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4화
두 번째 프로토가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파아아! 후룩-!
처용과 프로토를 중심으로 펼쳐진 공간이 확 뒤집어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어지럼증을 유발할 정도.
이윽고.
-후우욱! 스륵.
풍차처럼 뒤집히던 공간이 딱 멈추고 새로운 공간이 나타났다.
“여긴?”
처용이 주변을 둘러보며 읊조렸다.
눈앞에 드러난 광경은 별이 반짝거리는 광활한 우주였다.
심지어.
‘지구?’
처용이 뒤를 돌아보자, 눈에 보이는 푸른 행성, 지구의 모습이 보였고.
‘저건 무림, 그리고 저건 에스라 대륙? 저것들은…….’
황색과 녹색이 어우러져 보이는 무림 세계.
지구와 비슷하지만, 백색이 조금 더 많은 에스라 대륙.
‘……판데모니움.’
전체적으로 검고 칙칙한 세계인 판데모니움과 며칠 전에 수복했던 멸망한 세계들.
그 세계들이 이곳저곳에 퍼져 있었다.
각 세계가 서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이곳과의 거리는 어떻게 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사실,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광경부터가 현실 같지 않았다.
행성을, 세계 전체를 이렇게 한 눈으로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마치, 이 우주 전체를 한 눈으로 압축하여 보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때.
“때가 되었다.”
각 세계를 바라보던 처용의 뒤에서 높은 톤의 목소리가 울렸다.
처용의 뒤를 돌아봄과 동시에.
-스르르.
옆에 있던 두 번째 프로토가 멀리 떨어졌다.
정확히는 그와 같은 모습을 한 이들.
아홉 명의 새하얀 실루엣들이 서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가 빈자리를 채웠다.
두 번째 프로토 간 방향은 일렬로 나열된 프로토들의 중앙 부분.
그런 그의 옆, 가장 중앙이 되는 자리에는.
“선택할 시간이다. 계승자.”
-파아아!
다른 프로토들과는 다른 특징을 지닌 프로토.
머리 위에 왕관이 씌워진 듯한 형상의 프로토가 처용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가 남자로도, 여자의 목소리로도 들리는 높은 톤의 목소리로 말하자.
“거절한다.”
처용이 프로토의 말에 즉각 거절한다고 답했다.
그리고.
“네가 ‘첫 번째 프로토’냐?”
가장 중앙에 있는 프로토.
첫 번째 프로토로 의심되는 자를 향해 확인 차 물었다.
처용의 물음에, 가장 중앙에 있는 프로토.
첫 번째 프로토는 답하지 않고.
“계승자가 선택을 거부할 권한은 없다.”
-스륵.
처용을 향해 손을 뻗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강한 압박을 받은 듯, 처용의 인상이 확 일그러졌다.
이 우주 전체가 자신을 속박하고 억누르는 듯한 기분.
처용은 그 기운에 저항하며 이를 악물고는.
“일치단결! 멸천의 화신!”
-우웅! 촤라라!
수라와 일체화를 발동함과 동시에, 멸천의 화신을 소환했다.
금빛의 문양이 새겨진 검은 가면을 쓴 화신이 처용을 감싸며 소환되었고.
“태극천체일도 - 천지멸절!”
금빛의 별이 반짝이는 우주를 형상화한 도신.
태극천체일도를 뽑아 들며 사선으로 강하게 내리쳤다.
-샥! 화아아!
금빛의 선 사이로 검은 선이 그어지며 세상이, 우주가 나뉘는 듯한 광경이 펼쳐지자.
-……타아!
강렬한 충격음과 함께 처용을 옥죄던 알 수 없는 기운이 풀어졌다.
그 순간.
-순환을 거스를 순 없다.
위에서 아래로 강렬한 압박이 느껴지며 무거운 목소리가 울리더니.
-후욱! 쿠화아아!
멸천의 화신으로 변한 처용을 한 손가락으로 가릴 법한 크기의 거인.
순환의 포식자가 처용을 향해 손바닥을 내려치고 있었다.
도저히 현실감으로 와닿지 않는 크기의 거인이 내리치는 공격에.
“순환의 포식자……!”
처용이 휘둥그레진 눈을 부릅뜨며 태극천체일도를 아래에서 위로 올려 베었다.
거대한 거인의 공격을 막아 내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해 보였지만.
“반탄검 – 탄(彈)!”
-스릉. 화아아!
태극천체일도의 칼날이 지나자며 생긴 선이 풍선처럼 부풀었고.
-쿵! 콰아아!
순환의 포식자가 내려치는 손바닥과 강하게 충돌했다.
그 밑에 있던 처용 역시 강렬한 충격을 받았지만.
-탕! 후우욱!
바로 위에 풍선처럼 펼친 신력과 강기 뭉치.
탄성의 힘이 실린 방울이 일그러지며 순환의 포식자가 내지른 공격의 충격을 흡수했고.
-후욱. 타아앙!
일그러지는 방울과 함께, 그 뒤에 있던 처용이 타격당하며 뒤로 크게 밀려났다.
“……망할.”
-촤아악.
밀려나던 자세를 고치고 선 처용이 하늘 위, 순환의 포식자를 노려보며 읊조렸다.
악의 종주와 싸우면서도, 그 누구와 싸우면서도 단 한 번도 부서진 적이 없었던 멸천의 화신.
그런 멸천의 화신이 순환의 포식자에게 공격을 받은 결과.
-쩌적. 후두두……!
갑옷 곳곳이 갈라지고 부서져 내렸다.
충격을 조금이나마 상쇄시켰고 퍼트렸기에, 이 정도 대미지에 그친 것이었다.
아마, 정면으로 맞았으면 멸천의 화신이어도 무사하지 못했으리라 판단했다.
“법칙을 거스르는 것이 놀랍긴 하나, 너 역시 이 우주에 속한 존재, 이 우주를 거스를 순 없다.”
그 모습을 본 첫 번째 프로토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선택해라. 너와 같이 다음 우주를 관리할 열 명을.”
그렇다고 해도, 천칭의 조율자들조차도 거스를 수 없는 절대적인 법칙을 거스르기란 불가능했다.
첫 번째 프로토가 처용에게 다시 한번 선택하라고 말하자.
“선택하면 그들은 멀쩡하게 살려 주기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뭐냐!?”
처용이 갈라진 갑옷 곳곳에 신력을 주입해 복구하며 거칠게 물었다.
선택하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른다.
아마도, 태초의 마수들처럼 최초의 우주를 같이 만들어 갈 이들을 선택하라는 의미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정보가 소각되고 새로운 관리자로 재탄생하게 될 것이다.”
첫 번째 프로토가 처용의 말에 답해주었다.
실상은 처용이 예상한 것과는 많이 달랐다.
“너흰 서로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본능에 따라 행동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우주를 이끌어 갈 계승자가 선택한 이들은, 그 상태 그대로 함께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 역시 무한의 순환을 겪고 산산이 분해된다.
그 과정에서 작은 토대와 흔적만이 남아 새로운 관리자로 재구축되는 것이었다.
“영광인 줄 알도록.”
첫 번째 프로토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지랄!”
처용이 거칠게 소리쳤다.
동시에, 아직 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프로토들과 위협적인 기운을 내뿜는 순환의 포식자를 노려보고는.
‘이봐, 파멸…… 협력해라.’
자신에게 새로 깃든 존재, 악의 종주를 향해 협력을 요청했다.
수라와 일체화하여 멸천의 화신이 되었음에도, 무한의 순환을 거스르기란 불가능했다.
천칭의 조율자들인 프로토와 순환의 포식자들조차 공격할 수 없었다.
시도하지 않고 포기해 버린 것이 아니었다.
처음 순환의 포식자와 맞설 때 느꼈던 묵직한 감각이 그대로 되살아났으니까.
굳이 공격을 당하지 않는 존재에게 무식한 공격을 퍼부으며 힘을 뺄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헌터로서 눈앞의 존재들을 ‘공략’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악의 종주가 처용을 도와줄지는 미지수였지만.
-그러지.
그런 처용의 요구에, 악의 종주는 흔쾌히 돕겠다 답했다.
선 듯 도와주겠다는 말에 처용이 의아함을 품었고.
-어차피, 소용없는 발버둥일 테지만…….
악의 종주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을 이으며 파멸의 힘을 이끌었다.
-우웅. 스스스!
멸천의 화신 위로, 위협적인 파멸의 힘이 더해지며 솟구쳤다.
처용은 생각을 그만두고 전투에 집중하기 위해, 파멸의 힘을 느끼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가장 오랜 시간 맞서 싸운 정적의 힘이었기 때문이었을까?
혹은 악의 종주와 가장 가까운 존재인 수라와 함께했기 때문인가?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이렇게 다루는 것인가.”
처용은 자신에게 흘러넘치는 파멸의 힘을 익숙하게 느끼며 손아귀에 뭉쳤다.
-스스! 촤라라!
멸천의 화신 위로 파멸의 힘이 일렁이며 더욱 날카롭고 두꺼운 갑주가 둘렸다.
동시에.
“천마신공 – 투귀맹진, 개(改)”
-스르륵. 탁!
왼손에 검붉은 오오라가 일렁이는 투창을 형성해 손에 쥐었다.
태극천체일도처럼, 금빛의 별이 빛나는 검은 우주를 창의 형태로 형상화한 것 같은 모습.
“멸룡맹진(滅龍盲進)!”
-투! 콰아앙!
처용이 왼손에 형성된 투창을 있는 힘껏 순환의 포식자를 향해 내던졌다.
포탄처럼 쏘아진 파멸의 투창이 은은한 금빛의 꼬리를 그려 내며 쇄도했다.
이내, 그 크기가 점점 작아지며 멀어진 끝에.
-……쿠콰콰콰-! 콰쾅!!
순환의 포식자에게 닿았는지 강렬한 대폭발을 일으키며 터져 나갔다.
크기가 짐작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머리 전체를 감쌀 정도의 폭발력.
하나의 세계를 단번에 멸망시킬 법한 힘이었다.
아니, 그런 파멸의 힘에 처용이 지닌 힘이 더해져 더욱 강력해진 결과였다.
세계 자체를 파괴하고 쳐부술 수 있는 힘.
하지만, 처용은 그런 압도적인 힘을 발휘했음에도.
“……제길.”
인상을 찌푸리며 침음을 흘렸다.
그리고.
-후욱. 쿠구구!
파멸의 힘이 걷어지며 나타난 순환의 포식자는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처용이 지닌 힘에 파멸까지 더해졌음에도, 천칭의 조율자들을 공격할 수 없는 모습.
-분명히 말했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침음을 흘리는 처용에게 악의 종주가 입을 열었다.
-지금의 너는 네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고.
선 듯 도와주겠다면서도 무심한 모습을 보였던 이유.
자신과 처용, 둘의 힘만으로는 천칭의 조율자들을 공격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웃기지마!”
처용은 그 말에 거칠게 반박했다.
-반항해 봤자 소용없다. 너 역시 ‘초석’에 불과할 뿐이니까.
영겁의 시간이 흐른 끝에, 언젠가는 무한의 순환을 부술 누군가가 나타날 것이다.
다만 그 대상이 처용은 아니다.
악의 종주가 잔혹한 현실을 이야기하자.
“지랄하지 말라니까!”
처용이 인상을 확 찌푸리며 반박하고는.
‘다행히 아무도 없군.’
고개를 휙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처용의 시선이 닿은 곳은 다름 아닌 이 우주에 존재하는 세계들.
멀리 떨어져 보이기도, 작게 축소되어 보이기도 하는 세계들을 눈에 담았다.
그 세계 중 하나를 눈여겨본 처용이 눈빛을 번뜩였다.
바로, 최근 정화에 성공한 세계.
지금은 곧 다가올 파멸에 대비해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이 철수한 세계였다.
단 하나의 생명도 없는 비어 버린 세계.
“멸룡맹진(滅龍盲進)!”
-위이잉! 타아-앙!
처용은 그 세계를 강하게 노려보는 왼손에 파멸의 투창을 형성해 내던졌다.
순환의 포식자를 공격했을 때보다도 더욱 강하게 압축된 힘을 담았다.
이윽고 파멸의 투창이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진 순간.
“잠식해라. 역천!”
처용이 투창에 내재한 파멸의 힘과 멸천의 힘을 폭발시켰고 동시에 역천의 권능을 발동해 널리 퍼트렸다.
-쿵! 쿠콰콰콰-!
그 폭발력에 휩싸인 세계 하나가 조각조각 파괴되며 터져 나갔다.
깨진 구슬처럼 터져 나간 세계의 파편이 흩날리며 우주 곳곳에 흩날렸다.
-……무슨 짓을?
조용히 처용을 지켜보던 악의 종주가 의문과 놀라움을 드러냈다.
단순히 처용이 세계를 파괴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처용은 지금.
“……느껴진다.”
하나의 세계를 파멸시키는 것으로 무언가를 찾는 듯 보였다.
-쿠구구! 쿠궁!
이 우주에 있어서 중요한 일부분인 세계 하나가 완전히 파괴된 탓인지, 공간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처용이 흔들리는 우주를 향해 시선과 감각을 집중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뜨고는.
“……빈틈을 찾았다.”
미소를 지으며 각 세계를 향해 왼손을 뻗어 강하게 쥐었다.
그 결과.
-쿵! 쿠궁!
흔들리던 우주가 잠시 멈추더니.
-스륵. 쿠콰콰!
처용이 강하게 틀어쥔 손아귀를 비틀자, 우주가 더 거칠게 흔들렸다.
마치, 이 우주 전체를 파괴하려는 듯한 모습.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처용은 하나의 세계를 자신의 힘으로 뒤덮어 폭발시키는 것으로.
“네놈들이 ‘병(病)’이나 ‘바이러스(Virus)’라는 개념을 알까?”
이 우주 전체에 불안정한 힘을 퍼트려 오염시켰다.
세계 하나를 희생시킨 이유는, 사람으로 따지면 혈관과도 같은 개념의 통로를 찾기 위해서였다.
이 우주는 정교한 법칙의 힘으로 이루어져 있는 공간.
그 공간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지구를 포함한 각 세계였다.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를 잠식하는 것도 모자라 완전히 파괴한 것.
그로 인해, 이 우주의 법칙이 불안정하게 흔들렸고.
-탁!
처용은 그 불안정한 틈을 노려 자신의 힘을 우주에 넓게 퍼트렸다.
그것도 단순히 자신의 힘만을 퍼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파지직! 파직!
우주를 파괴하는 힘 ‘파멸’의 힘을 가득 담아 퍼트렸다.
처용의 말대로, 이 우주를 병들게 만들 목적이었다.
그 결과.
-쿠우우?
순환의 포식자가 고개를 뒤틀며 침음을 토해 냈고.
“쓸데없는 짓을.”
“반항이 심하군.”
프로토들 역시 불편한 분위기를 드러내며 읊조렸다.
이들의 반응만 봐도, 처용이 전례 없는 변화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게다가.
“태극천체일도 - 천지멸절!”
-스릉. 촤아아!
처용이 태극천체일도를 굳게 쥐고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며 우주를 반으로 갈라 내었다.
황금빛 선이 그어지고 뒤이어 떨어지는 검은 선.
마지막으로.
-쿠구! 촤아아!
강렬한 굉음을 토해 내며 떨어지는 검붉은 선.
파멸의 힘이 담긴 칼날이 마지막으로 그어졌다.
태극천체일도가 그려 내는 칼날에 세 번의 선이 그어진 순간.
-크어?
-촤아. 쩌적.
지금껏, 그 어떤 피해도 받지 않던 순환의 포식자가 괴로움이 일렁이는 듯한 침음을 흘렸다.
동시에, 머리와 가슴 부분에 세로로 옅은 자상이 그어졌다.
공격이 통하지 않는 존재에게 공격을 성공시킨 것.
-……!
그 광경에, 악의 종주가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움을 드러냈다.
-무슨 수로?
“뭐긴, 공격이 통하지 않는 놈들에게 공격이 통하도록 만들었지.”
악의 종주의 말에 처용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직, 자신이 방금 어떻게 정확히 무슨 수를 쓴 것인지 생각으로, 개념으로 잘 정리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제, 시작이다.”
공격이 통하지 않는 천칭의 조율자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것을 해내었으니까.
-확실히…… 네 녀석은 예측할 수 없는 존재다.
악의 종주는 그런 처용이 만들어 낸 결과를 인정하듯 말했다.
자신조차도, 아니 전 우주를 통틀어 처용과 같은 결과를 만들어 낸 이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허나, 안타깝구나. 그런 너조차도 벗어날 수 없을 테니.
그럼에도 악의 종주는 고개를 저었다.
처용이 놀라운 일을 벌였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그나마 다행이군. 너로 인해 기다림의 시간은 더욱 짧아질 것이다.
그나마 처용이 만든 결과 덕분에, 영겁의 시간이 조금 짧아졌다는 말을 읊조렸다.
비관적인 악의 종주의 말에 처용이 반박하듯 인상을 찌푸릴 때.
“더 날뛰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
-스륵.
첫 번째 프로토가 앞으로 나서며 처용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크흐읍!?”
-쿠구!
강렬한 압박감을 느낀 처용이 침을 흘리며 몸이 굳어졌다.
이 우주 전체가 자신을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
심지어, 멸천의 화신을 두르고 파멸의 힘까지 다루고 있음에도.
“크윽!”
도저히 자신을 짓누르는 압박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스스스…….
우주 공간 전체에 넘실거리는 검붉은 기류.
처용이 이 우주를 병들게 만들기 위해 퍼트린 기운이 점점 사그라지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처용이 침음을 흘렸고.
-…….
악의 종주는 안타깝다는 듯, 눈을 감았다.
“선택해라. 너와 함께할 열 명을…….”
처용의 행동을 억제하고 우주를 정화한 첫 번째 프로토가 입을 열었다.
“그 중, 자비의 대신은 선택할 수 없다.”
“……뭐?”
이어지는 프로토의 말.
돌연 보살이 언급되자, 처용이 저도 모르게 의문을 내뱉었다.
“그 순수한 존재는 새로운 우주를 만드는 핵이 되어 재탄생할 것이다.”
첫 번째 프로토는 보살이 이 우주와는 다른 별개의 새로운 우주를 만들기 위한 초석이 될 것이라 말했다.
새로운 우주를 만들 수 있는 초석.
천칭의 조율자들이 보살을 노렸던 궁극적인 이유였다.
“또 다른 완전한 우주의 탄생이라.”
“우주를 확장하는 것은 필요한 일.”
“그 순수한 존재는 우리의 것이다.”
다른 프로토들 역시 목소리를 내었다.
잔잔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작은 기대감이 일렁이는 듯 보였다.
그런 그들의 반응에.
“…….”
처용의 눈빛이 가라앉으며 확 찌푸렸던 인상을 폈다.
좋지 않은 목적으로 보살이 언급될 때마다 격한 반응을 드러냈던 처용답지 않은 모습이지만.
“이 씨발 놈들이 사람 선 넘게 만드네…….”
확 굳어진 처용의 입에서 시릴 정도로 차갑고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잔잔한 목소리 안에는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분노가 아닌.
“내가 이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어, 정말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한이 있더라고 끝장을 보겠다는 마음.
내가 파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곳에 있는 모두를 같이 파멸시키겠다는 잔혹함.
이젠 진짜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냉혹한 심상이 일렁였다.
동시에.
“너무나도 위험하고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 같으니까.”
지금까지 ‘생각’만 하고 실현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던 것을 떠올렸고.
-쿠구구! 스륵.
자신을 구속하는 속박에 저항하며 가까스로 왼손을 들어 올렸다.
힘겹게 들어 올린 손이 처용의 가슴으로 향했고.
-탁! 으드!
심장을 쥐듯, 가슴을 강하게 쥐어 보였다.
“내가 첫 번째 프로토의 권한으로 무작위 열 명을 지목하겠다.”
첫 번째 프로토는 그런 처용의 행동에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처용이 무슨 짓을 하든,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는 듯한 모습.
“무한의 순환을 받아들여라.”
무한의 순환을 받아들이라는 첫 번째 프로토의 말이 이어지자.
[무한의 순환을 시작합니다.]
[10.]
[9.]
.
.
시스템 창이 나타나며 10초를 읽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처용은 망설임이 사라진 눈빛을 차갑게 빛내며 신력을 끌어 올렸다.
멸천의 신력과 파멸의 신력이 처용의 심장을 향해 흘러갔고.
-화아아!
이내 전신으로 퍼지며 강렬하게 타올랐다.
그 순간.
[위험한 선택입니다.]
[당장 그만두십시오.]
[당장 그만-.]
[당장-!]
.
.
-삑. 삐빅! 삑!
처용의 눈앞에 경고를 알리듯, 붉은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지금 하려는 행동을 당장 그만두라는 것.
-무슨 짓을 할 생각이냐?
악의 종주는 그런 처용의 행동에 의문을 품으며 물었고.
-……젠장.
수라는 처용의 생각을 눈치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분노 그 자체인 수라조차도 지금부터 처용이 벌일 행동에 치를 떨고 있었다.
처용은 둘에게 반응에 답하지 않고 계속 경고를 띄우는 시스템 창을 강하게 노려봤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위험한 선택입니다.]
[당장 그만두십시오.]
[당장 그만-!]
.
.
경고를 반복하는 시스템 창에.
“너는 나한테 선택을 강요할 수 없어.”
처용이 답해 주듯 입을 열었다.
“이건 오롯이 내가 만든, ‘나만의 선택’이다.”
마지막 말을 이은 순간.
-우웅! 콰콰쾅!
처용이 자신의 심장과 육체를 두르며 타오르는 힘을 폭발시켰다.
마치, 스스로를 파괴하려는 듯한 모습.
그 결과는 당연하게도.
“크허어억!?”
-파사사사-!
멸천의 화신이 반파됨과 동시에, 처용의 육체가 피를 뿜으며 뒤틀렸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처용이 벌인 짓은 놀랍게도 ‘자해’였다.
“이해할 수 없는 짓을.”
첫 번째 프로토는 그런 처용의 행동에 고개를 기울였고.
“…….”
다른 프로토들보다 처용과의 접점이 있었던 두 번째 프로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침묵했다.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려는 듯한 모습.
이윽고.
[2.]
[1.]
-삑. 삑.
초읽기에 들어간 시스템 창이.
[0.]
-삐-!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마지막 시간을 가리켰다.
“이제, 새로운 우주가 만들어지리라.”
그 모습을 본 첫 번째 프로토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정이 별로 없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귀찮은 일을 드디어 끝냈다는 느낌이 일렁였다.
그러나 그 순간.
[0.]
마지막 시간에 도달한 시스템 창이 잠시 멈추었고.
[-1]
[-2]
.
.
-삑. 삑.
무언가…… 알 수 없는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
그 이변에 첫 번째 프로토가 고개를 기울이며 의아한 모습을 내비쳤고.
“크, 크흐…… 크흐흐!”
만신창이가 된 채, 피를 흘리고 있는 처용의 입에서.
“하하하하!”
광기 가득한 웃음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