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뜨거운 숨결
빈 상자를 정리하다가 커터 칼에 왼쪽 검지를 살짝 베었다. 핏물이 바닥에 뚝 떨어지고, 우유박스를 들고 가던 수아 누나가 그걸 보고는 바로 티슈부터 뽑아 들고 왔다. 건네 받은 티슈로 편의점 타일 바닥에 떨어진 핏물을 닦고 있는데 수아 누나가 혀를 쯧쯧 차면서 티슈를 몇 장 더 뽑아 내 검지를 감싸 쥐었다.
“바닥이 먼저니? 손부터 지혈해야지. 괜찮아?”
“에휴… 또 설이한테 한 소리 듣게 생겼네요.”
예민하고 눈치 빠른 내 동생은, 어딜 조금만 다쳐도 금새 알아채고는 내 옷을 걷어보며 심각한 표정을 하곤 했다. 무릎에 멍만 들어도 바로 약국에 달려가서 멍 연고를 사와 발라주는 자상한 아이였다. 나중에 어떤 여자한테 장가갈지 모르지만, 새삼 남 주기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수아 누나는 연고가 함유된 밴드를 손가락에 감아주며 내 머리를 가볍게 밀어냈다.
“너도 참 브라콤 중증이다, 애늙은아. 누가 다치면서 동생 잔소리를 먼저 걱정하니?”
“우리 설이가 워낙 섬세해서…”
“아, 됐어. 됐어. 동생 자랑 지겨워.”
수아 누나는 우유 박스를 다시 질질 끌고 가다가 뒤돌아봤다.
“참, 너 오늘 좀 일찍 끝내달라고 했다며? 대신 내가 한 시간 연장한다고 했어.”
“고마워요, 누나. 좀 멀리 가야 해서.”
“어디 가는데?”
“청담동에요. 동생 데리러 갈 일이 있어서요.”
손목시계를 흘깃 내려다보니 아직 일곱 시도 안 된 시간이었다. 설이는 파티에 잘 도착했을까.
***
아침 등교할 때 설이는 '나 꼭 데리러 와야 해, 형.' 하고 수줍게 웃었다.
서울로 이사온 뒤, 지리에 익숙하지 않아서 설이가 어디 갈 일이 생기면 내가 꼭 데리러 가서 함께 집에 오곤 했는데, 그때 생각이 나서 잠시 아련해졌다.
점심 시간이 끝나갈 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는데 소리를 빽 지르는 높은 목소리에 귀가 멍해졌었다.
"야! 너 왜 한설이 그루 엔터 대표랑 아는 사이인 거 나한테 말 안 했어?"
"뭐? 누구…… 한지윤?"
"그래! 괜히 협찬 받아보려고 나만 쌩쇼했잖아! 그쪽에서 초대 받았던데…… 짜증나, 진짜."
전화 예절이 왜 그 모양인지 모르겠지만, 한지윤은 알 수 없는 얘기를 늘어놓더니 제 할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내 옆에 앉아서 껌을 씹으며 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우정혁의 해석에 의하면, 설이가 한지윤보다 훨씬 더 연줄이 굵어서 한지윤 없이도 파티에 버젓이 유리구두에 드레스 입고 들어갈 수 있는 신분이라는 것이다.
학교와 독서실, 집 외에는 외출도 거의 하지 않는 설이가 어떻게 그런 연예계 인사와 아는 사이가 될 수 있는 건지 내게는 그게 희대의 미스터리였는데, 우정혁은 내 머리를 통통 쳤다.
"둔하기는. 난 검은 벤츠 탄 남자가 교문 앞에서 네 동생 기다리는 거 몇 번이나 봤는데."
"뭐? 설이를 왜? 나, 납치? 너무 눈에 띄게 잘 생겨서 납치하려고……!"
이래서 너무 지나치게 예쁘장한 외모는 위험한 것이다.
안 그래도 어린 시절 설이를 광고 모델로 쓰고 싶다면서, 아동복 회사 기획부장이라는 사람이 어머니를 귀찮을 정도로 따라다니던 때가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무렵, 출판사 사장에게 아버지 그림책 판권을 전부 빼앗겨버린 기억 때문에 어머니는 뭐든 달콤한 제안은 전부 '사기'라고 단정 짓고 사셨다. 그 기획부장이라는 사람이 선물을 한아름 안고 더 자주 찾아올수록 어머니는 냉대하셨고, 그 뒤로 비슷한 제안이 들어왔어도 어머니는 절대로 승낙하지 않으셨다.
나는 설이 외모를 칭찬하는 낯선 어른이 언젠가 설이를 홀랑 들고 튀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속에 자랐다. 그래서 틈만 나면 발차기에 매진했던 것이다.
우정혁은 질린다는 얼굴을 했다.
"야. 백팔십이 넘는 건장한 네 동생을 어떻게 납치해 가겠어."
"우리 설이가 그래 봬도, 애가 여려서……!"
"됐고, 벤츠 타고 온 남자는 아마 연예 기획사 쪽 사람일 거다. 네 동생 데려가려고 아예 죽치고 있다던 소문 꽤 퍼졌었는데."
"나는 왜 몰랐지?"
"네 동생이 그런 얘기 네 귀에 들어가는 거 싫어해서 그랬겠지."
우정혁의 결론은, 그러니까 놔두면 제 앞가림 잘하는 동생 가지고 안달복달할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우정혁이 설이가 얼마나 겁이 많은지 잘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오늘만 해도, 그런 성대한 파티에 가는 게 처음이라 겁이 났는지 나에게 꼭 데리러 오라는 말을 몇 번씩이나 했다. 설이가 나하고 떨어져 있는 걸 워낙 두려워해서, 나는 여태껏 친구 집에 놀러 가서 자고 오거나 수학여행이나 수련회에 참가하지도 않았었다. 그 정도로 설이는 소심한 부분이 있는 아이였다. 그러나 내 연설을 한참 들으며 우정혁이 눈을 가늘게 뜨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너도 참 콩깍지가 제대로다."
"내가 뭘."
"아무튼 일 끝나고 거기 가서 봐라, 네 동생이 정말 겁 먹고 벌벌 떨고 있을지."
우정혁은 설이가 없으니 하굣길에 편의점까지 따라와서 컵라면에 냉동만두까지 먹고 놀았다. 집에 있는 기사님 불러서 청담동 파티장까지 나를 바래다주겠다고 해서 내게 등짝을 얻어맞고 돌아갔다.
물론 거기까지 혼자 가려면 버스를 몇 번 갈아 타야 했지만, 그래도 괜히 신세 질 필요까지는 없었다. 설이와 집에 돌아갈 때는, 택시를 탈 예정이었다. 낯선 환경에서 설이가 얼마나 긴장하고 피곤했을지 생각하면 괜히 파티 같은 데를 가보라고 했나 약간 후회도 되었다.
건물이 길쭉하게 모두 잘 생겼고, 거리가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바닥 아스팔트마저도 학교 앞 거리와는 느낌부터가 달랐다. 부자 동네에 볼 일이 없어서 몰랐지만, 막상 와보니 우리 동네와는 다른 세계 같았다.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산책하는 강아지마저 무언가가 달랐다. 딱히 위축되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았다.
주소를 찾아가자, 거대한 건물 앞에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드라마에서 보던 클럽 같은 분위기였는데 여자들은 하나 같이 어깨를 드러내놓고 있었고 남자들은 정장에 번쩍거리는 구두 차림이었다.
날도 추운데 설이는 옷을 잘 챙겨 입고 갔을까.
예상보다 30분은 더 일찍 도착한 덕분에 건물 입구에서 설이를 기다릴 수 있었다. 기모 후드짚업 모자를 덮어쓰고 소매를 늘여 손까지 덮었지만, 저녁이라 바람이 쌀쌀했다.
"어디 연습생? 누구 불러다 줄까요?"
문 닫은 옆 건물 계단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고개를 들어보자 체크무늬 정장에 짙은 회색 숄을 두른 남자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일부러 태웠는지 까만 피부였는데, 눈썹도 진하고 인상이 무척 강해서 그런 피부색이 잘 어울렸다. 한눈에도 미남이었다. 연예인 같은 외모였지만, 정말 그렇다고 해도 티브이를 잘 보지 않아서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남자는 정장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서 나를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그 관심이 부담스러워서 후드를 더 깊게 눌러 썼지만, 남자는 허리를 숙여 나와 눈을 맞췄다.
"날 추운데 왜 밖에서 이러고 있어요. 행사 때문에 온 게 아닌가?"
"아뇨. 저는 동생 데리러 온 거라, 금방 갈 겁니다. 정말 신경 안 쓰셔도 돼요."
"흠."
남자는 내가 손을 휙휙 내저어도 가지도 않고 계속 내 얼굴을 바라봤다. 자꾸 귀찮게 말을 거는 게 기분 나빠서 뭐라고 짜증이라도 내려는 순간, 남자는 씩 웃었다. 시원하고 매력적인 미소였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것 같네. '권영도'라고 내 이름 대고 들어가요.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면 되지."
"말씀은 고맙지만, 정말 괜찮습니다."
내 딱딱한 대답에 남자는 부드럽게 웃었다.
"정말 나를 모르는 구나."
남자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고, 전화를 받고 나서 그는 허리를 숙여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또 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요.' 라고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꾹 고개 숙여서 인사했다. 어차피 이런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을 내가 일생에 다시 만날 일은 전무했다. 내가 지금 바라는 것은, 설이를 데리고 빨리 따뜻한 우리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아!"
인파 속에서 나는 설이를 단번에 찾아낼 수 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쉽사리 그쪽으로 다가갈 수 없었다.
설이는 내가 모르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검은 정장에 긴 코트를 걸치고 있었는데, 전에 본 적 없는 옷이었다. 구두와 벨트, 넥타이까지 전부 고급스러워 보였다. 까만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훤칠한 이마가 드러나니 설이의 미모가 한층 더 돋보이는 것 같았다.
옆에 선 여자들은 모두 예뻤지만, 설이만큼 아름답지는 못했다.
"아…"
하늘하늘거리는 연분홍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설이의 뺨에 키스했다. 설이의 허리를 팔로 감싸고 뭐라고 속삭이는 동안, 설이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마치 환상을 보는 것 같았다. 설이는 입 끝을 올려 작게 웃으며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서양 어딘가에서는 뺨에 입을 맞추는 게 인사라고 했던가.
사람들은 모두 설이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내가 없는 곳에서 설이가 반짝반짝 별처럼 빛났다. 화려한 인사들 중심에 설이가 서 있다.
"……"
주먹을 꾹 쥐었다. 나는 내 마음속에 부글거리는 이 뜨거운 열기가 뭔지 알 수 없어서 약간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분명 내가 바란 모습이었는데……. 유명한 사람들이 온다는 파티에서 설이가 잘 적응하고 그들의 사회에 속해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왜 웃음이 나오지 않는 걸까.
또 다른 여자가 등 뒤에서 다가와 설이의 어깨를 쥐었다. 반짝이는 손톱과 흰 손가락이 고운 도자기 인형 같았다. 설이의 넓은 어깨를 쥔 그 여자의 손에 내 눈이 고정되었다. 그 여자가 설이의 뺨을 가볍게 쓸었고, 내 주먹이 움찔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설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 저기… 나 여기……"
웅얼거리며 나는 어색한 미소로 손을 흔들었다. 설이는 고개를 기울여 내게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 조금도 긴장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인사를 한 뒤에 설이는 점점 내 앞으로 다가왔다.
코트 자락이 바람결에 나풀거렸다. 명품 로고 모양 그대로 버클이 되어 있는 가죽 허리띠와 고급스러운 검은 정장 덕분에 새하얀 설이의 얼굴은 마치 명화 속 인물처럼 더욱 돋보였다. 가까이 다가오는 설이의 모습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생각에 눈을 깜빡일 수 없었다.
코 앞에 다가온 설이가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두 손으로 내 귀를 감쌌다.
"형, 언제 왔어. 춥겠다."
"아… 아냐. 금방 왔어. 방금 도착했어. 이제 집에 가는 거지?"
설이는 귀를 감싼 손가락으로 내 뒷머리를 간질이듯 만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안심이 되어서 나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화려한 세계에 속해 있든 어쨌든, 설이는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 그것이면 된다.
택시 뒷좌석에서 설이는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옅은 향수 냄새가 풍겼는데, 평소 설이에게서 나는 체취가 아니라서 내 손을 잡고 있는 것이 낯선 남자처럼 느껴졌다. 꼼지락거리며 살짝 손을 벗어나려고 하자, 설이가 손가락 사이에 깍지를 끼며 내 손을 더 꽉 잡았다. 그 감촉에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설이와 눈이 마주쳤다. 입 끝을 미미하게 올려 웃는 설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여자의 입술이 닿았던 뺨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갔다. 립스틱 같은 게 묻어 있지는 않았지만 나는 설이의 손을 잡지 않은 오른손을 뻗어 설이의 보드라운 뺨을 닦아내듯 쓸었다.
"파티는, 재미있었어?"
"그냥… 그랬어."
"그래? ……즐거워 보였는데."
나도 모르게 투정하듯 중얼거리자, 설이는 나를 내려다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냐. 나는 형이랑 집에 있는 게 더 즐거워."
내 손을 만지작거리는 설이의 손장난이 귀여워서, 나는 웃음이 났다.
설이는 내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손목을 쥐어 들더니, 왼손 검지를 감싼 밴드를 살펴봤다. 살짝 핏물이 배어 나와 있었다. 눈썹을 세우고 예민한 표정을 한 설이가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어쩌다가 다쳤어. 속상하게.”
“아, 별 거 아니야! 일하다가 조금.”
혀를 쯧 차면서 내 검지를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리는 설이의 손길에 이미 고통은 다 날아가버린 뒤였다.
낯선 환경에 긴장해 있던 것은 설이가 아니라 나였던 듯, 차장 밖으로 익숙한 동네가 들어오자 나는 마음이 놓였다. 마치 누군가에게 동생을 빼앗길 뻔했다가 찾아온 기분이었다. 이런 화려한 파티는 한 번이면 족하니까, 다시 설이에게 권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집에 도착하자, 설이가 입고 있는 옷과 액세서리들이 얼마나 고급스러운 것들인지 알 수 있었다. 애초에 현관에 벗어놓은 구두조차도 우리 신발장에 어울리지 않았다.
은은한 빛을 내는 검은 넥타이를 잡아 끌어내며 설이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모습을 여자들이 섹시하다고 느끼는 거겠지.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설이가 허리띠 버클을 풀어내는 것에 나는 휙 시선을 돌렸다.
"그 옷들은 다 어디서 난 거야? 세탁해서 돌려줘야 할 텐데."
"안 돌려줘도 돼. 그냥 선물 받은 거야."
빨래 바구니에 들어 있는 코트와 넥타이를 내려다보다가 나는 불쑥 고개를 들었다. 설이는 검은 셔츠 단추를 풀어내는 중이었다.
"이렇게 비싼 걸 누가 선물로 줬어?"
"그냥…… 아는 사람."
나는 셔츠를 벗어 내게 건네는 것을 받아 들고, 설이의 판판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숨을 쉴 때마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복근에 멍하니 시선을 두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여자?"
그러다가 이내 아차, 싶어서 고개를 들었다. 설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꼰대처럼 설이가 누굴 만나고 뭘 하고 다니는지 코치코치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동생을 자유롭게 살게 하는 쿨한 형이고 싶었는데, 내 의지와 다르게 이상한 질문을 해버렸다.
얼굴에 열이 올라서 확인 안 해봐도 새빨개진 것이 느껴졌다. 허둥지둥 옷가지를 챙겨 빨래바구니에 넣으며 설이를 등지고 섰다.
"아, 아니, 그냥 물어본 거야. 아하하…! 대답 안 해도 돼. 배고프진 않아? 뭐 만들까?"
설이가 다가와 내 등을 꼭 끌어안았다. 짙은 남자 향수 냄새에 낯설어서 몸이 움찔거렸다. 등 뒤의 설이가 내 귓가에 작은 웃음소리를 내며 귀 뒤에 콧날을 비볐다. 행복해할 때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여자 아니야. 정말 그냥 아는 사람."
"……으응. 그래. 어서 샤워해. 응?"
설이가 내 가슴을 꽉 끌어안으며 내 뒤통수에 뺨을 붙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를 놓아주기 전에, 부드럽게 속삭이듯 말했다.
"형 오늘, 나랑 같이 자는 거야. 알지?"
대답도 듣지 않고 설이는 그대로 욕실로 걸어갔다. 나는 왠지 모르게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대서 가슴을 꾹 누르며 진정시켰다. 아직 젊은데 심부전증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
설이 다음 차례로 나도 씻은 뒤, 잠옷을 입고 머리를 말렸다. 내 머리카락을 말릴 때, 젖은 머리로 기다리고 있던 설이의 머리카락까지 함께 말려 주었다.
샤워를 마친 설이에게서는 평소의 비누 향이 났다. 진한 남자 향수 냄새가 사라지자, 다시 내가 아는 동생이 되돌아온 것 같았다. 귀엽게도 베개를 안고 내 방에 와서 이불 위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이제 불 끄고 누울까?"
"응. 이리와, 형."
설이는 옆으로 누워서 내 쪽으로 팔을 벌렸다.
예전에는 내가 설이에게 팔 베개를 해주곤 했었는데, 이제 그러기에는 설이가 나보다 훨씬 더 커버렸다. 나는 어두워진 방 안에서 설이의 품 안으로 들어가듯 곁에 누웠다.
천장을 보는 자세로 누운 나를, 설이는 두 팔로 가두듯 끌어안았다.
"너… 그러고 안 춥겠어?"
반라 상태로 잠옷 바지만 입고 있는 설이의 가슴팍에 안겨 있으려니 뜨거운 설이의 체온이 너무 적나라하게 느껴져서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설이는 내 어깨에 이마를 비벼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반대편으로 살짝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했다.
"그, 그러다가 감기 걸려."
"나 감기 걸린 적 없는 거 알잖아, 형."
그러고 보니 설이는 단 한 번도 감기에 걸린 적 없었다.
추위에 강해서 눈 오는 날에도 반팔 티셔츠를 입고서도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얼굴이어서 놀란 내가 얼른 니트를 가져다가 입힌 적도 있었다. 어쩌면 반은 인간이 아닌 짐승이기 때문에 체온이 높은 것인지도 몰랐다.
내 목덜미에 와 닿는 설이의 숨결이 뜨겁고 간지럽다. 화상이라도 입을 것처럼 목덜미의 피부가 덩달아 달궈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졸린 것처럼 하품을 지어내며 설이에게서 등을 돌려 옆으로 누웠다.
어릴 때처럼 옷을 다 벗고 알몸으로 자는 습관은 없어져서 다행이었지만, 다 큰 동생의 벗은 상체에 끌어 안겨 있으려니 쑥스럽고 민망해서 도저히 얼굴을 보면서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설이는 내 등을 꽉 끌어안고 내 목 뒷덜미에 제 입술이 닿을 듯 가까이 누웠다.
얇은 잠옷 천 사이로 설이의 뜨거운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심장이 이상할 정도로 뛰어서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등 뒤에서 느긋하게 숨을 내쉬던 설이가 내 허리에 두른 팔을 움직여 내 아랫배를 가볍게 쓸듯이 만지작거렸다.
"형, 벌써 자?"
"읏……"
설이가 속삭일 때, 부드러운 입술이 움직여 내 뒷목에 닿았다. 그 간질거리는 촉감에 등줄기가 찌릿했다. 나도 모르게 벗어나려고 설이의 팔을 잡아 떼려고 하는데, 강하게 끌어 안고 있는 것도 아닌데 설이의 팔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설이는 괜찮다고 나를 다독이듯 커다란 손바닥으로 내 가슴 위를 부드럽게 쓸었다. 뜨거운 손바닥으로 내 박동 소리가 전해질 까봐 나는 숨을 참았다.
설이가 작게 한숨 쉬듯 웃었다. 간지러운 숨이 내 피부를 타고 미끄러졌다. 내 어깨가 움찔거리자, 설이는 조금 틈이 생길 정도로 내 몸을 놓아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설이의 팔 안에 갇힌 상태였다. 설이가 내 손등을 덮어 감싸 쥐었다.
"……아까 사람들하고 인사하다가 형을 봤는데, 이상한 표정이었어."
"내, 내가?"
설이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응, 하고 대답했다. 내 등에 바싹 다가와 붙은 설이의 상체가 나를 벽처럼 가두었다.
"여자들하고 인사할 때."
"아."
머릿속에 설이의 뺨에 키스하던 여자와 설이의 어깨를 쥔 가느다란 손가락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입술을 꾹 안으로 말아 넣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설아, 있잖아. 내가 일부러 본 건 아니었는데… 그러니까, 저기, 너를 혼내려는 건 아니고… 내 생각에는 아직 미성년자인 네가 여자분들하고 그렇게… 그런… 스킨십을 하는 것은 조금……"
"기분 나빴어?"
"어……?"
속삭이는 설이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어, 라고 대답할 뻔한 것이 물음으로 올라가듯 나와서 다행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설이는 뭐가 그렇게 기분 좋은지 연신 작은 웃음을 흘렸다. 나는 설이에게서 손을 빼내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내 기분… 같은 그런 것보다, 설아. 너는 아직 어리고…… 여자들하고는…"
"입술 안 닿았어. 그냥 뺨끼리 마주 대는 인사야."
"어…… 그, 그래?"
설이는 응, 하고 작게 대답하며 웃었다.
꼼지락거리면서 움직이다 보니까 어쩌다가 설이의 입술이 내 뒷목에 살짝 닿았다. 부드럽고 뜨거운 촉감이 예민한 목에 닿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리며 몸이 경직되었다. 실수인 듯, 설이의 입술이 다시 한 번 내 목에 촉- 소리를 내며 닿았다.
"안심해, 형. 나는, 언제까지나 형 거니까."
그게 아니라,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할 말을 고르는 동안 어쩐지 뒷목에 닿는 뜨거운 숨결이 간지러우면서도 편안해서 나는 스르르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어느새 표범의 꼬리가 나와서는, 내 종아리를 부드럽게 감는 것을 느꼈다. 잠결에 설이가 뭔가 더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지만, 너무 졸려서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천사의 속삭임처럼 아주 기분 좋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