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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착한 아이로 있지 못해. (15/65)

15. 착한 아이로 있지 못해.

"간단한 일부터 설명할게."

자신을 행정 매니저라고 소개한 이희철은, 자신을 희철이 형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이하원 팀장은 나와 계약서를 작성해주었지만 그 이후로는 만날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정말 높은 사람이었던 모양이었다.

희철이 형은 나를 데리고 다니며 지하 구내 식당부터 맨 위층의 사장실 층까지 쭉 올라가며 건물 내부 설명을 마치고, 내가 할 업무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러니까 심부름꾼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네에."

"지금은 일단 신인 그룹 애들 쪽에 있다가, 너 면허 따고 운전 좀 익숙해지면 조안율 로드 맡기려고 해."

"네에."

"조안율이 누군지는 알지?"

"아뇨."

희철이 형은 내 대답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아까부터 희철이 형이 입에서 나오는 모든 연예인들의 이름 중에 내가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어서 죄송스러울 지경이었다. 우리 설이를 파티에 파트너로 데려가고 싶어 했던 한지윤이 사진으로 검색해서 보여줬던 기태훈을 안다고 했더니, 남의 소속사 배우 이름 알아서 뭐하냐고 욕을 먹었다.

내가 오늘 처음으로 한 일은, 희철이 형에게 아이스 카페라테를 대령하는 일이었다. 뚜껑을 열어 벌컥벌컥 커피를 마신 희철이 형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얼굴이 아침보다 훨씬 피곤해 보였다.

"잘 들어…. 조안율은 우리가 지금 밀고 있는 신인 배우야. 드라마 '카운트'에 출현 중이고. 조안율 로드 매니저가 한 명 더 필요해서 곧 네가 들어 갈 거야."

"네에."

"그리고 일단 네가 맡게 될, 아니지… 너를 맡기게 될 쪽은 아이돌 그룹 하이레벨 팀인데, 데뷔한지 세 달도 안 되어서 애들 착하고 순수해. 그쪽 치프 매니저가 나랑 친한데, 그래서 내가 너 일단 거기에 맡겨보자고 했어. 하이레벨 애들 미리 검색해서 이름 외우고 앨범도 들어보고 그래라. 알았지?"

"네에!"

"어휴… 앞길이 멀다, 멀어."

"열심히 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형."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희철이 형은 알았다며 내 등을 다독였다.

비록 연예인에 관심은 없지만, 뭐든 일을 맡으면 빨리 습득하고 내 몫을 해내는 편이었다. 그렇지 못하면 바로 잘리는 단기 아르바이트를 주로 해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휴대폰에 간단히 메모했고, 도중에 혹시 설이에게서 메시지가 오지 않았나 확인했지만 연락이 없었다.

결국 내가 고집을 꺾지 않고 그루 엔터테인먼트로 출근하겠다고 했을 때부터 설이는 입을 다물고 슬픈 표정으로 시위하는 중이었다. 웬만하면 내가 다 져주는데, 이번에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의사 표현을 했더니 어쩔 수 없이 나를 내버려두는 모양이었다. 한동안은 바짝 엎드려서 설이 기분 풀어줘야지, 생각하며 한숨 섞인 웃음을 내뱉었다.

"좋아. 구내식당에서 점심 먹고 오후에 하이레벨 애들한테 인사하자. 그 전에 그룹 정보 좀 보고. 알았지?"

"네, 희철이 형. 바쁘신데 가보셔도 돼요. 저 아까 식당 이용하는 방법도 배웠고, 밥 먹고 나서 2층 연습실 쪽으로 제가 찾아갈게요."

"그래, 그럼 나는 밀린 업무 좀 봐야겠다. 어려운 일 있으면 그쪽 치프 임의성한테 말해라."

"네에!"

꾸벅 인사하고, 바로 구내식당 쪽으로 향했다.

사원증을 태그하면 무료로 식당을 이용할 수 있다니, 너무 기뻐서 심장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게다가 학교 급식과 다르게 메뉴도 여러 가지 중에 정할 수 있고, 전체적으로 음식 퀄리티가 높은 것이 한 눈에 보였다.

오늘의 특식이라는 삼계탕을 먹고 앉아 있으려니, 설이 생각으로 눈물이 앞섰다.

"……우리 설이도 이거 좋아하는데."

퇴근길에 닭 한 마리 사서 푹 고아 먹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수저를 들었다.

아직은 출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고, 일정 루틴이 없어서 가끔 설이 아침과 저녁밥을 챙겨 먹이고는 있지만 곧 그것도 못하게 될 것 같아서 마음이 안 좋았다. 그래도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내가 따끈한 밥을 지어 먹이고 싶은데, 돈 벌면서 설이를 돌보려니 쉽지가 않다.

닭 뼈를 발골 하고 그릇을 거의 비웠을 때쯤, 휴대폰 진동이 느껴졌다. 혹시 설이 전화인가 싶어 급하게 화면을 보니 우정혁이었다. 느릿한 손길로 물부터 마신 뒤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한준, 이거 국제 전화다. 나 아직 호놀룰루에 있어."

"전화비도 비싼데 오면 연락하지, 뭘 국제 전화씩이나."

요즘은 통화 음질이 좋아서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우정혁의 웃음소리가 잘 들렸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출국하기 전보다 훨씬 기분이 나아진 것 같았다.

"졸업식에 참석을 못했더니, 다시 돌아가면 학교 다녀야 할 것 같다."

"야, 난 설이 혼자 등교하는 거 보면 기분 이상해. 나만 땡땡이 치는 것 같고."

"거기 기획사에 일하러 간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일단 삼계탕의 맛부터 설명했다. 분명 타지에서 한식을 못 먹고 있을 것 같아 놀리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우정혁은 하와이에도 한식 식당이 있다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렇구나, 내가 어디 외국을 나가 봤어야 알지.

우정혁은 나 말고는 교내 친구도 없으면서, 어떻게 소식을 접했는지 능글맞은 웃음소리와 함께 대뜸 말했다.

"야, 너 졸업식에서 유명 인사됐던데."

"아…"

"운동장 한복판에서 졸업 기념으로 친동생과 딥키스라니, 장난 아니네. 한준."

"아, 됐어. 끊어, 새끼야……."

우정혁의 음험한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들으며 통화 종료버튼을 눌렀다.

안 그래도 그 후, 설이의 등 뒤에 숨은 채로 교무실에 갔는데 담임은 어떻게 그렇게 소식을 빨리 들었는지 나를 앉혀두고 설교를 늘어놓았다. 너희 형제가 서로 애틋한 것은 알지만, 뭐든 과유불급이라 애정표현도 도를 지나치면 안 되는 법이라며 근심 섞인 얼굴로 말씀하시는데 민망해서 얼굴이 뜨거워져 혼났다. 반면에 설이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멋지게 차려 입은 채로 학교 복도를 거닐며 연신 싱글벙글 이었다.

학교에서 설이와 나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라도 났으면 어쩌나, 싶어서 학교 가는 설이에게 애들이 피하거나 수상쩍게 바라보지는 않냐고 물었더니 설이는 '아냐, 다 좋아.' 하고 상쾌하게 대답했다.

어쩌면 변태 같은 친형이 있다는 괴소문으로, 제 주변에 달라붙는 추종자들을 좀 덜어내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설이에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됐다면 된 거니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

"와, 여기에서 또 만나네요?"

아이돌 하이레벨의 무대 연습이 끝나지 않아서, 연습실 밖 복도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치면서 인사를 건넸다.

고개를 들어서 그 남자의 얼굴을 봤지만,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일단 누가 봐도 잘 생긴 연예인의 외모였는데, 캡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있었다. 평행우주 속 내가 아닌 이상, 나에게 서로 얼굴 아는 연예인이 있을 리가 없다.

생전 초면인 것 같은 사람이 눈 앞에 웃고 서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나는 뻣뻣하게 눈치를 보며 서 있었다.

그 뒤로 다가오는 치프 매니저 임의성과는 미리 인사를 나눴기에 아는 사이였다. 나는 헬프 사인을 보내듯 간절한 눈빛으로 임 치프님을 쳐다보고 있었다. 임 치프는 가까이 와서 그 남자와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놀란 듯 내 어깨를 찰싹 때렸다.

"준군, 권영도 이사님이랑 아는 사이였어?"

"아… 저기……."

안다고 말할 수도 없고, 모른다고 말할 수도 없는 애매한 분위기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자 캡모자를 쓴 그 남자는 내게 시선을 둔 채로 임 치프 쪽에 말을 걸었다.

"준군?"

"어, 한준이라고 새로 들어온 새끼 매니저에요. 권 이사님은 준군 어떻게 알아요? 이제 출근한지 일주일도 안 된 생초짜 신입인데? 스무 살이래요, 애기 같죠."

"아, 안녕하세요. 한준입니다."

눈치껏 고개 숙여 인사했더니, 남자는 내 얼굴을 빤히 보다가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흠, 반갑네요. 나는 또 어디 연습생인 줄 알았는데, 매니저 쪽이었네."

"그쵸, 준군 예쁘장하게 생겼죠? 나는 처음에 복도 걸어오는데, 이번에 숙소 들어온 앤 줄 알았잖아요."

권영도 이사라는 사람은,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팔짱을 낀 채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뭐야. 일 제대로 할 놈인지 아닌지 관상이라도 보는 건가. 

'이사'라는 타이틀이 아무래도 무척 높아 보여서 밉보이지 않으려고 앞쪽으로 공손히 손을 모아 잡고 착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그 권영도 이사가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시원스럽게 한 바탕 웃고 나서는 눈가의 눈물을 닦아냈다.

"아하하, 아… 나 정말 기억 못 하나 보네. 우리 만났었잖아요, 디엘 행사 기억 안나요? 청담 엘리와이?"

"아!"

나는 놀라 그의 얼굴에 삿대질을 했다가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내렸다.

설이가 파티 끝나고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나한테 말을 걸었던 까만 피부의 남자였다.

그때는 멋들어진 정장을 입고 있었던 데다가 지금과 헤어 스타일도, 분위기도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알아보기 힘들었다. 게다가 그때는 왠 쓸데없는 사람이 말을 건다 싶어서 제대로 얼굴도 보지 않았었다. 

다시 얼굴을 살펴보니, 인상에 남을 만큼 뚜렷한 미남인데 왜 이렇게 나는 눈썰미가 없을까.

"아무튼 반가워요. 하이레벨 애들 맡았나 보네."

"아, 준군은 여기 잠깐만 있다가 조안율 로드로 붙는대요."

"흐음."

권영도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것처럼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권영도 이사와 임의성 치프 매니저와 함께 셋이 연습실 안으로 들어가자, 후끈한 열기가 먼저 느껴졌다. 시끄럽게 스피커에서 울리는 노래 소리를 끄고는 땀 범벅이 된 청년 여섯 명이 입구 쪽으로 달려왔다. 일제히 정렬해서 맞춰 서서는 권영도 이사를 향해서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하이레벨입니다!"

바짝 긴장한 그 목소리에 괜히 나까지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권영도 이사가 그래, 하고 대답하고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그들에게 전하는 것 같았다.

"같은 소속사라고 해서 봐주는 거 없으니까, 준비 제대로 하고."

"네!!"

귀청 떨어질 정도로 큰 대답 소리에 눈이 절로 깜박거렸다.

권영도 이사는 구석에 서 있던 나의 어깨를 한 팔로 끌어안아 하이레벨 멤버들 앞으로 데려왔다. 

마치 친한 사이라도 되는 양, 어깨동무한 채로 나를 끌어안고 있는 그의 품 안에서 나는 놀라 눈만 크게 뜬 채로 권영도 이사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씩 웃으며 그들 앞에 나를 소개했다.

"여기는 한준 씨라고, 신입 매니저 분. 잘 해드려."

잘 해야 하는 건 이 사람들이 아니라 나일 텐데, 싶어서 허둥지둥 고개를 숙였는데 하이레벨 그룹 멤버들은 이런 소개와 인사가 익숙한 건지 일제히 내 쪽으로 고개 숙이며 잘 부탁 드립니다! 하고 우렁차게 인사했다. 웃는 얼굴들을 보니 다들 내 또래라서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의성 씨, 나 좀 잠깐 보죠."

권영도 이사는 나를 연습실에 버려두고, 임의성 치프 매니저와 함께 밖으로 나가버렸다.

"저기, 형 몇 살이세요? 되게 어려 보이시는데?"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꾸물꾸물 내게 다가오는 하이레벨 멤버들 중에 가장 키가 큰 청년이 내게 불쑥 물었다.

"야, 갑자기 그렇게 물어보면 실례지. 죄송합니다, 형. 얘가 좀 모자란 애라서요."

눈이 무척 큰 멤버가 땀에 젖은 탈색 머리를 뒤로 넘기며 겸연쩍게 웃었다. 

미리 정보 알아본 것에 의하면 눈 큰 쪽이 리더였고, 키 큰 쪽이 막내였다. 투닥거리면서 싸우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설이 생각이 났다. 우리 설이도 학교에서 친구들하고 이렇게 놀고 있을까.

스텝이 다가와서 내 어깨를 쿡쿡 찔렀다.

"준 씨, 이쪽으로 와서 짐 좀 옮겨요. 엘리베이터 타고 지하 1층 창고에 갖다 놔주세요."

"네!"

열심히 돈 벌어서 설이 고기 사줘야지, 절로 기합이 들어갔다.

***

"대파 한 단하고, 닭고기, 음… 인삼도 좀 사야 할 거고…"

퇴근길에 장볼 것들 목록을 작성하며 뒷문 쪽으로 나와 걷기 시작했을 때, 내 앞으로 아이보리 색상의 길다란 오픈카 한 대가 멈춰 섰다. 이런 걸 타고 다니려면 유지비가 꽤나 필요할 텐데, 얼마나 벌어야 타는 걸까. 나 같으면 그 돈으로 저렴한 국산 차 타면서 남은 돈은 저금할 텐데. 

쓸데 없는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들자, 핸들에 팔을 걸친 남자의 얼굴이 낯익었다.

"아."

"퇴근하나 봐요. 집 어디쯤이에요? 태워줄게요."

캡 모자를 벗으며 눌린 머리를 가볍게 털어낸 권영도는, CF에나 나올 법한 미소를 흘리며 조수석 쪽으로 턱짓했다. 검색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나보다 대여섯 살은 많아 보이는데,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을 지도 모른다. 연예인들은 도통 얼굴로는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렵다고들 하니까.

일개 신입사원에게 이사쯤이나 된 분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건 무척 감사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불편한 배려는 딱 질색이었다. 세상에 공짜란 없으며, 무언가를 받았으면 그 배로 되돌려줘야만 하는 게 세상의 이치라는 것을 이미 어릴 때부터 깨달은 바였다.

"괜찮습니다. 집에 가는 길에 들릴 데도 있어서요."

"흠, 내가 불편하군요?"

"아… 아니라고는… 못하겠는데요."

권영도는 입 끝을 올리며 기분 좋게 웃었다. 눈웃음을 깊게 지으면 눈꼬리에 살짝 주름이 져서 인상이 무척 부드러워졌다.

"재밌네요. 한준씨, 솔직해서 좋네요. 귀엽고."

보통 신입사원한테 불쑥 귀엽다는 말을 하나. 어색하게 웃고 서 있는데, 마치 대치 상황 같았다. 권영도는 나를 태우려고 웃으며 대기하고 있고, 나는 타지 않으려고 웃음으로 무마하는 중이었다.

구원자처럼, 그때 본사 건물 옆쪽 길에서 환하게 빛을 뿌리는 인물이 등장했다. 교복을 입고 가방도 매고 있는데도, 그루 엔터테인먼트 안에서 본 그 어떤 연예인보다 훨씬 더 빛나는 귀공자 같은 외모의 소유자였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성큼성큼 다가오는 얼굴이 굳어 있다.

"형."

"설아!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독서실은?"

등 뒤에서 내 허리를 두 팔로 감싸 끌어안으며 설이는 내 뒷목에 코를 댄 채로 대답이 없었다. 

잠시 그대로 있다가 내 어깨에 뭐라도 묻었는지, 설이가 내 옷을 툭툭 털어낸다.

"왜 그래, 설아?"

"……향수 냄새."

중얼거리면서 차에 타고 있는 권영도 쪽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권영도는 설이와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가늘게 뜨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윗사람이니 소개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백 허그 중인 설이의 팔을 쥐고 설명했다.

"아, 이쪽은 제 동생입니다. 동생이 마중 나와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허리를 꾹 숙여 인사하는데도 권영도는 내 뒤쪽의 설이를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흠, 동생분이 마스크가 좋네요. 타세요, 둘 다 태워다 줄게요."

자꾸 이렇게 권하는데, ‘버스 비도 아낄 겸 그냥 타고 갈까’ 싶어서 슬쩍 뒤쪽을 돌아보는데 설이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이대로 있다가는 귀와 꼬리가 튀어나오든, 눈빛이 시퍼렇게 변해버리든 할 것 같아서 설이의 어깨를 뒤로 밀며 뒷걸음질 쳤다.

"다음에! 다음에 태워주세요. 바쁘실 텐데 죄송했습니다. 그럼 저희 이만 가볼게요!"

"그러면… 그럽시다. 또 봐요, 한준 씨."

다행히도 권영도 이사가 먼저 포기해주었고, 차 뒤쪽의 라이트를 밝히며 오픈카가 떠나갔다.

요즘 슬픈 얼굴로 시위 중이던 설이가 나를 찾아온 게 너무 기뻐서, 등 뒤의 설이를 끌어와 뺨을 다독였다.

"에구, 착한 내 동생. 형 걱정돼서 여기까지 왔구나? 얼른 가자, 오늘 삼계탕 해줄게."

"……저 사람, 형 일에 중요한 사람이야?"

"응?"

설이는 이미 차가 사라진 차도 쪽을 주시하며 묻고 있었다.

"저 사람이 죽으면, 형이 곤란해져?"

이게 무슨 해괴한 질문인가 싶어서 설이를 가만히 올려다보니, 무척 중요한 질문이라도 되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편의점 진상 손님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얘기를 설이에게 해줬더니 놀란 기색도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었다. 그때는 무표정이더니 갑자기 그런 사고가 예기치 못하게 생길 수도 있다는 인식이 생겨서 무서워진 걸까? 나는 웃으며 설이의 등을 쓸어주었다.

"그렇지! 여기 회사 이사님 중에 한 분인가 보더라. 예전에 연예인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한 번 검색해 봐야겠어. 아무튼, 이사님이신데 갑자기 돌아가시면 큰일이지. 더구나 연예기획사잖아. 얼마나 기사가 많이 쏟아지겠어? 그러면 덩달아 다들 바빠지겠지. 그럼 나도 바쁠 거야."

"……그렇구나."

설이는 뭔가 아쉬운 듯 차도 쪽을 내내 바라보다가, 내 대답에 휙 고개를 돌리며 내 어깨를 감쌌다.

동네 마트에서 장을 보는데, 짐을 전부 설이가 들겠다며 가져가서 나는 빈손이었다. 계산대의 아주머니들이 잘생기고 착한 동생을 뒀다면서 칭찬 일색이라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했다.

사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렇게 순하고 착한 동생은 세상에 또 없을 것이라고, 여러 가지 일화를 들려주고 싶었지만 저녁을 차려야 해서 할 수 없이 집으로 향했다.

집 앞 길목에서 설이가 불쑥 물었다.

"아까 그 남자 말고, 오늘 또 누구 만났어."

"응? 음… 임의성이라는 높은 매니저 한 분도 만나고, 스텝 분들이랑 하이레벨 스타일리스트 팀도… 아! 하이레벨이라는 남자 아이돌그룹 애들도 만났는데, 우리보다 어리더라? 다 밝고 착하고 인사성도 좋아. 다들 귀엽더라."

고개를 숙인 설이가 부스럭거리며 마트 비닐봉지를 꾹 쥐면서 조그맣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즐거웠구나."

"응?"

설이는 짐을 한 손으로 모두 쥔 채 오른 손을 뻗어 내 왼손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는 내 새끼 손가락을 아기처럼 감싸 쥐며 울망울망한 눈빛으로 나와 눈을 맞췄다. 내 눈에는 그 모습이 꼭 길가에 홀로 남은 아기 고양이 같았다.

"나 없는 곳에서 너무 웃지마, 형."

내 손을 끌어가더니 내 손등에 제 매끄럽고 흰 뺨을 비비며 눈을 감는다.

"형이 그러면 나, 착한 아이로 있지 못할 지도 몰라."

마치 질투라도 하는 듯한 그 모습에 나는 웃음이 났다. 지금쯤 각자 집 안에서 저녁을 먹고 있을 길목의 주택들 창문에 대고 '세상 사람들, 이렇게 귀여운 게 바로 내 동생입니다!'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발끝을 올려 설이의 너른 어깨를 담뿍 끌어안았다. 그리고 설이의 뺨에 쪽! 입을 맞췄다.

"너처럼 착한 아이가 또 어디 있다고, 응?"

설이는 내 입술이 닿은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만히 음미하듯 만지면서 수줍게 중얼거렸다.

"…아니야, 형. 나 안 착해."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나는 또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주식 같은 건 잘 몰라도, 우리 설이가 지구에서 최고로 착한 순둥이 동생이라는 것에 전 재산을 걸 수 있다. 아마 그걸로 돈 벌 수 있다면, 나는 세계에서 손 꼽히는 재벌이 되었을 게 분명하다. 

설이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려 주며 현관문 안으로 들어서자, 마치 기다린 듯 소나기가 쏟아져 내렸다.

"와,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날 뻔했다. 설아. 우리 우산 없었잖아."

"그러게."

설이는 빙긋 웃으며 커튼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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