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
나 혼자 10만 대군 147화
44장 악마 사선(1)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모를 어두운 공간 안.
환하게 빛나는 마법진의 옆에서 창백해진 얼굴로 눈을 감고 있던 알리샤는 힘겹게 눈을 떴다.
초점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는 시야에 알리샤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그녀는 아직까지 출혈이 계속되고 있는 자신의 배를 부여잡으며 손을 움직였다.
스으윽…… 스으으윽…….
알리샤의 옷이 질질 끌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기어간 자리에는 붉은 피가 덧칠해졌지만, 알리샤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힘겹게 몸을 옮겨 빛나고 있는 마법진의 한쪽에 도착할 수 있었다.
“누가…… 네 마음대로…… 하게 둘 줄 알고?”
그곳에서 힘겹게 중얼거린 알리샤는 피가 묻은 자신의 손을 이용해 복잡한 수식을 피로 덧칠하기 시작했다.
마법진의 피로 덧칠하자마자 덧칠한 부분이 새하얗게 물들며 마법진의 일부가 되기 시작했고, 알리샤는 출혈로 인해 점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으로 마법진을 덧칠해 나갔다.
“끅…….”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 알리샤는 마법진을 덧칠하고 있던 손을 거두며 짧은 신음을 흘렸다.
알리야는 자신의 시야가 흐려지고 눈앞이 까맣게 물들어 가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빨리 움직여야 했는데.’
알리샤는 엘리고르가 준 마법진을 조금이나마 해석할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그저 가능성이지만 상황이 이렇게 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나름대로 엘리고르와 협상할 카드를 만들어뒀지만, 알리샤가 준비해 놓은 협상 카드는 제대로 사용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도…… 네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거야…… 엘리고르.’
알리샤는 흐려지는 시선으로 피로 덮어쓴 마법진이 환하게 차오르는 것을 본 뒤가 돼서야 떠져 있던 눈을 완전히 감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그저 마법진의 공명음만이 울릴 뿐이었다.
* * *
검게 변해버린 도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저 흐린 날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던 서울의 날씨는 이상한 것을 넘어서 무척이나 빠르게 급변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흐렸던 날씨는 금방이라도 해가 뜰 것처럼 구름 한 점 없는 깨끗한 하늘로 변했지만, 정작 지상을 비춰야 할 태양은 어두운 무엇인가에 가려져 마치 어두운 달이 뜬 것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콰가가가각!
“끄억!”
주먹을 맞고 땅에 처박힌 크세즈베트의 입에서 고통 어린 신음이 터져 나오고 그 뒤를 이어 크세즈베트의 몸이 한강 둔치의 도로를 일자로 박살 내며 땅바닥에 처박힌다.
그와 함께 주변에 몰려 있었던 그림자가 크세즈베트에게 달려들었지만, 크세즈베트는 자신의 마력을 폭발시켜 주변의 그림자를 전부 날려 보낸 뒤 거친 숨을 내쉬며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네 녀석, 어떻게 그런 힘을?”
그리고 회귀하고 나서 처음으로, 나는 ‘진짜’ 크세즈베트의 목소리를 들었다.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던 목소리.
회귀 전 최후의 전투를 끝내고 나서 멸망해 버린 세계를 눈앞에 두었을 때, 크세즈베트는 저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로 나를 조롱했었다.
생각하기만 해도 인상이 찌푸려지는 기억을 저편으로 날려버리며 나는 곧바로 몸을 날렸다.
꽝!
“굳이 알 필요가 있나?”
“큭……!”
크세즈베트는 인상을 찌푸리며 내 주먹을 막아내고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오히려 내가 크세즈베트의 주먹을 막기에 급급했을 텐데, 지금은 그 관계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내 주먹을 하나 막기에도 굉장히 힘들어 보이는 크세즈베트.
뭐, 크세즈베트의 경우는 직접 몸을 사용해서 전투를 벌이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끅!”
꽈지지직!
크세즈베트가 이렇게 약했나?
나는 핸디드를 휘두르자마자 제대로 막지도 못하고 저 멀리 날아가 버리는 크세즈베트를 보며 묘한 가시감을 느꼈고, 다시 한번 달려 나가 크세즈베트에게 검을 휘두르는 그 순간.
“잠깐!”
크세즈베트가 입을 열었다.
“이건 함정이다!”
“뭐?”
“너도 알고 있겠지? 엘리고르가 너를 노리고 있다는 건!”
“…….”
뭐, 그거야 잘 알고 있지.
애초에 나를 노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박살 내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상태가 아닐까?
“그래서?”
내가 크세즈베트의 대답에 응해주자 그는 내 주먹을 막은 채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엘리고르는 일부러 네가 나를 죽이게 하기 위해서 나를 이곳으로 소환한 거야! 너도 알고 있겠지? 내가 원래 이때 소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크세즈베트는 그렇게 말하고는 팔을 크게 휘둘러 내 검을 밀쳐내고는 땅바닥에 발을 붙인 나를 봤다.
“너는 회귀 전과 다르게 나를 압도할 정도의 힘을 얻었다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고작 그 정도의 힘으로 엘리고르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나는 크세즈베트의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크세즈베트는 지금 나와 협상을 하려 하고 있었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가능할 것 같은데?”
“아니, 불가능할 거다. 만약 네가 엘리고르를 죽이는 데에 성공한다고 해도 너는 이 세계를 멸망에서 구해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녀석에게는 나와는 다르게 군단이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크세즈베트가 필사적으로 지껄이는 게 웃겨서 조금 더 말해보라는 투로 말했지만, 그는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희망을 엿보았는지 말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도록 하지, 나는 엘리고르의 술수에 빠져 모든 힘을 가지고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네가 힘을 온전히 가지고 나오지 못한 나를 죽이는 건 당연히 쉬운 일일 터다. 그러니 거래를…….”
“이거 참.”
그리고 곧, 나는 그의 말을 끊으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은 뒤.
콰직!
“컥!?”
그의 몸을 다시 한번 땅바닥에 처박았다.
그리고 엉망진창으로 박살 난 콘크리트 한가운데서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고 있는 그를 보며 말했다.
“이것 참, 엘리고르에게 고마워서 어떻게 하나?”
“이 머저리 같은 새끼……!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거냐!!”
콘크리트의 시멘트를 회백색의 머리카락에 잔뜩 묻힌 체 버럭 소리를 지르는 크세즈베트.
“아니, 이해했는데?”
“그렇다면 어째서……!”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크세즈베트의 말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그 악마한테 질 일은 없으니까.”
“네가 엘리고르에게 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 녀석이 가지고 있는 군단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녀석의 군단은 이미 내가 전부 죽여 버렸으니까.”
“뭐……?”
내 말에 크세즈베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슨 헛소리를…….”
“아, 그래도 좀 남기는 했지? 그래도 거의 다 정리했어. 남은 군단은 얼마 없지.”
“도대체 어떻게?”
“그건 네가 알 거 없고.”
나는 피식 웃으며 능력을 끌어올렸다.
내 몸에 달라붙은 검은 그림자가 그 세를 불리며 더더욱 기세를 끌어올리고, 핸디드의 아지랑이가 어지럽게 돌아다니며 검은 칼날을 내뱉는다.
그리고 크세즈베트의 주변으로 형태가 다른 그림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누구는 인간의 형태를, 또 다른 그림자는 야수, 다른 그림자는 몬스터나 거인의 형태를 가진다.
“이제 슬슬 이해가 돼?”
그리고 그 사이에서.
“네가 그 잘난 세 치 혀로 아무리 나불거려 봤자 결국 너한테 내려지는 결론은 단 하나야. 알아?”
콰자자자작!!
콘크리트가 어지럽게 터져나가며 그에게 뛰어듬과 동시에 그림자들이 일제히 크세즈베트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너는 오늘 여기서 죽어.”
나는 선고를 내렸다.
꽝!
핸디드를 휘두르자 크세즈베트는 곧바로 자신의 팔을 치켜들어 핸디드를 막아냈지만, 핸디드의 검은 아지랑에서 올라오는 작은 칼날들은 크세즈베트의 몸을 꿰뚫기 위해 나아갔다.
크세즈베트는 그 모습에 서둘러 자신의 마력을 일으켜 핸디드의 칼날을 방어한 뒤 곧바로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쿵!
“큭! 끄악!”
순식간에 크세즈베트의 뒤에 도착한 그림자 거인은 몸을 빼려고 하는 그의 몸을 힘차게 걷어찼다.
그와 함께 앞으로 쏠리는 크세즈베트의 신형, 나는 곧바로 그림자를 이용해 그의 몸을 붙잡아 내리쳤다.
꽈아아앙!!
다시 한번 콘크리트가 사방으로 터져 나가며 사방으로 돌조각을 비산시키고, 그와 함께 그림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달려들어 크세즈베트가 처박힌 곳을 향해 제각각의 무기를 내질렀다.
하나 그것도 잠시, 힘찬 공명음과 함께 크세즈베트가 쓰러졌던 곳에서 터져 나온 충격파는 그를 공격하고 있던 그림자들을 모조리 날려 버렸고.
나는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크세즈베트의 몸에서 마력이 터져 나온 순간을 노려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 하고 있는 그의 앞으로 짓쳐 들어간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두 손을 올리는 크세즈베트의 심장에 핸디드를 박아 넣었다.
푹!
그리고, 지금까지 몇 번이고 핸디드를 쳐 냈던 크세즈베트는 자신의 몸을 뚫고 들어온 핸디드를 바라보며 검은 피를 토해냈다.
“미, 친…….”
“이미 한번 너를 죽였던 내가 네 약점을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회귀 전 크세즈베트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몬스터를 이용해 전략 전술을 짜거나 자신의 마력을 이용해 몬스터에게 버프를 걸어주는 식으로 전투를 했다.
하지만 부득이하게 크세즈베트 본인이 싸워야 할 때, 그는 자신의 압도적인 마력을 활용하는 쪽으로 전투를 이어나갔다.
압도적인 마력을 자신의 몸에 둘러 일종의 방어막을 생성해서 마력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신체 능력을 커버하며 싸우는 게 크세즈베트의 스타일이었고, 그 마력 방어막 때문에 SSS급 헌터들은 크세즈베트를 이기지 못했다.
아무리 공격을 가해도 공격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만 그런 사기라고 말해도 될 정도로 강력한 마력 방패를 가지고 있어도 크세즈베트에게는 약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크세즈베트가 대범위 공격을 할 때.
크세즈베트는 일정 이상의 마력을 썼을 때 일시적으로 마력 방어막이 해제되었다.
물론 마력 방패가 해제되는 순간은 불과 2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크세즈베트를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너는,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다……! 커헉!”
검은 피를 토해내며 일갈하는 크세즈베트의 몸에 나는 핸디드를 더욱 깊숙이 박아 넣고는 말했다.
“그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크세즈베트 검 푸른색 눈가가 희미해지다 완전히 꺼진 것을 확인한 뒤, 나는 그의 심장에 박혀 있던 핸디드를 뽑아냈고, 돌 먼지가 가득한 바닥에 크세즈베트의 시체가 힘없이 떨어졌다.
‘회귀 전부터 시작해, 회귀하고 나서까지 나를 따라 왔던 악마는 내게 죽음을 맞이했다.’
간단하고 명쾌한 사실이 내 머릿속을 한번 스쳐 지나곤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와 함께 도시의 위에 떠 있던 검은 달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고, 세계가 다시 검은 먹구름이 낀 하늘로 돌아왔을 무렵.
“안녕?”
허공에 떠서 진득한 웃음을 짓고 있는 엘리고르를 볼 수 있었고, 나는 그런 엘리고르를 마주 보곤 웃은 뒤 입을 열었다.
“지랄하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