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나 혼자 10만 대군 082화
24장 숫자의 폭력(2)
“윽……!”
국제 협회 소속 A급 헌터 리첼은 괴인들의 공격을 막아내며 짧은 신음을 흘렸다.
“꺄아악!”
“안나!”
리첼은 자신의 후배인 안나의 비명을 듣고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피를 흘리며 날아가고 있는 안나가 보였지만, 리첼은 도우러 갈 생각조차 못 하고, 그저 신음을 흘리며 다른 괴인들의 공격을 피할 뿐이었다.
‘도대체 이 녀석들은 어디에서 나타난 거야……!?’
새벽 2시경, 갑작스레 나타난 괴수나 몬스터로 정의할 수 없는 괴인들의 출현 때문에 지금 도시는 비상사태에 빠져 있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비명.
근처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자동차의 비상벨 소리는 리첼의 귓가를 어지럽게 했고, 건물 곳곳에서 올라오는 매캐한 연기가 그녀의 후각과 시각을 어지럽혔다.
챙! 창! 차창!
‘너무 많아……!’
리첼은 순식간에 치고 들어오는 괴인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열심히 창을 휘둘렀지만, 다섯이 넘는 괴인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은 그녀로서는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윽……!”
결국, 리첼은 괴인의 마지막 공격에 자신의 어깨를 내주고 말았고, 곧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지옥과 같은 풍경.
‘도대체 이 녀석들은 갑자기 어디에서 나타난 거지……!?’
이제는 들리지 않는 후배의 목소리를 느끼며, 창대를 꾹 잡은 리첼은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 녹색의 괴인들을 바라봤다.
8차선 사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괴인들, 그에 비교해서 괴인들을 제압하러 온 헌터들의 숫자는 턱없이 부족했다.
‘상위 헌터들은 다들 어디에 있는 거야……!!’
이곳 말고도 다른 곳에서 일어난 괴인 사태를 제압하러 갔을 거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는 리첼이었지만, 이 정도의 전력으로는 눈앞에 있는 괴인들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었다.
‘괴인들의 신체 능력도 만만치 않은데…… 너무 숫자가 많아……!’
압도적일 정도의 숫자 차이.
“끅…… 살려, 살려줘! 끄악!”
5명의 괴인과 대치 상태를 이어가는 중에도 들려오는 동료들의 비명에 리첼은 저도 모르게 공포심이 들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숫자에 밀려 삽시간에 줄어드는 아군들.
리첼이 창대를 고쳐잡았을 때, 괴인들이 다시 한번 그녀에게 달려들어 왔다.
위쪽에서 내리찍는 괴인의 공격을 막아내고, 곧바로 오른쪽 사선으로 치고 들어오는 괴인의 공격을 막기 위해 몸을 움직이던 리첼은.
‘어깨가……!’
조금 전 괴인에게 당했던 어깨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든 사선으로 덮쳐오는 괴인의 공격을 막기 위해 창대를 들이댔지만.
우직!
“꺄아악!!”
그녀의 창은 괴인의 공격을 막은 것을 끝으로 부서져 버렸고, 리첼은 그대로 허공으로 날아가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등을 기대게 되었다.
“으…… 윽…….”
어질거리는 머리,
그녀는 순간 스스로가 날려졌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창대를 쥐고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아…… 아…….”
이미 자신의 앞에 다가와 손톱을 들어 올리는 괴인을 보며 저도 모르게 망연한 탄성을 내뱉었다.
‘죽기 싫어……!’
괴인의 손톱을 보며 문득 리첼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하나 괴인의 손톱은 이미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고, 그녀는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떨어져 내리는 괴인의 공격에 눈을 질끈 감았다.
콰직!
‘……?’
살이 파이는 파육음.
하지만 예상했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도 느껴지지 않는 고통에 의아해하며 그녀는 눈을 떴고.
“……무슨?”
괴인의 손톱이 자신의 머리 위에서 멈춰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곧 괴인의 손을 따라간 시선을 통해 리첼은 볼 수 있었다.
녹색 괴인의 온몸에 칼을 박아 넣고 있는 ‘그림자’를.
촤악! 푸아악!
그림자들이 일제히 검을 빼내자 괴인의 몸에서 흘러나온 푸른 피가 사방으로 터져 나간다.
이내 힘없이 쓰러지는 괴인의 뒤로 보이는 풍경에 리첼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곳에는 그림자가 있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열도 아니었다.
100명 정도일까? 아니, 200명?
그녀의 시야가 메케한 연기 사이로 움직이는 그림자들을 보며 그 수를 짐작하려 했지만, 메케한 연기가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그녀의 시야에 잡히는 그림자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갔다.
500 정도? 아니, 1,000?
점점 더 그 숫자가 늘어난다.
녹색으로 점철된 8차선 거리가 순식간에 심연과도 같은 어두움으로 물들어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월한 숫자로 헌터를 학살하던 괴인들이 그보다 더한 숫자를 가지고 있는 그림자에게 죽임을 당하기 시작했다.
괴인의 공격이 그림자 하나를 공격하면 그와 동시에 다른 그림자들이 튀어나와 괴인의 몸을 찌르고, 괴인의 공격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녹색 괴인들 사이에 떨어져 검을 휘두르는 그림자도 보인다.
다른 한쪽에서는 그림자에 잡혀 사지가 찢겨나가는 괴인이, 또 반대쪽에서는 헌터를 죽이려던 괴인의 머리가 그림자에 의해 뜯겨나가는 모습이.
그리고 어느새 8차선 도로를 가득 채운 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점점 더 늘어나는 ‘심연’의 파도를 보며 리첼은 전율했다.
조금 전까지 죽음의 위협을 느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몸을 바르르 떨게 할 정도의 전율이 그녀의 등골을 스쳐 지나갔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숫자의 폭력 앞에서, 무참하게 죽어나가는 괴인들을 보며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문득 녹색 괴인들이 학살당하는 모습을 보며 리첼은 앞에 보이는 장면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압도적인 숫자의 폭력으로 괴수와 몬스터들을 찍어 누르는 장면.
“그림자…… 왕…….”
그녀는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이름을 멍하니 중얼거리며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방적인 폭력을 바라봤다.
* * *
“후,”
에테르 길드에서 나오는 변이체를 처리하고 길드 내에서 얻은 변이체가 있는 길드 목록을 확인한 나는 곧바로 다음 길드를 정리하기 위해 각성을 사용했다.
그리고 곧 내 몸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
내 몸이 마치 슬로우 모션에 걸린 것처럼 느려지고, 그와 동시에 내 앞쪽에 나타난 누군가가 곧바로 내 몸을 차올렸다.
순식간에 바뀌어 LA의 야경을 보는 내 시선.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아 나는 허공에서 날아온 투사체에 맞아 다시 땅 지상으로 추락했다.
곧이어 이어지는 여성의 공격을 막기 위해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쩌저저적!
하나 여성의 공격을 막자마자 얼어붙기 시작하는 팔을 보며 나는 곧바로 거리를 벌렸고.
꽝!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맞아 그대로 벽 한구석에 처박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 나는 곧바로 그림자를 끌어 올리며 자세를 잡았고, 곧 내 앞에 서 있는 헌터들을 볼 수 있었다.
“뭐야, 너희?”
주르륵 늘어져 서 있는 헌터들.
“와, 뭐야? 그렇게 처맞았는데도 안 죽었네?”
“네가 약하니까 그렇지, 병신아.”
“또 또 또, 나랑 싸우면 발릴 거면서 입은 존나게 터네.”
키득키득
하지만 그들은 내 물음에 답하지 않은 채 자기들끼리 욕설 섞인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있었다.
나는 그림자를 온몸에 두르며 눈에 보이는 녀석들을 한 명씩 훑었다.
“과연 ‘그림자 왕’ 혼자서 하이브 사태를 세 번이나 막았다는 건 역시 허황한 소문이 아니었나 보네?”
곧 대단하다는 듯 입을 여는 여자를 보며 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마귀?”
“뭐야, 설마 날 알고 있는 거야?”
내 물음에 그녀가 반응하며 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녀를 시작으로 그녀 뒤쪽에 서 있는 녀석들을 자세히 살펴봤고, 곧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나는 회귀 전에 이 녀석들을 본 적이 있었다.
헌터 킬러.
같은 헌터를 죽이는 것만이 아니더라도 헌터의 능력을 이용해 범죄를 저지르는 녀석들을 통틀어서 헌터 킬러라고 불렀다.
지금 내 앞에 주르륵 서 있는 녀석들은 전부 놀랍게도 이미 ‘헌터 킬러’거나, 머지않은 미래에 전부 ‘헌터 킬러’가 되는 녀석들이었다.
“마귀부터 시작해서 시체 조작이랑 역병 새랑 빙결 악마까지?”
내 말에 마귀의 뒤에 있던 이들이 무척이나 놀랍다는 듯 입을 열었다.
“뭐야? 우리가 그렇게 유명했어?”
“어떻게 나를 알고 있는 거야?”
“캬~ 내가 좀 유명하기는 하지~”
그 이외에 다른 녀석들도 희미하기는 하지만, 회귀 전에 봤었던 기억이 났다.
“쯧…….”
나는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을 보며 짧게 혀를 찼다.
녀석들은 거의 쓰레기라도 불러도 될 정도로 인성이 터져 버린 녀석들이었지만, 그들이 가진 능력과 실력은 진짜였다.
최소 S급, 아마 악마가 수작을 부려놨으니 SS급도 있겠지.
게다가 그 숫자마저도 10명.
아무래도 귀찮아질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를 알고 있다면 너도 잘 알고 있겠네?”
“뭘?”
내 물음에 마귀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긴 뭐야? 네가 이제 곧 우리 손에 죽을 거라는 거지. 게다가 네가 정말 화려하게 날뛰어준 덕분에 우리가 받기로 한 것도 지금 어떻게 될지 몰라서 말이야.”
마귀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나는 마귀를 포함한 헌터 킬러들을 한 번씩 보고는 씩 웃은 뒤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뭐라고?”
“귀 먹었어? 한마디로 그냥 곱게 뒤질 생각은 하지 말라, 이거지.”
마귀의 뒤에 서서 키득거리며 입을 여는 빙결 악마를 보며 말했다.
“너희가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뭐야? 허세 부리는 거야?”
베트남 남부에서 독을 퍼뜨려 대량 학살을 일으켰던 헌터 ‘역병새’가 비웃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확실히 그림자 왕, 당신의 업적은 대단해. 그 괴수들이랑 몬스터가 끊임없이 몰려오는 하이브 사태를 3번이나 단신으로 막아냈으니까.”
마귀는 그렇게 말하곤, 씩 웃음 지으며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는 결국 SS급 헌터잖아? 생각해 보면 결국 하이브 사태를 막은 것도 네 능력의 특성 덕분이 크고 말이야. 안 그래?”
“그래서?”
내 물음에 마귀는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단순하게 SS급 헌터 1명이랑 SS급 헌터 10명이 붙는다고 생각해 봐. 답이 나오지 않아?”
자신의 무기인 낫을 꺼내며 말하는 마귀를 보며 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단순히 숫자로 계산해 봤을 때, 결국 그들에게 있어서 나는 1명의 SS급 헌터일 뿐이니까.
하지만 정말로 유감스럽게도.
푸슉!
“끄아아악!?”
모두가 제대로 인지조차 하지 못한 순간, 핸디드에 있던 아지랑이가 쏘아져 나가 마귀의 뒤에 있던 역병새의 복부에 그림자를 찔러 넣었다.
이윽고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을 내보이는 그들을 보며 나는 말했다.
“내가 평범한 SS급 헌터로 보이냐? 이 존만이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