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2화
하늘이 사라지고 나타난 검은 우주.
그 안으로 진입한 처용이 악의 종주와 최후의 결전을 펼칠 때.
-쿠구구! 쿵!
악의 종주가 펼친 파멸의 결계.
새하얀 금이 번지며 검은 우주가 무너져 갔다.
그 모습은.
-쿠궁! 쩌저적-!
지상에서 파멸의 괴물들을 막아 내는 이들에게도 선명하게 보였다.
[결국…… 그들이 개입한 것인가?]
태룡사 위에 강림한 황룡이 점점 갈라지는 검은 우주를 올려다보며 읊조렸다.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눈치챈 듯한 모습이었다.
[저건…… 설마?]
[불길한 예감이 틀린 적은 없다지만, 아니기를…….]
미륵과 여래, 각 성운의 주신들 역시 불길함을 느끼며 하늘을 응시했다.
황룡처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 눈치챈 듯한 모습이었다.
전장의 분위기가 돌연 어두워질 때.
[눈앞의 적들에게 집중하라!]
아테나가 전장의 모든 이들이 잘 들리도록, 큰 함성을 내질렀다.
하늘 위, 검은 우주는 신경 쓰지 말고 눈앞의 적들에게 집중하라는 의미.
그녀 역시 검은 우주 너머에서 일어나는 이변을 눈치챘지만.
[우린! 우리가 맡은 바를 다해야 한다!]
지금은, 하늘에 신경 쓰지 않고 눈앞의 적을 쓰러뜨려야 할 때였다.
그것이 전장에 남아 싸우는 이들의 책임이었으니까.
당장은 파멸의 괴물이 되어 날뛰는 이들을 저지하는 게 중요했다.
그리고.
[전장에선 서로를 믿어라. 난 계승자를 믿는다.]
무엇보다도 아테나는 처용을 믿었다.
지금쯤 처용은 홀로 악의 종주와 마주하고 있을 터였다.
현재 검은 우주가 갈라지는 현상은, 처용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용이 홀로 악의 종주와 맞서고 있는 만큼, 성좌로서 지상의 문제를 책임져야만 했다.
아테나가 성좌들을 향해 소리치며 목적을 상기시킬 때.
[신법을 내놓아라! 아테나!]
-스릉!
파멸의 기운에 휩싸여 검은 괴물로 변한 악신.
아레스가 아테나를 향해 돌진하며 칼날을 내질렀다.
그녀의 주변을 지키던 올림포스의 성좌들 대부분은 주변으로 흩어져 다른 괴물들을 상대하고 있는 상황.
그 틈을 노린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런 아레스의 행동을 눈여겨보며 경계하고 있던 이.
[반탄신장 - 강!]
-샥! 후-우욱!
여래가 아테나의 앞에 나타나 아레스를 향해 오른손바닥을 내질렀다.
신력이 압축된 여래의 손바닥과 아레스의 칼날 끝이 서로 충돌한 결과.
[크헉?]
-까강! 타아아!
아레스의 검날 끄트머리가 부러지며 뒤로 튕겨 나갔다.
동시에.
[반탄의 원 – 유룡장(流龍掌).]
-스륵.
여래가 뒤로 한 발 물러나 아테나 곁에 서며 양팔로 태극을 그려 냈다.
푸른 신력이 뭉치며 형성된 용이 여래가 그려 내는 태극을 따라 주변을 배회했고.
-크롸아아! 타탕! 탕!
아테나를 향해 쇄도하는 검은 화살들을 물어 부수고 몸으로 막아 내며 튕겨 내었다.
아레스가 아테나를 노림과 동시에 원거리에서 저격을 가한 이들.
파멸의 힘이 응축된 화살 다발을 쏜 이들은 아르테미스와 아폴론이었다.
그들 역시, 괴물들 사이에서 기척을 숨긴 채, 집요하게 아테나를 노리고 있었다.
파멸의 힘을 받아들이고 이지가 반 이상 사라졌음에도.
[아테나…….]
[넌 신법의 자격이 없다.]
본능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추악한 증오와 질투를 아테나에게 내뿜고 있었다.
[이 하계종이 하찮은 기술로 나를 방해하다니!]
뒤로 나자빠진 아레스가 벌떡 일어나며 자신을 방해한 여래를 향해 소리쳤다.
[내 제자를 이기지도 못하는 주재에, 그 스승인 나를 넘볼 수 있겠는가?]
여래는 차가운 눈빛으로 아레스를 응시하며 답하고는.
[형제의 악연을, 내가 마무리 지어도 되겠습니까? 공정의 여신.]
뒤에 있는 아테나를 향해 물었다.
파멸에 잠식되어 아테나를 향한 증오를 내뿜는 괴물.
그 괴물들은 어찌 되었든, 아테나의 형제들이었으니까.
여래는 나름 아테나를 생각해 예의상 물은 말이었지만.
[저 괴물들은 제 형제가 아닙니다. 조화의 신.]
아테나는 단호하고도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추악한 괴물들은, 이제 조금도 형제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을 넘어서, 그들이 한때 올림포스를 지탱하는 성좌들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치욕스러웠다.
올림포스의 주신인 아테나에게는 성운의 치부나 다름없이 느껴졌다.
그랬기에, 아테나는 배신자들을 향해 조금의 연민도, 감정도 남지 않았다.
그저, 소멸시켜야 할 적에 불과할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아테나가 성운의 치부인 악신들을 맡은 여래에게 감사를 전하자.
[감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 역시 이들에게 유감이 많으니…….]
-우우웅.
여래가 잔잔하고 무거운 신력을 내뿜으며 답했다.
그 잔잔한 목소리 안에는 옅은 증오와 분노 또한 일렁였다.
역천을 버리고 과거의 감정을 정리했다고 하지만, 그와는 별개의 감정이었다.
바로 처용이 전해 준 회귀 전의 기억 때문이었다.
눈앞의 이들이 제 성운인 올림포스에, 신계에, 처용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조아려라. 하계종!]
-쩌저적! 탓!
아레스가 부러진 검을 원래대로 복구하며 다시 여래에게 돌진했다.
[바람과 대지의 조화.]
-스륵. 탓.
여래가 풍운부와 토류부, 바람과 땅의 기운이 응축된 두 장의 자연부를 소환해 쥐고는.
[선법 – 지폭흡인(地暴吸引).]
조화의 권능으로 뭉친 두 속성을 터트리며 아레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이-!]
-후우-욱!
아레스가 다리를 삐끗하며 넘어지고는 그대로 여래를 향해 빨려 들어왔다.
마치, 태풍을 견디지 못해 넘어져 날아가는 듯한 모습.
이윽고.
-콰앙!
여래가 아래스의 목을 잡아채 지면에 처박자.
-후욱! 쩌저저적!
주변의 바위와 흙, 금속들이 아레스에게 모여들며 달라붙었다.
아레스가 주변의 대지를 빨아들이는 자석이 된 듯한 모습.
강력한 인력에 의해 달라붙은 바위와 흙, 철 조각으로 인해 아레스가 구속되자.
-훅. 까가강!
여래는 흙더미 고치가 된 아레스를 앞으로 들어 올려 방패처럼 세웠다.
그 직후.
-피잉! 타다당! 까강!
수십 발의 화살이 여래에게 쇄도하며 그 앞에 있는 흙더미를 강타했다.
흙더미에 길고 날카로운 화살들이 반 이상 박혀 들자.
[케엑!]
그 안에 있는 아레스가 비명을 내질렀다.
[멍청한.]
[방해를…….]
화살을 쏟아 낸 아르테미스와 아폴론이 아레스를 향해 인상을 찌푸리고는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그때, 여래가 화살이 우수수 박힌 아레스를 들어 올리더니.
-투! 콰아앙!
전방을 향해 투창을 던지듯, 힘껏 집어던졌다.
포탄처럼 날아간 아레스가 향한 곳은.
[……!]
아폴론이 숨어 있던 장소였다.
자신의 은폐 실력을 믿고 안심하며 공격만을 준비하다가 방심한 것.
그로 인해.
[크허억!?]
-콰쾅!
아폴론은 흙더미 포탄으로 변한 아레스에게 직격당하며 지면에 처박혔다.
[변환 - 지폭염뢰.]
-탁!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여래가 손가락을 튕기자.
-스르륵. 피이이!
아레스를 구속한 흙더미가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화염이 불타오르더니.
-쿠구! 쿠콰콰콰!
화산이 폭발하듯, 불기둥이 하늘 높게 솟구치며 격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아레스와 아폴론이 불기둥에 휩싸여 사그라짐과 동시에.
[축지 – 섬뢰(閃雷).]
-탓! 파지직!
전신에 전류를 휘감은 여래가 발을 가볍게 박차며 사라졌다.
이윽고.
[……언제?]
불기둥의 열기를 피해 물러난 아르테미스가 바로 눈앞에 나타난 여래를 올려다보며 경악을 드러냈다.
여래는 그런 아르테미스를 차갑게 노려보고는.
[선법 – 천뢰신장(天牢神掌).]
-파직. 파직. 콰아아!
샛노란 벼락이 응축된 손바닥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듯 강하게 뻗었다.
그러자 손바닥에 응축된 강렬한 벼락이 빛을 내뿜으며 폭발을 일으켰다.
뇌전의 폭발이 나선으로 휘몰아치며 반구형의 섬광을 형성했다.
[꺄아아-!]
휘몰아치는 벼락의 폭발 속에 휘말린 아르테미스가 비명을 내질렀다.
여래가 형성한 벼락의 폭발 속에 아르테미스의 육체가 찢겨 나갔고.
-파사사……!
이내, 검은 잿더미가 되며 사그라졌다.
[남의 것을 탐하고 갈취할 줄만 아는 추악한 놈들.]
순식간에 악신 셋을 처치한 여래가 차가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질투와 시기에 눈이 멀어 제 성운과 부모, 형제를 배신한 신들.
스스로 무언가를 성취하려 하지 않고 남의 성취를 질투할 줄만 아는 어리석은 자들.
회귀 전, 악의 종주를 등에 업어 끝까지 비열하고 치졸한 수단을 저지른 이들.
그들은 그저 제 혈통과 악의 종주에게 내려받은 파멸의 힘만을 믿고 설치는 악신들이었기에.
[너희들은 애초에 진짜 선인들의 상대가 안 되는 애송이들이다.]
처음부터 처용과 여래의 상대가 못 되는 이들이었다.
여래는 차가운 목소리로 단언하듯 말하고는 주변에 흩날리는 먼지를 경계하며 바라봤다.
적이 끝장났음에도, 방심하지 않는 모습.
마치, 적이 소멸하지 않았음을 확신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런 여래의 짐작이 맞는 듯.
[이, 하계종이-!]
-탓. 스르릉!
아직도 불타오르는 불기둥 속에서 아레스가 만신창이의 모습으로 튀어나왔다.
육체 곳곳이 부서지고 갈라진 모습.
머리도 반이나 날아가, 마치 깨진 검은 조각상처럼 보였다.
아레스가 온전치 못한 몸으로 악을 내지르며 돌진해 오자.
[반탄신장.]
-후욱. 콰쾅!
여래는 돌진해 오는 아레스에게 눈길도, 고개도 돌리지 않고 손바닥을 강하게 밀어 쳤다.
-쩌저적. 파창!
반탄신장에 얻어맞은 아레스가 바닥에 떨어진 유리잔처럼 깨져 나가며 무너졌다.
이번에야말로 끝장난 듯 보였지만.
-스르륵.
깨져 나간 조각들이 다시 뭉쳐 들더니.
[크아아!]
소멸한 듯 보였던 아레스가 다시 몸을 일으키며 괴성을 내질렀다.
비단 아레스만이 아닌.
-스륵. 스르륵.
검은 가루가 모이며 아르테미스, 아폴론도 다시 원래 모습으로 재생되었다.
[크, 크흐흐! 나는 불멸의 신이다! 하하하!]
아레스가 자신의 불멸을 과신하듯, 입꼬리를 비틀며 광소를 내지르자.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영원히 부서져도 계속 웃을 수 있을지 보겠다.]
-쿠구구!
여래는 지친 기색 하나 없이 강렬한 신력을 내뿜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 순간.
[케헤에엑-!?]
자신감 어린 미소를 짓던 아레스가 돌연 몸을 뒤틀며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악?]
[무슨…… 일이!?]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역시 의문과 고통 어린 비명을 내지르며 주저앉았다.
아니, 비단 그들만이 아닌.
[크에엑?]
[쿠아악!]
파멸의 힘을 뒤집어쓰고 괴물이 되어 버린 악신들 모두가 괴로움을 내질렀다.
그런 그들에게서는.
-치이이……!
불길하게 일렁이는 검은 기운, 악의 종주에게서 하사받은 파멸의 힘이 점점 사그라지고 있었다.
여래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신력을 모으며 대비할 때.
[그자가, 지상에 흩뿌린 파멸의 힘을 모두 거두었다.]
황룡이 하늘 위를 올려다보며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를 이야기했다.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파멸의 힘을 내려 준 악의 종주.
그가 자신이 흩뿌린 파멸의 힘을 다시 거두어 간 것이었다.
그 결과, 지상에서 날뛰는 괴물들이 점점 약해지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파멸에 잠식된 마수들과 악신들, 대악마들은 물론.
-치이이……!
디아블로와 격렬한 싸움을 벌이던 거대한 어둠의 대악마.
이제는 거대한 파멸 자체가 되어 버린 바알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바알은 자신의 힘이 빠져나가며 점점 크기가 작아지고 있음에도.
[크흐흐, 파멸의 염원은…… 이루어지리라.]
괴로움은커녕, 기대감 어린 광소를 읊조렸다.
[실성했구나, 거대한 어둠!]
-스릉. 콰아아!
디아블로가 화염이 휘감긴 차륜 도끼를 무자비하게 후려치며 육체를 부수고 있음에도.
[나는 새로운 우주에서 불멸로 남을 것이다.]
-파사사. 파사. 스르륵.
바알은 디아블로의 공격을 받아 몸이 부수어지고 다시 복구되는 것을 반복하며 읊조렸다.
마치, 현재 상황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승리와 미래를 확신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파멸에 잠식된 바알과 대악마들, 소수의 악신을 제외하고는.
-파사사……!
디파일리스크를 포함한 괴물들은 모두 먼지처럼 사그라졌다.
갑자기 전장의 승기가 잡힌 정도가 아니라, 종전이 난 듯한 모습.
그때.
[……홀로 파멸과 맞설 계승자를 도와주지 않겠나?]
상황을 살피듯 하늘을 지긋이 올려다보던 황룡이 다른 성좌들을 향해 메시지를 전했다.
비단 그가 강림한 지구만이 아닌, 다른 두 세계에도 메시지가 전파되었다.
각 세계에서 분투하던 이들이 황룡의 목소리를 듣고 하늘을 올려다볼 때.
[올림포스는 계승자를 돕는다!]
아테나가 성좌들을 향해 소리치고는.
-슥. 우우웅.
황룡을 향해 신법의 존엄을 겨누며 눈을 감고 신력을 집중했다.
주신인 아테나가 직접 행동을 게시하자.
-우우웅.
-스르륵.
다른 성좌들 역시 황룡을 향해 손을 뻗으며 힘을 보탰다.
남은 잔당을 정리하는 이들을 제외한 모두가, 처용을 돕기 위해 나섰다.
그리고 지구에 있는 이들만이 처용을 돕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각 세계에서 처용이 세운 성지.
지구의 태룡사.
에스라 대륙의 아라한 왕궁.
무림 세계의 천마신교 천산.
태룡전으로부터 뿌리를 내린 각 세계의 성지들로부터, 처용을 돕기 위해 나선 이들이 힘이 모였고.
-스스스.
그 힘들이 황룡을 통해 태룡전으로, 이내 처용을 향해 흘러 들어갔다.
황룡은 성좌들이 전달하는 힘을 모아 정신을 집중하고는.
[이제, 그를 이길 수 있겠느냐?]
-스스스.
태룡전과 연결되어 있는 계승자, 처용을 향해 그 힘을 전달하며 말했다.
그런 황룡의 물음에.
-이미, 이겼습니다.
처용에게서 확신 어린 대답이 들려왔다.
황룡은 그런 처용의 말에 미소를 지었지만.
[허나, 여전히 절대적인 법칙은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내, 미소가 사라지며 침통함이 일렁이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황룡이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읊조린 말은 다름 아닌 무한의 순환이었다.
관리자로서 여전히 우주의 법칙을 거스르리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으니까.
하지만.
[허나, 네 의지와 바람대로, 무한의 순환을 막았으면 좋겠구나.]
황룡은 관리자의 입장과 생각과는 별개의 바램을 읊조렸다.
그때.
“계승자는 해낼 거야. 천찰.”
-탓.
보살이 황룡의 옆에 나타나 강한 믿음이 일렁이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늘 그래 왔으니까.”
-우우웅.
황룡을 향해 손을 뻗고 자비의 신력은 내뿜으며 힘을 보태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