저 끝나야만 처리가 가능하다는 대답만 되돌아왔다.
사실 그럴 줄은 알고 있었다. 게다가 지난 밤의 일에 대한 해명도 해야 했기에 어차피 권영도 이사를 만나야만 했다. 그걸 피하고 싶었을 뿐이었지만, 그런 시도조차 실패했다.
"그… 몸은 좀 어떠신지……"
임의성 치프 매니저가 알려준 주소로 찾아가자 그곳은, 권영도의 집이었다.
자기애 가득한 본인 사진이 벽 한 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정혁의 집에 놀러 갔을 때에도 궁전 같은 집에 적잖이 놀랐지만, 우정혁의 집은 그래도 가족들이 같이 살고 있으니 그렇게 크려니 생각했었다. 그러나 권영도의 오피스텔은, 열댓 명의 대가족이 살아도 충분히 여유 있을 듯 널찍했지만 권영도 한 명만의 공간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길어 보이는 소파 한 가운데에 앉아 한 쪽 허벅지에 다리를 올린 자세로 권영도가 나를 쳐다보았다.
"숙취가 좀 있지만, 그래도 약 먹었더니 괜찮습니다."
"다, 다행이네요… 하하…"
권영도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씩 웃었다.
"한준 씨가 걱정해주니까 좋네요."
여전히 친절한 얼굴을 보니, 지난 밤에는 취해 있어서 설이가 짐승의 모습으로 덮쳤던 것을 완전히 잊은 듯 했다. 기억을 잃을 정도로 만취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에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권영도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죠, 어제 한준 씨 집 근처에서 제가 넘어지면서 타박상이 있었던 거 같더군요."
"아… 아아, 네. 그, 그러셨죠. 넘어, 넘어지셔서……"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심장이 쿵덕거리며 뛰어서 옷자락을 꾹 쥐었다.
권영도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심한 건 아니고, 근육이 놀란 정도라 휴식을 취하면 된다고 합니다."
"네, 네에……"
"그런데 말이죠."
권영도가 소파 등받이에 두 팔을 걸친 자세로 앉아 있다가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뭘 하는 건가 싶어서 빤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명치가 보일 정도로 셔츠를 살짝 벌렸다. 구릿빛의 그 가슴팍에 눈에 띄는 상처가 있었다. 동물의 발톱 모양으로 가슴 한 가운데에 세 곳이 깊게 패였다. 그래서 그 주변이 모두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설 표범의 모습으로 튀어나와 가슴팍을 밀어 눕힌 자국이었다. 그저 살짝, 그 위를 밟은 걸로 보였는데 무게 때문인지 상처가 꽤 깊게 남았다. 눈이 휘둥그래진 채로 나는 그의 가슴팍을 바라보다가 권영도 이사와 눈이 마주쳤다. 싱긋, 웃는 그 미소에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버렸다.
"이상한 곳을 다쳤더군요. 마치 큰 야생동물에게 습격 당한 것처럼 말이죠."
"아……"
흐음, 하고 권영도 이사는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빠졌다. 나는 그가 뭐라도 더 기억해낼 까봐 침만 꼴깍 삼키면서 바짝 긴장한 채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런데, 기억이 잘 안 나서…… 한준 씨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합니까?"
마른 입술을 안으로 말아 침을 축이며 나는 눈동자를 열심히 돌렸다. 내가 술 한 모금도 안 마셨다는 것을 권영도 이사와 날 놀이터까지 차로 태워준 로드 매니저 김형이 기억할 텐데 대답을 얼버무려봤자, 아무 소용 없을 것이다.
"그, 그게 말이죠… 하하, 그, 그때 놀이터에… 왠 승냥이가 아, 아니 하이에나? 뭐였지, 들개! 들개가 나타났는데요, 그 들개가 갑자기 이사님께 막 달려 들어서는…! 저, 저도 너무 놀라서… 별 일이 다 있네요…… 그쵸? 하하……하…"
"흐음, 그래요?"
권영도 이사는 내 표정을 살피면서 고개를 느리게 끄덕거렸다.
식은땀이 다 났다. 이마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눈치를 살폈지만, 권영도는 내 설명에서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때 다른 남자도 같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죠."
"아…"
"한준 씨 동생이라고 했던 그 남자. 아, 그 학생이라고 말해야 맞는 건가요?"
권영도는 눈가에 주름이 생기도록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날 바라봤다.
설이가 함께 있었다는 것까지는 기억을 하는 구나. 나는 땀을 삐질 삐질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와서 착각하신 거라고 말하기에는 얼굴에 철판 깔 준비를 미리 못했다.
권영도 이사는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올려두며 내게 불쑥 물었다.
"내 옷에 신발 자국도 찍혀 있었더군요. 발 크기가 한준 씨보다는 훨씬 크고… 딱 그 동생분 정도인 것 같은데."
"아… 아, 그게… 그… 그러니까……"
"기억은 안 나지만, 아무래도 한준 씨 동생분이 저를 도와준 거겠죠?"
"네?"
얼 빠진 얼굴로 바라보고 있자, 권영도가 말을 이었다.
"커다란 들개가 갑자기 놀이터에 나타나서 저를 공격했는데, 그 곁을 지나던 한준 씨 동생이 발견하고 들개와 몸싸움을 벌여 저를 구해준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제 셔츠에 남은 자국이나, 이 상처가 설명이 안 되는데."
"아, 마, 맞아요! 맞습니다! 이사님 추측이 정확하십니다! 명탐정이시네요!"
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박수를 쳤다. 권영도 이사는 만족한 듯 웃었다.
이렇게 완벽하게 설이의 알리바이가 설명되다니, 운이 좋아도 너무 좋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렸다. 권영도 이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제 컨디션 상태가 이렇다 보니 생활 매니저가 한 명 필요할 것 같아서… 혹시 다 낫는 동안 한준 씨가 계속 일을 해줄 수는 없을까요?"
설이의 발톱에 찍힌 상처가 선명한 가슴팍을 셔츠 단추를 잠가 가리면서 권영도가 한숨을 내쉬었다.
"기어이 한준 씨가 그만둬야 한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또 이런 일이 있으면 어쩌나 싶어서 요즘 잠도 안 오고…… 생활 매니저 없이 다시 잘 지내려면, 놀이터 근처 CCTV라도 돌려 봐서 그 실체를 확인하는 일이라도 해봐야겠군요."
"제가! 제가…… 이, 이사님 매니저로 계속 있겠습니다."
"아, 그래 줄 수 있어요?"
나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라도 진짜 CCTV에 설이가 표범의 모습으로 변하는 장면이라도 찍혀 있을 까봐 두려워 손이 벌벌 떨렸다. 뒷목이 다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권영도 이사의 관심을 그쪽에서 돌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제가, 병원도 같이 가 드리고… 그, 시, 식사도 차려드릴게요. 얼른 나으셔야죠! 하…하하…"
권영도는 눈에 띄게 반색하며 눈을 빛냈다.
"한준 씨 요리도 할 줄 압니까?"
"그럼요, 동생도 제가 먹여서 키웠는데요. 뭐 좋아하세요, 뭐 해드릴까요?"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계란프라이 하나 한 적 없을 것 같은 새것이나 다름 없는 권영도의 주방에 서 있었다. 손으로는 전분을 풀고 고기에 계란 물을 입혀 튀겨 내면서 머릿속으로는 권영도가 제시한 금액에 대해 생각했다. 애초 입사할 때의 금액에 훨씬 더 많은 인센티브가 얹어졌다.
생활 매니저라고 해서 꼭 매일 상주할 필요는 없고, 그저 출퇴근의 시간의 경계가 조금 더 느슨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오피스텔에 머물다 가도 상관 없고, 가사 노동이 필수는 아니기에 가끔 식사를 함께 할 때 만들면 되는 모양이다.
그것만으로도 더 많은 월급을 받고 일하게 된다. 그 돈을 꾸준히 모은다면, 설이가 주는 돈을 전혀 쓰지 않고 설이 대학 등록금도 꾸준히 내면서 생활할 수 있게 된다.
"너무 지나치게 좋은 조건 아니냐?"
탕수육 소스에 넣을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기 위해서 마트로 가는 길에 우정혁에게 전화를 걸어 상담해봤더니 부정적인 의견을 내놨다.
"물론 경력에 따라서 그 업계에 그만큼이나 받고 일하는 매니저들이 있겠지만, 한준 네 녀석이 뭘 그렇게 대단한 인재라고 그렇게까지 투자하면서 곁에 두냐? 경력이래 봐야 편의점이나 배달 알바만 주구장창 해왔고, 단순하고 동생 밖에 모르는 멸치같이 비리비리한 동정남한테."
"지금 은근슬쩍 내 욕 한 거 같은데."
"얘기만 들어보면, 그건 매니저를 둔다기 보다 그냥 너를 마누라로 집에 앉혀두려는 수작 같이 느껴지는데. 그런 거 있잖냐, 집안일 하고 조개 같은 것 안에 쏙 들어가는 색시. 조개 색시."
"우렁 각시겠지, 미친놈아."
"아, 그래, 그거."
무식한 우정혁은 부끄러움도 없이 전화기 너머에서 무릎을 탁 치며 기뻐했다.
"혹시 그 배우가 너 좋아하는 건 아니고?"
"아… 아닌데."
"흐음, 뭐 그러면 상관 없지. 일 쉽고 돈 준다는데, 일단 해보든가."
우정혁과의 전화를 끊고 나서, 권영도 이사가 기다리는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탕수육 소스를 끓이는 중간에 권영도의 스케줄 매니저가 찾아와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는가 싶더니 금방 돌아가 버렸다. 로드 매니저와도 통화를 하는가 싶더니, 그것도 곧 끊어졌다.
고급 오피스텔 식탁에 권영도 이사와 단둘이 마주 앉았다.
국민배우라고 일컬어지는 남자와 내가 만든 음식을 먹고 앉아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가끔 티브이에서 봤던 리얼 버라이어티 방송이라도 촬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게, 집에서도 멋지게 차려 입은 권영도는 프랜차이즈 음식점 광고라도 찍는 듯 완벽한 표정으로 내 탕수육을 먹었다.
"와, 일반인 수준이 아닌데요? 어디 요리 학원이라도 다녔습니까?"
"그런 건 아니고요… 제 동생이 워낙 고기 요리를 좋아해서 자주 만들어주다 보니까 몇몇 메뉴만 좀 익숙하게 만들 뿐입니다. 탕수육도 그렇고, 설이가 갈비찜 같은 걸 좋아해서요. 그래서 고기를 튀기거나 푹 고아서 만드는 요리는 어느 정도 다 자신 있는 편입니다. 사실 저는 요리를 잘 한다기 보다, 그냥 설이 입맛에 맞게 만드는 것에 숙달된 설이 전용 요리사 같은 거라서요. 설이가 잘 안 먹는 메뉴는 잘 못 만들어요."
"흐음, 그렇군요."
권영도 이사는 와인을 홀짝이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타박상과 가슴팍 상처 때문에 약도 먹는다면서 왜 굳이 와인을 마시는 지 모르겠다. 내 앞에도 잔을 놔주었지만, 술을 즐기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동생분이 부럽네요."
"하하, 뭘요. 설이는 그냥 맨날 먹는 건데요."
"………"
와인 잔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권영도가 무표정한 얼굴을 했다. 내가 볼 때는 연신 웃는 얼굴이어서 아무 표정이 없는 그의 얼굴은 낯설었다.
그가 입을 다무니 지나치게 조용해져서,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겠다 싶었다.
"오… 오늘 집에 가서 설이도 탕수육 해줄까 봐요. 설이는 좀 매운 소스를 더 좋아하니까…"
"자고 가요."
"네?"
"오늘 여기서 자고 가라고요."
권영도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 제가 어제 악몽을 꿨습니다. 오늘도 그 악몽이 찾아올 까봐 이 집에서 혼자 자기가 두려워서요."
"악몽이요?"
뜬금없이 왜 분위기가 공포로 가나 싶었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장난 같지는 않았다.
"꿈속에서… 덩치 큰 표범 같은 게 나를 덮치는 겁니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새하얀 털에 표범 특유의 무늬가 검은 색으로 선명하게 그려져 있고, 아주 커다랗고 무서운 놈이었습니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면서 날 짓누르는데… 그대로 죽는 거 아닌가 싶더라니까요. 눈빛이 퍼런 색으로 변하더니…"
"네! 네, 제가, 자고 가겠습니다! 꿈이 참 뭐랄까, 혀… 현실성은 없네요. 하하…"
"그렇죠. 그런데 마치 있었던 일처럼 선명해요."
무의식이라는 건 엄청나구나. 어떻게 설이의 모습을 그렇게 제대로 떠올릴 수가 있지.
나는 설거지를 하면서도 거실에서 대본을 읽고 있는 권영도를 내내 힐끔거렸다. 설이의 비밀을 알아챈 것 같은 눈치는 없지만, 그래도 그 기억이 트라우마가 되어서 계속 악몽을 꾸다가 뭔가 떠올리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이었다. 상처가 아물고 설이에 대한 어떤 기억도 없을 때까지 내가 잘 보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예고도 없이 갑자기 외박을 하는 것은, 내가 설이에게 가르치는 교육 방침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여태까지 설이가 친구 집에서 자고 오겠다는 말도 한 적 없지만, 혹시라도 밖에서 귀와 꼬리가 튀어나올 까봐 교내 캠핑 같은 것도 보낸 적이 없었다.
고로, 설이는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도 나와 늘 같은 집에서 잤으니 이때까지 혼자 자본 적이 없다. 이제 문단속도 충분히 혼자 할 수 있는 나이였지만, 아무래도 내 눈에 설이는 아직 아기 같아서 혼자 재우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게다가 그렇게 혼낸 상태에서 갑자기 외박을 하려니 그것도 마음이 불편했다.
“어쩔 수 없지…….”
눈물을 머금고 설이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설아, 형 오늘 일 때문에 집에 못 들어갈 것 같아. 밥 잘 챙겨 먹고 문 잘 잠그고 자. 알았지?'
메시지를 남기자, 통 유리로 된 창 밖으로 별안간 번개가 내리쳤다. 깜짝 놀라 커튼을 쳐 보니 천둥이 치면서 비구름이 몰려왔다. 일기예보에서 이렇게 갑자기 날씨가 변한다는 말은 없었는데.
"잠깐 그칠 소나기 같네요."
권영도 이사가 내 옆에 다가와 창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에 바로 진동이 왔다. 설이였다.
'나를 혼자 버려두는 거야?'
어쩌면 단 열 글자로 내 마음을 이렇게 후벼 팔 수가 있는 건지.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 뚝 떨어뜨릴 것 같은 새까만 설이의 눈망울이 떠올라서 가슴을 부여잡았다.
안 되겠다. 생각해보면 설이는 인간 나이로 열아홉일 뿐이지, 아직 더 어린 걸지도 모른다. 비록 표범일 때의 몸은 산채만 했지만, 그래도 그 얼굴을 보면 자꾸 마음이 녹아 내리는 것이, 역시 그건 설이가 아직 애기이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권영도 이사에게 죄송하다고 집에 가보겠다고 말하자.
"저, 이사님. 아무래도…"
씻을 생각인지 목욕 가운을 들고 욕실 쪽으로 걸어가던 권영도가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참, 나를 공격한 것이 들개라고 했죠? 위험할 것 같은데 신고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아뇨! 아뇨… 저기… 어제 주인이 잘 타일러서 데려갔어요… 하하…"
들개의 주인이요, 하고 중얼거리던 권영도가 피식 웃었다.
"그럼 다행이고요."
욕실로 들어가는 권영도에게 그만 집에 가겠다는 말을 할 타이밍을 놓쳤다.
생각해보면, 설이는 표범의 모습으로도 자유자재로 변할 수 있고 요리도 곧잘 하고 집안일도 잘했다. 이제 집에서 혼자 자는 것쯤은 경험해볼 때인지도 모른다. 담임도 설이에게 자립심을 길러주라는 잔소리를 여러 번 했고, 이번이 그 기회인 것이다.
'너 이제 아기 아니잖아. 설이 혼자 충분히 문 잘 잠그고 잘 수 있어.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잘자.'
메시지를 보내자, 이번에는 답장이 오지 않았다. 통 유리 창 밖으로 잔잔하게 비가 내렸다.
한숨을 폭 내쉬며 커튼을 치려는데, 순간 번개가 치며 창 밖으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보인 것 같았다.
그러나 눈을 가늘게 뜨고 빤히 다시 보자 어둑해진 창 밖에는 비만 내릴 뿐,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