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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잊지 못할 졸업식 (14/65)

14. 잊지 못할 졸업식

숙취가 남은 채로 등교한 우정혁과 컵라면을 먹었다.

아무리 취해도 다 기억을 하는 우정혁은, 대뜸 어깻죽지를 만지작거리면서 '네 동생이 바닥에 던져서 온 몸이 아프다'고 엄살을 부려댔다. 생각보다 상태가 괜찮아서 안심이었다. 물론 컵라면은 우정혁이 샀고, 나는 대신 온수 양을 잘 맞춰서 따라주었다.

우리는 졸업을 앞두고 부실해진 급식 반찬이라던가 부담임의 결혼 소식 같은 것에 대한 시답잖은 수다를 떨었다. 술 취한 우정혁이 늘어놓았던 가족사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근데 너 좋은 일 있다더니, 뭔데."

"아. 맞다."

코밑을 쓱 닦으며 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나 꽤 괜찮은 곳에 취직하게 될 것 같다."

그루 엔터테인먼트에 찾아갔던 일과 기획팀의 이하원 팀장의 제안에 대해서 우정혁에게 말해주었다. 

이하원 팀장이 설이의 미모에 대해 찬사 했던 걸 상세히 전해주자 우정혁은 입을 옆으로 벌리며 무례하게 토 쏠린다는 표정을 보였다. 객관적으로 잘 생기기로는 하늘을 찌르는 설이의 미모를 우정혁은 왜 인정하지 않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열등감이냐고 묻자, 우정혁은 '그런 걸로 해두자'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음, 한설은 너 거기서 일하는 거 괜찮다든?"

"……어, 저기, 설이는 아직 몰라."

우정혁은 드물게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매점 쓰레기통에 컵라면 컵과 젓가락을 버린 뒤에 구관 창고 쪽으로 걸어갔다. 담배를 하나 꺼내 무는 우정혁 옆 벤치에 털썩 앉았다. 우정혁은 연기를 한 모금 내뿜어냈다.

"하아… 빨리 걔한테 털어놓는 게 좋을 거다."

"그렇겠지?"

"내 생각에 네 동생은, 너 졸업하고 나면 아예 집에 들어 앉히고 싶어서 안달일 것 같은데."

벤치 위에 발을 올려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우정혁을 올려다보자,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어내면서 빈 깡통에 재를 톡톡 털어냈다.

"어차피 대학도 안 가겠다고 했겠다, 그 놈이라면 뭐… 주식 같은 거라도 해서 너한테 월 삼백 정도 줄 테니까 집에서 나가지 말라고 꼬실 것 같달까. 왜, 가부장적인 옛날 남편처럼 너 단속하려고 들 것 같단 말이지."

"너 신기 있어? 혹시 사주팔자, 그런 것도 봐줄 수 있냐?"

"뭔 소리야."

우정혁은 담배를 빈 깡통 뚜껑에 비벼 끄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튼 걔한테 괜히 취직 숨기고 있다가 속인 걸로 되어버려서, 삐친 거 풀어준답시고 간이고 쓸개고 다 내주지 말고… 빨리 가서 말해라. 이러다 너 걔한테 벌 받는다."

"와… 우정혁, 나 너 무서워지려고 해. 복채 줘야 하나."

안 그래도 우정혁의 우려가 예언이 되어버릴 까봐, 하교하고 집에 가면 바로 말 할 생각이었다. 우정혁은 교실로 돌아가다가 대뜸, 내일 바로 하와이로 출국한다고 말했다. 그제야 정말 졸업식이 내일로 다가왔다는 것이 실감났다.

편의점 사장님께서는 졸업식이 끝난 뒤의 파트 타임으로 일해도 괜찮으니 졸업식 같은 행사에는 되도록 참여하라고 말하셨다. 그런 자잘한 추억들이 나중에는 소중해지는 것이라며 나를 다독이셨다.

외삼촌은 내 졸업식에 못 오는 대신, 설이와 맛있는 걸 사먹으라며 용돈을 보내주셨다. 요즘 외삼촌네 살림이 어려우신데 신경 쓰게 해드리는 게 마음 불편했지만 감사하다고 대답했다.

교실에 돌아왔을 때, 뜬금없이 수아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휴학생인 수아 누나는 오전 타임으로 옮겨 한창 편의점에서 일할 시간이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수아 누나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애늙은쓰. 너 그 소식 들었어? 사장님이 아직 말 안 하셨지?"

"무슨 일인데요."

나름대로 알바 인생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수아 누나는 웬만한 일에는 호들갑 떨지 않는 성격인데, 목소리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옆에 있었으면 팔뚝을 찰싹 찰싹 때리며 얘기했을 터였다.

"그 인간 있잖아. 얼마 전에 너 때렸던 그 싸가지 없는 놈. 나 따라다니고 외상 달라고 진상 부렸던 새끼."

"네. 혹시 또 왔어요?"

"아니, 아니. 사장님이 어제 내 얘기 듣고 CCTV 돌려보시더니, 그 인간 고소하자고 했어. 너 맞는 거 보시고는 단단히 화나셨거든. 그래서 경찰 부르고, 편의점 앞에 가끔 주차했던 그 새끼 차 번호판으로 인적 사항 찾아내서 연락했나 봐."

"네에."

"근데 너 때리고 도망간 날, 저녁에 교통사고 당해서 지금 중환자실에 가 있대. 완전 신기하지 않니? 천벌 받은 거야. 처음엔 좀 놀랐는데, 생각해보니까 속 시원해. 너도 때리고, 나 얼마나 만져댔었니. 세상에는 진짜 신이라는 게 있나 봐. 어떻게 바로 그날 사고가 나니?"

갑작스러운 소식이라 입만 벌리고 멍하니 있자, 휴대폰 너머에서 수아 누나의 수다가 이어졌다.

"그 인간 보기엔 안 그런데, 무사고 20년이었대. 근데 느닷없이 전봇대 들이받은 거래. 미쳤나 봐."

"네에… 별일이 다 있네요."

"그러니까 말이야. 안 그래도 너 간 다음에 네 동생이 와서 CCTV 확인하고 싶다고 해서, 괜히 네 동생이랑 그 진상 새끼 싸움 벌이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리 설이가요?"

수아 누나는 너 몰라? 하고 묻더니 이어 말했다.

"응, 네 동생. 얼굴 하얗고 키 크고 예쁘장한 애. 걔가 매장 와서 그날 CCTV 돌려보고 싶다고 해서 사장님도 허락해주셨거든. 얌전히 보더니 인사 꾸벅 하고 나가더라. 근데 뭐, 어차피 사고 나서 환자 된 사람 찾아가서 뭘 하겠니. 안 그래?"

"네에……."

전화를 끊고 나서 잠시 멍한 기분이었다.

설이는 그날 저녁 '친구를 만났다'고 했다. 편의점으로 가서 CCTV를 확인했다는 말은 내게 하지 않았다. 

내가 어쩌다가 다쳤는지 알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 남자를 찾아가서 싸움을 벌이지는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다. 집에 돌아온 설이의 얼굴은 여전히 말갛고 뽀얀데다가 다친 곳 하나 없었다. 어쨌든 간에, 빨리 설이에게 그루 엔터테인먼트에서 일하게 됐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

"왜 이렇게 늦었어, 형."

설이는 이미 편한 옷으로 갈아 입고 나를 맞이했다. 자연스럽게 날 껴안고 내 뺨에 쪽- 입을 맞췄다. 이제 이 정도의 스킨십은 정말 인사가 되어버렸다. 달콤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내 머리에 콧날을 비비고는 한 번 강하게 나를 꽈악 껴안고 겨우 놓아주었다.

부엌 쪽에서 고소한 냄새가 흘러 나왔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냄비를 보니 내가 좋아하는 동태찌개였다. 입맛이 돌자, 나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이 돌았다.

"잠깐, 너 독서실은?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오늘은 다 쉬어. 내일이 졸업식이잖아."

"그렇구나. 너 내일 수업 없겠네?"

설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어 보였다.

독서실도 쉬고 다음날 학교도 안 나가게 되면, 보통은 친구들과 여기저기 쏘다니며 놀기 바쁠 텐데 얌전히 집에 돌아와서 형 몰래 미리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조신하고 속 깊은 동생을 가졌다는 것에 뿌듯함으로 가슴속이 가득 찼다.

어디 매일 블로그 같은 것으로 동생 자랑 거리를 적어서 기록할까.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바르고 착한 설이의 모습을 알아야 한다. 그저 존재만으로도 빛과 같은 설이의 매력을 알리는 것이 내가 이 나라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선행이 아닐까.

어머니에게서 배운 조리법이기 때문에, 설이와 나는 똑같은 방식으로 음식을 만들었는데 신기하게도 내가 좋아하는 메뉴들은 나보다 설이가 훨씬 더 잘 만들었다. 어떻게 이렇게 내 입맛에 딱 맞게 잘 만드는 거냐고 물어보면, 설이는 수줍게 '사랑을 담아서 만들었거든'하고 대답해주었다. 나는 아무래도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이 틀림 없다.

설거지도 제가 하겠다며 고무장갑을 낀 채 큰 덩치를 구부려 싱크대 앞에 서 있는 설이의 듬직한 뒷모습을 보며 나는 벅찬 행복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이하원 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낮에 전화를 했을 때에 부재중 통화로 넘어갔었는데 이제야 짬이 생겨서 내게 리콜을 한 모양이었다.

설이가 알아챌 까봐 슬쩍 눈치를 보니, 물줄기 소리에 묻혀서 내 휴대폰 진동이 안 들리는 모양이었다. 살금살금 슬리퍼를 꿰어 신고 현관문 밖으로 나와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한준입니다."

"그루 엔터 이하원입니다. 한준 씨, 세 시간 전에 전화하셨더군요. 회의가 길어져서 못 받았어요, 죄송합니다. 무슨 일로 전화하셨죠?"

"아… 그게요."

나는 우물쭈물 입술을 깨물다가 결국 할 수 없이 떠밀리듯 대답했다.

"저 졸업하고 나서 팀장님네 회사에서 일하기로 했던 것 말이에요,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서요. 죄송해요. 생각해보니까 설이가 워낙 엔터테인먼트 쪽 일을 싫어했고……"

"한준 씨, 생색을 내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제가 드린 제안은 업계 최고 수준이고 어디 다른 곳에서도 이만한 제안 못 드릴 겁니다. 게다가 점차적으로 더 대우가 괜찮아질 텐데요."

마른 입술에 침을 축이며 나는 두 손으로 휴대폰을 든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고 있습니다. 팀장님 제안이 맘에 안 들어서 그런 게 아니라요."

"일단 일해보시다가 거절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죠."

"아… 음… 그럴까요."

이하원 팀장은 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목소리로 눈치 챘는지, 훨씬 밝아진 목소리로 '그럼요' 하고 대답했다. 생각해보면, 아무리 설이의 반대가 무서워도 일단 해보면서 차근차근 설이를 설득시키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었다. 설이도 아직 이쪽 업계에 대한 편견이 있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잘 설득하면 착한 설이는 나를 이해해줄지도 모른다.

"그러면, 네, 아… 본사로요? 네네, 그루 엔터 본사로 그날 아홉 시에 출근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헉."

등뒤로 다가온 설이가 조용하게 물어볼 때까지, 나는 설이가 현관문 밖으로 나를 따라 나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신기할 정도로 발소리를 안 내는 설이는, 가끔 내가 예상하지 못한 곳에 서서 나를 담뿍 껴안아 놀라게 할 때가 있었다.

설이가 싸늘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아, 저기, 설아. 그게… 그게 말이야…"

얼마나 놀랐는지 전화를 끊겠다는 말도 없이 나는 통화종료버튼을 눌러 버렸다.

어디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설이의 화를 가라앉힐 수 있을까, 고민하며 눈을 도록도록 굴리는 사이에 설이는 일부러 나 때문에 들고 나왔는지 커다란 제 패딩 점퍼를 내 어깨에 걸쳐 주었다. 여전히 눈은 화나 보였지만, 점퍼를 내 몸에 감싸 둘러주는 손길은 다정했다.

정작 자신은 이 한겨울에 티셔츠 한 장 걸치고 나와서는 전혀 떠는 기색도 없이 팔짱을 끼고 섰다.

“지금… 나하고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그루 엔터테인먼트로 출근하겠다는 이야기로 들렸는데.”

설이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거야?”

“아… 아니…”

“아니야?”

“……맞아.”

변명의 여지가 없어서 패딩 점퍼를 꼼지락거려 잡아당기면서 고개를 숙였다. 설이는 팔짱 낀 자세 그대로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일부러 나 들으라는 듯 과장되게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설이의 한숨 소리에 내 어깨가 움찔거렸다.

“형이 나한테 거짓말을 했어.”

“아, 아니, 저기. 설아!”

“……나를 속였어.”

상처 받은 까만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은 듯 표면이 반질거렸다. 비련의 주인공처럼 고개를 옆으로 떨구는 설이의 날카로운 턱 선과 뼈가 도드라지는 가녀린 목덜미가 보는 사람을 안쓰럽게 만들었다. 하필이면 이 추운 날씨에 티셔츠 한 장 입고 있어서 더 가냘픈 분위기였다. 본인은 춥지 않더라도, 보고 있는 나는 가슴이 아팠다.

잔뜩 토라진 얼굴이 어릴 적 그대로였다. 설이가 눈썹 끝을 축 내리고 슬픈 표정을 지으면, 나는 천하에 몹쓸 놈이 된 것 같이 느껴진다. 안절부절 못하며 나는 설이의 팔뚝을 잡고 흔들었다.

“미안해, 잘못했어. 설아, 형이… 어… 그렇지, 벌 받을게. 응? 뭐 할까, 형이 손 들고 서 있을까?”

“……”

“반성문 쓸까? 백 장이라도 쓸게! 설아, 잘못했어. 응? 응?”

“……”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발을 동동 구르던 나는, 결국 필살기를 쓰기로 한다.

“키, 키스 해줄까?”

설이는 약간 마음이 동하는지 슬쩍 시선을 다시 내 쪽으로 돌려주었지만, 여전히 새침한 표정이었다.

나는 내 스스로 무슨 말을 내뱉었나 싶어, 얼굴에 열이 올랐다. 이래서 애들이 아무리 칭얼거려도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다 보면 결국 버릇 들어서 응석받이로 키우게 되어버린다는 말이 딱 맞았다.

안달이 난 내가 설이의 어깨를 잡고 발끝을 올려 입술을 쭉 내밀자, 설이는 고개를 휙 피해버린다.

나는 설이의 품에 안기듯 껴안고 너른 가슴팍에 이마를 비비며 웅얼거렸다.

“잘못했어, 설아. 그런데 나 거기서 조금이라도 일 해보고 싶어.”

“……”

“형아 뽀뽀 받아주고 화 풀면 안 될까? 응? 설아.”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 힘을 빼며 숨을 길게 내쉰 설이가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지금은 말고. ……내가 원하는 때에 해줘.”

“알았어, 알았어. 그러면 화 풀어주는 거지? 응?”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도 설이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나는 그제야 안심이 되어서 몸에 힘이 풀렸다.

벌을 준다느니 뭐니 해도, 결국 내 뽀뽀 한 번이면 화가 풀리는 설이는 역시 천사가 맞다. 눈 산의 요정이 내게 선물해준 귀여운 내 동생이다.

***

“한준! 담임이 너 좀 기다려야 한대. 상담 때문에 삼십 분 걸린대.”

“어. 알았어.”

졸업식은 생각했던 것처럼 따분했지만, 그래도 중학교 때와 다르게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것은 감회가 새로웠다. 이제 성인이구나, 하는 생각에 묘하게 어색하고 떨렸다. 나에게는 마지막 학교가 될 것이니 더 의미 깊었다. 교가를 부르는 것으로 졸업식이 끝나고 강당의 모두가 박수를 쳤을 때에서야 비로소, ‘이제 정말 나는 학생이 아니구나’ 실감이 났다.

우정혁은 지금쯤 어머니와 하와이로 향하는 중일 것이다. 어쩌면 도착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우정혁의 몫까지 졸업장과 남은 기념품 따위를 받아가기 위해서 담임을 만나야 하는데, 학부모 상담 때문에 기다려야 했다.

운동장은 졸업 기념 사진을 찍으려는 학생들과 그들의 가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부모나 형제, 혹은 여자친구가 찾아와서 반 아이들의 부러움 섞인 놀림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그 사이에 멀뚱히 서서 바닥의 돌만 차내는 중이었다.

강당에서도 이따금 뒤돌아보았지만, 설이는 오지 않았다.

“……아직도 화난 걸까.”

아침에 일어났을 때 이미 설이의 방은 비어 있었다. 학교도 안 가는 날인데 일찍부터 어딜 갔나, 싶었지만 그래도 내 졸업식에는 와 줄 거라고 생각했다. 설이가 결국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서운해졌다. 

아는 척 하는 친구들과 인사를 주고 받다가 다시 혼자가 되면 시무룩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는데, 멀리서 소란스러운 소음이 들려왔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여학생들이 입을 틀어막고 작게 소리 지르는 것은, 내게 익숙한 소리였다. 설이가 등장할 때에 들리는 일종의 배경 음악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 어디에 설이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리자, 멀리서 내 쪽으로 정장을 입은 남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 설아…?”

그 무슨 론칭 파티인가에 갔을 때보다 훨씬 더 멋져 보인다. 다크 그레이 색상의 정장과 짙은 갈색의 가죽 구두와 허리 띠는 맞춘 듯 매무새가 아름다웠다. 게다가 이마를 드러낸 올림머리와 환한 미소의 하얀 얼굴은 그야 말로 백마 탄 왕자님의 모습이었다. 소년소녀들의 꿈속에 등장하느라 바쁠 것 같은 동화 속의 왕자님이 내 앞에 다가와 섰다.

커다란 꽃다발은 새파란 장미꽃을 중심으로 이슬을 머금은 듯 청량한 분위기의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예쁘다는 생각보다도, ‘이 정도로 기품 있고 큰 꽃다발은 대체 얼마나 하는 걸까’ 속물적인 생각을 먼저 하는 내가, 이런 꽃을 받을 자격이나 있나 싶어서 부끄러워졌다.

설이는 그 어떤 때보다 상큼한 미소로 내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저 멀리서 여학생 하나가 다리 힘이 풀린 듯 주저 앉는 것 같았다.

“졸업 축하해, 형.”

“고… 고마워, 설아. 이런 건 언제 준비했어? 그 모습은 또 뭐고, 응?”

쑥스러운 듯 뒷목을 주무르며 설이는 수줍게 웃었다.

“멀리서 예약한 꽃이라서, 찾으러 가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 늦어서 미안해.”

내 손을 잡으며 가볍게 흔드는 그 몸짓이 어리광 부리는 것 같으면서도 연인에게 애교를 부리듯 유혹적이어서, 나는 설이의 매력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이렇게 멋있어도 되는 걸까, 좀 위험한 수준이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이 되었다.

‘너무 지나친 매력으로 뭍 여성과 남성들을 함부로 사로잡은 죄로 체포하겠습니다’ 하고 경찰이 들이닥친다면 변명거리가 없어서 설이를 풀어주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안타까워서 내 눈망울이 촉촉해졌다. 주변 사람들이 허락도 없이 설이의 사진을 찍는 것 같은데, 설이가 이번에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왠지 즐거워 보였다.

한참 설이가 매력죄로 잡혀가는 망상에 빠져있던 나를 깨우듯 설이가 내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그리고는 작게 속삭였다.

“형, 지금이야.”

“응?”

설이가 달콤한 악마처럼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원하는 때에 키스해주기로 했잖아.”

응? 하고 되물으며 생각에 잠겼던 나는 사색이 되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구경거리라도 난 것마냥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은, 자신들의 졸업식이면서 설이에게만 온통 시선이 꽂혀 있어 마치 팬 미팅 현장을 방불케 했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면서 크게 눈을 떴다.

“지…… 지금? 여…… 여기서?”

설이는 부드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 할 수도 있다. 쓰읍, 하고 장난치지 말라며 설이를 혼내고 운동장을 벗어나도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그 뒤에 몰려올 후폭풍이 더 두려워지는 것은 왜일까. 설이는 평소에는 무척 순하고 착하며 내 말을 잘 듣는 동생이지만, 한 번 고집을 부리면 내가 당해낼 수가 없었다.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어차피 졸업하는 마당인데, 미친놈 돼봤자 뭐 잡혀가기야 하겠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설이의 두 뺨을 감싸 쥐자, 설이는 허리를 숙여 키까지 맞춰 주며 두 눈을 감았다.

이마까지 드러나서 그 잘생김이 배로 세상에 드러난 흰 얼굴은, 기대감에 미소 짓고 있었다. 새까만 속눈썹이 참 가지런하고 길기도 하다. 나는 에라, 모르겠다, 눈을 질끈 감고 설이의 입술에 도장을 찍듯이 입술을 꼭 마주 댔다. 

주변에서 놀라 까무러치는 웅성거림과 함께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가, 이내 누군가 한 명의 박수 소리에 전염되듯이 많은 사람들이 웃으며 박수를 보냈다.

내일 신문 일면에 나는 건 아닐까 모르겠다. 떨어지려는 입술을 설이가 고개를 내밀어 다시 밀어붙였다. 그리고는 살짝, 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얏…!”

다시 한 번 앙큼하게 거짓말을 했다가는 어떻게 될 지 한 번 보라는 듯, 경고와 애정이 담긴 키스였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졸업식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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