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10만 대군-2화 (2/202)

# 2

나 혼자 10만 대군 002화

1장 숫자의 폭력(2)

잿빛 세상, 하늘은 짙은 회색빛을 띠고 있고, 대지는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것은 잿가루가 흩날리는 언덕뿐.

인간의 문명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형체조차 보이지 않았고, 자연을 구성하는 동식물들도, 심지어는 물이 흘렀던 흔적조차도 찾을 수 없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세계.

그 멸망한 세상의 풍경을, 나는 멍하니 바라봤다.

“킥킥킥킥…… 너는 결국 졌어.”

소리를 향해 시선을 돌리자 눈앞에 있는 ‘악마’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악마의 몸은 이제 절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팔과 다리는 날아가고, 남아 있는 건 반쪽뿐인 얼굴과 기괴하게 뒤틀린 팔 뿐. 그런데도 악마는 웃고 있었다.

슬쩍 시선을 내려 내 몸을 확인했다.

하반신은 이미 저 멀리 날아가 볼품없이 잿빛 바닥에 처박혀 있고, 왼팔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오른팔은 붙어 있긴 한 것 같은데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러던 도중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다시 내 귓가에 울려 퍼졌다.

“멍청하고 우매한 녀석.”

“너는 결국 막지 못했다. 멸망을 막지 못했어!”

“킥킥킥 졌구나, 너는 졌어. 나에게 패배한 거야 이 ‘……’한테.”

그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 보이는 건 누렇게 물든 천장.

슬쩍 상체를 일으켜 보니 2평도 채 되지 않는 원룸이 눈에 들어왔다. 책상에는 구식 노트북이 탈탈거리는 소음을 내며 돌아가고 있었고, 제대로 된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반지하의 퀴퀴한 냄새가 내 후각을 자극했다.

노트북 옆에 있던 스마트폰을 집어 날짜를 확인했다.

[2019 / 06 / 10]

5년 전이다.

“상태창”

중얼거리자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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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우현 칭호: ---

성별: 남

나이: 27

능력: 그림자(shadow) [132]

[능력치]

[종합 평가 수준: F]

[평가 잠재력: 삼류 / 하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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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회귀한 건가……?”

눈앞의 상태창을 닫아버린 나는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2024년에 있던 세계 멸망을 막지 못하고, ‘악마’와 함께 동귀어진했던 나는 다시 과거로 돌아와 있었다.

정확히는 5년 전으로,

“어제까지는 마냥 꿈같았는데.”

3일 전, 처음 과거로 돌아와 멀쩡한 경기도의 야경을 봤을 때는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들이 마냥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제는 외곽 쪽에 있는 농가의 괴수들을 잡으며 슬슬 실감이 나기 시작했고, 오늘에 와서는 완전히 자각했다. 지금 나는 마치 누군가의 판타지 소설처럼 어떤 현상으로 인해 과거로 돌아왔다는걸.

하지만 그런데도 이상한 점이 있었다.

5년 전의 나, ‘김우현’은 말 그대로 하루를 벌어 하루를 사는 녀석이었다. 헌터로서의 능력이 어중간하게 개화되어 어느 길드에도 들어가지 못했고, 4인 권장 괴수를 20명이 넘는 인원으로 잡고 배당금을 타 먹는 신세였다. 한마디로 그냥 일용직 노동자와 비슷했다.

“능력을 그대로 갖추고 돌아오다니.”

능력을 갖추고 돌아왔다. 나를 F급에서 최상위 랭커까지 올려주었던 그 능력이 사라지지 않았다.

어제 과거로 돌아와 처음으로 써본 능력은 물론 하자가 많았다. 능력 대부분이 사라졌고 ‘본질’에 가까운 능력 하나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능력’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아무튼, 진짜 과거로 돌아왔으니…….”

이번에는 막아야 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조금 전 꿈속에서 봤던 내용이 스치듯 흘러갔다.

멸망한 세계, 생명체라고는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사라져버린 세계에서 최후의 싸움을 벌이던 나는 결국 악마와 동귀어진을 하며 죽음을 맞이했다.

“이번에는 막는다.”

어째서 이렇게 허울 좋게 능력까지 주어진 채 과거로 떨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과거로 돌아왔다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멸망을 막는 것!

딱히 이 세계를 지켜야 한다는 대의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살아갈 세계가 멸망하는 걸 뻔히 알고 있음에도 손 놓고 바라볼 정도로 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애초에 멸망한 세계에서 혼자 살아남아 봤자 의미가 없다는 것 정도는, 이미 회귀 전에 뼈저리게 느꼈다.

생명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쩍쩍 갈라진 대지와 태양을 가리던 잿가루들, 멀리서 보이는 잿빛 언덕들.

그 풍경을 다시 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조용히 다짐했다.

“그럼…… 우선 당장 해야 하는 건 능력 보강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위태하게 돌아가는 낡은 노트북 앞에 앉아 검색을 시작했다.

2011년부터 헌터들의 ‘길드’의 개념이 강해지면서 한국에서는 매년 5번, 새롭게 능력을 개화해 헌터가 되기를 희망하는 이들이나 길드에 들어가지 못해 ‘용병’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헌터들에게 ‘튜토리얼 던전’을 열어준다.

그리고 그 튜토리얼 던전에서의 성적을 바탕으로 길드는 헌터를 평가하고 등급을 매겨 길드로의 영입을 제의하기도 한다.

어찌 보면 프로선수들의 계약시장과 비슷한 느낌이기도 했다.

“물론 내가 원하는 건 대형 길드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능력의 강화지만.”

게다가 덤으로 상금도 얻고.

‘튜토리얼 던전’은 높은 성적을 거둔 헌터에게 격려비 차원에서 꽤 많은 양의 상금을 지급한다.

한마디로 튜토리얼 던전은 지금 당장 내가 필요한 것들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우선 밥이나 먹을까.”

헌터 자격증이 있어 별 무리 없이 튜토리얼 던전의 참가신청서를 작성할 수 있었던 나는 어느새 느껴지는 허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집안을 돌아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 실화냐?”

집안에 먹을 게 하나도 없었다.

냉장고는 얼린 얼음이 3조각, 찬장에 혹시 라면이 있을까 해서 찾아봤는데 라면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찾아본 지갑에는 지폐 대신 100원짜리 3개가 나올 뿐이었다.

갑자기 우울한 기분이 들어 힘없이 의자에 앉았을 때쯤, 침대에 던져 놓았던 스마트폰에서 익숙한 채팅 알림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들어 올린 나는,

“아, 오늘이 그날이었나…….”

2년 넘게 사귄 여자친구가 카X오톡으로 보낸 장문의 이별편지를 받게 되었다.

뭔가 묘한 마음에 눌러보니 채팅의 마지막에는 나를 차단한다는 소리를 끝으로 더 이상 대화가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와…….”

슬쩍 올려서 채팅을 보니 대부분의 내용은 ‘돈 없이 미래가 불안해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는 말로 일축할 수 있었다.

분명 회귀하기 이전엔 이 글을 보고 그날 깡 소주를 몇 병이나 들이켜고는 며칠 동안 집안에서 찔찔 짜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녀의 카톡을 보며 나도 모르게 피식 미소를 지었다.

“후회하게 될 텐데.”

예전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녀가 행동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그녀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계산적인지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아마 3일 후 튜토리얼 던전이 끝난 뒤, 그녀는 반드시 나를 차버린 것을 후회할 것임을.

* * *

내 능력은 훈련이나 특별한 수련을 통해 강해지는 게 아니었다.

오직 내 능력을 강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바로 ‘괴수’와 ‘몬스터’를 죽이고, 몸 안에 있는 마정석을 그림자들이 먹어 치우는 것으로 나는 점점 더 많은 그림자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툭 까놓고 말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 자체는 그리 특별하지는 않았다. 그냥 나랑 똑같은 또 다른 나를 만드는 것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내가 만들어 낼 수 '또 다른 나'의 숫자가 100명이 넘어간다면 어떨까?

1,000명이 넘어간다면?

“현재 시각 오후 3시 57분, 4시부터 신규 헌터들은 입장이 가능하니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튜토리얼 던전이 열리는 입구 앞에 서 있던 나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한쪽에는 길드들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한 헌터들이 언뜻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장비들을 입고서 딱 봐도 유명해 보이는 헌터들에게 조언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내가 알고 있던 얼굴들이 보였다.

“신천후와 이연화도 이때 헌터로 데뷔했나?”

대형 3대 길드 중 하나인 신천 길드의 ‘신천후’.

마찬가지로 3대 길드 중 하나인 고구려 길드의 ‘이연화’.

저 둘은 처음 헌터로 데뷔할 때부터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헌터 업계에 입성했다.

튜토리얼 성적은 둘 다 C급 괴수 한 마리를 솔로로 토벌한 것. 그렇게 튜토리얼 던전 때부터 유명해지기 시작한 저 둘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나지 않아 ‘SS’를 붙이게 된다.

한마디로 그들은 미래에서는 엄청난 유명인이었다.

뭐, 유감스럽게도 이번에는 그렇지 않겠지만.

어느새 입장 시간이 60초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헌터들은 슬슬 입구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길드의 지원을 받은 헌터들은 죄다 오른쪽에, 이제 막 능력을 개화한 헌터들은 왼쪽에 모여 하나같이 긴장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차이는 극명하지만, 그들에게도 공통점은 있었다.

조금이라도 높은 성적을 받아서 자신을 최대한 포장하는 게 그들의 목표겠지.

문이 열리기 5초 전, 나는 그들에게 짧게나마 마음속으로 사과했다.

아마 이곳에서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테니까.

“현재 시각 4시, 튜토리얼 던전을 개방하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목소리와 함께, 나는 곧바로 입구의 안쪽으로 들어가 능력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거뭇거뭇한 그림자가 사방을 잠식해 들어갔고, 헌터들이 의문을 느끼기도 전에 내 근처에서 그림자들이 생성된다.

한 명, 두 명…….

형태는 나를 그대로 닮아 있었지만, 온몸은 빛조차도 새지 않을 만큼 검은 그림자들이 점점 늘어난다.

처음에는 5명도 되지 않았던 그림자들이 삽시간에 수를 불려가며 어느새 20체가 가볍게 넘는 숫자가 되었다.

그제야 헌터들이 이상함을 느끼며 각자의 무기를 들었지만, 그림자들은 무기를 쥐고 있는 헌터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점점 물량을 불려 나갔다.

30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이미 튜토리얼 던전으로 가는 길을 막을 정도로 증식한 그림자들은 이내 튜토리얼 안쪽에 나누어져 있는 다섯 갈래 길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압도적인 숫자의 폭력이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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