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3화
검은 우주가 완전히 무너진 순간.
-피이이!
처용의 시야가 한순간 검게 변하며 어둠 속에 휘감겼다.
태극천체일도에 의해 반으로 갈라진 악의 종주가 터져 나가며 퍼진 파멸의 힘처럼 느껴졌지만.
-스스스!
그 무겁고 강렬한 어둠은, 처용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주변만 맴돌 뿐이었다.
이윽고.
-파아아.
시야가 점점 밝아지며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뭐지?’
처용이 눈을 뜨자마자 의문을 드러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반투명한 형체로 보였으니까.
검은 우주 속에서 반투명한 자신의 모습만 보이는 상황.
잠시 당황한 처용은.
‘……그런가?’
이내, 상황을 파악하며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반쯤 꿈을 꾸는 듯한, 현실이 아닌 듯 느껴지는 감각.
이러한 경험을 전에도 몇 번 한 적이 있었다.
바로, 다른 이들의 심상 세계에 들어섰을 때.
의학의 신과 로키의 심상에 들어섰을 때와, 느낌이 비슷했다.
다만, 전에 심상에 발을 들였을 때는 그들의 마음을 비추는 세계가 드러났었다.
반면에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추정컨대, 현재 처용이 있는 장소.
아니, 이 심상 세계로 짐작되는 곳의 정체는.
‘여긴, 악의 종주의 심상.’
악의 종주가 지닌 심상 세계로 추정되었다.
이곳이 어떤 장소인지 대략 짐작이 되자, 처용은 조금 궁금증이 피어났다.
악의 종주는…… 어떤 심상을 지닌 존재인가?
솔직히 너무나도 궁금했으니까.
그런 처용의 궁금증 어린 속마음에 답하듯.
-스스스.
검은 우주가 점점 밝아지며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안 돼에에!!
처용의 눈앞에 누군가가 손을 앞으로 뻗으며 울부짖는 모습이 보였다.
오른쪽 눈만 드러낸 검은 가면과 이곳저곳이 망가져 전류를 튀기는 기계 슈트.
커맨더의 기갑 슈트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조금 더 투박하고 각진 형태였다.
그런 기갑 슈트의 남자가 간절한 눈빛을 일렁이며 내뻗은 손 앞에는.
-스스스.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새하얀 형상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리고.
-운명을 받아들일 시간이다.
새하얀 실루엣 위에 있는 무언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무언가 있는데……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고 무언가가 있다고만 느껴지는 감각.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말 그대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남자를 향해 말한 것을 끝으로.
-파아아!
빛이 터지는 모습과 함께 모든 것이 멈췄다.
울부짖는 남자의 모습도.
그 앞에 놓은 수많은 사람의 실루엣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도.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멈추었다.
의아한 표정을 지은 처용이 새하얀 실루엣의 사람 앞에 다가가 자세히 살폈다.
“뭐야? 이건…….”
-스륵.
처용이 새하얀 실루엣에 손을 대 보며 읊조렸다.
가까이 다가가 관찰한 결과, 그것들은 새하얀 사람들이 아니었다.
사람이었던 이들, 그들이라는 존재 자체를 뚝 잘라 내 버린 듯 보였다.
마치, 존재 자체를 없애 버린 듯한 느낌.
처용이 그 실루엣들과.
“…….”
그들을 향해 울부짖는 남자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들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뭐지?’
다시 실루엣들을 관찰한 처용이 속으로 다시 의문을 품으며 읊조릴 때.
“이들의 정보는 모두 삭제되고 분해되어 악몽에 버려졌기 때문이다.”
처용의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레 들린 대답에 처용이 고개를 휙 돌리자.
“나 또한 다시 기억해 내고 싶었다. 그들을 떠올리고 싶었다. 허나, 불가능했다.”
-스르륵.
공간의 시간이 멈춘 영향으로 그대로 굳어 있던 울부짖는 남자.
그가 입을 들썩이며 목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문제는 그 목소리의 정체가.
“조크 – 크타니드.”
악의 종주라는 것이었다.
처용이 울부짖던 남자를 강하게 노려보며 그 정체를 입에 담자.
“그들은 내가 나의 의지로 무언가를 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스륵.
주저앉아 울부짖던 남자, 아니 악의 종주가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저 천칭이 내어 주는 ‘운명’대로 휩쓸릴 뿐이었다.”
악의 종주가 ‘운명’이라는 말을 잇자.
“태초신?”
처용은 그 운명이 무엇인지 눈치챈 듯, 물었다.
“……그렇다.”
그런 처용의 짐작 어린 말에, 악의 종주가 긍정했다.
대답을 들은 처용이 인상을 찌푸리며 짧게 생각에 잠겼다.
“……난, 그들이 내게 강제한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 자신을 한 번 더 죽였다.”
악의 종주의 말이 이어졌다.
자신에게 강제한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를 죽였다는 말.
그 말은 즉.
“태초신의 소멸…….”
태초신의 소멸을 의미했다.
처용이 그 뜻을 눈치채며 읊조리듯 답하자.
“천칭이 나를 ‘야드’로 만들었다. 그 상태에서는 그들에게 맞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악의 종주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는 태초신이라는 강제적인 운명을 내려받아 우주의 노예이자, 도구가 되었다.
바로, 무한의 순환이 끝나고 새로 재탄생한 우주를 다스리는 역할, 태초신의 역할이었다.
“나는 타락한 것이 아니다. 야드를 벗어던지고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것이지, 영겁의 시간을 견디면서…….”
이어지는 악의 종주의 말에 처용이 눈살을 찌푸리며 침묵하고는.
“……전대 우주의 계승자?”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었다.
그 말에.
“그래.”
악의 종주가 즉답했다.
지금까지는 태초신이 소멸하고 그 육체에 사악한 것들이 깃들어 악의 종주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 반대였다.
전대 우주의 계승자.
그는 무한의 순환을 거스르지 못하고 소중한 이들을 모두 잃었다.
‘태초신의 운명’을 부여받은 그는 영겁의 시간 동안 강제로 우주를 위해 봉사했다.
그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인내한 끝에, 그는 운명의 족쇄를 끊고 벗어났다.
태초신의 책무에서 벗어난 그는 악의 종주가 되어 무한의 순환을 저지하기 위해, 대파멸을 일으켰다.
이것이…… 악의 종주가 지닌 진실이었다.
“하…….”
진실을 깨달은 처용이 복잡한 심경이 일렁이는 헛숨을 내뱉으며 뭐라 말을 잇지 못하자.
“계승자, 그리고 독립된 나의 조각 중 하나여.”
악의 종주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처용만이 아닌, 처용에게 깃든 수라에게까지 건네는 말.
“이 세상에 절대적인 건 없다는 그 말…… 나는 그 말을 믿는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건 없다.
처용이 종종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자, 파멸의 운명을 이야기하는 악의 종주에게 반박하듯 내뱉었던 말.
악의 종주는 지금껏 겉으로 자신의 심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지만.
“나는 네게 공감하고 있었다.”
그런 처용의 강렬한 심정이 느껴지는 말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내 의지를 공감하고 있었다고?”
처용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묻자.
“나는 그 절대적인 법칙을 부수기 위해 영겁의 시간을 기다려 왔으니까.”
악의 종주가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한의 순환이라는 절대적인 우주의 법칙.
그 법칙을 부수기 위해 영겁의 시간을 노력한 자가 바로 악의 종주였다.
그랬기에, 절대적인 법칙이 얼마나 견고하고 거스를 수 없는지를 잘 알고 있기에.
“너는 여전히 그 절대적인 법칙을 부수기엔 부족하다.”
처용이 그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확신하듯 다시 한번 말했다.
그런 악의 종주의 말에.
“그래서 나보고 포기하라고? 네 녀석처럼 그저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처용이 반박하듯 인상을 강하게 찌푸리며 답했다.
“우주의 노예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렇다면, 그 의지를 꺾지 말고 끝까지 저항해라.”
거칠게 반박하는 처용의 반응에, 악의 종주가 작은 미소가 일렁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야…… 네 녀석이, 나를 ‘계승’할 수 있으니까.”
“……뭐?”
이어지는 악의 종주의 말에 처용이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자신을 계승하라는 알 수 없는 목소리.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묻자.
“네게…… ‘파멸’을, 무한의 순환을 저지할 열쇠의 시작을 계승하겠다.”
악의 종주가 자신의 진짜 계획을 언급했다.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보이지도 않았던, 마지막 계획이자 최후의 계획.
자신의 파멸로 새로운 무한의 순환을 구축하는 데 실패할 경우 마련한 보험.
게다가 악의 종주가 마련한 최후의 계획에 포함되는 ‘핵심’이.
“무한한 계승, 이제 시작에 불과하지만, 너 또한 이것의 초석이 되리라.”
다름 아닌 처용이었다.
악의 종주가 마련한 최후의 수단은 ‘무한한 계승’.
자신을 시작으로, 처용, 이후 나타날 계승자에게 계속 ‘지식’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끊임없이 이어지고 이어지는 ‘계승’을 통해 무한의 순환을 알린다.
그리고 그 의지를 계승 받은 이가 끊임없이 무한의 순환에 맞서 싸운다.
얼마나 더 실패가 반복될지는 알 수 없으나.
“실패라는 정보가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성공할 것이다.”
그 실패가 계속 이어지고 이어지다 보면, 실패라는 토대 위에 올라선 누군가는 성공하리라.
첫 번째 실패의 토대가 되는 자는 바로 악의 종주 자신이었다.
그리고.
“네 녀석 또한 내가 받은 고통을 겪으며 그 초석을 다질 것이다.”
처용 또한 그 실패의 초석이 되리라 확신했다.
악의 종주가 처용에게 안타깝다고 말한 궁극적인 이유였다.
그럼에도.
“허나, 이렇게 우리의 의지가 모이고 모이다 보면-.”
지금 이 순간, 이 우주에서 무한의 순환을 해결할 수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그 무한의 순환이라는 절대적인 법칙이…….”
영겁과 영겁의 시간을 겪고 또 겪은 이후.
“끝을 맞이하리라 믿는다.”
언젠가 그 절대적인 법칙이 무너지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런 희망 어린 마지막 말을 끝으로.
-슈화아아!
악의 종주가 지닌 심상 세계가 일그러지며 처용에게 빨려 들어갔다.
그러자.
“…….”
처용은 자신에게 빨려 들어오는 심상과 감정을 느끼며 침묵했다.
무한의 순환을 겪고 모든 것을 잃은 전대 우주의 계승자.
악의 종주가 느꼈을 상실감과 강제로 노역하며 받았을 고통 등.
그가 무엇을 계획하고 생각했는지 등의 감정들이 전해졌다.
“조크 – 크타니드.”
차오르는 심상을 느끼며 침묵한 처용이 악의 종주가 지닌 이름을 읊조리자.
-난 그 이름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처용의 심상 속으로 흡수된 악의 종주가 목소리를 내었다.
-크타니드는 이 우주가 내게 운명을 강제하며 주었던 이름 중 하나였으니까.
“원래 이름은 뭐냐?”
스스로에게 주어진 이름이 싫다는 그 말에, 처용이 진짜 이름을 물었다.
악의 종주가 전대 우주를 살아가던 계승자였다면, 그 역시 본래의 이름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사라졌다. 무한의 순환과 함께, 나에 대한 모든 것이 소멸되었고 재구축되었으니까.
무한의 순환으로 인해, 전대 우주의 모든 것이 소멸했다.
악의 종주는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이름이 사라졌다.
그렇기에.
-지금의 난 ‘파멸’ 그 자체다.
지금 그에겐, 그가 본래 지녔던 힘이자 신명, 그만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힘.
파멸만이 남아 있었다.
그 근원만큼은 끝까지 지킨 덕분에, 악의 종주는 자신의 목적과 의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너는 내가 겪었던 그 고통의 길을 따라 걸을 터이니, 너 역시 한처용이라는 이름을 잃게 될 것이다.
악의 종주는 이후 처용이 어떠한 운명을 맞이할지 예상된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 말에.
“내 이름이 사라지고 ‘멸천’ 그 자체가 된다. 이 말인가?”
처용이 짐작하듯 묻자.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
악의 종주가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듯한 분위기.
그런 악의 종주의 말에 처용이 인상을 찌푸리고는.
“……두고 봐라, 네 뜻대로는 되지 않을 테니까.”
절대로, 악의 종주가 읊조리는 운명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라며 다짐하듯 말했다.
-그래, 두고 보도록 하겠다…….
그런 처용의 의지와는 무관하게도, 악의 종주는 다음을 기약하듯 감정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슈화아아아!
주변에 펼쳐진 심상이 모두 처용에게 빨려 들어왔다.
그 순간.
“구면이군, 계승자.”
처용 앞에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의 일부분을 도려 낸 듯한 모습의 하얀 실루엣과 중후한 목소리.
“프로토…….”
처용이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의 정체를 읊조리자.
“정확히는 ‘두 번째’ 프로토라네.”
두 번째 프로토가 자신을 소개하며 말을 이었다.
시스템의 영향이 사라진 탓인지, 천칭의 조율자인 프로토의 목소리 역시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 덕분인지.
“솔직히, 나는 이런 방식을 원하지 않았다.”
“……?”
말을 잇는 프로토에게서 무언가 답답한 듯한 심정이 느껴졌다.
그런 프로토의 말에 처용이 인상을 찌푸리고는.
“법칙을 조율한다는 놈들이, 그 법칙을 자기 입맛대로 가지고 노는 건가?”
프로토를 향해 따지듯 물었다.
본래 무한의 순환이 예정된 일자는 지금으로부터 1년 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무한의 순환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처용은 두 번째 프로토가 한 말이 이와 연관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처용의 생각이 맞다는 듯.
“……하아.”
프로토가 탄식에 가까운 침음을 내뱉었다.
천칭의 조율자라 불리는 존재로서 보기 드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첫 번째 프로토’가 순환을 서두르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프로토라고?”
이어지는 두 번째 프로토의 말에, 처용이 의문을 표하자.
“……무한의 순환이 시작되었다.”
두 번째 프로토는 처용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계승자, 네가 선택해야만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탁! 파아아!
손가락을 튕겨 처용을 새로운 공간으로 인도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