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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정말 뭐든지 다 괜찮아? (5/65)

5. 정말 뭐든지 다 괜찮아?


어머니의 유언은 '밥 꼭 챙겨 먹어라' 였다. 

기운 없는 목소리였지만, 의지가 강한 어머니는 떠나시기 전까지 내게 힘든 모습은커녕 인자한 미소를 보이셨다. 그게 마지막이 될 줄 몰랐던 날의 대화가, 눈을 뜬 어머니와의 작별인사가 된 것이다.

평소 어머니는 우리 두 형제의 손을 잡고 '서로가 서로를 지켜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다. 나는 그걸, 세상으로부터 설이의 비밀을 숨기고 아무도 설이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위험으로부터 설이를 지켜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아마도 설이는 세상에 단 둘 뿐인 형제로서 나를 믿고 따르는 것으로 어머니의 말씀을 새겨 들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빈자리를 최대한 채워주고 싶었다. 설이에게 밥을 꼭 챙겨 먹이고, 혹시라도 누군가가 설이의 비밀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잘 단속하고 보호하는 것에 총력을 기울였다. 물론 그건 책임감뿐만 아니라 애정에서 비롯된 힘이었다.

설이는 내 동생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우수한 인재였다. 

남들 태어나서 한 번 해볼까 말까 한 전교 5위 안에 늘 들었다. 더러는 전교 1등까지 하는 날도 있었다. 보호자 자격으로 설이의 담임 교사와 상담을 할 때면, 어깨가 으쓱해서 가만히 앉아있기 힘들 정도였다. 

설이의 담임은 설이 공부 컨디션이 참 신기하다고 했다. 어떤 과목이든 모두가 어려워하는 난이도의 시험에서 갑자기 치고 올라가 1등을 하다가도, 올백 짜리 답안지에서 무척 쉬운 문제를 틀려서 다시 5등이나 6등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많은 학생들을 봐왔지만 설이가 특히 어려워하는 문제나 과목을 특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잘한다 싶으면 이유를 모르게 점수가 떨어졌다. 어쨌든 담임은 설이의 장래 가능성을 높이 봤고, 가능하면 명문고에 보내고 싶어했다.

자랑스러운 일이었지만 부모님은 두 분 다 보험금이 많지 않았다. 국가 지원을 받는다고 해도 설이를 강남구에 있는 고등학교로 보내기에는 버거운 살림살이였다. 감사하게도 설이 담임은, 학비뿐만 아니라 기숙사까지 제공하는 지원 제도를 알려주었다.

나는 설이를 앉혀두고 설득했다. 그러나 설이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거절했다.

"싫어."

"왜, 설아. 그 학교에서 너 오는 거 대 찬성이라고 했대. 기숙사도 엄청 좋더라!"

"......형은 같이 안 가잖아."

설이는 넓은 어깨를 구기고 앉아서 아이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작게 웃으며 설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난 지금 다니는 곳에 있어야지. 너 주말에는 집에 와서 자면 되잖아, 응?"

"싫어."

입술을 비죽 내민 얼굴이 어릴 때와 똑같았다. 귀와 꼬리를 숨기지 못하던 시절, 겨울에는 모자와 외투로 가릴 수 있었지만 여름에는 그게 불가능했다. 그래서 읍내 장 나갈 때 나와 손잡고 함께 갈 수 없다는 사실에 불복하며 떼를 쓸 때의 표정과 똑같았다.

설이는 속눈썹이 가지런한 깊은 눈매에 슬픔을 머금고 나를 바라봤다.

"형은... 나랑 떨어져서 살 수 있어?"

누가 들으면 평생 이별이라도 하는 줄 알 것이다. 해외로 이민을 가는 것도 아니었다. 고작 동작구에서 강남구 사이의 거리인데도, 설이는 무척이나 쓸쓸한 얼굴을 했다.

물론 설이와 떨어져 사는 게 쓸쓸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왜 아니었겠는가. 아버지 없이, 그리고 또 어머니 없이, 점점 줄어가는 집안 식구들의 빈자리가 뼈아프고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남들보다 훨씬 잘난 우리 설이를 더 좋은 학교,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훨씬 더 컸다.

설이의 곱고 길게 뻗은 손가락을 감싸 쥐었다.

"나도 집에 설이 없으면 외롭지. 그래도 우리 이제 어린애 아니잖아. 응?"

"......난 형 없으면 살 수 없어."

설이는 몸을 웅크려 내 무릎에 뺨을 댄 채로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나는 넓은 설이의 등을 쓸어주었다. 설이의 바지 허리춤으로 긴 꼬리가 비죽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바닥을 탁탁 쳐대는 긴 꼬리의 흰 털이 정전기가 일어난 것처럼 모두 바짝 서 있었다. 무척 기분이 안 좋은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설이는 귀를 쫑긋거리며 내 무릎에 이마를 비볐다.

"형 없으면 나 거기 가서, 귀랑 꼬리 못 숨길 거야. 그래도 돼?"

"안 되지!"

"룸메이트도 있을 텐데, 다들 내 비밀을 알게 되겠지."

"안 돼!"

"누구 하나만 알아도 소문나서… 나 잡혀갈지도 몰라."

"떽! 그런 소리를 왜 해!"

결국 나는 설이가 어디론가 납치당해 갇혀 우는 악몽을 꿨고, 설이 담임에게 명문고 진학 건을 거절하는 전화를 해야 했다. 

그런데 담임은 씁쓸한 웃음과 함께 어차피 지원 제도 항목을 충족 못할 것 같다는 말을 전했다. 설이의 중학교 마지막 학기 성적은 전교 100위 밖으로 훅 떨어졌다. 일부러 시험을 망친 거냐고 추궁하려 했지만, 내가 만든 떡국이 맛있다며 아이처럼 맑게 웃는 설이 얼굴을 보니 혼낼 마음이 전부 사라지고 말았다.

나와 같은 교복을 입게 된 설이는, 내가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나와 다시 같은 학교로 등교한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행복해했다. 그렇다고 해서 설이가 헤실 헤실 웃고 다니는 타입은 아니기 때문에 표정에 드러나는 것은 없었지만, 미미하게 올라간 입 꼬리라거나 은은하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 같은 것으로 나는 설이의 기분을 파악할 수 있었다.

물론 나도 기뻤다. 교내에서 지나가다 설이와 마주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가끔 창 밖으로 운동장에서 수업하는 1학년 중에 파란 체육복을 입은 설이의 넓은 등짝을 발견할 때면 뿌듯했다. 내가 저렇게 잘 키워놨다니, 보면 볼수록 감개무량이었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돼서부터 벌써 '신입생 중에 미친 미모의 남학생이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야, 일학년 한설 점심 때 농구한대."

"미친, 가야지. 죽어도 가야지. 데세랄 챙겨."

"너 병가 조퇴 아냐? 밥 먹고 병원 간다며."

"지금 병원이 문제야? 땀에 젖은 한설인데?"

급식소에서 여학생들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학년이 되면서 나는 우정혁과 같은 반이었는데, 우정혁이 이학년 때부터 학교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열아홉에 이학년이 된 우정혁은 일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고뭉치 날라리였던 모양인데, 나는 바삐 사느라 그걸 몰랐다. 우정혁을 피하지 않는 게 반에서 나밖에 없었기 때문인지 우리는 친해졌다.

"난 말이지, 너랑 걔가 형제인 게 참 기묘하다."

"조용히 밥 씹어라."

우정혁은 오징어 국을 후릅 마시는 나를 빤히 바라봤다.

"너네 하나도 안 닮았어."

"그거 질리도록 들은 레퍼토리거든? 잘 생기고 키 큰 아이돌 스타일 동생, 짜리 몽땅한 멸치 형."

우정혁은 젓가락을 휙휙 저었다.

“아니, 아니.”

기분 나쁜 김에 동그랑땡 하나 훔쳐 먹으려고 했더니 우정혁이 젓가락으로 철통 방어했다. 동그랑땡 정도는 곳간에 쌓아두고 먹을 부잣집 도련님이면서 꽤나 인색한 녀석이었다.

"그게 아니라… 넌 좀 쉽고, 단순하고, 바보 같은 게 놀려 먹기에도 딱 좋고, 옆에 둬도 그냥 지갑이나 폰처럼 안 거슬리고 적당히 편한 놈인데..."

"뭐야, 무슨 욕을 그렇게 섬세하게 해."

"아니, 그러니까, 네 동생은... 너랑 달리 속을 알 수 없는 타입이랄까. 사람 같지가 않아."

"컥!"

밥 먹다가 사레들려서 켁켁거리는 내게 우정혁이 물 잔을 쓱 밀어주었다. 나는 겨우 가슴을 쳐내며 물로 음식물을 억지로 삼켰다. 심장이 벌렁 벌렁거렸다. 물을 마시는 사이에 내 동그랑땡이 하나 없어진 것 같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우물거리며 식사 중인 우정혁에게 나는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무슨! 무슨 말이 그러냐?! 우리 설이가 얼마나 인간적인데? 나 피곤할까 봐 맨날 빨래도 다 개놓고 청소도 알아서 잘 하고 얼마나 순둥이인데? 어쩌다 생선 태워도 군말 없이 잘 먹고, 나 대신 장도 잘 봐오고, 밥은 또 얼마나 꼬들꼬들하게 잘하는지 알아? 그러면서 머리 말려달라고 샤워하면 달려오고, 얼마나 귀여운데!"

"...그건 그냥 동생 자랑 아니냐."

우정혁은 심드렁하게 말하며 요구르트를 뜯어 먹었다.

"어, 어쨌든... 내 동생은 너무 사람다운 애야."

나는 중얼거리면서 여전히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호들갑을 떤 바람에 주변에 앉은 애들이 흘깃거렸다. 헛기침을 하며 나도 요구르트로 식사를 마무리했다. 빈 요구르트 병을 주먹 안에서 찌부러뜨리며 우정혁이 트림했다.

"뭐, 분명한 거 하나는, 너를 엄청나게 사랑하는 놈이라는 거지."

우정혁이 그렇게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착하기만 할 뿐만 아니라 예의까지 바른 내 동생 한설은, 왠지 모르게 우정혁을 싫어했다.

우정혁이 매사 심드렁하고 무뚝뚝한 표정의 재미없는 놈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미움 받을 짓은 하지 않는데, 설이는 우정혁을 볼 때마다 경계의 눈빛을 했다. 어릴 적 아버지의 그림책 판권을 전부 빼앗아 갔던 출판사 사장이 장례식장에 찾아왔을 때와 같은 눈빛이었다.

그때 그 출판사 사장은 설이에게 '어린 게 눈에 독기가 서렸다'는 말을 해서 우리 어머니에게 뺨 싸대기를 맞았다. 나는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깨물 생각인 설이의 몸을 담요로 덮었다. 꼬리와 귀가 튀어나오기 일보직전이었다. 이글이글 불타는 설이의 새까만 눈동자는 아저씨가 떠날 때까지 그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설이를 처음 봤을 때 우정혁은 중얼거렸다.

"...너는 멸치인데 동생은 상어네."

장난 섞인 말이었을 뿐인데, 그때부터 이미 설이는 우정혁을 노려봤다.

두 사람이 친해졌으면 해서 일부러 우정혁을 집에 초대해서 밥을 먹인 적도 있었는데, 셋이 앉아 식사를 하는데 집 거실이 아니라 시베리아 벌판인 줄 알았다. 우정혁이야 원래 과묵했지만, 설이는 나와 단둘이 식사할 때 사근사근 말도 잘하고 내 입가에 밥풀을 떼어주는 등 자상하기 그지 없었는데, 내가 우정혁과 한 마디 대화할 때마다 설이는 수저를 든 채 멈춰서 우정혁을 쳐다봤다. 둘은 어땠을지 몰라도 그날 나는 급체할 뻔했기 때문에 그 뒤로 셋이서 밥 먹는 자리는 만들지 않았다.

***

"네 동생 다음주에 생일이라며."

"허? 그걸 우정혁 네가 어떻게 알았어?"

나는 진심으로 놀라 배구공을 떨어뜨렸다. 우정혁은 떨어져서 강당 바닥으로 통통 굴러가는 공을 주워 이미 공이 잔뜩 쌓인 정리함에 넣은 뒤에 손을 탈탈 털었다.

"아까 선생들 잡담하는 거 들었어."

"...선생님들은 내 동생 생일을 어떻게 아시는데?"

"여자애들이 말해줬겠지."

"걔네는 또 어떻게 알고?"

우정혁은 내 어깨에 팔을 걸치면서 쯧쯧 혀를 찼다.

"걔가 얼마나 인기 있는지 네가 모르는 구나."

강당에서 교실로 돌아가기 전, 우리는 개수대에서 씻고 난 뒤에 매점에 들르기로 했다.

빵을 하나씩 사 먹으며 벤치로 걸어갔다. 우정혁이 용돈을 받았다며 소보루빵과 앙금 팥 빵을 사주었기에 나는 기분이 들 뜬 상태였다. 우정혁의 용돈이란 건 내가 예상할 수 있는 푼돈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한 달은 더 빵을 뜯어내도 미안할 일 없다는 게 참 좋았다. 500밀리리터 흰 우유도 사주며 내게 잘 먹고 키 좀 크라고 꼰대 짓을 해도 참아줄 수 있었다.

입가의 흰 우유를 닦아내며 나는 긴 숨을 내쉬었다.

"하아, 배부르다. 이번 생일에는 설이 운동화 새로 사주려고."

"흐응."

"휴대폰을 최신으로 바꿔주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이번 달에 돈 나갈 데가 많더라. 외삼촌네 이사하셔서 부담도 안 드리고 싶고... 나이키 한 켤레 정도는 그래도 여유 될 것 같다."

"내가 좀 빌려줘?"

"됐어, 우정론. 더 힘들 때 부탁할게."

사실 설이는 워낙 착해서, 생일에 변변찮은 선물을 못 해줘도 불평하는 법이 없었다. 식탁에 조그마한 생크림 케이크 하나 올려두고 촛불만 불어줘도 나를 꼭 껴안고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설이의 생일은, 우리 가족이 설이와 처음 만난 날이었다. 내가 열에 들떠서 아버지의 품에 돌돌 쌓인 채 안겨 온 눈 뭉치를 흘깃거렸던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의 설이 생일에는 부모님이 떠올라서 무척 괴로웠다. 생일 케이크에 켜진 촛불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을 참기가 힘들었다. 나를 조용히 안아주는 동생이 없었더라면, 난 무너졌을 것이다.

"작년에는 어머니 돌아가신 뒤 얼마 안 돼서, 설이 생일을 잘 못 챙겨줬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

"그렇지. 그래서 이번에는 꼭 선물도 챙겨주고, 저녁에 잡채랑 소고기 먹일 거야."

"아이고, 그러세요. 보호자님."

우정혁은 쓰레기통에 우유곽을 골인시킨 뒤 물었다.

"걔는 네 생일날 뭐 해주냐?"

"설이는 내 생일에 아무것도 안 줘. 선물 못하게 해놨거든."

"왜?"

"부담주기 싫어서, 내 생일에는 설이가 저녁상 차려주는 게 다야."

"그러냐."

아주 어릴 적에는 설이가 내 생일이라며 산에서 열매를 잔뜩 따왔다. 그게 너무 기뻐서 잔뜩 먹었더니, 다음 생일에는 꼬리와 귀를 내민 채로 산 중턱에서 토끼와 다람쥐를 사냥해왔다. 심약한 우리 가족은 그걸 먹을 수 없어서 산에 묻어주었다. 풀 죽은 설이를 쓰다듬으며 고맙다고 머리에 뽀뽀해주자 설이는 나를 부둥켜 안고 방안을 뒹굴 뒹굴 굴러다녔다.

서울로 올라온 중학생 때, 설이는 용돈을 모아서 샀다며 값비싼 브랜드 가방을 내게 건넸다. 어머니도 놀라시고 나도 얼마나 놀랐는지, 설이를 혼내서 다시 값을 물어왔다. 슬픈 얼굴의 설이를 달래느라 몇 날 며칠 아양을 떨어야 했다.

설이의 생일 당일, 복도를 걷는 도중 우정혁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바로 옆에 있는데 무슨 메시지를 보내, 하여튼 요즘 애들은 대화가 부족하다니까, 따위의 생각을 하며 옆에서 걷는 우정혁을 한 번 째려본 뒤에 화면을 터치했더니 나이키 상품권 바코드였다.

눈이 휘둥그래져서 나는 우정혁의 옆얼굴을 보며 뭐냐? 하고 물었다. 검지로 귀를 후벼 파면서 우정혁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어디서 받았어. 그거에 좀 더 보태면 좋은 걸로 살 수 있을 거다. 동생 선물 사.”

“야… 미안하게…”

“어차피 난 이런 거 없어도 그냥 사고 싶으면 몇 켤레씩 사. 알잖아.”

부잣집 도련님의 배려가 정말 재수 없고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우정혁은 가만 보면 참 좋은 녀석인데, 어떤 사고를 쳤기에 주변에서 그렇게 무서워하고 다가오지 않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십만 원짜리 상품권을 그냥 껌처럼 건네주는 대인배 우정혁에게 거의 매달리듯 껴안았다. 우정혁의 목덜미를 껴안고 뺨에 입술을 꾹 갖다 대자 우정혁이 질색하면서 나를 떼어냈다. 나는 파랗게 질리는 우정혁 얼굴이 웃겨서 더 악착같이 매달리며 우정혁의 팔뚝을 붙잡고 늘어졌다.

“우정의 상징 우정혁! 사랑해요 우정혁!”

“꺼져, 제발!”

그때 뒤에서 누군가 강한 힘으로 내 허리를 낚아챘다. 순식간에 발이 바닥에서 동동 뜬 채로 깜짝 놀란 나를 우정혁에게서 멀리 떼어서 내려놓으며 설이가 내 귓가에 가까이 닿을 듯 입술을 대고 물었다.

“형 지금 뭐 하는 거야?”

분명 말은 내게 걸고 있었는데, 설이의 눈은 우정혁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를 등뒤에서 끌어안은 두 팔이 파르르 떨렸다. 누가 보면 내가 치한에게서 희롱을 당해서 구해낸 모습이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치한은 나였다. 교복 셔츠 소매로 제 뺨을 거칠게 닦아내고 있던 우정혁은, 뭘 꼬라 보냐는 듯이 설이를 마주보다가 무심히 말했다.

“야, 난 네 형한테 아무 짓도 안 했어. 쟤가 나 괴롭힌 거다.”

“……선배한테 말 건 적 없는데요.”

그나마 ‘그쪽’이라고 부르는 걸 내가 혼내서 호칭을 ‘선배’로 바꿔놨지만, 경계의 눈빛은 그대로였다.

나는 또 온도가 싸늘하게 낮아지는 걸 느끼며 뒤돌아서 설이의 코트 앞섶을 잘 여며주었다. 오랜만에 함께 하교하는 설이 생일날에 기분 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이 주는 생일선물 버리지 말고, 너무 고가의 선물만 돌려주라고 한 내 말에 착하게 선물을 챙겨서 오느라 가방이 빵빵 했다. 나는 여전히 우정혁을 불손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설이의 하얀 두 뺨을 감싸서 내 쪽으로 끌어내렸다.

“우리 설이 왔어? 춥지? 얼른 집에 가자, 형이 장 봐놨어. 케이크도 골라야지. 우정혁 다음 주에 보자!”

서둘러 두 사람을 떼어놓고 설이의 손을 잡고 한참 걸을 때까지도 설이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었냐고 물어도 고개를 저었고, 외식할까 물어봐도 고개를 저었다.

그나마 집에 도착해서 함께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설이 기분이 나아지는 게 느껴져서 다행이었다. 

잡채와 함께 우리 형제가 좋아하는 매운 갈비찜을 저녁 메뉴로 결정했고, 살코기가 아주 보드랍게 잘 쪄졌다. 케이크에 촛불도 불었고, 생일 축하 노래도 불러주었다. 설이는 내 뺨에 생크림을 묻히며 즐거워했다.

“설아, 생일 소원 뭐 빌었어?”

“비밀.”

설이는 조용히 웃으며 내 뺨에 제가 묻힌 생크림을 손가락으로 닦아내 빨간 입술 사이로 집어넣었다.

고등학생이 된 설이는 중학교 때와 분위기부터 달랐다. 예쁘장한 소년의 느낌에서 아름다운 청년으로 향하는 길목에 서 있었다. 그저 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흐뭇한 미모였다. 발 사이즈도 금방 커져서, 매년 기념일마다 선물로 운동화를 주게 되는 것 같았다. 우정혁의 도움으로 산 나이키 운동화를 받고 설이는 고마워했지만, 어쩐지 표정이 그다지 기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너, 갖고 싶은 선물 따로 있구나?”

설이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느릿하게 저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말했다.

“형이 잘 몰라서 미안해. 갖고 싶은 거 뭐야? 형이 사줄게.”

“……”

“비싼 거여도 괜찮아. 뭐든 좋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말해 봐, 다 들어줄게. 응?”

설이는 워낙 착하고 순해서, 내가 추궁해서 묻지 않으면 정말 원하는 걸 말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부추기자, 설이는 입술을 다문 채 묘한 미소로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속이 타서 설이의 허벅지를 가볍게 흔들자, 고민하던 얼굴이 고개를 들어서 까만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설이가 차분하게 물었다.

“정말 뭐든지 다 괜찮아?”

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럼!”

“…키스 해보고 싶어.”

내 귀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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