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나 혼자 10만 대군 063화
18장 좀 맞자 규륜(4)
악마 크세즈베트.
녀석은 당시 생존한 헌터들에게 ‘살아 있는 재앙’으로 불릴 정도로 그 악명이 높았다.
한창 인류가 멸망을 향해 기울고 있었을 때, 그리고 뒤늦게 힘을 합친 인류가 던전 침식을 막기 위해 온 힘을 쏟고 있었을 때, 크세즈베트는 나타났다.
처음 유럽에서 나타난 그 악마는 자신을 ‘크세즈베트’라고 소개했고, 그 뒤로 던전 침식에서 흘러나온 수십만의 몬스터 대군을 이끌고 전 세계를 멸망으로 이끌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모든 헌터들은 그런 크세즈베트를 막지 못했다.
SSS급 헌터들이 크세즈베트의 손에 하나둘 쓰러져 가고, 헌터들이 줄어듦에 따라 더욱더 늘어나는 몬스터들은 인류의 저울추를 한쪽으로 기울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결국, 나는 최후의 최후에서 ‘크세즈베트’를 막는 데 성공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게 끝이었다.
크세즈베트는 막았지만…….
인류 멸망은 막지 못했다.
“네 녀석, 어떻게 회귀한 거지?”
“설마 기억 못 하는 거야?”
……기억이라고?
규륜, 아니, 크세즈베트의 말에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 기억은 그곳에서 끝이었다.
잿빛으로 가득 찬 세상 속에서 눈앞에 있는 악마의 조롱을 들으며 눈을 감은 것, 그것이 내가 회귀 전 마지막 기억이었다.
내 표정에서 무언가 눈치챈 것인지 규륜은 잠시 묘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뭐 사실 지금에 와서 우리가 ‘어떻게’ 회귀했는지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지.”
“…….”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규륜, 아니, 크세즈베트가 나를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중요한 건 그거야.”
키득키득
“나는 다시 한번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해 움직일 거고, 너는 다시 나를 막기 위해 움직일 거라는 것.”
“…….”
“사실 초반에 빨리 너를 죽이고 느긋하게 성장하고 싶었는데, 이 몸뚱어리의 주인이 멍청해서 내가 하는 말은 죽어도 안 듣더라고?”
아쉽다는 듯 입을 여는 크세즈베트를 보며 나는 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내 몸을 타고 흘러나오는 그림자들, 그리고 내 등 뒤에 자리 잡는 검은 아지랑이, 그 모습을 본 크세즈베트가 이죽거리며 무엇인가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나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꽝!
한순간 크세즈베트의 앞에 도달한 나는 곧바로 허리춤에 있던 ‘아스토라의 뿔로 만든 장검’을 휘둘렀다.
크세즈베트는 무척이나 가벼운 움직임으로 내 공격을 피했지만, 내 등 뒤에 있는 아지랑이들은 그때가 기회라는 듯 크세즈베트에게 쏘아져 나갔다.
쾅! 쾅! 쾅!
수십 갈래로 나누어진 그림자 손이 유도탄처럼 그를 쫓아갔다.
크세즈베트는 무척이나 가벼운 몸놀림으로 대부분의 그림자를 피하거나 쳐냈지만…….
“쯧, 역시 인간의 몸은 한계가 명확해서 싫단 말이야.”
그림자에 의해 옆구리가 꿰뚫린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거의 치명상에 가까울 정도로 옆구리가 뜯겼는데도, 크세즈베트는 그저 인상을 찌푸리는 것으로 감상을 마쳤다.
나는 틈을 주지 않고 크세즈베트를 계속해서 공격해 나갔다.
이미 규륜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혀진 이상, 다른 정보를 얻을 필요는 없었다.
규륜의 몸에 들어가 있는 녀석이 나와 같이 회귀한 악마였다고 하면, 전부 이해가 되니까.
“컥!”
그림자 손에 얻어맞은 악마의 몸이 사정없이 허공을 날아 나무에 처박힌다.
우지끈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무가 무너지고, 결국 이전과 같이 그림자 손에 잡힌 채 질질 끌려오는 크세즈베트는 온몸이 기괴하게 뒤틀렸음에도 불구하고, 신음 하나 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쿨럭, 쿨럭. 이래서 나약한 인간은…… 조그마한 상처 하나에 이렇게까지 능력이 떨어지다니, 이 녀석을 키운 보람이 없구만.”
이내 내 앞까지 질질 끌려온 크세즈베트를 보며 나는 망설임 없이 검을 집어 들었다.
“그래, 인정해. 이번에는 네가 이겼어. 원래는 이 녀석 몸으로 이 나라를 아주 개판으로 만들려고 했지만…… 뭐, 아무래도 지금은 그렇게 못하겠네.”
“이후에도 네가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당연하지. 뭐, 당장 내가 이 몸뚱이를 가지고 하려던 일을 할 수는 없겠지만”
규륜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도 알잖아? 네가 네 나름대로 미래를 바꾸는 동안, 나도 내 나름대로 미래를 바꿨지.”
“…….”
“과연 네가 막을 수 있을까? 내가 만들어놓은 미래를? 응?”
촥!
나는 말을 이어가던 규륜의 목을 망설임 없이 베어냈다.
키득거리며 입을 열던 녀석의 목이 허공에 떠오르다 땅으로 추락했다.
웃음을 머금은 채 땅바닥에 떨어지는 얼굴.
하지만 머리와 몸이 분리되었음에도 크세즈베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만간, 다시 보자고.”
그 말을 끝으로 규륜의 머리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후…….”
머리가 복잡했다.
어디부터 정리해야 하지?
처음부터?
“이런 씨발.”
원래 목표였던 규륜을 찾아 그의 실체를 알아내고, 제거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본질적인 부분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나와 같이 회귀한 악마 ‘크세즈베트’
악마가 이미 바꾸어 버린 미래.
회귀 전의 ‘기억’.
기존의 과제를 끝마치자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과제가 생겨났다.
“…….”
멍하니 규륜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악마가 뭔가를 준비해 놨다면.”
악마가 준비해 놓은 그것들을 닥치는 대로 부셔 버리면 되는 일이었다.
“이게 누구야?”
그렇게 생각을 정리해 나가던 중, 들려온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그림자 왕이 여기 있네?”
그곳에는 꼬장꼬장한 느낌이 역력한 진룡이 실핏줄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찢어질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굉장히 다른 모습.
“진룡?”
“아직 기억하고 있군.”
흐흐흐 하는 웃음을 흘리는 진룡을 보다가, 슬쩍 규륜의 시체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악마가 죽기 전 무엇인가를 이용해 진룡을 이곳으로 부른 듯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오히려 더 좋았다.
어차피 이제부터 그 악마와 관련되었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모조리 처리할 예정이었으니까.
나는 망설임 없이 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 * *
‘……위험했군.’
악마 ‘크세즈베트’는 조금 전 자신과 전투를 벌였던 남자를 떠올렸다.
회귀 전, 인류의 멸망을 막기 위해 최후의 최후까지 남아 자신과 전투를 벌였던 SSS급 헌터, 그림자 왕 김우현.
그는 확실히 이대로 간다면 회귀 이전보다 강해질 것이다.
애초부터 헌터로서의 재능이 쥐뿔도 없어서 능력 개화를 시키지는 못했지만, 각종 영약의 복용으로 SS등급까지 올려놓은 규륜의 몸도 김우현에게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장영을 그곳에 보내는 게 맞았어.’
원래라면 규륜의 목숨이 다하는 순간 자신도 마찬가지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하지만 장영을 꾀어내 ‘본신’이 봉인된 던전을 공략하게 한 결과, 지구 전체에 풀리기 시작한 마기 덕분에 영혼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물론 지금 당장 ‘본신’의 봉인을 해제한다면 리스크가 상당하겠지만, 그것은 현재 그 던전을 공략하고 있는 ‘장영’의 몸으로 충당이 가능했다.
‘……과연 네가 전부 막을 수 있을까?’
크세즈베트는 조금 전 자신의 목을 내려치던 김우현의 얼굴을 떠올리며 키득거렸다.
비록 김우현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활동할 수 있는 몸이 죽었다고 해서 자신이 준비해 놨던 ‘트리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만약 ‘트리거’를 전부 없앤다고 해도.
‘그때쯤이면 ‘본신’으로 다시 볼 수 있겠지.’
악마는 씨익 웃으며 김우현을 다시 볼 날을 고대했다.
‘어차피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 세계의 멸망을 막을 수는 없을 거다.’
* * *
“크억…….”
진룡의 몸이 땅바닥에 패대기쳐진 뒤, 그 위로 그림자의 거대한 주먹이 꽂혔다.
까지지직!
지반이 울리며 땅이 움푹하게 패여 들어갔지만, 그림자는 멈추지 않고 땅을 짓눌렀다.
그와 동시에 하늘로 점프한 나는 땅바닥에 꽂혀 있는 진룡에게 검을 휘둘렀다,
촤악! ……카가각!
“이 새끼……! 어디서 쓸만한 물건을 주워 왔구만!?”
진룡은 칼을 막아내 피가 흘러내리는 주먹을 거칠게 휘두르며, 검을 잡아채려 했지만, 그 행동은 그림자에 의해 저지되었다.
바닥에 박힌 채 오른발을 올려 차는 진룡, 나는 그 공격을 피하며 거리를 벌렸다.
그와 동시에 바닥에서 일어나는 진룡의 모습은, 불과 5분 전과는 다르게 완전히 박살 나 있었다.
꼬장꼬장한 머리는 흙먼지가 가득히 붙어 노숙자를 방불케 했고, 그림자에게 패대기쳐지면서 이리저리 부딪힌 탓에 입고 있던 옷은 완전히 걸레짝이 되어버렸다.
무엇보다 조금 전 S급의 칼을 막았던 진룡의 팔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칼이 뼈에 막혀 더 나아가지 못했기에 팔을 잘라내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충분한 타격을 줄 수 있었다는 게 꽤 만족스러웠다.
“흐흐…… 이 개자식,”
진룡은 한 손으로 다친 팔을 붙잡으며, 분노와 웃음이 뒤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광인(狂人)’과도 같은 몰골.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전에는 너를 죽이지 못했지,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야.”
어둠 속에서 장검이 날카로운 예기가 느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하하하, 이 새끼, 네가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네가? 너는 그저 운 좋게 칼로 흠집 한 번 낸 거야. 그뿐이라고.”
“……진짜 미친놈이군.”
아직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아직 자신이 우위에 있는 양 아가리를 터는 진룡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고, 검을 들어 올렸다.
“이제 슬슬 죽어라.”
내 말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진룡이 그 자리에서 도약해 내게로 다가왔다.
굉장히 빠른 속도.
어쩌면 ‘죽음의 거리’에서 보았던 속도보다도 더 빠른 속력으로 내게 도달한 진룡은 허리를 비틀어 내게 주먹을 꽂았고.
콱!
“……!?”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위협적으로 느껴졌던 진룡의 주먹은 이제 그다지 위협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미… 친!?”
검은 아우라가 잔뜩 모인 내 왼손이 규륜의 주먹을 막는다.
한순간 놀란 표정으로 날 보던 진룡은 이내 오른손을 움직여 나를 공격하려 했지만, 오른손마저 그림자 손에게 속박되었다.
굉장한 밀도를 가진 그림자 손은 진룡의 발버둥에도 소멸하지 않았고, 그 상태로 내 몸에서 튀어나온 그림자들이 진룡의 몸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이전이었다면 진룡의 몸을 한 번 붙잡는 것으로도 만족해야 했던 그림자들은 ‘각성’에 ‘집약’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며, 그 강도가 강해졌다.
진룡의 사지가 결박되고, 그림자 손이 미친 듯이 발버둥 치는 진룡의 머리까지 붙잡는 것을 끝으로 나는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콰가가가각……!
“큭큭큭, 그 검으로 나를 죽이겠다고? 어림없는 소리 하지 마라, 내 능력을 완전히 ‘방어’ 쪽으로 돌리면 내 몸을 뚫을 수 있는 건 그 무엇도 없다!”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말하는 진룡,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진짜로?”
내 말에 답하지 않고 진득한 웃음을 짓는 진룡,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럼 실험해 보면 되겠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진룡의 입안에 장검을 쑤셔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