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삐딱선
몇 번을 다시 전화해봐도 부재중으로 넘어갔다. 절대로 나를 걱정시키지 않는 착한 설이가 이렇게 오랫동안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은 처음이어서, 혹시 무슨 사고라도 생긴 건 아닌가 걱정이었다. 담임 말로는 홀연히 사라졌다가 다음 수업에는 돌아와있곤 하니까 아마 학교 근처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진짜…."
답답한 마음에 손톱을 물어뜯으며 중얼거리고 있으니, 운전 중이던 권영도 이사가 가볍게 말했다.
"뭐, 어디 피시방이라도 가지 않았을까요? 그 나이 대에는 원래…"
"하아, 이사님. 그저 그런 철없는 아이들과 우리 설이를 똑같이 생각하시는 건, 설이에 대한 모욕이거든요? 다른 애들 용돈 더 달라고 조를 때 우리 설이는요, 용돈 모아서 살림에 보탬이 되려고 주식도 하고… 물론 우리 설이라고 해서 어리광이 없는 건 아니지만 뽀뽀나 조르는 귀여운 수준일 뿐이고, 아무튼, 설이가 수업 땡땡이 치고 놀러 가는 그런 아이는 절대 아닙니다. 형으로서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아… 미안합니다."
순순히 사과하는 권영도 이사 옆에서 식식거리고 앉아 있다가, 감히 신입 사원 주제에 까마득한 상사에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졌다. 싸가지 없다며 잘리는 건 아닌가, 싶어서 슬쩍 눈치를 보는데 권영도는 그다지 기분 나쁜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수업 중이야. 끝나면 연락할게.'
설이에게서 기다리던 메시지가 왔다. 나는 그제야 조수석 시트에 몸을 쭉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운전석 쪽에서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져서 권영도 쪽에도 휴대폰 화면을 흔들어 보여주었다.
"연락 왔어요! 제 동생, 학교에 있나 봐요."
"그래요."
설이의 메시지가 궁금했던 것이 아니었던 듯, 권영도는 대충 대답하며 계속해서 이쪽을 힐끔거렸다.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추고, 권영도 이사의 손가락이 핸들을 톡톡 두드렸다. 그 손길이 초조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권영도 이사는 나를 학교까지 태워주는 이유가 있었다.
"참, 저한테 할 얘기 있으시다고……."
보통 윗사람이 따로 할 말이 있다고 부르는 경우는, 좋은 징조가 아니다. 여태까지의 경험을 미루어 보면 갑자기 퇴사 통보를 한다거나, 월급을 밀렸다가 준다거나, 가게를 그만 접게 되었다고 할 때에 따로 불러 조용히 말하고는 했다. 그루 엔터테인먼트 같이 큰 회사가 갑자기 부도 날 리도 없고, 그런 일이 있다면 이미 매스컴을 탔을 것이다. 구멍 가게도 아닌데 월급을 밀리는 것도 말이 안 된다. 하지만 기획팀 이하원 팀장님이 애초에 제시했던 초봉이 나 같은 초짜에게 너무 셌던 것은 사실이니까, 조금 줄인다거나 할 수는 있겠다.
어차피 내가 그 금액 정도의 일을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당장 더 적게 준다고 해서 생활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니까 겸허하게 받아들이자. 그렇다고 설이가 주는 돈을 생활비로 쓸 생각은 없지만, 어차피 외삼촌이 주시는 돈 조금 모아둔 것도 있으니까…….
"그 반지, 애인이 준 겁니까?"
"네?"
권영도 이사는 웃지 않는 진지한 눈빛으로 나에게 무척이나 쓸데없는 질문을 했다.
나는 권영도 이사의 시선을 따라가서 내 무릎 위에 올려 놓은 내 왼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약지에 반짝거리는 반지에 시선이 꽂힌 뒤에야 내가 반지를 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픽 웃었다.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 보였다.
"이거요, 졸업 선물이에요. 우리 설이가 준 거예요."
"……그 동생분이요?"
"네. 기특하죠? 제가 학교 다니는 동안, 동아리 같은 것도 하나도 안 들어서 졸업 챙겨줄 후배들이 없었거든요. 그게 신경 쓰였는지 설이가 선물해줬어요. 제 동생이 이런 아이랍니다. 하핫, 뭐, 특별히 자랑하려고 끼고 다니는 건 아니고요. 사실 동생 자랑하자면, 이런 것보다도 어릴 때부터 얼마나 영특하고 순했는지 말씀 드려야 해서 시간이 모자라지만요."
"흐음, 동생이… 다이아 반지를 준단 말이죠."
권영도는 석연치 않는 표정으로 내 손을 한참 바라보다가, 신호가 바뀌자 다시 전방을 주시하며 핸들을 돌렸다.
학교 건물이 횡단보도 너머로 보이는 위치까지 왔기에 나는 가방을 쥐고 곧 내릴 준비를 마쳤다.
"이사님, 제가 상담이 얼마나 걸릴 지 몰라서요. 태워주신 것 감사하지만, 돌아갈 때는 혼자 갈 테니까 저 내려주시고 바로 출발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대답 없이 있던 권영도 이사는 학교 앞 마지막 횡단보도 앞 신호에 걸렸을 때, 불쑥 말했다.
"나 한준씨에게 관심 있습니다."
"네… 네?"
자연스럽게 말하는 어투 때문에 그게 고백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데에는 약간의 버퍼링 시간이 필요했다. 권영도 이사는 핸들에 팔을 기댄 채로 내 쪽을 바라보며 진지하지만 딱딱하지 않는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못을 박았다.
"연애의 의미로 말하는 겁니다. 한준씨가 마음에 들어요."
"어…… 저기……"
"그렇다고 지금 당장, 뭘 어떻게 하자는 건 아니니까 부담 가지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내 마음이 그렇다는 걸 알고 있기만 해도 됩니다."
"네에……"
그 자체가 부담인데요, 라고 대답하기에는 너무 높은 분이라서 나는 잠자코 가만히 있었다.
권영도 이사의 성적 취향에 대해서는 미용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누군가에 의해서 억지로 들어버린 바람에, 그가 남자인 내게 고백을 하는 것에 놀라지는 않았다. 아마 그런 소문을 듣지 못했더라도 딱히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 좋아한다는데, 성별이나 다른 구분이 필요한가? 그냥 마음이면 됐지.
문제는 내가 그런 그의 마음에 응해줄 생각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권영도 이사에 대해 '상사' 라는 것 이상의 다른 생각을 해본 적도 없을뿐더러, 내 마음 속은 '동생을 잘 키우자'는 슬로건이 전부였다. 요컨대 따지자면 내 마음은, '한설' 이라는 사람에 대한 생각뿐인 것이다.
"앞으로 지내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채점해봐도 됩니다."
"제, 제가 이사님을요?"
"네. 그래서 한준 씨가 생각하기에 괜찮은 놈이다, 싶으면 그때에는 내게 기회를 줘요."
"아……"
정문 앞에서 내려 꾸벅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고 차 앞문을 닫았다. 멀어져 가는 권영도 이사의 흰 차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
담임은 나를 앉혀두고 한참이나 설교했다.
내용인 즉, '네가 졸업한 뒤로 설이가 학교에 마음을 두지 못하고 갈피를 못 잡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졸업식 이후에 교내에 '한준 한설 형제의 키스 사건'이 화제가 되었던 동안에는 오히려 설이가 학교에서 잘 지냈는데, 요 근래 수업도 잘 안 듣고 홀연히 사라지곤 한다는 것이었다. 담임이 따로 불러내 왜 그러느냐 물어도 대답을 안 하니, 담임 입장에서도 답답할 따름이었다.
"한준, 너 요즘 어디 좋은 회사 취직했다더니, 일하느라 동생한테 너무 신경 안 쓴 거 아니냐. 어?"
"그럴 리가요! 정신 없어서 아침 식사를 잘 못 챙기기는 하지만……"
"저기 말이다, 준아."
담임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너네 형제를 입학 때부터 봐와서 하는 말인데 말이다. 사실 한설 같은 놈이 삐딱선 타면 끝 간데 없이 가는 타입이야. 걔는 네놈 껌 딱지처럼 너한테 의지하는 놈이잖냐. 어?"
"설이가 좀… 그런 경향이 있죠."
"좀이 아니야, 인마! 한설은 내가 보기에 네가 죽으라면 죽을 놈이야. 그 정도로 형을 잘 따른다는 건 좋은 일일지도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위험한 일이다, 이거야. 너네 형제는, 서로 거리를 둘 필요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한설 그 놈도 너 말고 교우관계를 넓혀야 하고, 너도 인마 이제 너무 동생만 쳐다보고 그러지 말어라. 응?"
"……네."
교무실에서 나와 복도를 거닐다 보니, 교실에 있어야 할 설이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보였다. 분명 수업 중인데 설이 책상만 비어 있었다. 수업 중이라서 연락을 못 받는다더니.
가끔 설이와 만나던 교내 산책로에도 가봤지만 설이는 없었다.
구관 창고 쪽에도 없었다. 학교 밖으로 나간 건가, 싶어져 뒷동산 쪽으로 터덜터덜 돌아서 걸어나가고 있는데 별안간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잎사귀가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고개를 들자, 거대한 느티나무 위쪽에 시꺼먼 물체가 올라가 있는 것 같았다. 대체 뭔가 싶어서 눈을 가늘게 뜬 찰나, 나뭇가지들이 태풍을 맞은 듯 부르르 흔들리더니 내 등 뒤로 무언가가 털썩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채 돌아보기도 전에 두 팔이 나를 꽉 끌어 안았다.
헉, 숨을 멈췄다가 무언가가 내 다리를 감싸는 느낌이 들어 시선을 내려보았다. 길고 부드러운 설 표범의 흰 꼬리에 매화꽃 모양의 검은 무늬가 선명했다.
"서, 설아."
내 허리를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꼭 끌어안은 손을 잡았다.
"이, 이 모습 뭐야. 너. 응?"
"……"
"설아, 나 좀 봐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설이의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흰 귀 끝에 까만 털이 내 목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파드득 떨었다. 내게 혼날 것을 걱정하는 건지, 시무룩한 얼굴은 이미 창백해져 있었다. 울먹이는 새까만 눈동자가 흔들리며 나를 시선에 담았다.
집 밖에서 귀와 꼬리를 내놓고 있다니, 평소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혹시라도 타인에 이런 모습이 발각되면 위험해 처한다는 것을 어릴 적부터 수도 없이 귀에 박히도록 교육해온데다가 이제는 스스로도 그런 것쯤은 가늠할 수 있는 나이였다. 일부러 밖에서 이런 모습을 보일 리 없다는 뜻이다.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니, 수업 중이라서 그런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 없다.
일단 큰 나무 사이에 숨듯이 앉으며 설이도 내 옆에 앉혔다. 그리고 반팔 위에 걸쳐 입고 있던 남방셔츠를 얼른 벗어서 설이의 머리 위에 덮어주었다. 설이는 얌전히 내가 하는 대로 가만히 무릎을 굽힌 채 앉아 나무등걸에 기대었다.
설이의 이마를 매만져주자, 귀 끝이 남방셔츠 아래서 움찔거렸다.
"너 혹시, 조절이 안 되는 거야? 그래서 수업 못 듣고 여기 숨이 있는 거야?"
"……"
설이는 대답 없이 슬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혼자 얼마나 무서웠을까. 누군가에게 이 모습을 들킬 까봐 사람 없는 곳에 숨어 있었을 설이의 모습을 생각하니까 눈가가 뜨거워졌다.
병원에 갈 수도 없고, 이런 현상에 대해 어디 물어볼 곳도 없었다. 평생 지켜준다고 다짐해놓고는, 형이 되어서는 이런 상황인 줄도 모르고 있었다니. 속상해서 마른 입술만 깨물고 있는데 설이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노력해봤는데, 잘 안 되는 것 같아. 스트레스 때문인가 봐."
"스트레스? 무슨 일인데, 형한테 말해줘. 응?"
"………"
설이는 긴 꼬리로 나뭇잎들이 잔뜩 쌓인 흙 바닥을 탁 탁 쳐댔다.
"말 못할 고민이야? 혹시 누가 괴롭혀?"
"………"
붉고 예쁜 입술을 꾹 다문 채로 설이는 새초롬하게 눈을 내리깔며 미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는 건지, 그렇다는 건지 확실히 알 수 없어서 애가 탔다. 혹시 어릴 때처럼 시비 거는 놈들이 있다면 내가 지구 끝까지 찾아가서 보복할 생각이었다. 금이야 옥이야 소중하게 길러온 내 동생을 스트레스 받게 해서, 귀 꼬리 조절도 못하게 만드는 놈이 있다니 가만 둘 수 없다. 이글이글 타는 눈빛으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설이는 고민하는 듯한 표정으로 한숨과 함께 작게 중얼거렸다.
"형이… 나 말고 다른 사람들한테만 신경 써주니까."
"응?"
예상치 못한 대답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자, 설이는 우울한 표정으로 제 무릎을 당겨 안았다. 머리에 덮어쓴 내 남방셔츠 안으로 고개를 숙여 표정을 숨겼다.
"하이레벨이니, 임의성이니, 스타일리스트, 그리고… 이사님이라는 사람한테, 하루 종일 신경 쓰고 나는 내버려두잖아. 그렇게 생각했더니, 마음이 불안해져서 자꾸 꼬리가 튀어 나와. 이제 조절하는 방법을 잘 모르겠어……."
"설아, 형 좀 봐봐. 그 사람들은 그냥 밖에서 일하느라 만나는 것뿐이지. 형은 늘 설이 생각밖에 안 해."
"……진짜?"
"그럼! 회사에서도 다들 나 동생 얘기 밖에 안 한다고 놀리는데? 형은 설이랑 잘 살기 위해서 일하는 거야. 형 마음 속에는 설이 밖에 없어!"
"………"
"진짜야, 응?"
나는 연인 앞에 결백을 증명하는 남자처럼 내 가슴을 팡팡 쳐댔다.
그러자 설이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면서 물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형이 나 말고는 아무한테도 신경 안 썼으면 좋겠어."
좀 더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형이… 나만 좋아했으면 좋겠어. 오직 나만."
나는 내게 기댄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대답했다.
"형은 설이만 좋아해. 오직 설이뿐이야."
머리를 덮은 남방셔츠 안에서 뾰족하게 솟아 있던 귀가 스르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바닥을 탁 탁 쳐대던 긴 꼬리도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겨우 한숨을 내쉬며 설이의 머리를 덮었던 셔츠를 걷어내자, 눈물에 젖은 까만 눈망울이 유순하게 나를 올려다 보았다.
"가자, 설아. 일단 집으로 가자. 응?"
"……응."
기운 없이 대답하던 설이는 내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큰 덩치를 웅크려 내 품에 끌어 안겼다. 놀랐을 설이의 등을 토닥여주며 담임의 말을 떠올렸다.
'너네 형제는, 서로 거리를 둘 필요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니.
담임 쌤은 우리 설이를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이 떼쟁이를 어떻게 떼어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
"준이 형! 이제 저희랑 일 안 하신다면서요. 서운해요."
하이레벨의 리드보컬 래디가 내 어깨를 잡아 흔들며 술주정하듯이 중얼거렸다.
어차피 성인인 멤버가 없어서 다들 음료수만 마시는 중이었는데, 마치 술 취한 느낌이라 혹시 다른 테이블의 뭔가를 주워 마신 건 아닌지 걱정이었다.
"맞아요. 그냥 저희랑 계속 일하면 안 돼요? 어디로 가세요?"
막내 니키가 내게서 래디를 떼어내며 물었다. 권영도 이사 쪽 스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말은 나 대신 리더 제이가 전했다. 자신들과는 댈 수 없이 높은 사람에게로 간다는 것을 깨닫고는 한 순간 테이블이 조용해졌지만,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환송의 건배를 했다. 물론 손에 든 것은 모두 탄산음료였다.
꽤 비싸 보이는 고급 레스토랑을 한 층 전체를 빌린 회식이었다. 하이레벨뿐만 아니라 그루 엔터테인먼트 소속의 가수가 몇몇 더 포함되어 있었다.
얼마 전 방영을 시작했던 오디션 프로그램의 모든 촬영이 끝났으며, 아직 방송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권영도 이사가 이끄는 그루 엔터 팀이 우승을 하고 끝난 모양이었다. 그 축하 자리 겸, 하이레벨 애들은 내 환송회라며 내게 따뜻한 인사의 말을 전해주었다.
나는 내가 시끌벅적한 자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환대를 받고 있으니 그것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친해지고 그 사이에서 소속감을 느끼는 일은 꽤나 즐거웠다. 이래서 다들 동아리도 들고, 대학 들어가서 MT 같은 것도 가고 그러는 건가.
음료 한 캔을 다 비우고 있는 사이, 임의성 치프 매니저가 다가와 내 어깨를 건드렸다.
"준군, 아까 말했던 건 말인데… 권영도 이사님이 직접 얘기하고 싶으시다네?"
"아…… 꼭 그래야 할까요?"
"이제 그쪽 소속이니까, 곧 온다는데 문 앞으로 나가봐."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하이레벨 멤버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서 일어섰다.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임의성 치프에게 말을 해놓은 참이었다. 아무래도 설이가 마음의 안정을 찾을 때까지는 집에서 설이를 챙겨줘야 할 것 같다는 것이 내 결론이었다.
설이가 학교 수업을 받는 동안에는 다시 편의점 파트 타임을 뛸 생각이다. 그루 엔터테인먼트 안에서의 일들은 출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데다가 너무 늦게까지 일을 하거나 새벽부터 일이 시작되어서, 아무래도 설이의 뒷바라지를 하는 데에 소홀한 면이 없지 않은 것 같았다.
이제 몇 개월 뒤에는 설이도 성인이 될 테니까 그 정도는 설이도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더니, 생각지도 못한 꼬리와 귀가 말썽이었다. 마음 여린 설이가 소외 당한다고 느끼지 않게 하려면 일단 그루 엔터테인먼트의 일을 그만 두는 게 우선이다.
"준이 형."
"어, 제이야. 왜 나왔어?"
문 밖에서 권영도 이사의 차를 기다리고 서 있으려니, 하이레벨 리더 제이가 내 곁에 다가와 섰다. 손에 들고 있는 게 뭔가 싶어서 내려다보니 담뱃갑과 라이터를 쥐고 있다가 내 시선에 부끄러워하며 등 뒤로 손을 숨겼다.
뭐라고 잔소리를 해주려다가, 연예계 생활이 오죽 힘들면 이럴까 싶어서 그냥 웃어주었다. 제이는 제 손 안의 것들을 만지작거리다가 청바지 뒷주머니에 슥 집어넣었다.
"……형, 저 사실은요. 짝사랑하는 사람 있어요."
"그래?"
제이는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니키 좋아해요. 우리 막내."
"아……"
뭐라도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입만 벌리고 있자, 제이는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이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풋 웃었다. 혹시 누가 들었을까 싶어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다행히도 밤거리에는 몇몇 지나가는 차들의 그림자뿐이었다.
"엄청 오래 좋아했어요. 누구 한 명 쯤은… 알아줬으면, 싶어서요. 어차피 형은 누구한테 떠벌리고 다니지 않을 거잖아요. 그렇죠?"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주자, 제이는 안심한 얼굴이었다.
니키는 지난 번에 내가 애정행각을 목격했던 여자 아이돌과 열애설이 나돌았다. 하지만 또 다른 여자 아이돌과도 데이트 사진이 나돌아서, 지금 양쪽의 스캔들을 무마하느라 행정 쪽이 무척 바쁜 것 같았다.
그 많은 스캔들 속에 리더로서, 짝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속 끓이고 있을까 싶어서 제이를 바라보니 내 눈빛이 전해졌는지 '고마워요' 하고 작게 대답하고는 다시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
잔뜩 취한 권영도 이사가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검은 벤을 운전해서 온 로드 매니저 김형이 일단 타라며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세상에… 어쩌면 이렇게……"
차 안은 마치 소독제를 쏟은 것처럼 알코올 냄새로 가득했다.
뒷좌석 시트에 몸을 기댄 채 느릿하게 숨을 내쉬던 권영도 이사가 조수석에 탄 나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살짝 움직여서 인사했다.
"좀 취해서…… 미안합니다, 일단 여기서 좀 벗어나죠."
술기운이 버거운 듯 숨을 길게 내쉰 권영도가 말을 이었다.
"한준 씨 집이… 어느 쪽이라고 했죠? 일단 그쪽으로 가자, 지훈아."
"네."
로드 매니저 김형이 짧게 대답하고는 내비게이션에 내 집 주소를 찍도록 도와주었다.
얼마 뒤, 우리 집 근처 놀이터에 도착했다. 조용하게 이야기할 곳이라고는 여기뿐이었다.
권영도 이사는 매니저가 사다 준 차가운 생수를 겨우 마시고는 나와 함께 놀이터 벤치에 앉았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매니저는 차에게 대기 하겠다며 떠난 뒤, 권영도 이사와 단둘만 남게 되자 매일 지나다니던 고요한 밤의 놀이터가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권영도 이사는 여전히 숨을 내쉴 때마다 알코올 냄새가 났지만, 만취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눈빛도 또렷했고, 비틀거리지 않고 똑바로 허리를 세운 채 앉아 있었다.
그가 조용히 생수 병을 만지작거리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내가 부담스러워서, 그만 두겠다는 겁니까?"
"아! 아뇨, 아뇨. 일이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서요."
차마 아홉 살도 아니고 열아홉 살 동생을 돌보느라 일 그만두겠다는 말은 할 수가 없어서 뻔한 이유를 댔지만, 권영도 이사에게서 고백 비스무리한 걸 받은 상태에서 갑자기 퇴사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고백에 대한 거절의 의미로 비치는 게 당연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마음을 받을 생각도 없었지만, 그렇게 매몰찬 사람으로 보여지고 싶지는 않았다. 혹시 누가 알겠는가, 설이가 졸업할 때 즈음 다시 그루 엔터테인먼트에 들어갈 수 있게 될지도 모르니까 긍정적인 이미지를 남기고 나오는 편이 좋다.
권영도 이사는 내 대답에도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날, 받아줄 마음은 없는 거죠? 그러니까 이렇게 차갑게 떠날 수 있는 거겠죠."
아니라고 대답하면, 당신을 받아주겠다는 뜻이 되고 맞습니다 하고 대답하면, 천하의 냉혈한이 된다.
"아…… 저기……."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 가로등 불빛 아래로 권영도 이사가 우수에 찬 눈빛으로 나를 가까이 바라봤다.
어느새 그의 얼굴이 코앞에 와 있었다.
긴 눈매와 뚜렷한 이목구비가 슬로우 모션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와, 영화 속에서 보면 꼭 키스 장면이 나올 때 이렇게 화면이 느려지던데……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정말로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진짜 닿았네’ 하는 생각이 들 때까지도 나는 멍한 상태였다. 뜨거운 입술의 낯선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질 때에야, ‘뭐야. 진짜였냐?’ 싶어져서 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빼며 벤치에서 일어섰다.
심장이 그제야 콩닥콩닥 뛰었다. 기습키스라니, 나한테 기습키스라니!
"이, 이사님, 지금 무슨……!"
"미안합니다. 놀라게 할 생각은,"
권영도 이사는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다.
멀리에서 불쑥 튀어나온 커다란 짐승이 권영도의 몸을 덮쳤다. 바람처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