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한설의 첫 연애
"설아, 사실은… 우리는 친형제가 아니야."
조심스럽게 눈을 떠 고개를 들면서 나는, 혹시나 설이가 충격으로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 같다.
곧 사춘기에 접어드는 나이인데, 혹시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서 가출이라도 하면 어쩌지. 여태까지 가족 이외의 타인에게 귀와 꼬리를 숨기게 했지만, 우리 가족만은 다 똑같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을 텐데. 어머니와 상의한 뒤에 말하는 편이 좋았을까.
내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의 걱정이 스쳐 지나가는 동안, 설이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나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당연한 거 아니야?' 라고 말하는 것 같은 평온한 까만 눈동자에 민망해질 때 즈음, 설이는 이미 귀와 꼬리를 잘 갈무리해서 숨기고 다시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설이는 작게 숨을 내쉬더니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떠서 날 바라보았다. 차분하다 못해 냉정한 표정이었다. 설이의 눈동자 속에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내 얼굴이 비쳤다.
"그래서 지금 형 말은, 우리가 친형제가 아니기 때문에… 형이 내 것이 아니라는 거야?"
"응?"
내 입장에서는 핀트가 약간 엇나간 질문이었다.
나는 우리가 친형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림과 동시에, 설이의 인간관계를 보는 시야를 좀 더 넓혀주고 싶었다.
‘너와 내가 친형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친하게 잘 지내는 것처럼, 네 주변 사람들에게도 좀 더 곁을 주고 잘 어울려 지내라.’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고립된 환경에서 자란 탓에 지나치게 나에게만 매달리려고 하는 설이의 습관적인 성격이 안쓰러웠던 것뿐이었다.
설이는 화가 날 때면 왼쪽 눈가를 약간 찌푸렸다. 그럴 때면 눈 밑살이 더 도톰해졌다. 아주 미약한 표정 변화였지만, 평소 잘 웃지도 잘 울지도 않는 설이의 얼굴을 생각해보면, 그 작은 변화는 큰 의미가 있었다.
나는 목 뒤로 침을 꿀꺽 삼켰다. 설이는 화를 참듯이 더 느리게 되물었다.
"내가 형에게는 없는 꼬리가 있기 때문에… 형은 내 것이 아니야?"
"무슨, 무슨 말이 그래?"
어색한 웃음으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며 나는 손을 내저었다.
"나는 여전히 설이 형이지! 난 그냥 네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네가 좀 더 주변을 넓게 봤으면 해서..."
내 대답이 설이의 마음을 풀리게 하지 못했는지, 설이는 뭔가 석연찮은 표정이었다. 토라진 동생을 달래기 위해서 마른 입술에 침을 축이며 나는 안간힘을 썼다.
"형은 설이가 꼬리가 있든 없든, 친형제든 아니든, 설이가 어디에서 무얼 하더라도 언제나 설이 형이야. 형은 설이 거야. 응? 화 풀어, 설아."
"......응."
마지막에는 내 대답이 맘에 들었는지, 아니면 노력하는 내 모습이 맘에 들었던 건지 설이가 입 꼬리를 슬쩍 올려 미미하게 웃었다. 나는 이미 그때부터 나보다 커진 설이의 몸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거렸다.
"아이고, 착한 내 동생."
내게 화답하듯이 설이도 내 허리를 껴안고 내 등을 슥슥 쓸었다.
설이가 크게 충격 받지 않고 넘어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날은 식사 후에 설이가 좋아하는 간식을 사다 주겠다고 했더니, 뜬금없이 초콜릿을 먹고 싶다고 했다. 어릴 적부터 산골에서 열매를 먹고 자란 탓에 우리 형제는 인위적인 단 음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설이가 학교 친구들에게 선물 받아오는 초콜릿, 과자, 사탕 등을 먹지 않고 결국 버리게 되어도 나는 그걸 혼내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날은 초콜릿을 사달라며 애교부리듯이 말꼬리까지 늘였다.
마침, 황주은이라는 여자아이가 주고 간 초콜릿이 있어서 내밀었더니 설이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건 싫어."
"꽤 맛있는 것 같은데, 싫어?"
"싫어."
"그러면 어떤 걸로 사다 줄까. 화이트 초콜릿? 크런키?"
"다 좋아."
설이는 부드럽게 눈을 살짝 접으며 웃었고, 그 미소가 너무 달콤해서 나는 행복감에 젖었다.
워낙 미남인데다가 웃기까지 하면 이렇게나 멋진데, 그걸 가족 말고는 아무도 보지 못한다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우리는 판 초콜릿을 부숴서 나눠먹었고, 그날 이후로 우리 집 현관에 설이의 친구가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나의 경우, 설이와 다르게 누가 집으로 찾아오는 일은 드물었다. 바쁜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이며 설이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정규수업 이외의 부 활동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반 아이들과 원만하게 지내는 편이었지만 딱히 붙어 다니는 친구는 없었다.
그나마 성격 좋은 두어 명의 애들과는 급식을 같이 먹고 매일 떠들었지만, 그 애들이 우리 집까지 찾아올 이유는 없었다. 여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스타일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뭘 열심히 먹어도 유난히 빼빼 말랐고 태양 볕 아래 서 있어도 피부가 붉어졌다가 다시 하얗게 돌아와서 소위 말하는 남성미 같은 것은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찾을 수 없는 타입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취향이 특이한 아이는 꼭 있기 마련인지, 고등학교에 입학했던 이 년 전, 나를 따라다니는 여학생이 하나 있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던 해였고, 대학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무척 바빴다.
병원비와 생활을 도와주시는 외삼촌과 이것저것 상의할 것도 많았고, 아직 중학생인 설이에게 집안일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빨래와 청소, 식사 준비 등을 설이가 하기 전에 내가 해놓기 위해서 보충수업도 자주 빠졌다. 다행히도 담임은 내가 일찍 집에 갈 수 있도록 늘 너그럽게 허락해주었다.
냉장고에 남은 것들을 찬거리로 해결하고, 어머니 병문안도 가기 위해서 처리해야 할 일들을 중얼거리며 집 앞까지 걸어갔을 때, 나를 기다리고 있던 정민지를 만났다.
"어? 너 왜 여기 있어?"
"아... 나는 원래 오후 보충 늘 안 들어서."
의아해하는 내 앞에서 정민지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조그맣게 대답했다. 내가 물어본 것은 왜 일찍 학교에서 나왔느냐는 게 아니라 어째서 우리 맨션 앞에 서 있냐는 것이었다.
미술 특기생인 정민지는 내 앞자리에 앉았고, 가끔 대화했기 때문에 미술학원 수업을 위해 일찍 하교한다는 것을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여리여리하고 예쁘장한 외모는 마치 수채화 같은 분위기였다. 그 애가 뭍 남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도 정민지가 예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건 객관적인 평가에 대한 수긍이었을 뿐이지 딱히 정민지와 사귀고 싶다는 욕구까지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내 몸과 마음이 너무 바빴고, 그때는 아직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 성적 지향성이 그쪽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말없이 서 있는 정민지에게 맨션을 가리켰다.
"나 여기 살아, 3층."
"...알아. 담임 선생님께 들었어."
정민지는 가방 안에서 종이 한 장이 든 투명한 클리어 파일을 꺼내 내밀었다. 담임이 만든 진로 상담 질문지였는데, 하교할 때 한 장씩 받아가서 내일 제출하라고 했던 것이 그제야 떠올랐다. 그걸 건네 받으면서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것 때매 여기까지 온 거구나. 미안해서 어떡하냐."
"아냐, 우리 학원 여기서 별로 안 멀어서..."
"뭐 마실 거라도 줄까? 집에 피크닉 사과 맛 있어."
정민지는 소리 없이 웃으면서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부드러운 연갈색 머리카락이 움직이는 것이 참 예뻤다. 가방을 다시 맨 정민지에게 나는 씩 웃어 보였다.
"고맙다, 야."
"......."
정민지는 돌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선 채로 시선을 내려 땅바닥만 바라봤다. 나는 고맙다는 말 이외에 더 할 말이 없어서 잠시 그대로 서서 그 애가 돌아가기를 기다렸지만, 집안일이 밀려서 농땡이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저기, 야, 그럼 나 먼저..."
"한준, 너 있잖아."
뒤돌아 서려다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민지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입술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바보 같은 나는 눈치까지 없어서 그게 고백의 순간이라는 것을 몰랐다.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내게 정민지는 용기 내어 목소리를 높였다.
"여자친구 없으면... 나랑... 사귈래?"
"뭐...?"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내가 벙 쩌 있었을 때, 정민지는 다시 말할 용기가 없었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긴 머리카락에 가려진 그 애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떨림이 내게까지 전해지는 것 같아서 내 얼굴에도 열이 올랐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내 마음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내 등 뒤로 그늘이 졌다.
"형, 여기서 뭐해."
설이가 내 뒤에 바짝 서서 정민지를 뚫어지게 내려다 보았다. 타인의 등장에 화들짝 놀란 정민지가 새빨갛게 된 얼굴을 들어서 설이를 보더니 "그럼 나 이만 갈게." 하고 도망치듯이 인도를 빠르게 걸어 사라졌다. 나는 멍한 얼굴로 정민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내 어깨를 아프도록 꽉 잡는 설이의 악력에 놀라서 뒤돌아 봤다.
싸늘한 눈길로 설이가 내게 물었다.
"...저 여자애가 마음에 들어?"
사실 나는 그 고백을 받아야 할지에 대한 결정도 못 내린 상태였다. 설이의 물음에 깜짝 놀라서 몸이 튀었다. 방금 도착한 줄 알았더니 우리 대화까지 다 들었나 싶어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마치 못된 짓을 하다가 들킨 것만 같았다. 부끄러웠다. 동생에게 이런 장면을 들켜서 민망한 마음이 훨씬 컸을 것이다.
"야, 야... 여자애라니, 누나라고 해야지. 나랑 같은 반이야."
"저 누나가 마음에 들어?"
"무, 무슨... 하하... 설아, 배고프지? 참치 김치찌개 끓여줄게! 그거 먹고 병원 가자. 응?"
설이의 어깨를 꾹꾹 눌러 겨우 맨션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설이는 정민지가 사라진 길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접점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정민지는 그 뒤로 며칠 내내 나와 얼굴도 안 마주치려고 하더니 갑자기 어느 날 나를 옥상 계단으로 불렀다.
"정말 미안해... 너에게 상처 줄 생각은 없어."
나는 난처해하는 정민지의 얼굴을 보면서도, 내가 왜 사과를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멀뚱멀뚱 바라보고만 있는 내 반응에 그제야 정민지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러자 정민지의 표정은 더욱 더 난처해진 것 같아 보였다. 수업 차임 벨 소리가 울리자, 시간 여유가 없어진 그 애가 발을 동동 구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고는 속삭였다.
"나, 한설이랑 사귀기로 했어."
정말 미안해, 다시 한 번 사과를 하고는 먼저 계단을 내려가버렸다.
혼자 남은 공간에 벽을 보고 선 채로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동급생 정민지가 내 동생과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는 사실이 뇌 내로 흘러 들어가서 그 뜻을 이해하기까지 꽤나 시간이 걸렸다.
우선 나는 정민지를 또래보다 성숙하고 말없이 조용한 미녀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그녀가 아직 어리다면 한참 어리다고 할 수 있는 내 동생 설이와 사귄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품 속에 아이를 세상으로 내보내는 어미의 심정이랄까, 나름대로 마음속이 복잡했던 것 같다.
게다가 이런 중요한 사실을 내 동생 설이가 아니라 정민지에게 먼저 듣게 되었다는 점에 어느 정도 배신감 섞인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설이는 내게 어떤 비밀도 없을 거라는, 무슨 일이 생겨도 나에게 제일 먼저 말해줄 거라는, 아이 키우는 부모의 흔한 착각을 나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내내 설이를 빤히 바라봤다. 샤워 후에 거실 방석 위에 앉아 선풍기 바람으로 머리를 말리고 있는 설이 곁에 다가가자, 나를 올려다보던 설이는 수건을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건네 받아서 설이의 머리카락을 비벼 말려주자 기분 좋은 듯 설이는 목 안쪽으로 나른한 소리를 냈다.
머리카락을 보송보송하게 말려준 뒤, 나는 설이의 앞에 앉았다.
"설아, 너 형한테 뭐 할 말 없어?"
장난스럽게 설이를 흘겨보며 떠보듯이 말했지만, 설이는 무표정하게 눈만 깜빡였다.
어디 중학생주제에 고등학생 누나랑 연애를 하냐며 꼰대 같이 혼낼 생각은 없었다. 물론 내 품 안의 설이가 나보다 먼저 '연애' 라는 영역의 문을 열었다는 것이 묘한 느낌을 주기는 했지만, 설이가 새로운 경험을 하며 인간관계를 넓혀가는 것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나는 설이를 자유롭게 살게 하고 싶었다.
설이의 팔뚝을 손가락으로 간지럽게 콕콕 찔렀다.
"너 정민지랑 사귄다면서? 형 다 들었는데?"
"아."
그제야 설이는 고작 그거였냐는 듯이 심드렁한 표정을 했다. 나는 좀 더 부끄러워하고 수줍어하는 소년의 모습을 기대했는데, 설이는 묘한 부분에서 참 무뚝뚝했다. 어쩌면 내게 제 첫 연애 사실을 들킨 것이 당황스러워서 더 표정이 굳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형 서운하다. 너 어떻게 형한테 말 안 할 수가 있어. 응?"
"......"
설이는 내 표정을 관찰하듯이 지그시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정민지가 우리 학교에서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그 애가 수상경력이 얼마나 되고, 얼마나 착하고 좋은 아이인지에 대해서 거의 연설하듯 쏟아냈다. 내 입장에서야, 설이가 누구랑 만난다고 해도 설이가 훨씬 더 아깝지만 그래도 정민지는 아주 좋은 여자친구가 될 것 같았다. 나는 설이의 첫 연애상대로 정민지만큼 좋은 아이가 없을 거라는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어쩌다 그런 사이가 되었느냐면서 설이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꾹 찌르며 물어봤지만, 설이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웃고 있는 내 얼굴만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곤 조용히 물었다.
"형, 질투 안 나?"
"......질투? 내가? 왜?"
나는 진심으로 설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미 정민지가 내게 고백했던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린 뒤였다. 옥상 계단에서 정민지가 내게 사과를 했던 이유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설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 누나가 마음에 들었던 거 아니었어?"
그제야 나는 설이가 내게 고백했던 여학생과 사귀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내게 그 사실을 말할 수 없었겠구나, 하고 깨달았다.
나는 흐뭇한 미소로 설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정민지가 좋은 애라고 생각해. 그것뿐이야. 여자친구 생긴 거 축하해, 설아. 응?"
다정하게 껴안고 머리를 비벼주자 설이는 묵묵히 내게 안겨 있었다. 품 안에 가둘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린 열여섯의 설이가 대견하고 어쩐지 감격스러웠다. 이래서 동생 키우나, 싶었다.
설이를 품 안에서 떼어놓으며 잘생긴 얼굴을 두 손으로 꾹 눌렀다.
"그렇다고 여자친구랑 노느라 공부 소홀하면 안 된다. 응?"
"......"
"형한테도 얘기 좀 해주고. 응? 안 그러면 나 동생 뺏긴 것 같아서 진짜 질투 날 거 같아."
반쯤 장난 섞인 말이었는데, 설이는 내 마지막 말에 환하게 웃었다.
어쩌면 이렇게 귀엽게 웃을 수 있는지, 감격스러워서 나는 정말 질투가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까지 내게만 보여줬던 설이의 귀여운 모습들을 다른 누군가와 공유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던 것이다.
내가 아닌 정민지에게 설이가 웃어주고, 말꼬리를 늘이며 애교를 부리고, 머리카락을 말려달라고 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마냥 웃음이 나오지는 않았다. 정말 팔불출이다, 싶으면서도 그날은 그런 상상 때문에 잠을 설쳤다. 그래도 아침에는 내 마음이 다 정리되어 있었고, 멋진 형의 모습으로 동생의 행복을 응원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민지는 아프다며 며칠 학교를 빠지더니 핼쑥해진 얼굴로 돌아왔다. 눈이 새빨갛게 부어서는 나와 눈이 마주치면 차갑게 피해버렸다. 왜 저러나, 싶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설이와 정민지가 일찌감치 헤어졌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고 나서 나는 의아했다. 정민지는 아직도 설이에게 미련이 남은 듯이 그 뒤로도 몇 달 동안이나 맨션 앞을 서성이거나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정민지가 특별히 잘못한 게 없다면 더 만나봐도 됐을 텐데, 설이는 뚝 끊어진 것마냥 정민지에 대한 관심이 없어 보였다. 매몰차다고 하기에는 아예 '무관심'에 가까웠다.
설이가 여학생에게 빠져 해롱대는 모습을 보면 그것도 속이 쓰릴 것 같았지만, 며칠 가지도 못하고 짧게 끊어진 연애와 여전히 타인에게 무관심한 설이의 태도가 아쉽기는 했다. 혹시 다른 여학생에게 마음을 빼앗긴 건 아닌가 싶어서 은근슬쩍 물었을 때, 설이는 뜬금없이 내게 되물었다.
"왜? 형 누구, 마음에 드는 여자애 있어?"
"응? 아니 아니, 나 말고 너 물어보는 거야. 설아. 누구 없니?"
"...누가 형한테 고백했어?"
난데없는 동문서답에 웃음이 나서 나는 손을 내저었다.
"그럴 리가. 나는 너 혹시 누구 또 좋아하는 애 생겼나 싶어서 물어본 거야."
"그런 거 없어."
설이는 어쩐지 안심한 얼굴로 담백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날이 갈수록 선명해지는 턱 선과 부드러운 듯 깔끔한 옆얼굴을 바라보며 난 작게 웃었다. 꽃 피듯 아름답게 성장하는 내 동생을 지켜보는 것이 내 거의 유일한 행복이자, 목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