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나한테 숨기는 거 없지?
"한준, 너 졸업식 참석해?"
"어… 글쎄? 그날 일 잡히면 못 올 수도 있다고 담임한테 미리 말했는데."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구나, 하고 말하는 반장에게 내가 되물었다.
"왜? 담임이 빠지면 안 된대?"
"아냐. 담임이 아니라, 옆 반 김동현이 알아봐달래서."
나는 눈을 끔뻑거리다가 반장의 어깨를 잡았다.
"김동현은 그게 왜 궁금하대?"
"아아. 김동현 여동생이 물어봐 달라고 했대. 우리학교 1학년."
"걔는 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내 의문이 답답하다는 듯 우정혁이 중간에서 내 손을 떼어내며 반장을 보냈다. 우정혁은 야채 고로케 두 개를 매점에서 사 왔는지, 하나를 내게 내밀며 자리에 앉았다.
수능이 끝나고 나니, 교실 분위기가 한결 편안해졌다. 선생들도 애들 기강 잡겠다며 허구한날 매질하던 것이 싹 없어졌고, 몇몇 실기 시험이 남은 학생들을 빼고는 모두 이제 졸업만 기다리는 한량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수능조차 안 친 한량 중의 한량이 고로케 포장을 뜯어주며 나를 나무랐다.
"넌 아직도 그렇게 모르겠냐? 네놈이 졸업식에 와야, 네 동생도 올 거 아니야."
"아."
"한설이랑 사진이라도 한 번 찍어보고 싶은 팬의 마음이 아니겠냐, 이 둔탱아."
"우리 설이 사진 찍는 거 싫어하는데.”
우정혁은 껌을 하나 꺼내 씹으면서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걔 그럼 너랑도 사진 안 찍어?"
"아니지, 당연히 나랑은 사진 찍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흘겨보자, 우정혁은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껌을 씹는다.
작년 교내에서 설이와 단둘이 운동장 산책로에 앉아 잠시 노닥거리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찰칵 셔터 음 소리가 났다. 다른 학생들이 지나가면서 셀카라도 찍나 보다 생각하며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설이는 벌떡 일어나서 산책도 뒤쪽 나무 덩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그 속에 잠복하듯 웅크리고 앉아 있던 여학생을 찾아냈다. 그 여학생은 휴대폰을 든 채로 설이를 올려다보며 덜덜 떨고 있었다.
내게는 설이의 너른 등과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설이가 정중하게 우리를 찍은 사진을 지워달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들었다.
그제야 나는 여학생이 설이와 내 사진을 몰래 찍었다는 것을 알았다.
"시… 싫어요. 웃는 사진은 처음이란 말이에요!"
여학생은 울먹이며 소리쳤다. 그리고는 나무 아래에서 벗어나려고 도망치던 찰나, 설이가 그 애의 휴대폰을 낚아챘다. 그 과정에서 여학생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넘어지는 등의 불미스러운 일은 전혀 없었을 뿐더러, 설이가 그 휴대폰을 바닥에 던지거나 고장 내려고 한 적도 없었다.
그저 휴대폰을 잡아챘을 뿐이었는데 어째서인지 휴대폰이 반으로 구부러졌다. 액정이 부서진 것은 물론이고 꼬부랑 할아버지처럼 휴대폰 허리가 굽어 버렸으니 당연히 사용불가 상태가 되어버렸다.
어떻게 그 단단한 휴대폰이 설이의 손 안에서 갑자기 구부러져 버렸는지는 지금도 의문이지만, 내가 휴대폰 값을 물어내주겠다고 하자 여학생은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대로 이름도 모른 채 여학생이 도망쳐 버려서 그 일은 그렇게 마무리되고 말았다.
"미안해, 형. 나 때문에……."
설이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네가 잘못한 게 뭐가 있어. 근데 휴대폰이 왜 갑자기 부러졌을까, 신기하네.”
“나 때문에 형 사진 찍혔잖아. 미안해……."
나 따위 사진이야 백날 찍어봐야 아무 상관 없는데도, 설이가 너무 침통한 표정이어서 나는 설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 뒤로 설이와 학교에서 같이 있는 시간을 만들지 못했다. 어째서인지 나와 함께 있을 때면 설이는 유독 사진을 많이 찍혔기 때문에, 또 같은 소동이 일어날 까봐 내가 먼저 피하게 된 것이다.
나는 고로케를 우정혁 몫까지 다 먹고 난 뒤에야 겨우 만족의 한숨을 내쉬었다.
"졸업식에 웬만하면 올 까봐. 설이랑 기념 사진 찍으려고."
"그러던지. 나는 못 온다. 나 없다고 울지 마라."
"왜? 너처럼 한가한 놈이 졸업식에 왜 못 와?"
우정혁은 앞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면서 피식 웃었다. 내 눈이 절로 우정혁이 꺼내는 담배에 눈이 갔지만, 설이와 약속한 게 있어서 침만 꿀꺽 삼켰다. 우정혁은 얇은 카디건을 챙기며 담배 피러 구관 창고로 나갈 채비를 했다.
"하와이 가기로 했어. 어머니랑."
"와…… 부잣집 클래스 봐라. 외국을 옆 동네처럼 막 가네. 졸업 여행, 뭐 그런 거냐?"
"아니. 어머니가 이맘때 한국에 있는 걸 힘들어 하셔서."
무슨 말인가 싶어서 올려다보자, 우정혁이 껌을 포장지에 뱉어내곤 교실 뒤쪽 쓰레기통을 향해 던져 넣었다. 골인이었다.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하더니 우정혁이 심드렁하게 툭 내뱉었다.
"누나 때문에."
"누나? 무슨 누나. 너 외동아들 아니었냐?"
우정혁은 미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 원래 누나 있어. …있었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교실 뒷문으로 터덜터덜 걸어나갔다. 따라 나갈까 싶었지만, 혼자 있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놔두었다. 잘은 모르지만, 저 집도 가정사 복잡한 모양이었다.
하긴, 즐겁기만 한 삶이 어디 있을까.
돈 많은 집에는 그 나름의 고통이 있을 것이다.
***
돈 없는 나한테는 또 나 나름의 고통이 있어서, 편의점 알바 도중 비는 시간에 구인구직 어플을 다운 받아서 계속 목록을 내려 보는 게 요즘의 취미였다. 한숨을 폭 폭 내쉬고 있는 내게 수아 누나가 다가와서 메론바를 내밀었다. 그러고 보면, 우정혁이나 수아 누나나 나만 보면 자꾸 먹을 것을 내미는 이유를 모르겠다. 너무 마른 체질이라서 보기에 안쓰러운 걸까.
"취직하려고? 어떤 곳이 좋은데?"
수아 누나는 아이스크림 포장지를 까면서 내 휴대폰 화면을 흘깃 넘어다 보았다.
"글쎄요. 특별한 건 없고… 수습시간 포함 월 이백은 주면서, 정시에 퇴근하고, 고졸이어도 가능하고 특별한 능력은 필요하지 않지만 배워서 충분히 습득할 수 있고, 또 가능하면 집이랑 가까워서 교통비 안 들고, 불법적이지 않으면서 노동 착취 당하지 않는 올바른 방식으로 경영 중인 법인 회사요."
"…애늙은이, 너 어디 동물의 숲 같은 데에 살고 있니? 그런 회사가 있어?"
역시 너무 뜬구름 잡고 있나, 싶지만 어쩔 수 없다.
제대로 된 직장이 아니면 설이가 허락해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여름 방학 때 마침 버거 배달하다가 만난 애 소개로 좋은 일자리가 있었다. 단기 알바인데다가 당일 현금지급이라니, 급전에 목마른 내게는 정말 딱 이었다. 건설현장 심부름꾼으로, 처음에 적응하려면 꽤나 고생해야 하지만 근육통만 잘 이겨내면 그만한 꿀알바도 없다는데 출근 도중에 설이에게 붙잡혀서 집에 돌아왔다.
'형이 정 그런 곳에서 일하고 싶다면, 나도 같이 하게 해줘.'
설이의 한 마디에 나는 지고 말았다. 소중한 내 동생을 그런 힘든 일 하는 데에 데려갈 수 없었다. 그런 조건을 내건다면, 내가 결국 포기하고 말 것이라는 걸 설이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앞으로는 무슨 일을 하게 되든, 설이에게 미리 제대로 설명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나마 편의점 알바만은 허락해줘서 다행일 지경이다.
"애늙은쓰, 전화 오는데?"
휴대폰 화면에는 모르는 번호가 찍혀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그루 엔터테인먼트 기획팀 이하원이라고 합니다만, 한준 씨 되십니까?"
피로감을 느끼며 나는 눈을 감고 눈꺼풀 위를 꾹꾹 주물렀다. 조용하다 싶더니 다시 난리였다.
"저 한준 맞습니다. 그런데요, 설이 때문에 전화하신 거라면 설이는 그쪽에 아무 관심이 없다고 몇 번이나 말씀 드렸고요. 저도 형이라고는 하지만, 설이가 맘 없다는 걸 강요할 수는…"
"아, 그게 아니라 혹시 취업 생각 있으신지 물으려고 전화 드렸습니다."
"…네?"
***
거대한 자동문이 열리자, 그 안으로는 미래시대로 타임머신 타고 넘어온 듯 유리로 된 계단과 투명한 엘리베이터 같은 것으로 꾸며진 건물이었다. 휘황찬란한 건물에 눈이 휙휙 돌아갔다.
이런 투명한 소재는 지문이 잘 남아서 걸레질을 하루 종일 해도 모자랄 텐데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 거지, 싶다가도 당연히 청소부도 많이 고용하고 있겠지 싶어 홀로 납득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내가 바로 그 일을 맡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바닥 타일이고 벽면의 연예인 사진 박힌 액자고 전부 닦아야겠지, 그 규모를 가늠하며 걸었다.
몇 번이나 전화로 목소리를 들었지만, 기획팀 이하원 팀장을 직접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게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명함을 건넨 그는, 나를 소파 자리로 안내했다. 엔터테인먼트 건물 안에 사내 카페가 있는지, 그가 내민 아이스 아메리카노 테이크아웃 컵에는 그루 엔터테인먼트 로고가 박힌 컵홀더가 끼워져 있었다.
"저희가 그 동안 자주 전화로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귀찮으셨죠?"
"아, 아니… 뭐, 괜찮습니다. 그보다 제 취업이라는 게 대체 무슨 말씀인지……"
그는 싱긋 웃으면서, 친절하게도 회사 내에 소속되어 있는 연예인들이나 연예 사업에 대한 설명을 먼저 해주었다. 아무래도 이런 일과 영 관련 없이 학교만 다니고 살아온 내게는 무척이나 생소한 세계였다.
"그래서 저희에게는, 소속 연예인들을 잘 관리하는 체계와 그걸 이뤄줄 많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최상의 컨디션으로 좋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게 돕는 것, 매니지먼트라는 게 바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그, 그렇겠네요."
"한준 씨께 연락 드린 것도, 동생분을 그렇게 알뜰살뜰하게 잘 돌보는 한준 씨에게서 매니저로서의 좋은 자질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한준 씨가 딱 적임자거든요."
"제, 제가요?"
이하원 팀장은 매니저의 업무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곁들였다. 특별한 능력이나 자격증 같은 것도 필요하지 않고, 그저 튼튼한 신체와 성실함이 가장 큰 재능이 될 것이라는 말에 솔깃했다. 게다가 점차 업무 경력에 따라 연봉도 빠르게 오르는 편이며, 노력만 한다면 승진도 쉽다고 하니 누가봐도 좋은 직장이었다. 그래도 마냥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닐 텐데, 의심할 때쯤 이하원이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면허는 있어야 합니다만…"
"아, 그건 금방 딸 수 있어요!"
대답하고 나서야, 그의 제안에 혹해버린 속내가 뻔히 보였나 싶어서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하원 팀장은 씩 웃으면서 내게 악수를 청했다.
"이거, 생각보다 훨씬 더 얘기가 잘 통하는 분이시라 다행입니다."
"아뇨… 아직 결정한 건…"
"한설 씨도 형님 분처럼 대화가 좀 더 잘 되는 분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사실 설이가 타인과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는 편이 아니라는 것은 알기에 나는 어색한 미소를 띠었다.
너무 싸고돌면서 키운 내 탓도 있었다. 타인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성격은 못되었다. 그래도 오히려 거절의 의사표현은 확실하게 하는 아이로 자라서 그게 더 다행인가 싶기도 했다.
"한준 씨도 아시겠지만, 한설 씨처럼 흡인력 있는 외모는 업계에서도 드물거든요."
"아, 그건 그렇죠."
역시 프로는 프로였다. 설이 외모에 대한 평가가 정확한 사람이었다.
"예쁘장하거나 멋진 외모는 수술해서 어찌 만든다고 해도, 한설 씨의 그 눈빛과 아우라는 도저히 대체될 수 없는 매력인 겁니다. 물론, 지금 한 순간만의 아름다움일 수도 있는 거지만 말이죠. 유명한 배우 중에도 어릴 땐 못생겨서 흑역사가 있다거나 그런 사람도 많습니다."
"저기, 우리 설이는 흑역사가 없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쭉 봐와서 제가 잘 알아요. 그리고 앞으로도 그대로 멋진 청년으로 자랄 겁니다. 제가 보장할 수 있어요."
여태까지는 우정혁이 잘 안 들어줘서 못했는데, 오랜만에 설이 칭찬에 열을 올리려니 흥이 났다.
"사실 말이죠, 설이가 어릴 때부터 스카우트 많이 당했었는데, 그걸 다 거절해온 거거든요. 예상하시겠지만, 중학생 때 처음 교복 입었는데 너무 잘 어울려서 아침 등교 때마다 눈이 부셔서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할 지경이었어요. 공익을 위해서 애 얼굴을 모자라도 써서 가려야 하나 싶었다니까요. 아니나 다를까, 교복 맞춘 브랜드에서 모델로 쓰고 싶다는 제의도 있었고요. 교내 대표 지면 광고 모델로 쓰고 싶다고 교장 교감도 사정사정 했었는데, 설이가 싫다고 해서 거절했었어요. 그때도 참, 거절하기 피곤했습니다."
이하원 팀장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군요."
너무 떠들었나 싶어서 좀 후회가 되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빨아 먹으며 목을 조금 축이고 있자, 이하원 팀장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서 형님 분 혼자 감상하시기에는… 너무 아까운 외모라는 생각이 드네요. 안 그러십니까? 한설 씨 정도라면, 국내를 넘어 세계적 스타가 될 수 있는 자질도 충분하다고 보거든요. 일단 잡지 모델로 시작해서, 연기를 배워 드라마 주연 하나만 넣어놓으면 그대로 금방 날개 달려서 엄청난 인기를 타게 될 거라고 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저 이 업계 15년입니다."
"아, 그렇지만…"
"제대로 된 작품 만나서 운 좋으면, 작품 하나 찍어서 그걸로 평생 호화롭게 지낼 수 있는 부를 거머쥘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이거, 아무에게나 오는 기회는 아니라는 거 말씀 안 드려도 아시겠죠."
"아…"
한류 드라마가 DVD로 해외 곳곳에 판매되어서 듣도 보도 못한 지구 반대편의 먼 타국에서도 인기를 얻어서 대박이 났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그대로 세계적 배우 반열에 오른 드라마 주역은 강남에 건물이 몇 채라고 했던가.
그것보다도 만약 설이가 그런 스타가 된다면, 많은 작품들이 DVD로 남아서 설이 얼굴을 언제 어디서나 두고두고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더 솔깃했다. 귤 까먹으면서 티브이 앞에 앉아서 이런저런 표정을 연기하는 설이를 감상할 수 있다니 엄청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아, 안돼."
"네?"
겨우 혼잣말을 내뱉으며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연예인 생활이 얼마나 고독하고 괴로운 지는, 연일 쏟아지는 가십 기사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 화려해 보이는 직업은, 그만큼 뒤가 구리다는 것도 익히 들어 아는 사실이었다.
설이는 안정적이고 좋은 직장을 얻어서 편안한 삶을 살게 하고 싶다. 타인의 시선에 일거수일투족 책잡히는 인생은, 살게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만 남도록 한 번에 쭈욱 빨아 마시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기… 설이 일 때문에 저 회유해보려고 부르신 거라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뒤돌아 서서 사무실 문고리를 잡았을 때, 이하원 팀장이 불쑥 말했다.
"수습기간 삼 개월 동안 이백오십, 그 뒤로는 삼백 드리겠습니다."
"......"
"인센티브 있을 거고요, 면허 따고 나면 차량 지급합니다."
나는 조용히 문고리를 놓고, 아까까지 앉아서 설이의 미모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차분히 앉았다.
"…4대 보험 다 되는 거죠?"
내 물음에 이하원 팀장은 믿음직스러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어쩌면 설이를 연예계로 유혹하기 위한 덫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들었지만, 고졸인 내게 이렇게까지 조건 좋은 직장은 아마 없을 것이다. 단호하게 거절하기에는 너무 많은 금액이었다.
아직 졸업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근로계약서는 졸업 후 작성하기로 했지만, 그때 꼭 계약서를 쓰겠다는 서약서까지 작성하고 나서야 나는 돌아갈 수 있었다.
***
후련한 마음으로 휘파람을 불면서 돌아올 때에는 즐거운 생각뿐이었는데, 막상 설이가 기다리는 집 앞에 다다르자 깨달았다. 서약서를 쓰기 전에 설이에게 미리 허락을 받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든 되겠지, 고개를 저으며 현관문을 열자 설이가 울상이 되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발소리를 듣고 이미 내가 오는 것을 알았는지, 신발장 앞에 서서 내가 들어오자마자 나를 꼬옥 덮치듯이 껴안았다. 양말 신은 발로 마중 나와 끌어안는 설이가 아이 같아 귀여웠다.
"왜 이렇게 늦었어."
귓가에 입술이 닿을 정도로 가깝게 붙이며 설이가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탓에 귀가 간지러웠다.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설이의 등을 쓸어주었다.
"미안. 배고프면 찌개 데워서 먼저 먹지, 또 안 먹고 있었어? 냉장고에 포도도 있는데."
"……걱정했잖아."
외출했던 주인에게 치대는 강아지처럼 설이가 나를 껴안은 채로 낑낑거리고 있어서 거실을 가로질러 걸어가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어서 점퍼만 벗어 놓고 김치참치찌개부터 데워야지, 하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는데 설이가 날 껴안은 채 갑자기 우뚝 멈춰 선 바람에 나도 거실 한 가운데에서 안긴 채로 멈췄다.
“왜 그래, 설아?”
“……”
내 목덜미에 코끝을 대며 설이가 킁킁 냄새를 맡는 듯 했다. 아직 샤워도 안 했는데 얘가 왜 이러나, 민망한 마음에 설이의 품 안에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나를 더 꽉 껴안아서 그 팔뚝 안에 갇혀 버렸다.
설이는 내 머리카락과 어깨까지 훑듯이 냄새를 맡는 듯 하더니 내 어깨를 쥐며 나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눈빛이 변해 차가운 흑회색이 된 눈동자로 나를 빤히 내려다본다. 설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낯선 남자 냄새가 나네.”
낮은 그 목소리에 나는 바람이라도 핀 것마냥 어깨가 움찔 떨렸다. 싸늘한 눈길이 나를 내려다보며 대답을 구하듯 말없이 그대로 멈춰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하원 팀장이 향수를 뿌린 것처럼 향긋한 냄새를 풍겼던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내 몸에 묻어날 정도로 가깝게 있지도 않았다. 얼떨결에 악수 한 번 했던 것뿐인데, 설이는 예민하게 알아채고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내 어깨를 더 세게 쥐었다.
“누구, 만났어?”
이왕이면 밥도 먹고 좀 편안한 분위기에서 내가 그루 엔터테인먼트에서 매니저로 일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차근히 꺼내고 싶었다. 피곤할 정도로 연락이 와서 더 그런 건지, 설이가 그쪽과 관련된 일을 워낙 싫어해서 내가 ‘엔터’ 얘기만 꺼내도 미간을 굳힐 게 뻔했다.
평소라면 설이가 반대하는 일은 깔끔하게 손을 뗐겠지만, 이건 다른 단기 아르바이트들과는 차원이 다른 일자리였다. 설이가 반대하지 않도록 잘 설득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다 싶어, 점퍼를 벗으며 설이를 밀어냈다.
“어어, 그냥 편의점 일하느라 사람 많이 만나서 그렇지 뭐. 밥 먹고 샤워할 거야.”
냉장고에서 냄비를 꺼내 가스레인지에 불을 올리는데,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 나왔다.
월 삼백만 원이라니, 그 정도면 대출금도 금방 갚을 수 있을 것이다. 목돈을 모아뒀다가 설이하고 둘이 살 아늑한 집을 전세로 얻거나… 아니, 살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인센티브까지 얹어준다고 하면, 자가를 얻는 것도 꿈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흥분되어서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힘든 업무를 던져준다고 해도 다 즐겁게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설이만 반대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만사형통이다.
등 뒤로 그림자가 져서 흘깃 뒤돌아보자, 설이가 내 등 뒤에 서 있었다.
“형,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없지?”
“어? 어…… 어, 그럼. 없지. 뭐가 있겠어. 하하… 너도 참.”
자연스럽게 웃으려고 해도 눈을 가늘게 뜨고 내려다보는 설이의 시선을 피하려니 자꾸만 어색한 목소리가 나갔다. 찬장에서 김을 꺼내려고 손을 뻗는데, 설이가 내 손목을 잡아서 돌려세웠다.
진지한 눈빛의 설이가 못 박듯이 천천히 되물었다.
“정말이야?”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는 수 밖에 없었다.
설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손에 힘을 풀어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
“믿을게.”
속으로 다행이다, 생각하며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데 뒤돌아 서는 내 등뒤로 설이가 조용히 말했다.
“거짓말하는 아이는 벌을 받는다고, 형이 그랬었으니까. 그렇지?”
“으, 으응… 내가 그랬지.”
“형에게는 내가 보호자니까, 벌을 줘도 내가 주게 될 텐데……. 형이 내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
씩, 웃는 설이의 얼굴이 어쩐지 우정혁의 말처럼 악마로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하지만 그렇다면 내가 여태껏 본 악마 중에 설이가 제일 아름다운 악마일 거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