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홀로 계승자-726화 (에필로그) (726/726)

#726화 - 에필로그

악의 종주가 불러오는 대파멸을 저지한 지 한 달 정도 지난 시점.

“흐흥~.”

태룡사의 산책길을 따라 걸어가는 선녀 옷의 소녀, 아니 여신.

“오늘이라고 했지?”

즐겁게 노랫소리를 흥얼거리던 보살이 품에 안긴 작은 드래곤, 유리아를 향해 묻자.

-삐익.

유리아가 보살의 말에 긍정하듯, 밝은 목소리를 울리며 답했다.

“어쩐지…… 오늘은 뭔가 기분 좋은 느낌이 들었어.”

유리아의 대답에 보살은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산책길을 따라 쭉 내려갔다.

동시에, 대략 한 달 전, 악의 종주와의 대전쟁 이후를 떠올렸다.

천칭과의 협상이 체결된 이후.

-화아아!

황룡과 함께 우주에 나타났던 모든 이들이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처용은 함께 돌아오지 못했으며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다행히 태룡전을 통해 처용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고.

-삑.

그 당시, 처용과 함께 천칭을 만난 유리아가 돌아와 대략적인 상황을 전달해 주었었다.

처용의 협박에 가까운 협상 덕에, 천칭은 더 이상 무한의 순환을 고집하지 않았다.

우주와 세계의 파멸 또한 완전히 끝났다.

가장 큰 문제가 해결되자, 대부분이 일상으로 돌아갔다.

각 성운과 그들을 따르는 길드 역시 일상의 업무를 계속했다.

아직, 던전이 발생하는 사태와 전쟁의 여파가 남아 있었으니까.

또한, 길드들은 WHU를 도와 각 세계의 자잘한 분쟁과 협상 자리에 나서 중재를 도맡고 있었다.

모든 이들이 참혹하고 처절했던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며 서로의 발전을 이끌어 주고 있었다.

동시에, 모두가 속으로 처용이 돌아오기를 바라며 일상을 살아갔다.

그들에게 일상과 미래를 확보해 준 결정적인 인물이 바로 처용이었으니까.

보살 또한 그러한 마음으로 처용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시에.

“…….”

처용이 만들었다고 해도 무방한 도시와 거리의 전경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성운의 성좌, 각기 다른 세계에서 모인 인간과 이종족, 신수, 마지막으로 악마족까지 모인 장소.

태룡사(太龍寺).

이 우주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모여 조화를 이루는 단 하나뿐인 장소였다.

보살이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도시를 즐거운 눈빛으로 구경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태룡사에서 열렬한 인기를 얻는 장소는 많았다.

아직도 헌터들이 몰리고 이젠 세계 각지에서까지 무인들이 모여드는 수련탑.

드워프들이 만든 무구를 맞춤형으로 구할 수 있는 보물전, 아이언 웨펀 트리.

앞서 두 곳보다 다른 세계에서의 방문객이 많은 장소.

지구 세계 각지의 다양한 요리를 취급하는 식당들이 몰린 맛집 거리 등이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위의 장소들보다 더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곳이 있었다.

-탁.

태룡시 거리를 지나쳐 가던 보살이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옆을 바라봤다.

큰 대궐의 입구처럼 보이는 정문과 그 뒤로 나열된 선반들.

그 위에 차곡차곡 진열된 책들의 모습과 기와가 쌓인 탑 형태의 전각이 눈에 보였다.

보살이 잠시 구경하듯 도서전 입구에 들어서자.

[무림맹의 문파와 세가들……]

[에스라 대륙의 국가 관계와 그 중심에 선 아라한 왕국…….]

[태룡시 맛집 투어.]

[효율적인 수련탑 이용 방법.]

.

.

다양한 정보를 취급하는 책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도서전(圖書殿)]

대궐의 입구와 탑 형태의 전각 입구에 걸려 있는 문패의 이름.

이곳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다양한 책을 취급하는 서점.

더 자세히 말하자면, 역사를 기록하고 보관하는 거대한 ‘도서관’이었다.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 선 보살이 흥미로운 눈길로 책들을 둘러볼 때.

-우웅. 스르륵.

보살의 주변 환경이 일렁이더니, 다른 공간의 모습이 드러났다.

마치, 보살만이 다른 장소로 이동된 듯한 광경이었다.

조금 전에 있었던 장소보다도 더 옛것의 느낌이 나는 목재 책장들과 그곳에 나열된 무수한 책들.

과거의 느낌이 물씬 풍겨 오는 장소였다.

보살이 새로운 장소의 중앙에 나타나자.

[구경하러 오신 겁니까?]

-탁.

그런 그녀 앞에 언문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다.

“응, 재밌는 책들이 많아 보여.”

보살이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말석의 대악마 안드로말리우스, 그를 삼천마로 만들기까지 - 레나.]

[무한한 공포의 대악마, 디아블로와 맞서라. – 저자 이진호.]

[드래곤과 절친한 친구가 되는 법 – 장현아.]

[성운의 이름을 짊어지기 위한 마음가짐 – 제시카 로스차일드.]

.

.

보살의 눈에는 익숙한 사람들의 일대기를 기록한 책들과.

[던전의 발생 원리와 우주의 비밀에 대하여.]

[먼 과거, 신계에 벌어진 비극.]

[에스라 대륙을 점거했던 사이비 교단과 악신 아스터.]

[만마전이 되기 전의 판데모니움, 악마들의 세계란?]

.

.

우주의 비밀과 지난 과거, 기나긴 전쟁과 관련된 대한 서책들이 눈에 보였다.

심지어.

[악의 종주, 파멸을 불러오는 자.]

악의 종주에 대한 책까지 있었다.

이처럼 중요하고 무거운 내용을 다룬 책들은.

-헌터 협회 승인자, 혹은 태룡사 도서관장의 승인을 받아야만 대여할 수 있습니다.

자격과 인증을 받은 자만 대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중요 서책들을 관리하는 이가 바로 언어와 문자의 신, 언문.

자신의 성역이라 할 수 있는 도서전에서, 그는 이제 역사를 기록하고 보관하는 도서관장이 되었다.

“책이 많네.”

[신이라고 놀고먹기만 할 순 없지 않습니까?]

책들을 구경하던 보살의 말에 언문이 미소를 지으며 답하고는.

[과거를 기록하는 것 또한 중요하고요.]

-탁.

손에 들고 있던 두꺼운 책의 표지를 보살에게 보여 주며 말을 이었다.

그 책은 다름 아닌.

[세계를 구원한 ‘마지막 계승자’ 한처용.]

처용의 이름이 언급된 역사서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처용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가 기록된 책.

언문이 정성을 다해 집필 중인 중요한 역사서였다.

언문이 아직 정보를 다 모으지 못했고 내용이 워낙 방대하기에, 아직 미완성 상태였다.

[집필이 끝나면 가장 먼저 보여 드리지요.]

“응.”

보살이 언문의 말에 기대감 어린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리고.

“그 책의 주인공을 맞이하러 가야 해서 이만 가 볼게.”

-우웅.

도서전 구경을 마친 보살이 게이트를 열고 사라지자.

[그렇군요? 그 친구가 무사히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허허.]

언문 역시 기대감 어린 미소를 흘리며 답했다.

도서전의 중심부에서 나온 보살의 발걸음이 태룡사의 하단을 향해 나아갔고.

-탓.

이내, 보살은 누군가를 기다리듯 태룡사의 입구 앞에 서서 고요한 하늘을 바라봤다.

그때.

-삑.

유리아가 반가움이 일렁이는 듯한 목소리를 울렸고.

-우우웅.

그와 동시에 보살 앞에 황금빛 게이트가 열렸다.

그곳에서 누군가의 모습이 점점 드러났고.

“보살 님.”

이내, 처용이 보살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다.

“……금방 돌아올 거라고 믿었어.”

-탁.

보살이 처용을 향해 따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반겨 주듯 품에 안겼다.

처용이 자신을 반갑게 맞이해 주는 보살을 마주 안아 주며 미소를 지을 때.

[이렇게 마주하는 건 처음이군. 우주의 순수한…… 아니, 자비의 대신.]

-우웅.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게이트 안에서 누군가가 나타나 목소리를 흘렸다.

새하얀 코트에 작은 신사모를 쓴 노인.

“프로토.”

보살이 노인의 모습을 한 이의 정체를 알아본 듯 말하자.

[정확히 말하자면, 두 번째 프로토…… 아니지, ‘감찰자 시놉(Synop)’이라고 하네.]

처용과 동행하게 된 두 번째 프로토.

천칭에게 ‘감찰자’라는 역할과 ‘시놉(Synop)’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존재가 답했다.

[이렇게 창조되어 발전된 지상을 직접 보니 신기하지만, 우리는 그리 오래 머물 수는 없다네.]

두 번째 프로토, 아니 시놉이 처용을 향해 무언가를 재촉하는 듯한 분위기로 말을 잇자.

“휴가를 받아서 온 건데, 안부를 나누는 며칠의 시간 정도는 이해해 주겠지?”

처용이 진지한 목소리로 시놉에게 되물었다.

여유 시간을 달라는 처용의 물음에.

[물론.]

시놉이 작은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협조적으로 나오는 시놉의 말에 처용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돌아온 거야!?

-드디어!

멀리서 돌아온 자신을 맞이하기 위해 달려오는 이들을 바라보고는.

“……다녀왔습니다. 여러분.”

밝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돌아왔음을 알렸다.

그 미소 안에는 모든 것을 끝내고 평화를 쟁취했다는 만족감.

동시에, 집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새로운 변화에 대한 기대감이 일렁였다.

***

처용이 태룡사에 돌아온 지 이틀 정도 지났을 때.

“역시, 집으로 돌아오니 좋네요.”

왁자지걸한 분위기인 태룡시의 중앙 광장을 둘러본 처용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성지에서 열리는 축제이니만큼, 성지의 주인이 함께 있어야죠.”

옆에 있던 태민이 같은 곳을 바라보며 처용의 말에 답했다.

지금, 태룡시의 중앙 광장은 축제를 준비하듯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괜찮으신 겁니까? 이사님.”

광장을 구경하듯 바라보던 처용이 태민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깔끔한 현대식 정장과 옷깃에서 빛을 내는 금빛의 용머리 배지.

태민의 모습은 태룡사를 책임지는 헌터 협회의 이사이자, 차기 협회장다운 모습이었다.

다만.

“하하,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처용의 질문을 받은 태민이 미소를 짓고는 머리를 쓸며 답했다.

머리를 만지긴 했지만, 그의 머리 위에 머리카락은 없었다.

단 한 치의 모근도 보이지 않는, 태양 빛이 고스란히 비치는 민머리.

신물을 이용해 위험한 권능을 발현한 대가였다.

뛰어난 현대 의학과 헌터들의 스킬, 성좌의 권능으로도 치유가 불가능했지만.

“오히려 이 사찰을 책임지는 책임자처럼 보여서 좋습니다. 하하.”

태민은 오히려 좋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말은 나름 진심이었다.

현재 스스로의 모습을, 본인의 책무를 다했다는 훈장처럼 느끼고 있었으니까.

“다행입니다.”

그런 태민의 말에 처용이 다행이라는 듯 말하고는.

“결혼식이라…….”

분주한 분위기의 중앙 광장, 한껏 꾸며져 있는 전경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이전, 천문과 적무신의 신관인 초하가 꾸몄던 무대 위 스테이지.

그곳에는 하얀 꽃들이 엮인 아치형 장식들과 푸른 무늬가 새겨진 하얀 카펫이 쭉 나열되어 있었다.

처용의 말대로 결혼식 준비가 한창인 중앙 광장의 모습이었다.

게다가 태초신의 성지인 태룡시에서 거창하게 열리는 결혼식이니만큼, 평범한 이들의 결혼식이 아니었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축 결혼.]

[제시카 로스차일드.]

[스티븐 스틸러그.]

올림포스 길드의 길드장인 제시카와 같은 길드의 신관인 스티븐이었다.

이전, 제시카가 카페에서 처용과 만났을 때.

-시기가 시기인지라, 약혼식을 미룰까 하고…….

제시카는 약혼식을 미루려 한다고 말했었다.

중요한 대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한가롭게 약혼을 할 때가 아니라 생각했었으니까.

그러나.

-아니, 그런 이유로 미루는 것만큼은 반대다.

처용은 그런 제시카의 말에 반대했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다고 하여, 축복을 미루지 말라는 의미.

그런 처용의 말에 용기를 얻은 제시카는 지인들만 초대하여 약혼식으로 올렸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 지금, 많은 이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리고 있었다.

고향인 미국이 아닌, 태룡사에서 결혼식을 진행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 장소가 세계 그 어디보다도 ‘상징적’이었기 때문이었으니까.

게다가.

-허락하네. 나 또한 축복을 내리지.

황룡을 비릇한 태룡전의 대신들이 허락까지 해 주었다.

다른 이들도 아니고 항상 처용을 도우며 전쟁에서 앞장섰던 올림포스 성운과 길드.

그런 길드의 두 신관이 맺는 결혼식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보통 순서와 절차가 있는 현대식 결혼식과는 조금 달랐다.

평소 알고 지내며 초대를 받은 지인들과 태룡시에 체류 중인 사람들.

올림포스 길드만이 아닌, 타 길드에서 모여든 헌터들.

각 성운에서 대표로 온 성좌들과 다른 세계에서 온 축하 사절단까지.

모든 이들이 모여 축하 인사와 선물을 전하고 환호해 주는 축제 파티에 가까웠다.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하얗게 꾸며진 결혼식 무대 위 스테이지에 위에 제시카와 스티븐이 올라갔다.

화려하다기보단, 단아하고 고급스러운 백색 디자인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제시카.

금빛 자수가 수놓아진 검은 웨딩 정장을 입은 스티븐.

결혼식의 두 주인공이 무대 위에 서자.

[오늘은, 그대들이 나에게 영광을 바치는 게 아닌, 내가 그대들을 위해 영광과 축복을 내리겠노라.]

아테나가 두 사람 앞에 서서 축복 어린 목소리를 내었다.

두 신관의 주례를 봐주는 이는 다름 아닌 올림포스 성운의 주신, 아테나였다.

성운의 주신이며, 신법의 선택까지 받은 가장 고귀한 성좌.

[별과 우주의 축복 아래, 두 신관이 함께 만들어 가는 미래에 기쁨과 행복을 바라겠다.]

그런 아테나가 축복을 내리며 주례를 마치자, 결혼식의 주인공인 두 사람이 서로 마주하며 입을 맞추었고.

-와아아아!

사람들이 크게 환호하며 결혼식의 주례 절차가 마무리되었다.

비단 사람들만이 아닌.

[하하하!]

[우리가 지상에 내려와 신관의 혼례를 볼 줄이야.]

[앞으로가 참 기대되는군.]

올림포스의 성좌들을 비롯한 각 성운의 신들 역시 축하를 전했다.

처용 역시 사람들과 함께 환호와 기쁨이 넘치는 결혼식 광경을 지켜보며 박수를 쳤다.

그리고.

“왜? 아쉬워?”

어느새 옆에 다가온 루나를 보며 물었다.

결혼식을 지켜보는 그녀의 품에는 작은 드래곤, 유리아가 안겨 있었다.

“전혀, 이렇게 많은 주목을 받는 건 영 달갑지 않아서.”

루나가 그런 처용의 말에 무심한 목소리로 답하고는.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지 않아도-.”

품에 안겨 있는 유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우리만의 인연으로 엮여 있으니까.”

처용이 뒤에 이어질 루나의 말을 알고 있다는 듯 답하자, 루나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는 거야?”

잠시 미소를 보이던 루나가 진지한 목소리로 처용에게 물었다.

“으음…….”

그 말에, 처용이 잠시 침음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언뜻 들으면 의미를 알 수 없는 질문이었지만.

“앞으로 이 우주가, 무엇이 어떻게 바뀌느냐에 따라 달라질 텐데…….”

처용은 루나가 한 질문의 의미를 알고 있다는 듯 읊조렸다.

루나의 질문은 다름 아닌 천칭과의 협상.

앞으로 이 우주가 어떻게 변할 것이며, 자신이 처용을 도울 일은 없는지 묻는 것이었다.

악의 종주와의 전쟁도 끝났기에, 새로운 피의 서약도 끝난 것과 다름없었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든 난 끝까지 서약자와 함께할 거야.”

루나는 언제 무슨 일이 있든, 처용과 끝까지 함께 할 생각이었다.

처용은 루나의 대답에 미소를 짓고는.

“앞으로의 도움이라…….”

주변을 둘러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앞으로 있을 우주의 변화.

그 변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지는 아직 정확하게 판가름할 수 없었으나.

“이전처럼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겠네.”

악의 종주와의 전쟁 때처럼, 처용은 언젠가 주변인들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용이 앞으로의 변화를 생각할 때.

“제시카 언니, 축하해요!”

“축하드립니다.”

연아와 연화를 비롯한 여성들이 제시카에게.

“축하합니다. 스티븐 헌터.”

“이제, 진정한 남자가 되었구만. 하하!”

커맨더와 백호를 비롯한 남자들이 스티븐에게 다가가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동시에, 각자가 준비한 결혼 선물을 건네주기 시작했다.

“짜잔, 이건 언니랑 같이 직접 만든 거, 정원 같은 거 만들 때 중앙에 두면 딱 좋을 거에요.”

연아와 연화가 준 선물은 청록색 별빛을 빛내는 배구공 크기의 푸른 구슬.

주변 일대의 환경을 반 영구적으로 쾌적하게 만들어 주는 레전더리 등급의 아티팩트였다.

그 외에도.

“이건 내 선물.”

아공간을 포함해서, 다양한 기능들이 내장된 시계를 선물한 커맨더.

“두 분의 앞날에 태양의 따듯한 포근함이 가득하길.”

태양의 신력이 내장된 모래가 채워져 은은한 태양열을 내뿜는 모래시계를 선물한 라진.

그 외에도, 각 길드의 대표로 온 길드장들.

커맨더를 비릇한 S급 헌터들.

진호와 백호를 비롯한 최상위 헌터들.

다른 세계를 대표해 온 사절단.

각 성운의 성좌 중 일부까지, 결혼식을 축하한다며 선물을 전했다.

심지어.

“자, 만마전에서도 몇 개 나오지 않는 블랙 로즈 다이아몬드라고.”

예언자, 레나도 결혼식에 참석해 축하 선물을 건네주었다.

그런 그녀의 뒤에는 메르핀과.

“…….”

조용히 뒤를 따르며 침묵하고 있는 젊은 인상의 남성이 보였다.

왼쪽 얼굴에 화염을 상징하는 듯한 검은 문신이 새겨진 라틴아메리카인 남성.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디아블로의 신관, 집행자였다.

항상 쓰고 있던 복면 없이, 맨 얼굴을 드러낸 모습이었다.

처용은 제시카와 스티븐에게 축하 인사와 선물을 건네주는 이들을 잠시 구경하고는.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겠는데.”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인파로 나아가며 말했다.

“내 말이 맞았던 셈이네, 약혼을 하면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둘 다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이야.”

처용이 제시카와 스티븐에게 다가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정말 감사한 조언이었습니다. 모두…… 당신 덕분입니다.”

제시카가 진심 어린 감사의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모두 처용 덕분이라는 감사의 말.

그 말은, 지금 태룡사에서 올리는 결혼식을 비롯한 기쁨 어린 일들 모두.

“이 모든 것이, 세계를 구한 덕분입니다.”

처용이 세계를 구한 덕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제시카의 말에, 주변에 모인 모두가 공감 어린 분위기를 띄었다.

“선물이라…….”

처용은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을 보며 짧게 고민하듯 읊조리고는.

‘인도해라. 관천.’

자기 자신만의 방법으로 선물을 주기로 마음먹으며 권능을 발현했다.

멸천의 신명 속에 깃든 권능 중 하나인 관천(貫天).

한계를 부수고 더 앞으로 나아가게 인도하는 권능이자, 정해진 운명을 비틀고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는 힘이었다.

처용은 이 권능으로 두 사람의 미래에 있을지 모를 불행의 운명을 낮춰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관천의 권능이 발현된 그때.

“음?”

돌연 의문을 표하며 처용이 눈을 가늘게 떴고.

-후우욱!

가늘게 뜬 그의 시야가 잠시 흐려졌다가 선명해지며 눈앞에 환상이 드러났다.

마치, 누군가의 심상 세계에 들어온 듯, 약간 몽롱한 분위기의 환상.

그 환상 속에서는.

-전 포기하지 말라고 배웠어요.

-약속대로 파마의 힘도 능숙하게 다뤄 보였잖아요.

금발에 벽안을 한 어린 여아가 처용을 올려다보며 당돌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마치, 제시카의 어린 시절처럼 보이기도 하는 여아.

그런 어린 아이가.

-정 못 미더우면, ‘멸천’을 구성하는 권능의 일부만이라도 한번 맡겨 주세요.

처용을 향해 멸천의 신명을 언급하며 자신감 어린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런 여아를, 처용이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사아아…….

환상이 사라지며 다시 결혼식장의 광경이 드러났다.

“……이럴 수가.”

처용이 방금 본 환상을 다시 상기하며 황당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하하. 이런 재미있는 운명이 있을 줄이야.’

방금 본 환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처용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관천으로 제시카와 스티븐의 운명을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인도하려다 본 환영.

아니, 미래라고 봐도 무방한 가능성 중 하나였다.

방금 본 환영을 잠시 생각하며 침묵한 처용은.

“……모여라.”

-우웅.

손을 들어 올리며 신력을 집중시켰다.

금빛 별이 반짝이는 검은 신력, 멸천의 힘이 처용의 손아귀에 모이며 작은 구슬들을 형성했고.

-촤라라.

이내, 그 구슬들이 서로 연결된 팔찌, 금빛 별이 반짝이는 검은 염주가 나타났다.

즉석에서 신물에 가까운 아티팩트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지금은 아무 기능이 없는, 그저 처용의 신력이 담겨 반짝이는 염주에 불과했지만.

“나중에, 이 선물이 꼭 필요할 때가 올 거다.”

처용은 언젠가 이 아티팩트를 쓸 곳이 생길 거라며 제시카에게 넘겨주었다.

그런 처용을 마지막으로 결혼 선물 증정식이 모두 끝나자.

-탁. 타탓.

곳곳에 배치된 테이블 위로 온갖 먹음직스러운 요리들이 세팅되었다.

경사스러운 날이니만큼, 모두 태룡시에서 입을 모아 자랑할 만한 식당들의 대표 음식들이었다.

오늘 하루에 한정해서, 모두 무료로 제공되는 요리들.

테이블의 외곽에 비치된 간이 요리대에서는 초대받은 요리사들이 조리하는 과정도 볼 수 있었다.

그중 가장 중앙에 자리한 조리대 위에는.

-차캉! 촤아아!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얀 두건을 머리에 묶은 노인이 거대한 생선을 해체 중이었다.

그는 요시다 무라마사.

야스라의 스승이자, 이전 시노비들을 이끌던 1세대 헌터였다.

지금은, 태룡사의 식당에서 최고라고 평가받는 성지의 대표 쉐프였다.

헌터들도, 다른 세계의 귀빈들도, 성운의 성좌들조차도 인정한 요리 솜씨를 지닌 자.

그런 그가 해체하는 거대한 생선의 정체는 ‘붉금바리’라 불리는 심해 던전의 A급 희귀 몬스터였다.

아주 중요한 날, 혹은 오늘처럼 중요한 행사를 위해 아껴 준 고급 재료를 꺼낸 것.

그런 요시다의 손에서 해체된 빛깔 좋은 생선살이 밥알 위에 얹어지며 초밥이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요시다의 초밥을 먹어 본 이들은 하나같이 조리대를 눈여겨보며 기대감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외에도 태룡사를 대표할 만한 온갖 먹음직스러운 요리들이 테이블 위를 장식했다.

결혼식에 모인 사람들은 테이블 이곳저곳을 오가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제시카와 스티븐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지만.

-이번에 새로운 던전이…….

-무림 세계 북쪽 바다에…….

각지의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이니만큼,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 중 하나.

“생각은 해 봤어? 최고의 대우를 약속할게.”

올림포스에 소속된 신관 중 하나이자, 블레이즈 길드의 길드장, 도로시가 누군가를 향해 부탁하듯 말했다.

“으음…… 곤란한데요.”

그 대상인 현아가 고개를 기울이며 답했다.

고민하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저는 이곳에서 받은 게 많은지라, 태룡사를 완전히 떠날 순 없어요.”

거절하려는 듯한 의사가 강한 목소리였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할 생각은 없어, 그냥 명예직으로 반만 길드에 소속되어서…….”

“으음…….”

설득하려는 듯한 도로시의 말에, 현아가 고민하듯 침음을 흘렸다.

무려 월드 헌터 토너먼트 랭킹 4위.

헌터 중, 유일하게 드래곤과 신수의 계약을 맺은 자.

아라한의 길인 염열(炎熱)의 길을 나아가는 강력한 화염 마법 클래스 헌터.

대부분 화염 마법 클래스 헌터들이 모여 있는 블레이즈 길드의 입장에서, 현아는 탐나는 인재였다.

그리고.

“화톳불 수호자가 헤스티아 님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현아가 자신에게 가호를 내린 성좌의 이명을 읊조리며 말했다.

블레이즈 길드는 올림포스의 대신급 성좌 중 하나인 화로의 여신 헤스티아를 따르는 길드.

현아에게 내려진 가호, 화톳불 수호자가 바로 헤스티아를 상징하는 이명이었다.

그녀를 길드에 반만이라도 끌어들이려는 이유 중 하나였다.

비단 현아만이 이러한 제안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피릿 팀에 소속된 이들 대부분이 각 길드에게 비슷한 제안을 받고 있었다.

그들 모두 타 길드의 헌터들보다도 월등히 강한 이들.

게다가 개 중 일부는 현아처럼 아라한의 길을 찾아 나아가는 이들까지 존재했다.

그렇게 곳곳에서 제안을 받는 스피릿 팀 소속 헌터들의 모습과.

“이젠 내가 여신님보다 강할걸?”

[나는 전투 성좌가 아니야. 이 멍청아!]

이젠, 서로 스스럼없는 대화를 나누는 진호와 티케.

“아직도 망설인단 말이에요?”

“그래도, 어제는 아빠랑 만나서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

[인간들은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하지 않느냐. 조금 더 시간을 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카란디아의 말에 답하는 에블린과 그런 둘에게 조언하듯 말하는 요정 여왕, 티타니아.

인간과 신이 경계 없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들도 보였다.

그 외에도.

“이번 일이 끝나면 전에 약속한 대련을 하지. 쿠루타.”

“화산의 전사는 도전을 피하지 않는다!”

대련을 하자는 천마의 말에 흔쾌히 답하는 쿠루타, 그런 둘을 지켜보는 검성과 루비아의 모습.

“네 녀석.”

“다시 한번 말하는 거지만, 저는 조커 본인이 아닙니다. 제이슨 씨.”

하워드를 향해 분노 어린 목소리를 읊조리는 집행자와 그런 그를 피하듯, 뒤로 물러나는 하워드의 모습이 보였다.

이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처용이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둘러볼 때.

“한처용 헌터, 그 존재는…… 지금 함께 있는 겁니까?”

결혼식에 참석한 신관 중 하나, 성자가 처용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 그렇죠.”

그 말에, 처용이 답해 주었다.

성자가 묻고자 하는 말은 다름 아닌 처용에게 깃든 존재 중 하나.

바로 파멸, 악의 종주에 대한 이야기였다.

처용의 대답이 울리자.

-대리자의 신관인가?

-스스스.

검붉은 신력이 옅은 안개처럼 피어나며 악의 종주, 파멸의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

성자가 악의 종주를 알아보고는 흠칫하며 뒤로 한 발 물러났다.

동시에, 근처 주변에서도 흠칫하는 듯한 반응이 들려왔다.

-소란을 피울 생각은 없다. 난 이제 목적을 잃은 망령에 불과하니…….

악의 종주는 아주 짧게 자신을 드러내고는 이내 말을 마치며 존재감을 감추었다.

“뭐, 그렇다네요?”

처용이 별일 없었다는 듯, 가벼운 목소리로 말하자.

“계속, 그 존재와 함께 하는 겁니까?”

성자가 처용을 향해 궁금한 듯 물었다.

모든 성운의 성좌들을 압도하고 세계를 파멸시킬 수 있는 강력하면서도 위험한 존재.

물론, 성자는 그가 어떤 목적으로 가지고 ‘파멸’을 불러일으켰는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런 거대하고 위험한 존재를 짊어진 처용이 걱정되는 것은 별개였다.

“수라랑 같이 제가 책임질 수밖에…… 진정한 멸망을 저지한 대가라고 치죠.”

처용이 성자의 질문에 작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스스로 계승자인 처용에게 계승되는 것을 선택한 악의 종주.

그의 본래의 목적은, 무한한 계승이었다.

먼 미래에 자격을 지닌 누군가가 무한의 순환을 저지할 수 있도록 정보를 축적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하지만, 처용이 무한의 순환을 저지해 버리는 바람에,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물론, 그 덕분에 악의 종주가 바라던 진정한 목적이 달성된 셈이었다.

그렇기에 처용에게 계승된 악의 종주는 허무하면서도 후련한 심정으로 조용히 침묵하고 있었다.

“파멸을 짊어지고도 그리 편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너니까 가능한 거다.”

그런 처용의 말에 답하듯, 레나가 다가오며 말했고.

“네가 개척한 너만의 운명, 네가 만들어 낸 평화의 결과다. 한처용.”

뒤이어 엘리스가 말을 이으며 마쳤다.

지금의 광경이 처용이 만들어 낸 평화라는 엘리스의 말에.

“맞는 말입니다.”

성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내가 만들어 낸 평화라…….”

처용은 그 말에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고 목소리를 읊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모두 축제를 즐기듯 웃으며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모습.

인간, 이종족, 성좌 나눌 것 없이 모두가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회귀 전, 세계가 차례차례 멸망하고 점점 피폐해져 가기만 했던 사람들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처용에게는 그런 회귀 전 광경과 지금 자신이 변화시킨 광경이 겹쳐 보였다.

이윽고.

-스르륵.

회귀 전, 피폐한 모습의 과거가 처용의 눈에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처용의 입가에서 미소가 피어났다.

아직 평화라는 단어와 분위기가 어색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좋네.”

처용은 그 어색하게 느껴지는 평화를 바라보며 좋다고 말했다.

그때.

“멀리서 볼 때는 긴가민가했었는데…….”

제시카와 스티븐의 결혼을 축하해 주던 보살이 돌연 고개를 기울이며 읊조렸다.

“가까이서 보니까. 확실히 알겠네. 축하를 받아야 할 사람은 ‘세 명’이야.”

보살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마치자.

“……!”

제시카가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고는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움을 표했다.

동시에.

-우웅.

처용에게서 건네받은 결혼 축하 선물.

제시카의 손에 쥐어진, 금색의 별빛이 반짝이는 염주가 짧게 점멸했다.

“하하, 조만간 선물을 하나 더 준비해야겠네.”

그 모습을 본 처용이 축하의 미소를 지으며 읊조리듯 말했다.

처용의 미소 안에는 그동안 짊어졌던 무거운 운명을 내려놓은 듯, 후련함이 일렁이고 있었다.

나 홀로 계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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