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
나 혼자 10만 대군 161화
48장 이계화(4)
묘한 공간.
어디는 마치 거울이 반사된 것처럼 구부러져 있고 또 어딘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블랙홀처럼 뻥 뚫려 있었다.
그러자면 또 아무것도 없는 하얀색으로 칠해진 곳도 있고, 또 어느 곳에서는 깨어진 유리 조각이 뭉쳐 있는 듯 사방으로 빛이 반사되는 곳도 있었다.
이 장소를 글로 묘사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난잡한 그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것 참, 다들 오랜만이군.]
[그러게 킥킥킥…… 얼마 만이지? 한 3만 년 만인가?]
[우리에게 시간을 세는 게 의미가 있나?]
[나는 잠들어서 도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조차도 희미하군.]
[끄루욱?]
음울하고 거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다들 제각각 할 말을 하며 순식간에 시끄러워진 공간.
하나 그것도 잠시.
[다들 조용히 해봐.]
음울한 목소리가 그 장소에 울려 퍼지자마자 사방에서 떠들던 목소리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다는 듯 완전히 조용해진 공간 안에서 음울한 목소리를 가진 남자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너희도 알고 있지? 지금 이렇게 이야기가 할 수 있는 이유가 상호보완이 깨져서 그렇다는 걸?]
[그래, 알지. 나도 알고 있어. 그걸 모르면 어떻게 하나? 킥킥]
[그래.]
[그래서 뭐?]
서로 대답하며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는 목소리들 사이에서 음울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너희도 이렇게 대화하는 거로 끝내고 싶은 마음은 없잖아?]
[그렇지?]
[대화로 끝내기에는 아까워, 아깝지!]
[그렇군. 이렇게까지 제약이 풀렸는데 강림하지 않고는 못 배기지.]
이전보다 더 소란스러워지는 목소리들, 그중에는 날카로운 목소리도 있었고, 또 장난을 치는 듯 비웃는 목소리도, 또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음성도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음성들 사이로 음울한 목소리는 말했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봤자 개죽음이라는 건 알지?]
[끼엑!? 그게 무슨 소리야!!]
[다르간이 강림했다가 죽었어.]
[다르간?]
[다르간??]
[다곤의 파편?]
[죽었어?]
[진짜로?]
음울한 목소리가 한 번 말할 때마다 소란스러워지기를 반복하는 공간.
그리고 그 공간 안에서 음울한 목소리는 한참이나 웅성거리는 목소리들 사이에서 가만히 있다 다시 음성을 보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가 방법을 알려줄게.]
[응??? 뭐를? 뭐를??]
[혼자 강림해서 죽지 않고, 다 같이 한 번에 강림하는 법을 알려줄게.]
음울한 목소리가 말했다.
* * *
고풍스러운 도서관.
하나 도서관의 모습은 이전까지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흠…….”
바로 도서관 천장에 떠 있는 일식 때문에.
원래 도서관 천장에 달려 있어야 하는 고풍스러운 샹들리에는 사라져 있었고, 그곳에는 도서관을 어둡게 물들이는 일식이 떠올라 있었다.
넓은 방 한가운데에 떠 있는 일식은 척 보기에도 무척이나 괴리감을 일으켰지만, 로우레테는 그런 괴리감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게 하늘에 떠 있던 일식을 한참이나 바라보곤 입을 열었다.
“이제 닫아도 된다.”
그 말에 나는 곧바로 신격 각성을 해제했고, 그와 함께 일식이 깨져 나가며 도서관의 천장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둑어둑한 하늘이 사라지고, 그 위에 고풍스러운 문양이 박힌 천장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말했다.
“그래서, 어때?”
“우선 몇 가지 알아낸 게 있지만 잠깐만 기다려 봐라. 좀 더 확인이 필요할 것 같으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곧바로 몸을 움직여 책장 사이로 사라졌고, 나는 그런 로우레테의 뒷모습을 보며 자리에 앉았다.
“후…….”
신격 각성을 사용한 직후라 슬쩍 지끈거리는 머리.
예전처럼 머리가 깨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 지끈거리는 두통은 빨리 좀 사라졌으면 했다.
뭐, 지금 머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내가 불과 몇 시간 전 그 거대 어인을 잡고 나서 느낀 그 두통보다는 조금 줄어든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부족했다.
내가 자리에 앉아 기다리자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 로우레테가 책장 속에서 빠져나와 내 맞은편에 앉았다.
“전부 찾아봤어?”
내 물음에 로우레테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래, 우선 첫 번째로 네가 이번에 상대했던 괴신은 다르간이라는 괴신이다.”
“다르간?”
“그래, 뭐 정확히 말하면 다곤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그 녀석은 다곤의 파편 중 하나니까 다곤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 파편? 괴신들도 파편이고 뭐고가 있어?”
“뭐, 이건 사실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신 중에서는 신좌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자신을 따로 떼어서 버리는 녀석들도 있다.”
“그건 또 무슨…….”
내가 물으려 하자 로우레테는 고개를 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걸 설명하려면 또 한참이나 설명해야 하는 데다가 다곤에 대한 지식도 풀어놔야 하는데 굳이 듣고 싶나?”
그녀의 물음에 나는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뭐, 내게 있어 중요한 것은 다곤이 누구인가가 아니니까.
내 대답에 마음에 들었는지 로우레테는 마음에 든다는 듯 자신의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곤 말을 이어나갔다.
“그럼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서, 지금 네가 사용한 그 신격 각성이라는 스킬부터 설명해 주도록 하지.”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횃불 안으로 들어온 이유는 다르간에 관해 묻기 위해서도 있었지만 내 스킬인 신격 각성에 대해서도 궁금한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 신격 각성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물어봤어야 했지만, 그때는 악마들을 제거하느라 너무 바빠서 못 물어봤으니까.
“우선 네 신격 각성은 엄연히 말하면 신격 각성이 아니다.”
“……?”
내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으음, 너는 지금까지 그 스킬을 사용하면 네가 강해진다고 했었지?”
“그렇지?”
“그리고 너는 강해진 이유가 그 스킬을 사용함으로써 신격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네가 생각하는 건 틀렸다. 엄밀히 말하자면 지금 네가 사용하는 신격 각성은 네게 신격을 부여해 준다기보다는 신격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거다.”
“……공간?”
“그래, 공간.”
고개를 끄덕인 로우레테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내가 전에 말해줬지? 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신앙을 받아서 만들어진다. 그 신앙이 계속해서 쌓이게 되면 그 녀석들은 일개 영혼에서 신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신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게 뭘까?”
“……글쎄?”
“신전이다.”
“……신전?”
내 되물음에 로우레테는 고개를 슬쩍 끄덕이고는 말했다.
“물론 신전의 형태는 다 다르다. 신전이 없어도 신앙이 모일 정도로 강한 녀석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논외로 치고, 기본적으로 신들은 신전이 있다. 이유는 자신의 신앙을 좀 풀어서 말하자면 신격을 만들기 위해서지.”
“…….”
“그리고 네 신격 각성은 네게 신격을 부여하는 게 아니라 네 신격을 모을 수 있는 신전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거다.”
“신전이라고?”
“그래, 신전. 분명 네가 전에 이야기했었지? 이 스킬을 준 녀석이 무조건 악마나 괴신과 싸울 때 신격 각성을 사용한 채로 싸우라고. 그건 네가 악마나 괴신을 잡아서 그들의신격을 빼앗으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남의 신격을 빼앗는 것도 가능해?”
물론 이 스킬 자체가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특히 엘리고르와 크세즈베트를 죽인 뒤, 스킬을 사용한 후 느껴졌던 두통이 많이 완화된 것을 생각해 보면 확실히 이 스킬이 성장하고 있는 것은 맞는 것 같았다.
“원래라면 같은 신도 아닌 인간이, 그 대상이 아무리 괴신일지라도, 그 신격을 빼앗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네가 가진 신격 각성이 있다면 가능하다. 그리고 그렇게 괴신을 죽여 신격을 모으면…….”
로우레테는 무엇인가를 신중하게 고민하는 듯하곤 말했다.
“저번에 말했던 것처럼, 너는 정말로 사탄을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
“…….”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고깔모자를 뒤로 눌러쓰고는 이야기했다.
“아무튼, 이걸로 네가 할 일은 정해졌다.”
“괴신을 죽이는 것?”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많은 괴신을 죽여서 ‘신격’을 얻는다. 그게 최우선이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네 동료들의 나머지 각성 아이템을 찾아주면 되겠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오래된 신전.
신전 입구에 세워진 조각상은 완전히 풍화되어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고, 바닥에 깔아둔 타일도 마찬가지로 풍화되어 걸음을 옮기다 부서지지 않을까 싶었다.
창문 사이에 박아놓은 스테인드글라스는 이미 여러 갈래로 깨어진 채 본연의 예술미를 잊어버리고 있었고, 여기저기에 쏟아진 잔해는 이 신전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했다.
그리고 그런 신전의 끝에 있는 거대한 의자에서 한 남자는 앉아 있었다.
낡은 신전과는 다르게 정갈한 흑의를 입고, 팔짱을 낀 채 풍화된 신전의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는 곧 자신의 옆에 나타난 검은 형상을 보며 말했다.
“뭐야, 이번에는 좀 빨리 왔네?”
남자의 물음에 검은 형상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자의 왼쪽에 있는 부서진 석판 사이에 앉고 말했다.
“녀석이 괴신을 사냥했어.”
“오, 그래? 첫 상대는 누구였는데?”
“다르간.”
“음, 첫 상대치고는 나쁘지 않네.”
괴신 중에서도 수위에 드는 신의 이름을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 남자는 형상을 향해 말했다.
“그래서, 힘들게 잡았어?”
“우선 가지고 있는 스킬을 전부 활용해서 잡더군.”
“흠, 그건 좀 위험한데? 다르간 정도로 그렇게 힘을 쓰면…… 뭐, 성장 중이니까 됐나? 그래서, 그 녀석의 ‘신전’은?”
“엘리고르랑 크세즈베트, 그리고 이번에 다르간을 잡으면서 조금씩 쌓이고 있어……. 다만 쌓이는 속도가 조금 느리지.”
“그래? 아직 계승자가 안 돼서 그런가?”
“내가 볼 때는 그런 것 같더군.”
형상의 말에 남자는 혼자서 고민하는 듯 자신의 턱을 만져가며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젖더니 다시 턱을 괴고는 말했다.
“뭐, 아무튼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어때? 잘될 것 같아?”
“……솔직히 지금 당장은 미묘하군. 아무래도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하긴 아직 확인하기는 좀 이르지? 이제 막 다르간을 죽인 뒤니까…….우선 그 녀석을 죽일 때까지는 지켜봐야지.”
“아무튼, 이번에는 성공하면 좋겠네…… 회귀도 이번이 마지막인데 말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곤 이내 턱을 괸 팔을 바꾸었다.
“제발, 이번에는 괴신들을 전부 꺾고 다시 이곳으로 와주기를…….”
남자는 그렇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