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눈 감아. (6/65)

6. 눈 감아.


'키스'라는 단어에 놀라서 머리가 돌아가질 않았다.

설이는 내 대답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멍청하게 입을 벌린 채 설이를 쳐다봤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혹시 내가 모르는 요즘 애들 은어 아니야?

생각해보면 나는, 열여덟 살답지 않게 늙은이 같은 데가 있었고, 친구래 봐야 일년 꿇은 상늙은이 우정혁 뿐이라서 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이나 유행하는 말에 무감한 편이었다. 설이가 말하는 키스라는 것도 사실은 유행하는 게임기의 한 종류 아닐까? 플스, 키스, 비슷하잖아.

나는 운동화 상자를 만지작거리며 설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설아, 키... 스라는 게 그러니까, 게임기..."

"입 맞추는 거. "

쓸데 없는 생각 말라는 듯 설이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 당황하면 안 된다는 상식쯤은 있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리라고 생각했다. 주변에서 빨간딱지 붙은 만화책 돌려보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외장하드를 웃돈 주고 거래하며 옆 반에서 밀반입하는 것도 본 적 있었다.

나라고 해서 성인군자는 아니기에 헐벗은 두 사람의 은밀한 몸동작 같은 것에 전혀 흥미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야릇한 스킨십 같은 것은 언제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마련이다. 하물며 혈기왕성한 나이에는 그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그래도 내 경우, 남들만큼 호기심이 강하지 않은 건지 시청각 자료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여자의 신체 같은 것에는 크게 관심 없었다. 아름답고 야하기로 치자면, 오히려 농구 코트에서 티셔츠를 벗고 땀을 흘리는 설이의 모습이 더 자극적인 것 같은데.

어쨌든, 동생에게도 '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시기가 올 거라는 생각은 해왔다.

완전히 나와 같은 인간은 아니기에 설이에게는 사춘기가 좀 다르게 올지도 모르지만, 인간이든 표범이든 호랑이든 다들 동물인 것은 마찬가지니까. 성교육은 같을 것이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그... 그거를 형이 어떻게... 들어줄까? 여, 여자친구를 소개..."

"아무하고나 하라는 거야?"

차가운 목소리였다. 놀라서 설이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새까만 눈동자에 우울한 빛이 고였다.

나는 당황해서 어? 하고 되물으며 바보 같은 표정을 했다. 설이는 비참한 표정으로 내게서 시선을 비껴 고개를 숙였다.

"형은 내가 아무 여자하고나 그런 걸 했으면 좋겠어?"

"아, 아무... 아무 여자는 아니지...! 그건 안 되지!"

생각해보면 설이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나와 동급생이었던 정민지와 사귄 적도 있었다. 그때는 둘이 아무 일도 없었던 모양이다. 하긴, 뭔가 관계에 진전이 있기에는 너무나 짧은 만남이었다. 

슬픈 얼굴의 설이는 어쩐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아이의 눈빛이 되어 있었다.

설이는 도톰한 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첫 키스는, 소중한 거라고 하던데. 아무하고나 하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들 말하던데."

"그, 그렇지. 맞아. 설아."

"형은 해봤어?"

불쑥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마치 레이저라도 나올 것처럼 선명한 눈동자가 나를 쏘아보자, 나는 어버버거리며 붕어처럼 입술을 움직이는 게 고작이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해봤다고 해야 하나, 솔직하게 아니라고 말해야 하나. 십 수년을 형으로 살아왔지만, 동생과 이런 대화를 어떻게 이어나가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잠깐 화장실 간다고 한 뒤에 숨어서 인터넷 검색이라도 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왜, 왜 그런 걸 물어 봐..."

어색하게 웃으며 중얼거리는데 설이가 한숨을 깊게 푹 내쉬었다.

"생일은 특별한 날이라고, 가족을 만난 날이니까 축하 받아야 한다고 형이 그랬었는데."

"그, 그랬지..."

"그래서 생일에 키스해보고 싶었어. 그래도... 모르는 사람과 하긴 싫어."

"그건 안 되지!"

"상대도 없고...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기운 없는 한탄을 듣고 있자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설이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생각해보면 설이의 모든 처음은 내가 함께해왔다. 젓가락질을 하는 것도 내가 가르쳤고, 덧셈뺄셈이나 옷을 개키는 방법, 계란프라이를 굽는 일도 내가 알려줬다. 커가면서 내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설이 혼자 터득하는 일들이 많아졌지만, 그래도 설이는 여전히 형인 내게 의지하고 있었다. 좀처럼 고민이나 원하는 것을 말로 꺼내지 않는 설이가 오랜만에 겨우 말을 꺼낸 것이다. 나는 어떻게 도와줄지 고민하며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숙였다.

설이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이랑 하면 좋을 텐데."

"어?"

"형이 나랑 키스해주면 안 되는 거야?"

설이는 가여운 표정으로 나와 눈을 맞추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쩌면 저렇게 귀여울까.

내가 여태까지 설이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줬듯이, 이번에도 내가 도와주는 게 맞는 건가?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면 그래도 괜찮은 건가?

도덕적 갈등과 그걸 다 깨부수는 설이의 엄청난 미모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던 나는, 어차피 그런 쪽에 대해서 경험이 없기 때문에 내가 설이를 도와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게다가, 차분히 생각해보면 이건 안될 일이었다.

"설아, 나는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들어주고 싶어. 그리고 오늘은 설이 생일이니까, 가능하면 소원도 이뤄주고 싶은데... 키스... 라는 것은, 아무래도 좀 더 성장해서 성인이 된 후에 그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고... 물론! 나중에 설이가 여자친구가 생겨서 그런 걸 하고 싶어지면 그때라도... 형은 그런 걸로 설이 혼낼 마음은 없어. 건전한 교제를 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고... 저기, 그러니까 형이 하고 싶은 말은, 지금 형이 도와주기는 어렵지만 설이가 원한다면 나중에 좋은 사람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설이는 조용히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이해시킨 것 같아서 다행이란 생각에 가슴을 쓸어 내리는데, 설이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형은... 그 정도로 날 아끼지는 않는 거구나."

"뭐?"

나는 놀라서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왜 얘기가 그렇게 돼?"

설이는 자조 섞인 미소를 감추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내 말을 듣기 싫다는 듯 뒤돌아 섰다. 놀라서 따라 일어나 팔을 붙잡자, 설이는 내 손을 떼어냈다.

"됐어. 곤란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형."

그리고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어차피 나는 친동생도 아닌데, 너무 어려운 부탁을 했나 봐."

나는 설이의 팔을 세게 꽉 붙잡아 돌려세웠다. 큰 덩치에도 설이는 힘 없이 내게 이끌려 돌아봤다. 

고개 숙인 설이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라 있었다. 슬픈 영화 속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설이는 입술을 꾹 깨물면서 겨우 흐느낌을 참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 이기심에 큰 충격을 받았다. 고작 입술 좀 맞부비는 게 뭐라고, 애를 이렇게 슬프게 만들다니.

도덕적 갈등이고 뭐고, 그딴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생일이 특별한 날이라고 가르쳤던 것도 바로 나였다. 제 생일이라고 기뻐하고 있는 설이가,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늘 웃는 순둥이가, 사춘기 호기심에 겨우 뽀뽀 한 번 해보고 싶다고 하는데 따분한 설교나 늘어놓고 그걸 못 들어주다니 나는 정말 형편 없는 형이었다.

막말로 설이가 호기심을 못 이겨, 어디서 날라리 여학생이나 연상의 누님과 연이 닿아 첫 키스를 하게 된다면 그게 더 위험한 게 아닐까? 그러다가 설이가 그릇된 성 관념을 갖게 되고 그런 쪽에 더 흥미가 생겨서 타락의 길을 걷게 된다면 그건 다 내 책임이다. 물론, 나라고 뭔가 제대로 된 방법 따위를 알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가 설이의 첫 키스 상대가 되는 편이 오히려 안심이 될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게다가 설이의 이 상처 받은 표정은, 견딜 수가 없었다. 심장을 당장 꺼내달라고 해도 기꺼이 뜯어주고 싶어지는 얼굴이었다.

나는 설이의 두 뺨을 소중하게 감싸고 설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눈 감아."

목소리가 떨리고 말았다.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사실 내게도 첫 키스였던 것이다. 온몸을 돌아다니면서 심장이 뛰고 있는 것 같았다. 떨려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희고 고운 뺨을 감싸 쥔 내 손바닥이 긴장으로 차갑게 식고 있었다.

설이는 놀란 눈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가지런한 속눈썹과 곱게 뻗은 콧날, 흰 피부와 대조되는 붉고 탐스러운 입술이 내 앞에 나의 입맞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쩐지 비현실적인 기분이었다. 눈 감은 천사의 석고상에 입을 맞추는 성스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천천히 발끝을 들어 설이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 설이의 눈 감은 얼굴이 코앞으로 점점 가까워지자,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감싼 두 뺨 사이로 입술을 쭉 내밀었다.

촉, 부드럽고 따뜻한 입술끼리 맞닿았다고 느꼈을 때 설이가 허리를 숙여 더 깊이 입술이 짓눌러졌다. 발끝을 세우고 있던 나의 허리를 감싸 안아 다시 바닥을 온전히 딛고 설 수 있도록 해주면서 설이가 나른하게 숨을 내뱉으며 입술을 벌렸다.

"음!?"

촉촉한 혀끝이 내 입술 사이로 쑥 들어올 때 나는 파드득 어깨를 떨며 눈을 떠버렸다.

새까만 눈동자 속에 내가 보였다. 설이는 어느새 눈을 뜨고 있었다. 마냥 까맣다고만 생각했던 설이의 눈동자는, 코앞에 닿을 듯 가까이 바라보자 안쪽이 청회색이었다. 푸른 안개와 구름으로 덮여 있는 밤하늘처럼 신비로운 빛이었다. 어쩌면 내 동생은 눈동자마저 이렇게나 아름다운 걸까,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뒷목을 감싸는 손길에 고개가 비스듬히 돌아갔다.


"으응...!"


입술을 가르는 혀에 의해서 입이 벌어지기가 무섭게, 미끌거리는 뜨거운 혀끝이 뱀처럼 입천장을 훑었다. 그 생경한 느낌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었다. 눈을 질끈 감고 설이의 가슴팍을 본능적으로 밀어내는데, 설이가 내 허리를 더 강하게 끌어안으며 몸을 밀착시켰다. 치열을 핥은 혀끝이 부들부들 떨리는 내 혀를 감쌌다가 간질이면서 능구렁이처럼 움직였다. 내 것이 아닌 타액이 내 것과 섞여 목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이상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정신 없이 나를 이끄는 그 혀 놀림에 나는 따라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게다가 등을 쓰다듬는 커다란 손바닥이 어째서 그렇게 기분 좋은지 알 수 없었다.

쪽, 쪽,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내 혀를 빨면서 설이는 낮은 숨소리를 냈다. 뺨에 닿는 숨결이 간지러웠다. 모든 감각이 예민하게 바뀌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숨을 참다 못해서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되면 설이는 내게서 입술을 떼어냈다가, 바로 다시 못 참겠다는 듯 자석처럼 찰싹 입술을 맞붙여왔다.

첫 키스의 느낌이란 건, 좀 더 부드럽고 가볍고 간질거리는 것일 줄 알았다. 솜사탕 같은 것일 줄 알았더니, 단번에 녹아 내리는 캐러멜 같은 것이었다. 나는 머릿속이 온통 끈적끈적하게 녹아서 아무 생각도 못할 정도가 되어서야 겨우 설이의 품 안에서 떨어져 나왔다.

숨을 몰아 쉬고 있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넘어질 뻔했다. 휘청거리는 나를 설이가 얼른 부축하며 내 팔을 잡았다. 입술이 퉁퉁 부어버린 듯이 아릿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고백하기 창피하지만, 속옷 안이 아주 살짝 젖은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왠지 모르게 서럽고 짜증나고 당황스러웠다. 내 표정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 눈이 마주치자, 설이는 입맞춤을 하기 전과 똑같이 평온한 천사의 얼굴이었다. 눈동자가 더 까맣게 가라앉은 건 기분 탓인가. 설이는 숨을 작게 몰아 쉬면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온 설이의 눈빛이 나를 씹어먹을 것처럼 맹렬해서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나는 벙 찐 얼굴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설이 너… 너, 왜 이렇게… 잘하는 것 같지…?"

순수한 의문이었다.

내 질문에 설이는 놀란 눈을 했다가 환하게 웃었다. 만족한 듯 뿌듯해하는 미소가 눈부셨다.

"책에서 봤어."

수줍게 대답하는 설이의 얼굴이 너무 예뻐서, 나는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머리 좋은 애는 뭘 해도 잘 하는 법이었다. 나는 설이에게 멋진 본보기 같은 것이 되어주지 못한 것 같아서 얼떨떨한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결과적으로 설이의 기분은 좋아 보였다. 어설픈 나로나마 만족한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차마 남들에게는 말하지 못할 창피한 기억이었지만, 그래도 설이를 달랠 수 있었고 생일날의 설이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 나는 그것으로 기뻤다.

착한 설이는 그 뒤로 성에 대한 잘못된 호기심 같은 것을 보이지 않았다. 한심하게 몰려다니면서 여자애들 꼬실 생각을 하거나 상스럽고 야한 대화를 나누는 무리와는 차원이 다른 모범생의 모습이었다. 

어차피 한 번뿐인 추억이었다. 

더는 설이가 키스 같은 걸 내게 조르지는 않을 테니 이대로 잊으면 되겠지,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