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천사의 경고
'야, 나 좋은 일 있다. 편의점 앞으로 와. 소프트 콘 사줄게.'
우정혁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콧노래를 부르며 조끼를 벗었다. 소프트 콘이 원 플러스 원이라서 사주는 거지만, 그래도 내게는 큰 인심 쓰는 것이었다. 졸업 후 큰 회사에서 제대로 된 임금을 받으면서 일하기로 했다는 것을 누구한테든 말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직 설이에게 솔직하게 말은 못했지만, 조만간 잘 설명할 것이다.
스텝 룸이자 창고로 쓰는 공간에서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소란이 일어난 걸 알았다.
"아, 사장 나오라고! 손님 대접을 뭣 같이 하는데, 이 계집애 안 자르고 뭐 하는 거야!"
편의점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중년 남자의 목소리에 카운터의 수아 누나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중년 남자는 와이셔츠 단추가 힘겨울 정도로 튀어나온 배를 내밀고 허리에 두 팔을 얹은 채로 위풍당당하게 서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CCTV로 몇 번 확인했던 얼굴이었다.
"저기요, 손님. 무슨 일이시죠?"
다가가 말을 걸자, 남자는 입을 다물고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머릿속 계산에서 아무래도 내가 사장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는지 비열한 웃음부터 입에 걸렸다.
"뭔데. 이 비리비리한 새끼는? 너 이 계집애 애인이냐?"
수아 누나가 카운터 전화기를 집어 흔들어 보였다.
"자꾸 이러시면, 경찰 부를 수 밖에 없어요. 저희는 말씀 드렸듯 외상은 절대 안 되구요. 아저씨, 제가 전화번호 안 줘서 자꾸 무리한 요구하는 거잖아요. 경찰 부르기 전에 가세요."
단호한 말투였지만 수아 누나 눈동자에 두려움이 보였다. 남자는 어이 없다는 듯 하! 숨을 내뱉고는 위협하듯이 손을 들어올렸다.
"아우, 이게 진짜! 누굴 변태 새끼로 알아?!"
"그만하세요."
"뭐야, 이건 또!"
팔을 붙잡았더니, 나를 팍 밀쳐냈다. 등 뒤에 있던 생활용품 진열대에 어깨를 부딪혀서 물품이 와르르 쏟아져 냈다. 그와 동시에 수아 누나가 입을 가리고 비명을 질렀다.
짝! 소리와 함께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목뼈가 뻑뻑한 느낌과 함께 뺨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남자는 시근덕거리며 화를 삭이지 못한 채로 내 멱살을 잡았다.
"너, 이 년 애인이지? 지금 너네가 편 먹고 나 엿 먹여 보겠다, 이거지?"
"놓으세요."
"뭘 놔, 놓기는! 이 시팔!"
빡, 같은 쪽의 뺨을 이번에는 주먹으로 맞았다.
욕이 절로 나왔다. 두 대나 참아줬으면, 이제 정당방위 되겠지.
주먹을 쥐고 몸의 반동을 이용해서 기름진 그 얼굴의 관자놀이 쪽을 향해 내리꽂았다. 남자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 제가 맞을 줄은 몰랐던 듯, 두 손으로 제 옆 통수를 감싸면서 놀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팔을 걷어붙이며 다가갔다.
"너… 너 이 새끼… 감히 나를…!"
"어디 한 번 해보죠. 지금 당신이 난리 피워서 문 밖에서 되돌아간 손님만 두 명이고, 바닥에 떨어져서 가치 떨어진 상품은 재판매도 안 되거든요. 업무방해에 상해, 성추행까지. 제대로 신고하고 조사 받아봅시다. 사장님도 그러자고 하셨어요."
"서… 성추행, 내가 언제 그랬어! 증거 있어!?"
"네, 지난 삼 개월간 여기 있는 이 누나한테 은근슬쩍 스킨십 시도했던 것, CCTV로 다 증거확보 해뒀거든요. 지금 제가 때린 게 억울하시다면, 오늘 자 CCTV도 다 제출해서 한 번 소송해보실까요?"
"이… 씨발…"
남자는 엉거주춤 일어나가더니 문밖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제야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수아 누나가 카운터 밖으로 뛰어나와 내 얼굴을 살폈다. 겁을 먹었던지 손이 떨리고 있었다.
"어떡해, 입술에 피 나!"
"이 정도는 괜찮아요. 누나 근데 시간대 바꾸기를 잘했네요, 저러고 또 오지는 않겠죠."
진상 손님 하나가 수아 누나 혼자 일하는 시간대를 교묘하게 골라 오는 게 벌써 몇 개월 째여서 골치가 아프던 차였다. 얼음 팩을 비닐로 감싸 내 뺨에 대어주며 수아 누나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애늙은이, 너 동생이 보면 걱정하겠다."
"아."
일을 저지르고 나니, 이제야 설이 얼굴이 떠올라서 초조해졌다.
설이는 내가 일 하다가 다치는 걸 엄청나게 싫어하는데, 짐 옮기다가 허리를 삐끗한 뒤로 한동안 설이가 편의점에 찾아와서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 얼굴이 오죽 뚱했으면 수아 누나까지 노심초사였다.
수아 누나의 손거울에 비쳐보니 입술이 제대로 터져서 며칠 지나면 딱지가 앉을 것 같다. 턱 주변에 시퍼렇게 멍드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길 가다가 어디 부딪혔다는 변명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아서 난감했다.
손끝으로 입가를 살짝 건드리고 있자, 수아 누나가 불쑥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애늙은이! 너 이 반지 뭐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귓가가 불 붙은 듯 뜨거워졌다. 나도 모르게 손을 빼내 등 뒤로 숨겼다.
생각해보면 숨길 이유도 없는데, 내가 왜 그랬지 싶었지만 이미 심장이 쿵덕쿵덕 뛰고 있었다. 수아 누나는 방금 전까지 진상 손님 때문에 우울해져 있던 얼굴은 금새 어디 가고,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비실비실 웃으며 내 옆구리를 쿡 찔러댔다.
"애인 생겼구나! 뭐야, 언제? 누구야? 어떻게 만났어?"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기는, 결혼 반지 같이 생긴 커플링 끼고 나타나서는!"
"진짜 아닌데…"
"근데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 귀신을 속여라. 응?"
그냥 놀라서 그렇다고 웅얼거리면서도 나는 왜 이렇게 당황하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당당하게 '내 예쁜 동생이 졸업 선물로 준 반지다' 하고 자랑하면 될 것을, 등 뒤로 손을 숨겨 꼼지락거리고 있는 내가 어색했다. 가끔 편의점 사장님이 나와 수아 누나에게 둘이 사귀어보면 어떠냐고 장난을 걸 때에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넘어갔는데, 동생이 준 반지 가지고 당황할 이유가 뭔가 싶었다.
오히려 학교에 반지를 끼고 갔을 때 우정혁은, 반짝이는 내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심드렁하게 '네 동생이 줬구나' 하고 말했기 때문에 그때는 그냥 자연스럽게 넘어갔던 것 같다. 내가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자, 우정혁은 그걸 왜 모르냐는 듯 말했다.
'한설이 준 게 아니면 지금 네 손가락에 그게 남아 있겠냐?'
무슨 뜻이냐고 하자 우정혁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어 나를 보냈다.
수아 누나는 내게 이것저것 캐묻던 중간에 손님이 들어오자, 카운터로 돌아갔다.
"애늙은이, 너 친구 왔다."
수아 누나의 목소리에 유리문 밖을 보자, 사복을 입은 우정혁의 뒷모습이 보였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우뚝 서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누가 봐도 고등학생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이제 스물한 살이 되는 거니까 풋풋한 느낌은 이미 사라진 모양이다. 안 그래도 노안이었다.
비싸 보이는 코트에 정장까지 차려 입은 뒷모습이 수상해서, 얼른 문을 열고 다가가 등을 두드렸다.
우정혁은 픽 웃으면서 담배를 껐다.
"야, 너 어디 갔다 오냐? 차림새가 왜 이래?"
"……그냥 좀."
나를 내려다보는 눈도 약간 풀려 있고, 말투도 너무 느렸다. 이게 마약이라도 한 거 아닌가, 덜컥 겁이 났는데 알코올 냄새가 풀풀 풍기는 걸 보니 술 취한 모양이었다. 아직 초저녁인데 누가 부잣집 망나니 아니랄 까봐 이 시간부터 술을 퍼 마시나, 싶어서 한 소리를 하려는데 우정혁이 푹 쓰러지듯 나를 껴안았다.
"야, 징그러워. 왜 이래?"
"……진짜 죽었나 봐."
"뭐?"
"우리 누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물기에 젖어 있었다. 풀어내려던 팔을 그대로 둔 채, 훨씬 작은 내게 몸을 기대듯이 나를 안고 있는 우정혁의 등을 가만히 쓸어주었다.
입술을 꾹 깨물고 흐느낌을 참으려고 하는지, 숨소리가 가쁘게 변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우정혁의 지지대 역할을 하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우정혁은 한숨과 함께 떨리는 목소리를 뱉어냈다.
"납골당에… 거기 있는 걸 보니까 이제 실감이 나."
"……"
"누나는 이제 없어. 죽었어. 없는 거야."
"……"
뭐라고 해줄 말이 없어서 나는 그대로 낮게 숨을 내쉬었다. 우정혁이 제 손등에 눈가를 거칠게 닦아내며 눈물을 삼켰다. 그럼에도 내 어깨가 푹 젖었다. 찬바람이 우리를 쓸고 지나갔다.
"너 내가 왜 일년 꿇었는지 안 물어봤지."
"……응."
"사람을 죽였어, 내가."
우정혁은 제 스스로 말을 꺼내놓고도 믿기지 않는지 하, 작게 웃었다.
"누나가 집 앞 골목에서…… 당하는 걸 봤어."
나는 숨이 멎을 것처럼 놀라, 표정이 굳었다. 우정혁이 내게 기대고 있어서 얼굴을 마주볼 수 없는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정혁은 과거를 떠올리기가 힘든지 잠시 침을 삼키며 뜸을 들였다.
"그래서 내가 그 새끼를 잡아다 죽도록 팼어. 경찰이 왔고… 조사 받는 도중에 그 새끼가 병원에서 혼수상태로 있다가… 죽었어. 과실치사로 소송 당하고, 맞고소 하는 와중에… 누나가. 방에서 문 잠그고… 자는 줄 알았는데……. 그랬는데…"
"됐어, 그만 말해도 괜찮아."
괜찮아, 중얼거리며 우정혁의 등을 쓸어주는데 강한 힘이 내게서 우정혁을 떼어냈다.
만취해서 휘청거리는 우정혁의 팔을 쥔 채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설이가 눈 앞에 서 있었다. 하교하는 중이었는지, 교복을 입은 설이가 창백할 정도로 하얀 얼굴로 입술을 열었다.
"지금 둘이 뭐 하는 거야."
"설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우정혁을 싸늘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우정혁의 팔을 더 꽉 쥐었다. 고통스러운지 우정혁이 미간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이 선배가 왜 형 품에 안겨 있을까."
"놔 줘, 설아. 걔 지금 취했어!"
"……취한 상태로 형을 끌어안았어?"
설이가 내팽개치듯이 우정혁의 팔을 쥐고 있다가 놓아버렸고, 우정혁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내는 목소리가 나가버렸다.
"한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얼른 몸을 숙여 우정혁의 몸을 부축했다.
그때 옆 차도 쪽에서 클락션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운전석 차창이 열리고 운전자가 얼굴을 내밀었는데, 언젠가 본 적 있었던 우정혁네 집안 기사님이었다.
다행이란 생각에 이쪽으로 와달라고 손을 흔들었더니, 기사님이 달려와서 우정혁을 업어 들고 갔다. 차 뒷문을 열어주고 우정혁을 태워서 차가 멀리 가는 것까지 보고 나자, 아차 싶었다.
설이는 내가 소리를 지른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저기. 설아… 사실 지금 우정혁이 사정이 좀 있어서…"
"나보다 저 선배가 더 소중해?"
가여운 눈빛으로 묻는 설이의 얼굴이 어찌나 안쓰러운지 나는 펄쩍 뛰었다.
"그럴 리가! 나는 설이만 있으면 돼. 설이가 제일 소중해. 알잖아, 응?"
"…응."
"형이 화내서 슬펐어? 미안해, 지금 그건…"
별안간 설이가 손을 뻗어 내 턱을 쥐었다. 그리곤 눈썹을 밀어 올린 날카로운 표정으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내 입술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형 입술에서… 피가 나네."
말하다 말고 설이는, 우정혁을 태운 차가 사라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괜한 오해를 하겠다, 싶어서 나는 얼른 설이의 어깨를 쥐어다가 토닥거렸다.
"아니야, 아니야. 형이 조심성이 없어서, 저기, 매대에 부딪혔어!"
"…누가 밀었어?"
"어, 아, 아니?"
"…누가 형을, 때렸어?"
"아, 아닌데?"
"……편의점 손님이구나."
독심술이라도 하는 건지, 내가 아니라고 대답할 때마다 설이는 정답을 맞춰냈다.
"때렸구나, 형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설이의 목소리에서는 감지할 수 없을 정도의 냉랭한 기운이 느껴졌다.
어릴 때부터 왠지 모르게 싸움에 잘 휘말리는 설이를 내가 지켜내려고 싸움에 끼어들곤 했었는데, 그 와중에 내가 한 대라도 맞으면 설이는 조용하지만 무척 신속하게 다가와서 상대를 밀쳐냈다.
그렇다고 해서 반격하며 마구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설이는 그저 상대를 고요히 노려봤을 뿐이었다. 지레 겁먹고 상대는 물러났다. 그러고 나면, 왠지 모르게 반드시 나를 때린 상대 놈은 자퇴를 하거나 퇴학을 당해서 다시는 볼 일이 없었다.
일단 설이의 기분을 풀어주는 게 우선이라서, 설이의 차가운 손을 꼭 잡고 흔들었다.
"가자, 설아. 응? 일단 집에 가서…"
"나 볼일이 있어. 형 먼저 집에 가 있을래?"
걱정하지 말라는 듯 싱긋 웃어주는 설이의 눈빛이 일순간 푸른빛이었다. 그 푸른 빛을 마주한 순간 섬짓할 정도로 온몸이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설이의 팔을 잡아당겼다.
"서… 설아, 너 눈이 갑자기… 어떻게…"
"아, 이거. "
귀찮다는 듯 눈가를 찡그린 설이가 잠시 눈을 깊이 감았다가 떴고, 눈동자는 다시 검은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아주 잠깐이었지만, 분명 설이의 눈동자가 푸른 불꽃처럼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괜찮아. 가끔 이래, 형."
"뭐? 그게, 왜…"
병원에라도 가봐야 하나? 하지만 괜히 병원에 갔다가 설이가 평범한 보통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어쩌지? 여태껏 큰 사고도 없었고, 아픈 곳도 없어서 설이를 병원에 데려가 정밀 검사할 일이 없었으니 다행이었지만, 만일 누구라도 설이의 정체를 알게 되는 날에는……!
내 걱정이 표정으로 다 들여다보였는지, 설이가 차분하게 내 팔뚝을 쓰다듬었다.
"화나는 일이 있으면 가끔 그러는데, 걱정할 필요 없어. 형."
"아, 그래도…"
"나 저녁에 불고기 먹고 싶은데, 만들어 줄 수 있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설이는 만족한 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내가 동생이라도 된 듯 해서 피식 웃어버렸다. 설이는 확인하듯 반지를 낀 내 왼손을 만지작거리다가 잡은 내 손을 흔들었다.
"그럼 먼저 집에 가 있어, 형. 나도 곧 갈게."
"어, 그, 그래."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성큼성큼 걸어가는 설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코를 훌쩍거렸다.
한겨울 냉방보다 더 차가운 설이의 푸른 눈빛이 떠올라서 머릿속이 복잡했다. 안 그래도 우정혁의 무거운 가족사를 막 들은 참이라서 생각할 게 많았는데, 설이의 그 비현실적인 푸른 눈동자가 머릿속에 콱 박혀 버렸다.
어쨌든, 일단 집에 돌아가서 불고기를 재놔야 할 것이다.
***
‘우정혁, 잘 들어갔냐.’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장은 없었다. 술 취해서 뻗은 모양인데, 차라리 푹 자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우정혁에 대한 소문들이 들려올 때마다 무시했었는데, 그런 사연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집에 부모님하고 자신뿐이 없다고 했고, 가족 얘기를 꺼내지 않아서 당연히 외동아들인 줄로만 알았다. 이렇게 마음 힘든 구석이 있는 걸 알았더라면, 빵 한 쪽이라도 더 주는 건데.
졸업하고 나면, 술이라도 한 잔 사줘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잘자라’ 하고 메시지를 하나 더 보냈다.
현관문 도어록 열리는 소리가 들려서 벽시계를 보니,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마침 불고기도 다 준비되어 있고, 뚝배기도 꺼내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두었다. 밥도 고슬고슬 잘 지어져서 15분 내로 따끈한 밥과 불고기를 먹일 수 있을 것이다.
현관문으로 마중 나가자 신발을 벗던 설이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내게 미소 지었다. 덥석 손을 뻗어 나를 끌어 안았다.
“왔어? 손 씻고, 밥 먹자. 설아.”
“응…….”
나른하게 대답하는 설이가 나를 껴안고 놔주지 않아서 나는 되물었다.
“왜? 샤워 먼저 할래? 샤워하고 식사할래?”
“음, 그러면… 나는 형 먼저.”
“어?”
설이는 피식 웃으며 아니야, 하고 말하더니 코트와 교복 재킷을 벗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샤워나 식사 중에 고르라고 했더니, 나를 먼저 하겠다는 건 대체 무슨 대답인가 싶어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부엌으로 걸어가 가스레인지에 불을 올렸다.
식사를 마친 뒤에 어딜 다녀왔냐고 물었더니 미미하게 웃으며 ‘친구를 만났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설이의 친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설이 주변에는 사람들이 늘 바글바글했지만, 그 중에서 달리 친해 보인다거나 집에 데려오는 아이는 없었다.
어릴 때야, 맘대로 집에 찾아오는 애들이 더러 있었지만 설이는 친구를 집으로 초대하지 않았다. 이것저것 떠드는 성격이 아니라서 학교에서 누굴 만났는지 뭘 했는지 얘기하지도 않으니, 친한 친구가 누가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설아, 근데 어떤 친구…”
설이가 흰 봉투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데자뷰였다. 얼마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그 봉투 안에는 지폐가 들어 있었고…
의심의 눈길로 설이를 바라보다가 봉투를 살짝 열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돈 봉투였다. 이번에는 저번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아무래도 형은 입금해주는 것보다 현금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설이는 낮게 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매달 삼백만 원씩 줄게. 일하지 말고 집에 있어줘, 형.”
“……뭐?”
설이는 내 표정을 훑어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무슨 말을 할지 뻔히 알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누가 화를 낼 상황인데, 왜 네가 먼저 그렇게 화난 표정을 짓는 거야? 싶어서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설이는 제 긴 손가락을 반대편 손으로 꾹 쥐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어머니 살아계실 때부터… 형이 나 돌보느라 바쁜 게 속상했어. 중학생 때 우유 배달도 했었잖아, 형도 어렸는데.”
“그건 잠깐… 정말 몇 달 안 했었어!”
“나는 집에 돌아왔을 때, 혼자인 게 싫어. 너무 외롭고 쓸쓸해. 그래서 형이… 집에서 날 기다리고 있어줬으면 좋겠어.”
아마 그랬을 것이다. 아버지가 떠나고, 어머니도 떠나, 점점 가족 수가 줄어들어가는 집에서 우리는 단둘이 컸다. 내가 외삼촌의 지원을 받는 게 부담스러워서 어릴 때부터 푼돈이라도 받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느라, 설이 혼자 저녁을 먹게 한 적도 많았었다.
가녀린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한숨을 내쉬는 설이의 붉은 입술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미안한 마음에 나도 할 말이 없었다.
“공부를 더 하고 싶다면 해도 좋지만, 일은 안 했으면 해.”
“설아, 그치만…!”
“나를 위해서, 그래 줄 수 있지. 형?”
“……”
“나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을 거지?”
“……응.”
설이가 아기 사슴처럼 새까만 눈동자로 날 쳐다보며 부탁하면, 가끔 나도 모르게 대답을 하게 되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백수로 살 수는 없으니, 기분 좋을 때의 설이를 잘 설득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편의점도 이번 달까지만 하고 그만뒀으면 좋겠는데.”
“설아, 그건… 사장님하고 약속도 있고…!”
내 두 뺨을 잡는가 싶더니, 불쑥 설이의 조각 같은 하얀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아얏! 하고 앓는 소리가 절로 났다.
이미 얻어터져서 뜯어진 아랫입술을 설이가 잘근 깨물었다. 아파서 입이 벌어지자, 설이의 뜨거운 혀가 입 안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왔다.
츄웁, 쭙, 소리가 날 정도로 내 혀와 입 안을 빨아 삼키는 입맞춤으로 머릿속까지 뜨거워져서 몽롱할 지경이었다. 듣기 싫은 대답만 하는 나의 입을 막을 목적이었나 싶지만 너무 과격한 방법이 아닐까.
나는 몸에 열이 오르는 듯 숨이 가빠져서 설이의 어깨를 밀어냈지만, 간지럽고 차가운 손가락이 내 니트 속으로 들어와 등줄기를 쭉 훑어 올라왔다.
“으읍?!”
그 손길에 놀라 눈을 번쩍 떴고, 맞닿은 입술 사이로 설이가 피식 웃는 것이 느껴졌다.
곧 입술이 떨어졌다. 내 옷 속으로 들어왔던 손가락도 빠져나간 지 오래였다. 숨을 헉헉 내쉬고 있는데, 설이가 돈 봉투를 내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내 손등을 꾹 쥐었다가 놓았다.
그리곤 제 방으로 돌아가려고 일어나며 말했다.
“혹시라도, 나 모르게 어디서 일하기로 약속하고… 서약서 같은 걸 썼다면,”
어깨가 움찔, 떨렸다. 설이는 눈을 내리깔고 내 얼굴을 빤히 보았다.
“…당장 가서 취소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지만, 여기서 고개를 끄덕이면 인정하는 꼴이라는 걸 가까스로 떠올리며 침만 꼴깍 삼켰다.
설이는 무표정한 눈빛으로 나를 가만히 몇 초간 바라보다가 싱긋 웃었다.
“나는, 형 믿어.”
어색하게 웃으며 설이를 마주보았더니, 의심이 풀어진 듯 설이는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내 무릎 위의 두툼한 돈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일단 설이가 준 돈은 전부 고스란히 저금해둘 작정이다. 내일 바로 은행에 가야지.
“아, 따가워…….”
입술이 얼얼해서 만지작거리다가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런데, 마치 내 계획이 다 들킨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착각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