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나 혼자 10만 대군 104화
30장 각성 키워드(4)
강남역 근처에 세워져 있는 고층 빌딩.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완전히 박살 나 있었던 강남역은 국제 헌터 협회 소속의 건축 능력자가 도움을 주기 시작하면서부터 엄청난 속도로 옛날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고구려 길드의 상징과도 같았던 고층 빌딩은 비록 예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훌륭하게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빌라의 꼭대기 층에서 앉아 있던 이광천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고 있는 다른 고층 빌딩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림자 왕…….’
이광천은 저도 모르게 그 이름을 듣자 자신의 위축되는 기분을 느꼈다.
SS급 헌터가 되고 나서, 그리고 한국에서 단 3개밖에 없는 대형 길드의 길드장이 되고 나서 이광천은 그런 기분을 느낀 적이 없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대한민국에서는 3대 대형 길드라 불렸던 고구려 길드의 자리를 넘볼 수 있는 이들은 없었고, SS급 헌터인 이광천을 내려다볼 수 있는 헌터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한국의 대형 길드라고 불리던 고구려 길드는 물론 지금까지도 ‘대형 길드’라는 탈을 유지하고 있기는 했지만, 다른 길드에게 자리를 위협받을 수 있는 위치까지 내려왔다.
게다가 한국에서도 더 이상 SS급으로는 최강을 논할 수 없게 되었다.
‘……김우현.’
한국에 있는 SSS급 헌터이자, 현재 세계에 내로라하는 다른 길드들과도 힘을 견줄 수 있을 만한 길드인 ‘씨커’ 길드의 길드장인 그 때문에,
‘1년하고도 6개월.’
김우현이 처음 헌터로 데뷔해 SSS급 헌터가 될 때까지 걸린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은 곧, 이광천과 김우현의 신분이 뒤바뀌는 데 걸리는 시간이기도 했다.
F급 헌터에서 SSS급 헌터로, 그리고 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 ‘씨커’ 길드의 길드장.
그와 반대로 몰락해 가는 고구려 길드의 길드장이자 SS급 헌터에서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이광천.
“후…….”
이광천은 긴 한숨을 내쉬며 왠지 모르게 복잡한 마음을 정리했고, 그렇게 의자에 앉아 고층빌딩을 바라보던 중, 문이 열리며 지연희가 들어왔다.
“길드장님,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김우현 헌터가 찾아왔습니다.”
“알겠네, 지금 내려가도록 하지.”
이광천은 지연희의 말을 듣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길드장실에서 나와 눈앞에 열려 있는 엘리베이터를 탄 지연희와 이광천은 곧 내려가기 시작하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맡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베이터가 멈춘 뒤, 이광천은 지연희를 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리고 곧 이연희가 앞서 나가 연 문 안에는 ‘그림자 왕’이 있었다.
“…….”
그리고 이광천은 눈앞에 앉아 있는 그림자 왕을 보며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분명 1년 전 북한에 처음으로 하이브 사태가 터졌을 때 보았던 그 모습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런데도 이광천은 눈앞에 있는 김우현이 무언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렇게 문 앞에서 가만히 서 있던 이광천은 곧 들려온 김우현의 목소리에 의해 입을 열었다.
* * *
“뭐, 그 정도야 상관없지만. 정말로 그 정도 조건이면 괜찮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고개를 슬쩍 끄덕이며 대답하는 이광천을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뭐, 그 정도라면 딱히 조건에 대해서 협의할 필요도 없을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강남에 하이브 사태와 변이체 사태가 연달아 터지고 난 뒤 간만에 온 강남역은, 복구하려면 10년은 걸린다는 전문가들의 말과 다르게 벌써부터 예전의 그 느낌이 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무척이나 빠르게 올라가는 고층 건물과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는 사람들.
아직은 일반인보다 건축업자들이 많은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 건물이 지어짐에 따라 강남은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감상을 가지며 찾아온 고구려 길드에서 나는 뜻밖에 나쁘지 않은 제안을 들을 수 있었다.
“우선 약식으로 계약서를 준비해 드릴까요?”
내게 묻는 지연희 부장, 아니, 지연희 이사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지연희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접대실을 떠났다.
그리고 그런 지연희의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바로 고구려 길드가 발견한 SS급 일반 던전 ‘횃불의 초대’에 대한 던전 선점권의 양도 제안 때문이었다.
뭐, 전화로 해도 되지만, 나름대로 3대 길드라는 타이틀을 걸고 있는 고구려 길드의 특성상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릴 수도 있다.
그래서 되도록 서로 부딪히지 않고 빠르게 에피메테우스의 횃불을 얻기 위해 직접 찾아와 이광천을 만났지만, 상황은 내 생각과는 조금 다르게 흘러갔다.
분명 나름대로 자존심을 세워 반말을 쓸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조심스레 존대하는 고구려 길드의 이광천.
거기에 덤으로 조금 덤터기 같아도 원활한 아티팩트 습득을 위해 어느 정도까지는 양보하려고 했던 던전 내 아이템 분배도 내 생각과는 다르게 양측이 동등하게, 아니, 어떻게 보면 고구려 길드가 조금 더 불리한 쪽으로 맞추었다.
그 대신 고구려 길드가 건 조건은 내가 SS급 일반 던전에 들어갈 때 고구려 길드 소속의 헌터를 같이 데려가 달라는 조건과 동시에 고구려 길드에서 제작하는 단편 영상에 잠깐 출현해 줄 수 있냐는 것뿐이었다.
그 정도야 들어줄 수 있는 범위 안이니까 별로 상관은 없었다.
……뭐, 이광천이 노리는 게 무엇인지는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현재 고구려 길드는 대한민국의 대형 길드를 자처하고 있었고, 외부에서도 이미지 때문에 아직 대형 길드로서 입지를 전부 잃지는 않았지만 고구려 길드는 몰락하고 있었다.
아무리 대형 길드라고 해도 길드 건물이 완전히 작살 나고 길드 내 헌터가 아무리 열심히 던전을 돈다고 해도 하이브 사태가 일어났을 때 고구려 길드가 잃은 헌터의 수는 고구려 길드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그리고 이광천은 나를 통해 고구려 길드의 몰락을 막으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SS급 일반 던전을 나에게 양도하고 나와 함께 들어가는 것으로, 몰락해 가고 있는 고구려 길드의 이미지를 벗겨내려는 것이겠지.
그런 이광천의 의도가 뻔하게 보였지만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쓰는 것보다 내게는 에피메테우스의 횃불을 얻는 게 더 중요하니까.
이광천과 함께 기다리자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며 지연희가 약식으로 만든 계약서를 가지고 왔고 나는 계약서를 한번 읽어본 뒤 망설임 없이 지장을 찍고 ‘횃불의 초대’의 선점권을 양도받았다.
“그럼 던전 공략은 언제 하실 생각이신지?”
계약서에 도장을 찍자마자 지연희는 내게 물었고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내일입니다.”
“내일……? 바로 공략하실 생각이신가요?”
지연희의 말에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오후 2시에 바로 공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랑 같이 들어갈 길드원들도 그때까지는 준비를 마쳐달라고 전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지연희의 대답을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그다음 날 오후 2시.
서울시 광진구 쪽에 위치한 아차산 초입에는 무척이나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쯧.”
SS급 일반 던전 ‘횃불의 초대’의 입구.
그리고 그 주변에 서 있는 수많은 사람을 보며 나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뭐, 고구려 길드가 언론을 끌어들일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만 이렇게 입구 근처를 빽빽하게 뒤덮을 정도로 많은 기자와 카메라는 상상하지 못했다.
“와, 사람 엄청 많네요?”
“그러게 말이야.”
내 옆에서는 오랜만에 교복을 입은 김서윤이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응? 교복?
“뭐야, 너 왜 교복을 입고 있냐? 학교 방학 아니야?”
“고등학생들한테 방학이 어디 있어요? 방과 후 학습으로 전부 나오라고 하죠.”
“너는 안 나가도 되는 거 아니야?”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방과 후 학습도 30일 중 5일은 참가해야 출석으로 인정해 준다고 하던데요?”
“아니, 방과 후도 출석해야 인정해 준다고?”
“저도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렇다고 하더라구요?”
그랬었나……?
……뭐,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김서윤과 이야기하는 도중 사방에서 터지는 플래시 세례에, 순간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기자들은 그 이상 우리에게 다가와 인터뷰를 한다거나 하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아마 고구려 길드 측의 입김을 어느 정도 받은 거겠지.
나는 슬쩍 뒤를 돌아 아직까지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고구려 길드원들에게 입을 열었다.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아, 네!”
내가 말하자 곧바로 몸을 돌려 입을 여는 이연화.
분명 1년 전쯤 만났을 때는 제법 신인 티가 났던 것 같은데, 지금은 나름대로 이쪽 업계에서 일하는 듯한 느낌이 났다.
“애들 잘 지켜. 알았지?”
“또또! 제가 그렇게 못 미더워요? 맨날 그렇게 몇 번이고 강조하는 거, 너무 심하다구요.”
“네가 못 미더워서 그런 게 아니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하는 거지.”
내 말에 김서윤은 무엇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툴툴거렸지만, 그녀는 이내 슬쩍 나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아저씨.”
“왜?”
“이 던전 클리어하고 나면 저랑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래요?”
“……? 아이스크림?”
“네, 베스X라벤스에 아이스크림이요.”
“……? 그래, 뭐 먹으러 가지 뭐.”
내 말에 금세 툴툴거리는 듯한 표정을 지우고 씩 웃는 김서윤을 바라보다 어깨를 으쓱이고는 슬쩍 고개를 돌려 이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 고구려 길드를 바라보곤 중얼거렸다.
“자, 그럼 빠르게 끝내볼까.”
던전의 입구로 걸어가며 능력을 발동한다.
한순간 내 주변으로 검은 영역이 회색빛의 콘크리트를 잡아먹으며 주변을 어둠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기자들이 밟고 있는 땅마저도 먹어치운 심연 속에서, 그림자들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어둠이 흘러나오고…….
형태를 만들어…….
이내는 나와 같은 모습을 취하게 되는 그림자들.
“동화.”
내 말과 동시에 스킬이 발동되고 형태를 잡은 그림자들의 눈가에 붉은 안광과 동시에 외뿔이 생겨난다.
붉은 안광을 흩뿌리는 그림자들.
하나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영체 합일 대상이 선택되었습니다 ‘사령 술사 리치’]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창과 함께, 심연과도 같은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아닌 ‘언데드’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며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에에에에.
심연을 파헤치며 좀비와 구울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딱딱딱 거리는 소리를 내며 스켈레톤이 검은 아지랑이 속에서 빠져나온다.
그리고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솟아 나온 마법진에서는 목 없는 기사인 듀라한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며 어둠을 휘감은 츠바이헨더를 들고 소환되었다.
기자들로 혼란스러웠던 던전의 입구가 침묵으로 물들고, 나는 입을 열었다.
“갑시다.”
짧은 한마디.
그 말과 함께, 내 주변에 서 있던 ‘군단’이 그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