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같이 자고 싶어.
아침 일찍 출근한 사장님과 교대할 때, 나는 거의 초주검이 되어 있었다.
새벽 한 시쯤에 휴학생 수아 누나가 퇴근하고 나면, 그때부터 편의점을 혼자 지키게 되는데 청소와 재고정리, 진열과 계산을 부지런히 하다 보면 졸 시간도 없었다.
사장님은 편의점 로고가 박힌 조끼를 입으며 나를 돌아봤다.
"준아, 너 이만 가. 고생했다."
"아…"
"왜, 뭐 할 말 있니?"
주섬주섬 짐을 챙기면서 나는 네, 하고 작게 대답했다. 바로 말이 나오지 않아서 소매 끝을 끌어당겨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끌었다. 그 사이에 손님 하나가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왔고, 담배랑 껌 하나를 계산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게 손님 몇이 더 들어오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뒤로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돈 부탁하는 건 아무리 많이 해봐도 익숙해지지 않고, 누구한테여도 꺼내기 어려운 얘기였다. 편의점 사장님은 벌써 몇 번이나 내 사정을 봐주느라 급료를 미리 주거나 보너스를 더 넣어주기도 한 분이었다. 이번에도 내가 같은 얘기를 꺼내자 사장님은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너도 알겠지만, 우리 둘째 학원비가 꽤 많이 들어가서… 이번 달엔 여유가 없네."
"아, 그러시겠구나. 저 그렇게 꼭 필요한 돈은 아니었어요."
"미안하다, 준아."
"아녜요, 제가 괜한 말씀 드려서 죄송합니다."
사실 필수적으로 내야만 하는 돈은 아니었으니, 그저 내 욕심이다. 사장님께 부담을 드린 것 같아서 나는 머쓱해진 얼굴로 인사를 꾸벅 하고 편의점을 나섰다. 이른 아침 공기가 상쾌해서 잠 못 잔 머릿속을 씻어주는 것 같았다.
내가 없어도 설이는 일찍부터 일어나 등교 준비를 하고 있겠지만, 그래도 아침을 차려주고 같이 등교하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
"설아, 형이 빨리 아침……"
현관을 들어서면서 급하게 운동화를 구겨 벗는데, 이미 거실에서 고소한 냄새가 흘러 나왔다.
크림 수프와 프렌치 토스트였다. 어릴 적 설이가 어머니와 나에게 처음으로 만들어 준 음식이었는데, 그 뒤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침식사 메뉴가 되었다. 설이가 그 작은 손으로 냄비 속 수프를 휘젓고 발판에 올라가 빵을 뒤집어 굽던 모습을 떠올리면 아직도 눈시울이 시큰하다.
완벽하게 머리를 말리고, 샴푸 향을 풍기면서 설이는 흰 교복 셔츠와 바지를 차려 입은 채 현관까지 나를 마중 나왔다.
싱긋 웃으며 내 어깨를 한 품에 넣어 끌어안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수고했어, 형. 씻어."
"어어. 우리 설이 아침부터 바빴겠다. 나 빨리 씻고 나올게!"
아무리 동생이어도 이 정도로 완벽하고 비현실적으로 왕자님 같으면, 안겼을 때 살짝 가슴이 떨리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하다고 속으로 스스로를 납득시키면서 욕실로 바로 들어갔다.
생각해보면 설이는 한 번도 그 파티에 가고 싶다고 얘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설이의 의견을 먼저 물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돈이야, 염치불구하고 다시 우정혁에게 빌려달라고 해도 되는 일이고, 어차피 벨트든 구두든 사려면 설이가 골라야 할 테니 설이의 의견이 가장 중요했다. 돈 걱정은 안 하도록, 밝은 표정으로 얘기를 꺼내야지 다짐하며 수도꼭지를 잠갔다.
젖은 머리를 탈탈 털어내며 수건을 목에 걸치고 나오자, 설이는 얌전히 크림 수프와 프렌치 토스트 그릇 앞에 앉아 있었다. 뭔가 고민이라도 있는 건지 식탁 앞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나를 보며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
"왜, 먼저 먹지. 응? 어서 먹어, 설아."
"…아침은 꼭 형이랑 같이 먹고 싶어서."
쓸쓸한 미소를 띤 설이의 얼굴을 보자 가슴이 찡해졌다. 며칠 내내 편의점 심야 알바를 뛰는 나 없이 혼자 저녁을 먹으며 설이가 얼마나 외로웠을까. 되도록이면 밤을 새는 일은 맡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스푼을 들었다.
설이는 내가 수프를 떠 먹고 토스트를 한 입 깨무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저도 스푼을 들었다.
정갈한 자세로 식사하는 설이의 모습은 귀공자 그 자체여서 이 모습을 찍어 그대로 로코코 시대 명화 속 한 장면으로 써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누가 키웠는지 참 잘났다. 식사하는 모습 하나로 주변 배경이 평범한 서울 변두리 맨션에서 영국 왕실로 바뀌어 버렸다.
"형, 왜 이렇게 못 먹어. 맛 없어?"
"아아니?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데? 내가 이거 제일 좋아하는 거 알잖아. 난 설이 네가 만드는 게 고급 식당에서 나오는 것보다 훨씬 더 맛있더라?"
내 대답에 설이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수줍게 웃었다. 차마 식사하는 동생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넋을 잃고 있느라 수프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있었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나는 연신 맛있다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식사를 마쳤다.
설이는 내가 다 먹을 때까지 말없이 앉아 있더니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흰 봉투였는데 뭔가 싶어서 열어보니, 빽빽하게 오만 원짜리 지폐가 들어차 있었다.
"형이 뭘 가지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걸로 사."
"뭐… 너… 이게 무슨……"
"필요하면 더 줄 테니까, 야간 일은 하지 말아줘."
곧 혼날 것을 미리 아는 것처럼 무릎을 꿇고 앉은 설이가 시선을 내린 채로 묵묵히 내 대답을 기다렸다. 난 잠시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멍하니 설이의 가지런한 속눈썹과 무릎 위에 올린 손등의 핏줄을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돈 봉투를 열어 보았다.
분명히 돈이었다. 그것도 꽤나 많은 금액이었다. 어림잡아 이백만 원은 될 것 같은 현금이 봉투 안에 가득 들어 있었다. 나는 핏기 가신 얼굴로 바닥에 봉투를 탁 내려놓았다.
"너, 설이 너 이 돈 어디서 났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는데, 설이는 내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낮게 숨을 내쉬고는 차분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형이 준 용돈."
"마… 말도 안 돼. 그거 모아봤자 얼마나 된다고! 너 바른대로 말 안 해?"
설이는 덜덜 떨리는 내 손을 덮어 감싸면서 나와 눈을 맞췄다.
"그 용돈으로, 주식 해서 번 돈이야."
"어…?"
"현금화하려면 이틀 정도는 필요하니까, 미리 말해주면 몇 백은 더 꺼낼 수 있어."
마치 외계어라도 말하는 듯한 설이를 잠시 입 벌린 채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설이 네가 몇 살인데, 주식은 무슨 주식…!"
아, 기억 속에서 그날이 떠올랐다.
설이가 중학생이 되던 해였는데, 어머니가 설이에게 뭐 갖고 싶은 게 없느냐고 물었더니 설이가 주식계좌를 열어달라고 했던 모양이다. 어머니와 설이가 은행에 다녀오는 길에 붕어빵을 사와서 그걸 먹으면서 티브이로 히어로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난다.
그때 한창,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금융 감각을 키워줘야 한다면서 아이들 이름으로 스스로 적금을 들게 하거나 주식계좌를 터서 돈이 굴러가는 흐름을 알게 하는 교육이 시작되던 때였다. 내게도 통장은 있었지만, 주식에는 관심이 없었다. 내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렵고 복잡한 세계였다.
사실상 그렇게 계좌를 연다고 해도, 그걸로 돈을 벌 수 있는 청소년이 얼마나 되겠는가. 실제로 그런 아이들이 존재하기나 할까.
"너… 그러면 옛날에 만들었던 주식… 지금도 하는 거야?"
설이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한 데에는 투자하지 않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그, 그렇지만 넌 아직 어리고…!"
"불법적인 일도 아니고, 아직 그렇게 큰 이익을 보지는 않았어."
목 뒤로 침을 꼴깍 삼키며 나는 눈을 깜빡였다.
한 달에 몇 만원 쥐어주는 돈으로 교통비나 기타 필요한 물품을 사는 것도 빠듯할 텐데, 남은 돈으로 투자해서 이렇게 몇 백만 원씩 빼낼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나게 이익을 본 게 아닌 건가. 나는 그런 세계를 이해할 수 없어서 바닥에 내려둔 불룩한 돈봉투만 쳐다봤다.
내 손을 감싸며 설이가 눈썹 끝을 내리고 슬픈 눈빛을 했다.
"형이 걱정할 까봐 말 못했지만, 나 돈 더 있으니까… 편의점 그만 두면 안 돼?"
"뭐…"
"우리 둘이 꾸준히 쓸만한 돈 있어."
"그건… 그럴 수 없어, 설아."
나는 설이의 손 안에서 내 손을 빼냈다. 단호한 내 표정에 설이는 기운 없는 눈빛을 했다. 새까만 눈동자에 어린 빛이 촛불처럼 흔들렸다. 그 시선을 피하면서 마른 입술을 축였다.
"네가 돈이 얼마 있든, 그건 설이 너를 위해서 써야 해. 여차하면, 대학 등록금이 될 수도 있고… 형은 비록 큰 돈은 못 벌어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해서 돈 모으고 싶어. 너한테 빌붙어 사는 쓸모 없는 형은 되고 싶지 않아."
"형이 왜 쓸모 없어."
설이가 내 팔을 확 끌어당겨 나를 안았다. 내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어리광 부리듯 웅얼거린다.
"형은 내 곁에만 있으면 돼. 그것만 해줘."
나는 한숨을 작게 내쉬며 설이의 부드럽고 까만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설이가 중학교 교복을 입고나서부터는, 되도록이면 함께 걸을 때 손을 잡지 않으려고 했다. 설이의 독립심을 키워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고, 한국 사회에서는 꼬마가 아닌 이상 남자 형제들끼리 손을 잡고 걷지 않는다는 인식을 설이에게도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어도 워낙 잘생겨서 눈에 띄는 설이에게 누군가 손가락질하거나 수군거리게 만들 거리를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은 손을 잡고 등교했다.
주식을 어떻게 하면 그렇게 큰 돈을 버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하지 않고 돈을 손에 넣는 것은 큰 위험이 따른다는 것이 아버지의 지론이었고 나도 그 말을 믿고 있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주식에 큰 돈을 넣지 않도록 타이르기 위해서 설이와 잡은 손을 흔들면서 설이의 기분을 살폈다.
"설아, 있잖아."
"형. 사고 싶었던 게 뭐야?"
"어?"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설이가 먼저 내게 물었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등교 중인 다른 학생들이 우리를 쳐다봤지만 설이는 내 손을 놓아주지 않고 내 얼굴을 빤히 내려다봤다.
하긴, 천 원짜리 한 장에도 바들바들 떨고 마트 깜짝 세일에 열을 올리는 내가 백만 원이 넘는 걸 갖고 싶다고 하니 그게 뭔지 궁금할 만도 했다. 나는 한숨 섞인 웃음과 함께 사실을 고백할 때가 왔음을 알고 설이의 손을 꼭 잡았다.
"실은, 그거 네 구두랑 벨트 좋은 걸로 사주고 싶어서 그래."
"……갑자기 왜."
설이는 낮은 목소리로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기분이 안 좋을 때의 표정이었다. 괜히 긴장이 되어서 나는 변명하듯이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그, 저기, 내가 들어보니까 너 저기 무슨 좋은 파티에 초대됐다고 하더라. 거기 가면 유명한 사람들도 만날 수 있고, 아무튼 좋은 기회라고 하던데… 내가 너 다른 건 못 해줘도, 좋은 구두 한 켤레쯤은…"
"누가 그래?"
"어, 한지윤이…"
"형 그 여자애랑 얘기했어?"
싸늘한 말투에 어깨가 굳었다. 마치 바람이라도 핀 듯한 기분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어버버거렸다. 너보다 걔가 한 학년 위니까 선배라고 해야지, 라는 말도 해줄 분위기가 아니었다. 설이는 기분이 나쁠수록 더 차분해지는데, 나긋한 목소리로 되물으며 내 손을 꽉 쥐었다.
"걔랑 단둘이 얘기했냐고 묻잖아, 형."
"어… 응… 뭐, 강당 복도라서 둘만은 아니었고… 신호! 초록 불이다, 설아. 건너자. 응?"
교문 앞에 도착할 때까지 설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손을 놓아주지 않아서, 나는 얌전히 설이의 큰 손 안에 잡힌 채로 운동장까지 걸어가야 했다.
설이는 신관에 가야하고, 나는 구관에 교실이 있어서 건물 입구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우리는 손을 놓았다. 설이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형은, 내가 그 파티에 갔으면 좋겠어?"
"뭐? 그건, 설이 네가 가고 싶은지가 중요하지. 돈 때문에 그러는 거면… 형이…"
"내가 거기 가야, 형 마음이 편할까."
"아……"
솔직히 나는 설이가 멋지게 차려 입고,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모여서 친목을 다진다는 파티에 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설이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거길 보내고 싶은 것을 보면, 우정혁 말대로 나는 극성부모가 맞는 모양이다.
설이는 대답 없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갈게."
"정말?"
"응, 그렇지만 구두나 벨트는 필요 없어. 그 돈은 그냥 형이 써."
"그, 그래도!"
"내가 알아서 할게. 그리고, 그 여자애 파트너로는 안 갈 거야."
"하, 한지윤한테 초대권이 있다는데?"
"없어도 괜찮아."
설이는 미미하게 웃으며 나를 안심시켰다. 곧 수업 시작을 알리는 차임 벨 소리가 들려왔다. 설이는 뒤돌아서기 전에, 나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하지만 형이 원해서 가는 거니까, 대신 내 부탁 들어줘."
"무슨 부탁?"
"파티 끝나면 형이 데리러 와줘. 그리고 그날은, 형이랑 같이 자고 싶어."
'그리고 그날은, 형이랑 같이 자고 싶어.'
설이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 메아리 치듯이 계속 맴돌았다.
우리 형제는 강원도 산골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한 방에서 꼭 껴안고 잠들곤 했다. 서울로 이사를 와서는, 집에 좁아서 어머니와 셋이서 방을 써야 할 때도 있었다. 나중에 형편이 아주 조금 나아져서 어머니는 작게나마 우리 형제에게 각자 방을 하나씩 내어주었는데, 그래도 한동안 설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베개를 들고 내 방에 와서 함께 잠들었다.
그러지 못하게 된 것은, 몇 년 전부터였다. 처음으로 몽정이라는 것 경험했고, 그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배워 알면서도 스스로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한밤중에 이불을 세탁기에 집어넣었다. 훌쩍이며 화장실에서 속옷을 빨다가 나온 나는, 잠에서 깬 설이와 마주쳤다. 그 당시 설이는 고작 중학교에 입학했던 때였기에 내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눈물 젖은 내 얼굴을 까만 눈동자로 살펴보던 설이는 말없이 제 방으로 되돌아갔고, 그 뒤로 내방에서 자지 못하게 했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심각하게 하냐. 또 돈 때문이냐?”
“아, 동생이랑 같이 자는 생각.”
“……오해의 소지가 농후한 발언인데, 네 표정을 보아하니 19금 딱지 붙을 건 아닌 것 같고.”
“뭐래.”
우정혁에게 결국 백육십이만 원이 필요하지 않게 된 경위와 설이가 꺼낸 돈 봉투, 설이가 파티에 가기로 결정된 결말까지 전부 이야기해주고 나자 우정혁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다 잘된 거 아닌가? 그리고 부탁이래 봐야, 어릴 때처럼 한 방에서 같이 자고 싶다는 건데 무척 소박한 부탁이고.”
“소박하지.”
“근데 뭐가 불만인데. 너 표정이 썩 좋지가 않아.”
“……미안해서 그러지. 형이 되어서는 설이한테 구두 한 켤레 제대로 못 해주고.”
우정혁은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교복 앞 주머니에 껌을 하나 꺼내 내밀었다. 별로 껌을 씹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일단 주는 거니까 받아뒀다.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우정혁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렇게 고민할 필요 없는 거 같은데. 네 동생은 너한테 물질적인 도움 받는 것보다 다른 걸 기대하는 거잖아.”
“다른 거?”
“뭐…… 구관 창고 앞에서 내가 본 그거라거나.”
“야, 쉿!”
혹시라도 우정혁이 설이와 나의 입맞춤을 얼떨결에 흘려 말할까 봐 나는 놀라서 얼굴에 열이 올랐다. 우정혁은 걱정 말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내가 보기에 한준 너는, 네가 해줄 수 없는 걸 걔한테 못해줘서 안달인 것 같은데… 그것보다는, 네가 그 놈한테 ‘해줄 수 있는 걸’ 더 걱정해야 할 거다.”
“무슨 아리송한 말이야.”
“뭐, 언젠가는 무슨 말인지 알 테고, 책이나 펴. 나 교과서 없어.”
어차피 수업 내내 책상에 뺨을 붙이고 퍼져 잘 거면서 우정혁은 내 서랍에서 교과서를 꺼내 펼쳤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볼펜을 꺼내 들었다. 며칠 전의 고민인 듯 교과서 구석에 ‘162’라는 숫자가 적혀 있기에 슥슥 덧그어서 지워버렸다. 이제는 그 위에 ‘10시’라고 끄적거렸다.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파티 장소에 설이를 데리러 갈 때쯤 열 시가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설이는 어릴 때부터 몸에 열이 많아서 옷을 다 벗은 상태로 잠들곤 했는데 지금도 그러려나, 어쩐지 그게 의식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