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얼마면 돼?
수능이 머지않아, 교실 분위기는 꽤나 삭막해졌다.
어차피 대학 진학 예정이 없는 나 같은 애들은 별 생각 없지만, 쉬는 시간에도 꼼짝 않고 제자리에 앉아서 뭔가를 중얼중얼 암기하는 놈들이 많아졌다. 담임은 수시로 학생들을 교무실로 불러 진로상담을 이어나갔고, 내게도 그 차례는 돌아왔다.
"그래, 한준. 너 졸업하고 진로는 다시 생각해본 거냐?"
"지난 달에도 말씀 드렸지만, 그냥 어디 취직자리 알아볼 생각이에요."
"음…"
담임은 쓰고 있던 안경을 책상에 내려놓고 손 깍지를 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내가 일학년이던 때부터 내 담임이었던 그는, 어머니 병실에도 찾아온 적이 있을 정도로 정 많은 교사였다. 가끔 어머니와 전화 통화로 내 상담을 하셔서 나에 대한 어머니의 걱정도 많이 들으셨을 터였다.
"준이 너처럼 졸업 후에 바로 취직하겠다는 애들이 우리 반에 너 말고도 많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 놈들은 뭐라도 '하고 싶은 일'이 있어. 그냥 무작정 대학 안 가겠다, 가 아니야. 주환이처럼 미용 기술을 배우겠다거나 기영이놈은 아버지 따라서 목수 하겠다고 하잖냐. 어?”
"네…"
"한준, 너는 사실 성적도 크게 나쁜 편이 아니고 똘똘하니 예쁘장하게 생긴데다가, 이것저것 잘 하는 게 많은 편인데… 뭘 딱 하겠다는 게 없어서 내가 참 답답하다, 이거야."
나는 묵묵히 담임의 한탄 섞인 걱정을 듣고만 있었다.
담임은 나를 불러다가 몇 번이나 여러 직업에 대해 소개하며 내 '장래희망'을 물었다. 혹시라도 요리를 한다거나 가게를 차린다거나 여행을 한다거나, 그 어떤 것 하나라도 내 취향에 얻어걸리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건, 한결같이 '설이가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을 얻고 남들 보란 듯 잘 사는 것'뿐이다. 그런 내 바람을 나를 삼 년간 봐온 담임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난 말이다, 네가 너무 동생만 바라보고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
"......"
"네 동생은 동생이고, 넌 네 인생이 있단 말이야. 네 어머니께서도 그 걱정 많이 하셨어. 준아."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은 알지만, 나는 설이가 내 인생에 방해물이라도 된다는 듯한 뉘앙스로 말하는 걸 들으면 울컥 반발심이 치솟았다. 입술을 꾹 깨물면서 참다가 나는 결국 고개를 들었다.
"쌤, 제 걱정해주시는 건 감사한데요. 제가 장래희망이나 꿈이 없는 건, 그냥 제가 생각이 없어서 그럴 뿐이지, 설이 때문은 아니에요. 설이는 아무 잘못 없어요."
"준아, 난 그런 말이 아니라…"
"졸업 전에 미리 취직한 만한 곳 알아보고, 다시 말씀 드릴게요. 걱정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꾸벅 인사하고 나오는 길에 담임은 나를 붙잡지 않았다.
내 표정이 안 좋아 보였던지, 교무실에 가기 전까지는 깐죽거리면서 날 귀찮게 하던 우정혁이 물끄러미 팔을 괘고 나를 바라봤다.
휴대폰을 꺼내서 구인광고 사이트에 어디 고 수입 알바라도 없나 알아보는 내 마음도 심란했다.
담임은 내가 어디 지방 대학에 가서 보조금을 받고 공부를 하더라도 대학 졸업장을 하나 따놓고 나서, 직업을 갖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 모든 과정이 의미 없게 느껴졌다. 딱히 뜻을 두지도 않은 공부를 앞으로 이 년에서 사 년 가까이 하면서 대출을 늘리는 것이, 나중에 내게 어떤 보상이 될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그런 이름 없는 대학 나와서 대기업에 입사할 수도 없는 건데, 차라리 일찍부터 몸을 굴려 돈을 벌어 차곡차곡 적금 넣어두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고졸은 일할 곳이 마땅치 않네."
내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우정혁은 익숙한 제안을 했다.
"우리 아버지 회사에 꽂아준다니까. 뭘 그렇게 걱정이야."
"됐어… 꼴통 아들 하나도 힘드실 텐데, 아들놈 친구까지 붙어서 그러면 무슨 추태야."
"근데 이게, 자꾸 꼴통 꼴통거리네."
"너 학년 꼴찌잖아."
"백지 내서 그렇다니까 진짜 안 믿네."
"야, 우리 그냥 호스트바라도 들어갈까? 뭐가 없다, 진짜."
우정혁은 나를 빤히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너 같이 삐쩍 마른 희멀건 한 놈을 과연 누님들이…"
"스톱, 알겠어, 됐어, 그만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자율학습 중이라 교실은 조용했고, 심야 알바를 위해서 나는 잠을 보충해두어야 했기에 책상 위에 엎어졌다.
우정혁은 내 등에 체육복을 덮어놓고는 영화라도 볼 작정인지 에어팟을 꺼냈다. 그리고는 한쪽을 내 귀에 쏙 꽂아 넣었다. 자장가처럼 교향곡이 흘러나왔다. 잠이 부족했던지 나는 바로 까무룩 잠들어버렸다.
욕심이라는 건 알지만, 나는 설이한테 입히고 먹이는 건 다 좋은 걸로 해주고 싶었다. 안 그래도 귀티 나게 생겼는데, 차림이 후줄근하면 가난이 더 눈에 띌 것이 분명했다. 가끔 돈을 보내거나 전화하며 외삼촌은, '동생 말고 네 것도 좀 사라'며 잔소리했지만, 그래도 내가 갖기보다는 설이한테 뭘 사줄 때 내 마음이 훨씬 더 만족스러웠다.
"야, 야. 일어나."
"왜…"
"왜긴 왜야, 한 시간 지났으니까 깨우지."
방금 눈을 감았다가 떴는데 벌써 교실은 웅성거리고, 쉬는 시간이었다. 책상에 눌린 자국 때문에 간지러운 뺨을 긁적이며 나는 몽롱한 상태로 눈을 끔뻑거렸다. 이미 석식을 먹으러 간 애들이 많아서 교실은 드문드문 비어 있었다. 이대로 석식을 먹고 야간자율학습을 이어가거나, 독서실로 빠지거나, 아예 나처럼 하교하는 애들로 나뉘어지는 시간이었다.
가방을 챙기는 내 옆에서 우정혁이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너 요즘 야간 왜 이렇게 많이 뛰냐. 무슨 일 있어? 집세 또 올랐냐?"
"아냐. 구두 좀 사고 싶어서 그래."
"무슨 구두?"
가방을 어깨에 걸쳐 매면서 나는 기억 속의 브랜드 이름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사… 살바… 가무…"
"뭐?"
"살바두레… 베리가무…"
우정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페라가모? 살바토레 페라가모 말하는 거냐?"
"어어, 그거."
"관심도 없더니 그런 걸 갑자기 왜?"
우정혁은 묻고 나서 바로 깨달았는지 아, 하고 외마디 소리를 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며칠 전, 여학생 반과 함께 합동수업을 했던 날의 일이었다. 응급상황의 구조활동에 대해서 배우는 과목이었는데, 강당에서 두세 반이 한 번에 들으며 진행되는 수업이었다. 나는 워낙 또래 여자애들에게 관심도 없지만 여학생 반에 아는 애도 없어서, 그날도 관심 없이 마네킹처럼 바닥에 누운 우정혁의 가슴이나 꾹꾹 누르며 심폐소생술을 연습해보고 있었다.
그때, 누가 내 어깨를 건드렸다. 알지는 않아도 모를 수도 없는 애가 서 있었다.
"어, 한지윤."
"너 잠시 나 좀 볼래?"
모델 에이전시와 계약하고 이미 활동도 하고 있다는 그 애는 키가 엄청나게 컸다. 게다가 마치 만화 캐릭터처럼 눈도 크고 코도 높고 입도 작아서 패션 인형 같은 인상이었다. 가까이에서 보는 것도 처음이지만, 말을 해보는 것도 처음인데, 어쩐지 한지윤은 내게 화가 난 것 같아 보였다. 만인의 연인인 그 애가 나에게 말을 걸어서 강당 안은 수군거리고 있었다.
강당 바깥 복도에 서서 팔짱을 낀 한지윤이 확인하듯 내 얼굴을 뜯어봤다.
"너 맞지? 한설이랑 형제라는 게."
"그렇긴 한데… 왜? 설이한테 무슨 일 있어?"
한지윤은 짝 다리를 짚고 오른쪽 발끝을 달달 떨면서 혼자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러다가 삥이라도 뜯기는 건 아닌가, 지갑에 현금이라고는 저녁 국거리랑 세제 살 돈 만 팔천 원뿐인데, 싶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나 이번에 디엘 광고에 나온 거 알지?"
"…디엘이 뭐야?"
한지윤은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제 휴대폰을 꺼내서 유튜브 영상 하나를 클릭해 내게 내밀었다. 짧은 광고 영상이었는데, 보석 박힌 목걸이나 반지를 착용한 여자들이 얇은 드레스 같은 것을 걸치고 빨래마냥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그 중에 한 사람을 한지윤이 손가락 끝으로 가리킨 덕분에 그게 한지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휴대폰을 다시 가져가며 한지윤이 본론을 꺼내놨다.
"그래서, 내가 디엘 론칭 파티에 가게 됐어. 뭐, 론칭 행사는 일찍 끝날 테고 사실 프라이빗 디너 파티라고 보면 돼. 파트너 데리고 좀 노닥거리는 거지."
나는 한지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파악할 수 없어서 멀뚱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영어 섞인 단어들은 언뜻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명확히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 말들뿐이었다.
"나 사실, 기태훈이랑 같이 가기로 되어 있었어."
"…그건 누군데?"
한지윤은 이번에도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위아래로 노려보고는 휴대폰을 꺼냈다. 한지윤이 말한 기태훈은 연예인인 모양이었다. 포탈사이트에 이름을 검색하자 구릿빛 피부에 상체를 드러내거나 정장을 차려 입은 그 남자의 사진들이 수두룩하게 떴다.
"근데 기태훈 해외 촬영 가서 그날 파티를 못 온다고 하네?"
한지윤이 다시 휴대폰을 가져갔다.
"그래서 내가 한설한테 같이 파티 가자고 했거든."
"우리 설이?"
"그래. 어차피 뭐 그냥 저녁만 먹고 좀 노는 거니까, 부담 가질 필요 없고… 사실 거기 유명인사들이 꽤 오기 때문에 혹시라도 엔터 쪽 생각 있으면 눈도장 찍고 좋거든. 한설 정도라면, 뭐… 나도 면이 설 것 같고… 거기 감독이나 대표들도 한설 괜찮아할 것 같아서. 장래에 어떻게든 엄청 도움 될 사람들이거든?"
"그, 그래?"
"어. 근데 한설이 싫다더라. 관심 없대. 내가 보기에 걔는 뭘 몰라서 기회를 발로 차는 거야. 답답해했더니, 다른 애들이 너 찾아가서 부탁하면 될 거래. 한설, 형 말은 잘 듣는다더라?"
설이가 내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인 것만은 확실하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고민했지만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음, 나도 설이가 원하지 않는 거라면…”
한지윤은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콩콩 치고는 긴 생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모습에 멀리서 보고 있던 남자애들 몇 명이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머리 쓸어 넘기기’의 정석은 2학년 2반 한설이라고, 설이가 반듯한 이마가 드러나도록 머리를 한 번 넘길 때마다 여자애들 숨 넘어가는 소리가 얼마나 다급한지 구급차 부를 수준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걔 아마 꿇릴까 봐 그럴걸? 사실 나 에이전시 들어가고 처음 파티 갈 땐 나도 좀 그랬어.”
“어? 뭐가 꿇려?”
“왜, 옷이나 구두, 뭐 그런 거 있잖아. 몰랐는데 너네 좀 사는 집은 아니라며? 정장 한 벌쯤은 뭐, 내가 친분으로 어떻게 협찬 받아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구두나 벨트 정도만 적당한 거 해서 가면 어때? 나도 기태훈 바쁜 거 아니면, 굳이 일반인이랑 갈 생각 없었어.”
설이 고등학교 입학한 재작년부터 한지윤이 몇 번이나 설이한테 접근했던 걸 내가 기억하는데, 모델 데뷔했다고 태도가 바뀌었다. 입술을 비죽 내밀고 있는데 한지윤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진짜 이런 기회 없다니까? 뭐… 구두만 제대로 신고 오라고 해. 페라가모나 보테가베네타 정도면 됐지 싶은데. 알았지?”
“……그 파티라는 게 언젠데.”
나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고, 한지윤은 호텔 이름과 일시가 적혀 있는 초대장 화면을 캡쳐해서 내게 보내주었다.
그때부터 내 고민은 시작된 것이다.
사실 그런 파티라는 게 어떤 건지, 얼마나 좋은 건지는 모르지만, 좋은 경험이라면 설이에게 꼭 시켜주고 싶었다.
설이가 신데렐라처럼, 파티에 신고 갈 구두가 없어서 포기하고 거절하는 거라고 생각하자, 속상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설이에게 호박마차도 되어주고 시종도 되어줄 수 있었다.
까짓 거, 그 정도쯤은 나도 얼마든지 사줄 수 있어!
“구두가 팔십칠만 원… 벨트가 칠십오만 원… 합의 백육십이만 원…….”
“애늙은이, 아까부터 뭘 그렇게 중얼거려?”
“하아… 아닙니다…… 일 열심히 하기 위한 마법의 주문입니다…….”
재고 정리할 건 또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사장이 신상품을 대거 주문해서 입고된 물품 정리만 삼십 분째였다. 편의점에서 야간에 함께 일한 지 일 년이 넘은 휴학생 수아 누나는 노랗게 탈색한 머리를 질끈 올려 묶고 막대사탕을 쪽쪽 빨았다. 신상이라며 민트초코맛 막대사탕을 내게도 내밀었지만, 나는 사탕 먹을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
검색해본 브랜드 구두와 벨트는, 내 예상을 뛰어넘어 뒷발로 나를 뻥 차버릴 만큼 비쌌다. 비상금으로 쟁여둔 오십 만원을 보탠다고 하더라도 백십 만원 정도가 더 필요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김경수한테 돌려받았던 합의금 중에 우정혁에게 빌렸던 돈을 그렇게 미리 갚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다시 내놓으라고 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아무리 허물 없는 친구 사이라지만, 그럴수록 정도를 지켜야 한다. 동생 구두 사주겠다고 백만 원을 다시 달라고 하는 것은,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백육십이만 원이 필요하니?”
“누나 귀 밝으시네요.”
“너 출근해서 조끼 입는 순간부터 계속 중얼거렸잖아. 백육십이만 원, 백육십이만 원.”
“하아… 저 이주안에 꼭 필요한데, 사장님께서 삼일 땡겨 주실까요?”
“해주시겠지, 너 예뻐하시잖아. 내일 잘 말씀 드려.”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손님이 없는 틈을 타서 설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시래깃국 데워서 고등어랑 저녁 꼭 먹어. 알았지? 형 늦으니까 문단속 잘하고!’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할 때마다 설이가 무척이나 싫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일에 대한 것만은 설이 뜻대로 맞춰줄 수 없었다. 외삼촌에게 생활비를 기대는 것도 한계가 있고, 학교 다니면서 시간 구애 받지 않고 지속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알바였다. 내 사정을 잘 아시는 사장님이 편의를 봐주어서 학교 일정 때문에 급하게 펑크를 내도 이해해주시니, 편의점만큼은 계속 다녀야 했다.
게다가 지금은, 한달 임금을 땡겨 주시기만 한다면 며칠 밤을 새라고 해도 할 판이었다.
“애늙은쓰, 밥 안 먹어? 삼각김밥 폐기 겁나 많던데.”
“입맛이 없어요.”
“그래도 쉬고 와. 너 먼저 20분 쉬어.”
수아 누나는 고맙게도 돈에 대해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따뜻한 두유 한 병을 계산해주며 나를 유리문 밖으로 떠밀었다.
파라솔 아래 플라스틱 의자에 무릎을 웅크리고 앉아서 두유를 홀짝이고 있으니 왠지 내 인생이 청승맞게 느껴졌다. 동생 하나 잘 키워보겠다는 게 뭐 이렇게 어려운지……. 설이에게 맹세만 안 했어도 수아 누나한테서 담배 한 대 얻어 피울 텐데, 그럴 수도 없었다.
공기 중에 하얀 입김이나 만들어내며 후드짚업을 뒤집어썼다. 급해서 아무거나 걸치고 나왔더니 설이 것이었던 모양이다. 내 손등을 다 덮고 손가락만 비죽 튀어나올 정도로 팔이 길고 품도 컸다. 후드를 쓰자 코까지 다 덮였다.
그때, 등뒤에서 누가 나를 끌어안았다. 놀랄 것도 없이, 내 팔을 감싸 안은 정갈한 손끝이 눈에 익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손등을 토닥거리며 설이를 달랬다. 등뒤에 있어도 쀼루퉁한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왜 여기까지 왔어. 응?”
“……”
기분이 안 좋은지 대답도 없었다. 나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더 강해졌다. 후드를 쓴 내 뒤통수에 얼굴을 비벼대는 것이 꼭 어리광부리는 큰 짐승 같았다. 푸스스 웃으며 손을 뒤로 뻗어 설이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겨우 나를 놓아준 설이의 팔을 끌어오자, 여태껏 집에 가서 교복도 안 갈아입고 있었는지 교복 셔츠 위에 내가 입은 것과 색만 다른 짙은 회색 후드짚업을 걸쳐 입은 상태였다. 흰 뺨을 손끝으로 쓸자 눈을 느리게 깜빡이는 것이 참 예쁘다. 숲 속의 사슴 같이 청초하고 예쁜 내 동생.
“밥은 먹었고?”
“……나 혼자 저녁 먹는 거 싫어.”
웅얼거리며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내 앞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서 내 무릎에 턱을 괬다. 그리곤 까만 눈망울로 올려다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움찔거리는 설 표범의 귀가 보이는 것 같아서 잠시 놀랐지만, 내 착각일 뿐이었고 설이는 귀와 꼬리를 잘 감춘 채로 낑낑거리듯 작게 말했다.
“형, 야간 안 하면 안 돼? 나랑 같이 집에 가서 저녁 먹어줘.”
“음… 이번 주는 해야 돼. 미안.”
어릴 때처럼 순수한 눈빛으로 쓸쓸한 표정을 하는 설이를 보니 가슴이 뭉클해서 거절하기가 미안했지만,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설이의 머리를 가만히 쓸어주자, 제가 원하는 대답을 못 들었을 때는 늘 그러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내 무릎에 기댄 고개를 들면서 두 손바닥으로 청바지를 입은 내 허벅지를 감싼다. 그리고는 손끝으로 주무르듯 내 허벅지 위를 은근하게 만지작거리면서 불만족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빤히 올려다봤다. 뜨거운 손바닥이 청바지 위로 체온을 전하면서 움직이자,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설이의 손을 내 허벅지에서 떼어내면서 설이의 두 뺨을 살짝 쥐었다.
“이번 주까지만 좀 봐줘. 응? 내가 뭐 좀… 사고 싶은 게 있어서, 급전이 필요해서 그래.”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속 깊은 설이가 내 선물을 거절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약간 둘러대듯이 말하는 스킬이 필요했다. 설이는 내 말을 해석하기 위해 애쓰는 어린아이처럼 내 표정을 훑어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뜨며 담담하게 물었다.
“얼만데.”
“응?”
내 손목을 잡아 끌어당겨 길쭉한 손가락으로 손목뼈를 만지작거리며 설이는 차분하게 되물었다.
“얼마 있으면, 형이 집에 오는데.”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설이에게 잡힌 손목을 비틀어 빼려고 꼼지락거렸는데, 설이는 나를 놔주지 않았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편의점 유리문 안쪽에서 사탕을 깨물어먹고 있던 수아 누나가 사탕을 다 먹고 남은 막대를 든 채로 유리문을 조금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는 설이 쪽으로 혼잣말처럼 외쳤다.
“백육십이랬나? 그쯤일걸?”
“아, 누나!”
도대체 애한테 돈 얘기를 꺼내서 뭐 어쩌겠다는 거냐면서 화를 내려고 하는데, 수아 누나는 다시 문 안쪽으로 쏙 들어가더니 카운터로 돌아가버렸다. 그때까지 내 손목을 잡고 있던 설이는 내 반응을 살피듯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나를 놔주었다.
플라스틱 의자에서 일어나며 다리에 쥐가 나서 비틀거리자 설이가 내 어깨를 잡았다.
“읏!”
어깨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나를, 이번에는 앞에서 끌어안았다.
“설아… 아파…”
후드를 쓴 내 머리를 제 입술 부근으로 꾹 짓눌렀다. 어쩌면 이렇게 힘이 센 걸까. 제 딴에는 힘 조절을 하는 건지, 손을 꽉 잡거나 끌어 안아서 가끔 내가 아파하면 깜짝 놀라며 놓아주곤 했다.
오늘은 내가 바둥거려도 아랑곳하지 않고30초 가까이 나를 그렇게 끌어안고 있었다.
겨우 나를 놓아주고는, 인사도 없이 휙 뒤돌아서 집 쪽으로 걸어가버렸다. 언제 이렇게 빨리 커버렸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저벅저벅 걷는 다리가 길게 뻗어서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하게 기분 좋았다.
이따금 부는 바람에 흐트러지는 검은 머리카락과 희고 단단해 보이는 설이의 뒷목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는 편의점으로 다시 되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