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영역표시
"돈을 돌려 받았다고?"
우정혁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내 손에 든 봉투와 내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나도 이 상황이 황당해서 우정혁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못하고 있었다.
"그 새끼가 이백오십만 원을 고스란히 돌려줬다고? 무슨 꿍꿍이 있는 건 아니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두툼한 봉투 속에 함께 들어 있던 각서를 꺼냈다. 정말 법적으로 효과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반환한 금액에 대해서 일절 문제 삼지 않겠다'는 맹세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김경수의 지장까지 찍혀 있다. 게다가 이건 본인 개인 돈이기 때문에 부모님은 모르시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설이와 농구 시합 도중에 설이의 직각 어깨에 다쳐 안대를 한 것도 모자라, 반대편은 내 주먹으로 시퍼렇게 멍들어서 김경수는 우스운 꼴이었다. 설이를 학폭위에 보낼 거라며 빈정거리던 얼굴은 온데간데 없이 순한 양처럼 변해 있었다. 김경수 부모님이 요구한 피해보상 금액까지 합쳐서 이백오십만 원이면, 나에게는 피 같은 돈이었다. 아니, 피 팔아도 못 구할 돈이었으니, 이유야 어찌되었건 그 돈이 다시 내 손에 들어와서 기쁘긴 했다. 하지만 설이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는데, 태도가 바뀐 게 영 수상했다. 이 새끼가 왜 이러나 싶어 쳐다보니, 김경수는 우물쭈물하며 '한설에게 미안하다고 전해달라'는 말까지 했다. 그 눈빛은, 마치 설이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집안 재력을 등에 지고 그렇게 의기양양하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설이뿐만 아니라 내게도 미안했다며 사과했다. ‘내가 너한테 사과한 거… 꼭 한설한테 전해줘, 부탁이다.’라며 답지 않은 말까지 했다.
어쨌든 생각지도 못하게 일이 잘 해결되었고, 나는 우정혁에게 백만 원을 바로 갚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담임도 학폭위가 열리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며 기뻐했다.
우정혁은 오만 원짜리 신권이 스무 장 들어 있는 돈봉투를 받고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별일이네."
"그러니까 말이야. 나야, 골치 아플 일 없어져서 좋긴 해."
안 그래도 보증금 대출 이자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와서 신경 쓰였는데 바로 입금해둘 수 있겠다는 생각에 웃음이 실실 나왔다. 우정혁은 받은 돈봉투를 가방에 집어넣고는 내게 땅콩크림 빵을 건넸다. 이미 점심 급식으로 나온 짜장 밥을 그득하게 먹은 상태였지만, 빵 하나쯤 더 들어갈 자리는 있었다.
"네 동생이 걔 불러다가 팬 거 아닐까."
"무슨 소리! 우리 설이가 얼마나 순둥이인데 그런 짓을 하겠어?"
충분히 할 것 같은데, 라고 눈빛으로 말하는 우정혁을 쏘아보자 순순히 눈빛을 물렸다.
만약 정말로 설이가 김경수를 불러다가 때리기라도 했다면 불평 많게 생긴 그 얼굴이 멍이나 생채기로 더 울긋불긋 색칠되어 있었어야 하는데, 어디 터진 데 없이 그대로였다.
게다가 설이는 오늘 아침 식사로 차려준 반찬에 비엔나 소시지가 문어모양이라며 작게 기뻐하는 아이였다. 케첩에 소시지를 푹 찍어 먹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는지도 모르면서.
그런 설이가 김경수 같은 놈을 패거나 협박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우정혁을 비롯한 모든 남학생들은 설이가 말수 적고 키 크고 잘 생겨서 오해하는 부분이 많았다. 그 넓은 어깨를 굽히면서 내 무릎에 기대고 누울 때는 온순한 짐승 같았다. 물론 내 동생이 어느 정도 짐승은 맞지만, 말하자면 덩치만 크고 늘 꼬리 흔들며 돌아다니는 대형 견 같은 존재나 다름 없다.
물론 내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우정혁은 쯧쯧 혀를 차면서 안과에나 가보라며 비아냥댔지만 어쨌든 우리 설이는 누구를 괴롭히거나 두렵게 만들 아이가 아니었다.
우정혁은 게 눈 감추듯 땅콩크림 빵을 먹어 치운 나에게 이번에는 박카스를 한 병 내밀었다.
"아무튼 고생하셨고, 아드님 일 잘 마무리되어서 다행입니다."
"예, 예, 감사합니다."
우리는 박카스 병을 부딪히며 축배했다. 급한 돈을 빌려준 것도 모자라서 늘 그랬듯이 이자도 받지 않는 우정혁에게 내가 빵을 사도 사야 할 판인데, 우정혁은 신경 쓰지 말라며 다독였다. 가만 보면 진짜 대인배인데다가 어른스러운 면도 많은데 좀처럼 '형'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그걸 바라지도 않아서 다행이지만.
우정혁은 점심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슥 일어났다. 주머니가 볼록한 교복 재킷도 챙겨 든다. 나도 일어나서 함께 나갈 채비를 하자 우정혁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아, 새끼… 눈치는 빨라가지고."
"에이, 거 합승 좀 합시다."
굽실거리며 따라 나서자 우정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앞장 섰다.
구관 건물 뒤편에는 모든 학교가 그렇듯이 담배꽁초가 널려 있는 장소가 있다. 강당이 새로 생기기 전에 체육 기구들을 넣어두던 창고 앞이었는데, 가끔은 지나가다가 선생들도 그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목격하곤 했다.
창고 문 앞의 버려진 벤치는, 우정혁이 애용하는 흡연 장소였다.
벤치 끝에는 또 다른 애연자의 소행인지 통조림 깡통 같은 것이 재떨이처럼 늘 구비되어 있기도 했다. 우정혁은 저도 고작 스무 살이면서 재킷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쥔 상태 그대로 이 끝으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무는 폼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대체 언제부터 피워대면 저렇게 되나, 싶어 부모의 눈빛으로 한탄스럽게 바라보자 우정혁이 픽 웃었다.
"어쭈, 얻어 피우러 온 놈 눈빛 봐라."
"네가 이해해라. 내가 애 키우느라 기본 마인드가 꼰대잖냐."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지포 라이터를 한참이나 찾기에 벤치에 놓인 싸구려 라이터를 주워 건넸다. 그냥 편의점에서 싼 거 사다가 쓸 일이지, 비싼 라이터를 사다가 늘 잃어버리는 우정혁의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돈 있는 집 애들은 이래서 안 되는 것이다.
"또, 또, 불손한 눈빛."
"아이고, 죄송합니다. 나으리…"
두 손으로 공손하게 라이터를 건네주자 우정혁이 바로 물고 있는 제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훅, 피어 오르는 연기와 함께 우정혁이 깊이 숨을 내쉬었다. 어깨가 축 처지면서 편안해진 것이 보였다. 벤치에 등을 기대고 앉은 우정혁이 다시 한 번 담배 연기를 멀리 뱉어냈다. 나는 눈을 감고 그 냄새를 콧속으로 깊이 마셨다.
일탈을 즐기는 성격은 아니지만, 담배는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냥 한숨을 내쉴 때보다 담배 연기를 삼켰다가 내쉬는 편이 더 몸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정신이 쉬어가는 느낌이 좋달까. 잠시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흩어지는 연기만 바라보는 시간이 내게도 필요했다.
그래 봤자 내겐 너무 값비싼 휴식이기도 하고 아직은 학생이라 금지된 일이니 담배를 잘 찾게 되지는 않았지만, 가끔 우정혁에게 얻어서 피우는 맛이 쏠쏠했다. 졸업하게 되면 우정혁 찬스도 쓰기 힘들 테니 지금이라도 기회를 누려야 했다.
손바닥을 내밀고 있자, 우정혁은 못 본 척하려다가 연기와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아… 나 이러다가 또 너네 애한테 들키면 큰일인데."
"안 들켜, 집에 갈 때 양치하면 몰라."
줄듯 말듯 고민하며 미간을 찌푸린 얼굴로 우정혁은 담뱃갑을 만지작거렸다. 약이 올라서 놈의 정강이를 슬리퍼 신은 발로 툭 차자, 앓는 소리를 냈다.
어느 날인가, 하굣길에 골목길에서 우정혁에게 한 대 달라고 졸랐다가,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 오르는 담배를 들고 있는 나를 설이가 목격한 적이 있었다. 설이는 마치 우정혁이 나를 잡아먹기라도 한 것처럼 쏜살같이 달려와 우정혁의 멱살을 잡았다. 그런 거친 행동을 하는 설이를 처음 봤기 때문에 나는 놀라서 멍하니 서 있었다. 한 대 맞은 우정혁이 나가떨어지는 것 보고 나서야 발이 움직였다.
안 돼, 설아. 하지 마.
타다 남은 담배를 바닥에 던져버리고 설이의 등을 껴안았다. 거친 숨을 들썩이는 설이가 그제야 멈춰 섰다. 나는 우정혁이 바닥에 나뒹구는 것보다도 설이가 이성을 잃고 귀와 꼬리를 내보일까 봐 그게 더 걱정이었다. 다행히도 설이는 그렇게까지 흥분한 상태는 아니었던지 우정혁 앞에서 짐승화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뒤로 아무리 타일러도 설이는 우정혁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이면 흡연하는 모습을 설이에게 들켜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했다.
"후우-… 한 모금만 피워."
"겨우?"
"어차피 시간도 없어."
우정혁은 내가 아무리 노려봐도 쩨쩨하게도 내게 한 개비를 통째로 꺼내주지는 않았다. 그래도 얻어 피우는 입장에서 그게 어디냐 싶어서 우정혁에게로 다가갔다. 우정혁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는 담배에 고개를 기울이며 입술을 벌리는 순간, 나는 구관 건물 뒤쪽에 우뚝 서 있는 설이와 눈이 마주쳤다.
"헉."
대낮에 귀신도 아니고 예기치 못한 장소에 느닷없이 나타나는 설이의 모습은, 내게 그 누구의 등장보다 무서웠다. 차라리 학주라면 너스레 떨면서 좀 혼나고 말았을 텐데, 설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뭔데?"
돌아보는 우정혁의 가슴팍을 나도 모르게 밀어냈다.
설이는 우정혁의 손가락 사이에서 연기를 피워 올리는 담배와 우정혁의 얼굴, 내 얼굴을 번갈아 가며 눈 안에 새기듯이 바라봤다. 마치 이 상황이 지금 내가 생각하는 상황이 맞냐고 묻는 듯이 나를 빤히 바라보던 설이가 휙 돌아서서 건물 반대편으로 가버렸다.
"서, 설아! 잠깐만!"
그때 점심시간이 끝나는 것을 알리는 차임 벨 소리가 들려왔고, 설이를 따라갈 수 없었다.
"…뭐야, 오늘은 안 달려드네?"
남의 속도 모르고 우정혁은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느긋하게 몇 모금 더 빨아 연기를 내뿜은 뒤에야 통조림 빈 깡통 안에 담배꽁초를 비벼 껐다. 기운 없이 터덜터덜 교실로 되돌아가는 내 옆에서 우정혁이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어차피 집에 가면 만나잖아."
"뭐라고 변명하지…? 무지 실망했을 텐데…"
우정혁은 재미있는 얘기라도 들은 듯이 킥킥대며 웃어댔다. 책상 앞에 돌아와 앉아 휴대폰을 꺼내봤지만 역시 설이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없었다.
"보통 형이 담배 핀 것 가지고 동생이 이렇게 화내고 그러나?"
"넌 외동이라 몰라, 새끼야…"
내 옆자리에 앉으며 우정혁이 뺨을 긁적였다.
"주변에 너처럼 남동생 눈치보고 사는 놈은 본 적도 없다."
"우리 설이가 워낙 예민하거든. 탈선 같은 것도 해본 적 없고…"
벌써부터 교과서 위에 뺨을 대고 누워 잘 준비를 하며 우정혁이 중얼거린다.
"너네는 뭐랄까, 마누라한테 잡혀 사는 남편 같기도 하고… 집착하는 애인 달래주는 거 같기도 하고…"
"뭐가 어째?"
"난 모르겠다, 집에 가서 뽀뽀라도 해줘 봐. 그러면 화 풀릴지도."
우정혁이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수학 교사가 들어왔다.
책을 펼쳤지만 머릿속에는 설이의 무표정한 눈빛이 계속 빙글빙글 맴돌았다.
***
매운 닭찜을 파 송송 넣고 푹 쪄놓은 채로 집에서 기다렸지만, 설이는 독서실에서 저녁을 먹고 오겠다며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리고는 정말로 열한 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신발장 앞까지 마중을 나갔지만, 설이는 교복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내며 나와 눈도 마주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운동화를 벗었다. 늦게까지 공부하느라 고생했다는 나의 말에도 그저 고개를 한 번 살짝 끄덕이고는 가방을 방에 둔 채 샤워를 하러 욕실로 바로 들어갔다.
안절부절 못하면서 거실을 왔다 갔다 걸어 다니며 설이의 샤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머리카락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트레이닝 복 바지와 흰 반팔 티셔츠를 입고 나오는 설이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설아, 내가 머리 말려줄까?"
"…됐어."
단단히 삐친 모양이었다. 차갑게 거절하고 방에 들어가더니, 이내 드라이기 작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뒤로도 말을 걸 틈이 없어서 결국 아침까지 냉랭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말았다.
다른 것은 다 참을 수 있었는데, 교복을 입고 방에서 나온 설이가 아침밥을 안 먹고 그냥 가겠다며 먼저 집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와 달리 한참 잘 크고 있는데다가 공부하는 애가 아침도 거르겠다니!
나는 울먹이는 얼굴로 눈물을 머금고 가방을 든 채로 헐레벌떡 설이를 따라 나섰다. 이미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설이에게 달려가서 팔을 붙잡았다. 입술이 다 바짝 말랐다.
"저, 저기, 설아. 빈속에 공부하면 힘드니까 매점 가서 뭐라도 꼭 사먹어, 응?"
"......신경 쓰지 마. 어차피 형은, 나 같은 거 아무래도 상관 없잖아."
우울한 눈빛으로 바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는 설이의 창백한 얼굴에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았다. 설이의 두 팔을 쥐고 올려다보며 나는 설이 마음을 달래려 애썼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왜 너를 상관 없어 해? 어제 그거… 때문에 마음 상했어?"
"…내가 싫다고 해도 또 그 선배랑 담배 필 거잖아."
"안 그래. 절대 안 그럴게! 형이 진짜 맹세할게. 잘못했어, 설아. 응?"
"......"
고개를 기울여 눈을 맞추자 설이가 반대편으로 시선을 휙 피해버린다. 그쪽으로 따라가자 또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린다.
"어떻게 하면 우리 설이 마음이 풀릴까? 응? 형이 어떻게 해줄까?"
"......키스해줘."
"어?"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대낮에 편의점 앞에서 할 대화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키스라니, 그저 한 번의 해프닝으로 잊으려고 했던 기억이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얼굴에 후끈 열이 올랐다. 그러나 장난으로 해본 말이 아니었는지, 설이는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빤히 내려다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조그맣게 대답했다.
"지… 지금은 좀… 그렇지 않냐…? 하, 학교도 가야 하고…"
"지금 말고, 이따가 내가 부를게. 거기로 와."
언제 삐쳐 있었냐는 듯이 설이는 눈을 살짝 접으며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일단 그 표정을 보자 나는 안심이 되어서 온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안절부절 못하는 나를 보면서, 우정혁은 ‘동생 달래주려고 이렇게 안간힘을 쓰는 형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냐’며 늘 비아냥거렸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내게는 설이가 세상이었다.
***
'형, 지금 와.'
설이의 메시지를 받자마자 심장이 쿵쾅대며 마구 뛰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가는 중이었고, 마침 나는 구관 근처 수돗가에 있었다. 구관 뒤쪽에서 나오는 듯 애들 무리가 낄낄거리며 손을 털고 지나갔다. 그 애들에게서 옅은 담배 냄새가 났다. 아마 거의 마지막으로 그쪽에서 쉬고 오던 애들 같았다.
금방이라도 차임 벨 소리가 울릴 것 같아서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자, 담배꽁초가 널려 있는 후미진 창고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깔끔한 차림의 설이가 벤치 앞에 서 있었다. 내가 우정혁에게 담배를 구걸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고개를 숙이며 다가가자, 설이는 하얗게 웃었다.
깨끗한 흰 종이 같은 그 미소를 마주하자, 나는 이 상황이 더 민망해졌다.
"저기, 설아… 형이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이런 건…"
"아까 해주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랬었나, 싶어서 눈을 깜빡이고 있자 설이가 성큼 다가와 내 허리를 두 손으로 끌어안아 감쌌다.
코앞으로 다가온 설이의 얼굴에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려는 찰나, 설이가 먼저 고개를 숙여 내 입술을 깨물듯이 핥았다.
뭉클하게 닿는 부드러운 입술의 촉감이 낯설면서도 이미 기억 속에 있어서인지 숨이 금새 뜨거워졌다. 심장 뛰는 속도가 빨라지자 가슴이 답답해서 입술이 벌어졌고, 설이는 눈을 감으며 익숙하게 파고들어왔다. 부드러우면서도 촉촉한 혀끝이 치열을 훑고 입천장과 혀를 집요하게 쓸었다.
어쩐지 등줄기가 찌릿거리는 느낌에 설이의 가슴을 밀어내자, 심술 부리듯 내 혀를 깨물었다.
"읏…!"
그때 차임 벨 소리가 교내로 울려 퍼졌고, 나는 힘주어서 설이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헉헉 숨을 거칠게 내쉬는 나와 달리 설이는 평온해 보였다. 설이는 입맛을 다시듯이 붉은 제 아랫입술을 핥았다. 엄지로 입가를 닦아내며 설이가 싱긋 웃어 보였다.
"수업 열심히 들어, 형. 오늘 저녁에는, 어제 형이 만들어놓은 닭찜 먹을래."
"어? 어어, 응, 그래. 그러자."
설이가 손을 흔들며 떠나가고 난 뒤에도 나는 잠시 몇 초간 내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불쑥, 벽 뒤쪽에서 우정혁이 걸어 나왔다.
"…저 새끼 골 때리네."
우정혁은 피식 웃으며 담배를 바닥에 던져 운동화 바닥으로 짓눌러 껐다.
"너…! 너 왜 거기 있어!"
나는 도둑질 하다 들킨 사람 마냥 손을 덜덜 떨었다. 우정혁은 설이가 사라진 쪽을 돌아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보여서는 안 될 장면을 우정혁이 다 봤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그러나 우정혁은 평소와 다름 없는 심드렁한 얼굴로 다가왔다.
"내가 너보다 먼저 와 있었어. 계속 저기 있었어."
"그… 그럼 너… 다 봤어…?"
우정혁은 교실 쪽으로 발길을 돌리며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보기 뿐이냐, 도중에 네 동생 놈이랑 눈도 마주쳤어."
"…뭐?"
"지 꺼다, 이건가? "
우정혁이 웃음 섞인 한숨을 푹 내쉬며 내 머리를 짓눌렀다.
"넌 인마, 호랑이 새끼를 키운 거야. 앞으로 고생 좀 하겠다."
우정혁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지식도 없는 만큼 편견도 없는 건지 우리 형제의 그 특이한 화해 장면을 보고도 나를 꺼려하는 기색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우정혁아, 내 동생은 호랑이가 아니라 표범이야. 설 표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