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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남들 다 하는 연애 (16/65)

16. 남들 다 하는 연애

커피 심부름을 얼마나 했던지, 근처 프랜차이즈 카페의 모든 메뉴를 가격까지 전부 외워 버렸다. 아침 일찍 미용실에 가서 머리 세팅하는 하이레벨 애들에게 밥이며 간식 날라다가 먹이고, 벤 내부 청소를 한 뒤, 반납하는 의상들 미리 트렁크에 옮겨 싣고, 퀵으로 온 신발을 리허설 끝나기 전까지 방송국 안까지 가져다 주기 위해서 냅다 달렸다. 짬짬이 운전 면허 필기 시험 준비도 해야 했다.

몸이 바쁘고 힘든 건 괜찮다. 하지만 등교하는 설이가 아침 밥 먹는 것도 못 보고, 새벽부터 출근해야 하는 게 가슴 아팠다. 하이레벨 잘 먹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꼭 설이 생각이 났다. 이래서 아기를 보육원에 맡기고 출근하는 부모들이 눈물을 머금고 일하는 모양이었다.

"저기, 준이 형. 저 잠시만…"

"응?"

하이레벨 리더 제이가 내게 손짓했다.

바쁜 일이 끝나고, 촬영장 구석에서 면허 필기 예상문제집을 들춰보고 있던 도중에 제이를 따라서 복도로 나갔다. 아무도 없는 비상구 계단 쪽으로 나를 끌고 간 제이가 안절부절 못하며 큰 눈에 초조함을 담고 있었다.

"왜 그래? 무슨 문제 있어? 뭐 사다 줄까?"

"아뇨. 그게 아니라… 아까 보셨던 거, 모르는 척 해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어두운 표정의 제이를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그제야 뭘 말하는 건지 깨달아서 아!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정신 없이 바빠서 잊고 있었지만, 방송국 내 스케줄 도중 내가 목격한 게 있긴 했다. 

다리가 아파서 무대 뒤쪽에 잠시 쭈그리고 앉아 있을 때였다. 하이레벨의 키 큰 막내 니키가 다른 여자 아이돌과 몰래 애정행각을 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아무도 안 보고 있는 틈을 타서 등 뒤로 서로 손바닥을 간질였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하필 그 장면이 정면에 보이는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고,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둘이 비밀 연애 하는 구나' 깨달을 만큼 정확한 제스쳐였다. 

사실 내게는 그런 남의 연애 사정보다는, 곧 있을 운전면허 실기 주행 시험에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더 우선이었다. 머릿속에서 이미 그 장면을 잊은 지 오래였다.

제이는 간절한 표정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나는 어디 말할 생각 전혀 없어."

"…감사합니다."

제이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지만, 어딘지 슬픈 눈길이었다.

"그런데 너랑 멤버들은 다 알고 있는 거야?"

"아뇨, 저만 알아요. 다른 애들은 몰라요."

제이는 나에게 기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형은… 짝사랑해 본 적 있어요?"

그 질문에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생각해보건대, 나는 짝사랑은커녕 사랑을 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가족과 친구,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제이가 묻는 게 '연애적 감정'이라는 것은 모르지 않았다. 

그런 쪽에 완전히 문외한이라서 어색한 미소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더니 제이는 그렇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제이가 누군가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쯤은 나도 눈치챌 수 있었다. 제이는 내게 뭔가 더 말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다시 입술을 꾹 다물고 내게 인사했다.

멀리 달려가는 제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설이의 연애 사정은 어떨까 궁금해졌다.

설이를 좋아하는 여학생들이 무척 많다는 것은 나도 아는 사실이지만, 정작 설이는 그들 중 누구에게도 특별히 관심이 없어 보였다. 사실은 몰래 누군가와 교제하는 중일지도 몰랐다. 한참 공부에 집중해야 할 수험생이기에 반발심으로 연애에 관심이 높아질 수도 있는 것이다. 

직접 물어봐 봤자, 착한 내 동생은 테이블에 턱을 괜 채 귀여운 얼굴로 "나는 형밖에 없어. 형 말고는 다 관심 없어." 하면서 예쁜 말이나 해줄 게 뻔했다.

드디어 한국에 온 우정혁은, 내가 일하는 그루 엔터테인먼트 본사까지 놀러 왔다. 성격 좋은 임의성 치프 매니저는 친구한테 기획사 구경도 시켜주고 잠깐 놀다 오라며 식사 시간을 길게 빼주었다. 사내 카페에 앉은 우정혁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본사가 생각보다 크진 않네."

"아이고, 대궐 같은 집에 사는 도련님 눈에는 그러시겠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네며 핀잔을 주자, 우정혁은 빨대를 쪽 빨며 길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아, 내가 오래 살다 보니 한준이 사주는 커피를 다 마셔보네."

"사원 할인 되거든. 한 잔 더 사줄까?"

"됐어. 벼룩의 간을 빼먹지."

우정혁은 여행 선물이라며 곰돌이 모양 병에 담긴 하와이 꿀과 쿠키 등을 안겨주었다. 나는 우정혁의 고등학교 졸업장과 그것들을 맞바꾸었다. 멋지게 정장을 차려 입고 흰 셔츠의 팔 부분을 걷어 올린 우정혁은, 백수 주제에 나보다 한 살이 더 많기 때문인지 오히려 나보다 더 사회인처럼 보였다.

"어차피 넌 좋은 물건 사다 줘도, 먹는 것보다는 덜 좋아할 것 같아서."

"잘 아네. 고맙다."

우정혁은 잠시 몇 달 간 한국에 머물러 있다가 곧 해외 유학을 갈 예정이라고 했다. 아마 영국이 될 것이라는 말을 전했다. 고등학교 재학 때부터 이미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학교에서 내내 붙어 다녔던 친구 놈이 멀리 바다 건너 떠난다는 소식을 들으니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우정혁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우정혁, 너 연애 같은 거 해본 적 있냐. 혹시 지금 누구 만나?"

"오… 한준치고는 꽤나 신선한 질문이네."

다리를 꼬고 앉은 우정혁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던 버릇 그대로 빨대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여자 몇 번 만나봤지. 오래 사귄 적은 없지만."

삐딱한 시선으로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있다.

"관심 있는 사람 생겼냐."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우정혁은 내 칼대답에 그러면 그렇지, 하고 중얼거렸다.

"그렇겠지. 넌 네 동생 놈한테 밖에는 관심 없으니까. 너 설마 경험도 전혀…? 아, 물을 필요도 없겠다."

"아, 진짜 대낮에, 미친놈이. "

테이블 밑으로 정강이를 차줬더니, 무릎을 감싸며 앓는 소리를 냈다. 동정남이 사람 때린다며 중얼거려서 한 번 더 차줬다.

근처 공용 주차장이 꽉 차서 차를 아무데나 대놨다며 우정혁은 커피도 다 마시기 전에 일어났다.

"아무리 바빠도 다 연애하고 살더라. 특히 너 같은 사람은, 동생한테서 좀 벗어나서 다른 사람도 좀 네 삶에 끼워줄 필요가 있을 지도."

말이 쉽지, 너나 연애 해라, 하면서 우정혁의 등을 밀어 밖으로 보냈다.

***

면허증을 발급 받았지만, 임의성 치프 매니저는 아직 운전에 미숙한 나를 바로 배우 전담 로드로 보낼 수 없다며 시간 날 때마다 가까운 길을 내게 운전 시켜 심부름을 보냈다. 

신기하게도 전부 권영도 이사의 스케줄과 관련된 일들이었다.

포털사이트 프로필 정도에 의하면 권영도는, 나보다 일곱 살이 많은 남자였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다수 주연을 맡은 배우였고, 데뷔는 꽤나 일찍 했다. 보이그룹 리더 출신이었는데 그루 엔터테인먼트의 설립 공신으로 지금 이사 자리까지 올라온 모양이었다. 

몇 년 채 자동차 브랜드 광고 모델이어서 스크린 도어에도 버젓이 얼굴이 붙어 있었는데 왜 나는 몰랐을까. 무척이나 유명한 연예인이었다. 그만큼 유명세가 있으면, 사람이 거만하거나 싸가지 없기 마련인데 권영도는 담백하고 서글서글한 성격인 듯 했다.

일개 심부름꾼인 나를 대하는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미안합니다. 이거 또, 한준 씨를 귀찮게 만들어 버렸네요."

"아뇨! 이게 제 일인데요. 편하게 이것저것 시키셔도 됩니다."

미용실까지 그의 웹 파우치를 가져다 주자, 그는 고맙다며 싱긋 웃어주었다. 고급 브랜드 로고가 찍힌 가죽 파우치가 혹시라도 흠집 날 까봐 종이 백 안에 파우치를 담아서 조심스레 운반했다. 파우치 안에서 아이패드를 꺼내는 것을 보며 겨우 훅, 숨을 내쉬고 뒤돌아 서려는데 그가 나를 불러 세웠다.

"한준 씨. 나 곧 끝나니까 같이 밥 먹고 가요."

"네? 아니, 저는 괜찮습니다."

"이것도 일이니까 사양하지 말고, 저쪽에서 기다려요."

"아… 네, 감사합니다."

여러 번 봐서 얼굴을 익힌 권영도의 스케줄 매니저는 나를 미용실 한쪽의 소파에 앉히고 전화를 받으며 급히 자리를 떴다. 미용실 스텝 하나가 내게 오렌지주스를 따른 유리컵을 서빙해 주었다. 다들 바쁜데 멀뚱히 앉아 있으려니 민망해서 휴대폰을 열었는데, 설이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여덟 시에 데리러 갈게. 같이 집에 가자, 형.'

내가 이쪽에서 일하기 시작한 이후로, 설이는 독서실도 잘 가지 않고 멀리까지 매일 나를 찾아왔다. 처음 한 두 번이야, 괜찮았지만 이렇게 자꾸 설이의 시간을 빼앗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단호한 말투로 답장을 보냈다.

'너 수험생이잖아. 형 혼자 갈 테니까 너는 공부에 전념해.'

서운하게 생각한대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지금 설이를 좋은 대학에 보내고, 내 힘으로 잘 키우고 싶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비록 현재 한가하게 오렌지 주스나 마시고 있지만, 어쨌든 일하는 중인 것이다.

설이는 내가 월급을 받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계속해서 내게 매달 삼백만 원씩 건네주었다. 시위하는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일이 힘들면 언제든 그만 둬도 된다'는 다정한 말도 귀에 박힐 정도로 끊임없이 해주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도깨비 주머니처럼 이렇게 꾸준히 돈이 나오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불법적인 일은 하지 않는다는 설이를 믿기로 했다.

"……너무 차갑게 말했나?"

설이에게서 그 후로 답장이 오지 않자, 초조해지는 것은 나였다. 이런 게 연애할 때 말하는 밀당인 걸까. 수업 중이라서 휴대폰을 못 보는 거겠지.

"권영도 씨 스텝이에요?"

옆자리에 누가 털썩 앉으며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무척이나 화려한 중년 여자였다. 분명 내게 말을 걸고 있지만, 긴 손톱으로 머리카락을 빗어 넘기며 시선은 잡지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얼버무리듯 네, 하고 작게 대답했다. 여자는 흐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권영도, 나이스하지."

별안간 잡지를 펼쳐 보던 여자가 고개를 들더니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근데 자기, 꽤 귀엽게 생겼네. 매니저 조금 하다가 배우 쪽으로 빠질 계획이죠?"

"예? 아니요…. 그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왜. 얼굴 아깝게."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저는 그저 돈 열심히 벌어서 동생 잘 키울 생각뿐이라서요’ 하고 내 인생 계획까지 읊어줄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 그저 어색한 미소만 띄었다. 중년의 여자는 보조개가 깊게 들어가도록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아무튼 조심해요. 권영도가 어린 남자 좋아한다는 소문 알죠."

"네?"

"게이라고 말 많잖아. 잡아 먹히지 않게 조심하라구."

여자는 속삭이듯 말했지만, 표정만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이내 미용실 스텝이 다가와서 그 여자를 데리고 갔다. 나는 일어서서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

가벼운 식사를 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나의 오산이었다. 비싸 보이는 한우 고깃집의 룸 안으로 초대되었다. 하이레벨 애들은 맨날 배달 도시락 아니면 패스트푸드 아니면 샐러드로 끼니를 때웠는데, 역시 슈퍼스타 급이 되면 식사도 고급으로 바뀌는 모양이었다.

권영도의 매니저들과 스텝들이 다 함께 하는 자리였다. 이 안에서 나와 스타일 팀의 어린 막내가 가장 아래일 것이다. 사회생활 잘 하려고 자연스럽게 물 컵을 나르고 반찬을 정렬하고 고기를 굽는 나를, 권영도가 끌어가더니 제 옆에 앉혔다.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차돌박이 된장찌개를 보며 침을 삼키고 있으니 그가 내게 수저를 들려주었다.

"많이 먹어요.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밥 사는 거니까."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면서 동시에 차돌박이를 얹은 밥 한 숟가락을 볼이 터지도록 입 안에 집어넣었다.

"한준 씨 다음주부터는 나랑 일하게 됐거든요."

네? 하고 묻고 싶었지만 입 안이 가득 차서 눈만 댕그랗게 뜨고 있으려니 권영도가 픽 웃으며 물 잔을 건넸다. 빠르게 우물우물 음식을 씹어 넘기고 물을 마신 뒤에야 겨우 입이 열렸다.

"크흠, 저기, 저는 다음주부터 조안율 배우님 로드 매니저 보조로……"

"그거 내가 가로챘습니다. 한준 씨는 이제 제 담당이에요."

"아……"

"싫습니까?"

진심으로 걱정하는 눈빛의 권영도를 보며 나는, '일하는데 좋고 싫고가 있나?' 싶었다. 일단 내 의사를 물어봐 주는 것이 낯설고 감사해서 재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뇨. 그냥 갑자기 바뀌어서요."

"다른 매니저 분들하고 인사들 나누세요. 우리, 잘 해봅시다."

나는 얼떨결에 권영도와 악수하고, 일하는 도중인데다가 낮이라서 술 대신 콜라를 받아 마셨다.

연예인답지 않게 권영도는 곁에 있는 나를 잘 챙겼다. 불판 위의 고기가 알맞게 구워질 때마다 내 앞 접시에 옮겨 담아주었다. 타인에게 이런 호의를 받는 것이 어색해서 몇 번이나 거절했지만, 권영도는 마치 어미 새가 둥지의 아기 새에게 먹이를 날라주듯 그런 행위를 반복했다. 결국 저버린 나는 얌전히 고기를 받아 먹었다.

잘 구워진 소고기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 빤히 바라보고 있자, 권영도가 물었다.

"뭐해요? 고기가 이상합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동생 생각이 나서요."

나는 오물오물 밥 먹을 때의 햄스터 같은 설이 얼굴을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제 동생도 소고기 엄청 좋아하거든요. 워낙 얌전한 편이어서,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막 급하게 먹거나 하지는 않는데… 눈빛을 보면 '맛있어 하는 구나' 알 수 있어요. 육회를 특히 좋아해요! 갈비찜 같은 것도 맵게 해주면 잘 먹고요. 물론, 가리는 음식이 없어서 뭐든 잘 먹기는 하지만요. 왜, 어릴 때 애들 반찬투정 많이 한다는데, 우리 설이는 그런 것도 없어서 키우기 참 수월했거든요. 그래서 저랑 다르게 길쭉하니 키도 크고 잘 자랐나 싶더라고요. 애기라 고생시키기 싫어서 주방 일 돕는 것도 잘 안 시켰는데, 요즘에는 요리도 제법 해요. 어쩌면 그렇게 국물 맛을 잘 내는지! 역시 머리 좋은 애는 뭘 해도 잘 하나 봐요. 밥 먹을 때도 뺨이 볼록해서 오물오물 먹는 게 얼마나 예쁘냐면……."

말하다 보니, 이렇게 맛있는 고깃집에 설이와 함께 있지 않다는 사실이 슬퍼져 버렸다.

"하아, 동생 보고 싶네요."

권영도는 신기하다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동생을 엄청 사랑하시네요."

자주 들어온 말이라서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네에, 하고 대답했다. 권영도는 지난 번에 봤던 설이의 얼굴을 떠올리는지 가만히 나를 응시하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 둘이 친형제 맞습니까?"

"네? 왜… 왜요, 왜 물어보세요?"

이런 질문에 당황하면 안 되는데, 너무 방심했던 탓인지 표정이 굳어버렸다.

"신기해서요. 두 사람, 전혀 안 닮은 데다가 동생분은… 마치 한준 씨 연하의 애인 같아 보이던걸요."

"무,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권영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기분 나빴다면 죄송합니다. 동생 분께서 워낙 잘 생기셔서 그렇게 느꼈나 봐요."

그 뒤로는 내게 어느 정도 일에 적응은 되었는지에 대해서 물어보았고, 화제는 곧 현재 권영도가 출연 중인 현직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하이레벨도 함께 출현 중이었는데, 소속사와 상관 없이 각자 찢어져 팀을 이루고 퍼포먼스를 준비해서 경연하는 내용의 프로그램이었다. 

권영도는 거기에서 심사위원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매니저들과 어우러져 대화하는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되었다. 나도 맞춰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머릿속에서는 미용실에서 들었던 권영도의 소문이 떠다녔다.

……혹시 권영도가, 설이에게 첫눈에 반한 건 아닐까. ‘연하의 애인’ 운운하는 게, 아무래도 이상하잖아. 보통 남의 동생에게 그런 표현을 쓰나? 혹시 설이가 마음에 들어서, 그래서 형인 나를 이용해서 설이에게 접근할 목적인 거라면 어떡하지?

동생이 너무 뛰어나게 예쁘니까 걱정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다.

"한준 씨, 전화 왔는데 안 받아요?"

내 반대편 쪽에 앉아 있던 스케줄 매니저가 내 어깨를 툭 쳤다. 테이블 위에 놓인 내 휴대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저장된 이름을 보니 나의 고등학교 담임이었다. 지금은 설이의 담임이 되셨다. 

휴대폰을 들고 룸을 벗어나 고깃집 복도에서 전화를 받았다.

"네, 쌤."

"한준! 네 동생이 갑자기 대학을 안 가겠다는데 무슨 일이냐, 어?"

"예?"

"얘가 왜 갑자기 수능도 안 보고 대학 진학을 안 하겠다고 뻐기냐, 뻐기기를. 너는 형이니까 뭐 좀 알 거 아니냐, 어?"

"그… 그게 무슨, 잘못 아신 거 아녜요? 쌤, 지금 저랑 설이 착각하셔서 그런 거 아니에요? 대학 안 간 거는 저 한준이고요. 제 동생은 설이잖아요."

"이게 지금 선생을 알츠하이머 환자로 만들고 있네. 너 말고 네 동생이 안 간다고, 인마! 그리고 한설이가 요즘 수업도 자주 빠지고 중간 중간 없어지는데, 그것도 너 모르지. 너 빨랑 교무실로 찾아와라. 어?"

청천벽력 같은 일이다. 우리 착한 설이가 수업도 자주 빠지고, 대학도 안 가겠다니!

아침까지 아무 말도 없었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설이에게 바로 전화를 해봤지만 받지 않았다. 점심 시간인데 받지 않는 걸 보면 내 잔소리를 피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냅다 룸으로 되돌아가서 내 가방을 집어 들었다. 

권영도에게 급히 상황을 설명했다.

"저, 동생 학부모 면담 때문에 지금 학교에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끝나면 바로 회사로 돌아올게요."

"진짜 동생 예뻐하네요, 한준 씨."

권영도는 재미있다는 듯 웃더니 일어섰다.

"내가 학교로 데려다 줄게요. 내 차 타고 같이 가요."

놀란 내가 거절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모든 스텝들이 '갑자기? 안 하던 짓을 이렇게 한다고?' 하는 눈빛으로 일제히 올려다 봤다. 권영도는 민망한 듯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도, 그 사이에 내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내 팔을 붙잡았다.

"한준 씨에게 할 얘기도 있고 말이죠."

"아… 연예인이신데, 괜히 애들 많은 곳에 가시면 불편하실 텐데요? 그리고 저 정말 괜찮습니다. 혼자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학교에 가면 우리 설이 만날 수 있으니까, 은근슬쩍 같이 가려는 거 아니야? 

의심의 눈초리로 나는 가방 끈을 꾹 쥐었다. 권영도는 그러나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차피 저는 차에만 있을 테고, 제 차 타고 가면 빠를 겁니다. 그리고 제가 함께 가면, 그대로 바로 퇴근하셔도 됩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며, 나는 바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감사합니다. 신세 좀 지겠습니다."

칼퇴의 유혹은 이길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 빨리 교무실에 가야 하니까, 찬 물 더운 물 가릴 때가 아니다.

차 키를 들고 일어서는 뿌듯한 표정의 권영도를 졸졸 따라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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