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0화
각 세계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관여하지 않고 곧장 하늘 위, 검은 우주로 몸을 던진 처용.
처용이 각 전장에 개입하면 당장 큰 전력이 되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처용은 각지에서 벌어지는 전쟁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날의 사태에 대비해 그동안 정말 철저하게 준비해 왔었다.
그 철저한 대비 덕분에, 우주가 멸망할 법한 재앙 속에서도 모두 잘 싸우고 있었다.
처용은 그런 사람들을 굳게 믿었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또 이대로 재앙을 계속 방어만 해서는 이 사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현재 벌어지는 재앙을 멈추기 위해서는, 이 재앙을 벌이는 원흉을 없애야만 했다.
바로 악의 종주, 조크 – 크타니드.
이 파멸의 재앙 속에서 처용이 맡은 바는 단 하나.
바로 파멸의 원흉인 악의 종주를 처단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스스스!
검은 우주에서 불어오는 아주 옅은 기류가 처용의 주변을 맴돌며 퍼졌다.
다른 이들의 눈과 감각에는 보이지 않고 오직 처용에게만 보이는 기운.
마치 처용을 안내하는 듯한 기류였다.
처용은 눈에 보이는 그 기운의 흐름을 따라 이동했을 뿐이었다.
검은 우주 속에 있을 존재, 악의 종주가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았으니까.
처용은 그런 악의 종주의 초대에 기꺼이 응한 것이었다.
하늘로 쭉 나아가던 처용이 검은 우주에 가까워지자.
-스르륵.
처용이 검은 우주에 빨려 들어가듯,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검은 우주에 들어선 처용의 시야가 한 순간 암전되었고.
-피이. 피이이.
검붉은 별이 반짝이는 우주 공간이 펼쳐졌다.
그런 검은 우주 사이로 파멸의 힘이 일렁이는 기류가 끊임없이 흘렀다.
처용은 그런 검붉은 우주의 광경을 잠시 눈에 담았고.
“……조크 - 크타니드.”
아내, 파멸의 힘이 넘실거리는 우주 중앙에 있는 존재.
공간 전체에 힘을 보태고 있는 듯 보이는 악의 종주를 차갑게 응시하며 말했다.
그러자.
“……답은 구했느냐?”
악의 종주의 입에서 답을 구했느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현재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뜬금없다고도 할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아니.”
처용은 악의 종주가 던진 질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듯 답했다.
-계승자, 정녕 네 뜻을 관철하고자 한다면, 3년 뒤에 네 답을 듣겠다.
3년 전, 악의 종주가 사라지기 직전에 했었던 말이었다.
무한의 순환을 무슨 수로 저지할 것이냐는 의미였다.
처용은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무수히 고민하고 또 노력했지만.
“아무리 대가리를 굴려 봐도,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았거든.”
무한의 순환을 저지할 방법을 알아내지 못했다.
몇 가지 단서를 잡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도저히 3년이라는 시간 안에 우주의 멸망을 저지할 확실한 방안을 마련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와서, 내게 무슨 답을 따지고 있어?”
처용은 전혀 문제가 없다는 듯,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3년 동안 무한의 순환을 저지할 방법을 찾지는 못했다 해도, 아직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무한의 순환을 저지할 방법을 찾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악의 종주 때문이었다.
그가 불러올 대파멸을 막기 위한 준비도 만만치 않았다.
따지고 보면, 3년 동안 악의 종주가 불러올 파멸을 신경 쓰느라 무한의 순환을 생각할 여유가 부족했다.
악의 종주는 절대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처용은.
“너를 끝장내고 남은 시간 동안, 무슨 수를 쓰든 방법을 찾으면 되니까!”
지금 이곳에서 악의 종주를 끝장내고 남은 시간 동안 무한의 순환에 오롯이 집중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답은 구할 거다. 네놈을 끝장내고 남은 1년 동안-.”
처용의 말이 더 이어지기도 전에.
“그럴 시간은 없을 것이다.”
악의 종주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시간이 없다는 말에, 처용이 인상을 확 찌푸리며 반박하려는 순간.
“지금 당장이라도 계승자인 네 녀석이 답을 구해야만 한다.”
악의 종주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무한의 순환을 해결할 방법이 필요하다는 듯한 분위기.
잔잔한 목소리로 말하는 악의 종주였지만.
‘……경각심? 저 녀석이?’
처용은 그런 목소리 속에 일렁이는 경각심을 느꼈다.
악의 종주가 평소 보일 법한 모습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의아함을 드러낸 처용이 반사적으로 묻자.
“그러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니까.”
이번엔 그 경각심과 위기감을 숨기지 않은 목소리가 악의 종주에게서 흘러나왔다.
지금 당장 무한의 순환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면, 모든 것이 끝장난다.
처용은 악의 종주가 한 말을 다시 되새기고는.
“……1년의 여유 시간이 사라졌군.”
이내, 악의 종주가 왜 경각심을 보이는지 알아챘다.
1년 뒤에 찾아올 무한의 순환.
그 여유 시간이 사라져 버렸다.
번뜩하며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속으로는 그게 아니었음을 바랬지만.
“그렇다.”
악의 종주에게서 제발 아니길 바랐던 상황이 벌어진 듯, 단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처용의 인상이 확 찌푸려졌고.
“나 역시 네 녀석이 답을 찾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고 1년의 여유를 더 둔 것이었다.”
악의 종주가 검은 우주가 펼쳐진 하늘과 공간을 쭉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허나, 소용없게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가 정한 규칙을 수정하고 개입을 시작했으니까.”
다가오는 무한의 순환이 더욱 빨라진 이유.
악의 종주와 처용이 생각했던 1년의 여유 시간이 사라진 이유.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무한의 순환을 관장하는 이들.
‘천칭의 조율자’들 때문이었다.
그들이 조금씩, 이 우주에 개입하여 무한의 순환을 이끌어 오고 있었으니까.
“악몽을 통해 이 우주에 개입하려는 천칭의 조율자들을 저지하고 있었지만, 이젠 한계다…….”
악의 종주는 사라진 3년 동안 최후의 파멸을 준비하며 천칭의 조율자들을 막아 왔었다.
그러나, 이젠 그들을 저지하는 것도 한계.
“이 전쟁이 끝나는 순간, 무한의 순환이 시작될 것이다.”
악의 종주가 검붉은 우주가 펼쳐진 하늘 위를 올려다보며 말하자.
“…….”
처용 역시 위를 올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검붉은 별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우주였지만.
“……!”
처용의 눈과 감각으로는 그 검은 우주 너머에서 강렬한 존재들.
천칭의 조율자로 짐작되는 이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마도, 악의 종주가 펼친 이 파멸의 결계 너머에서 우주의 상황을 지켜보는 듯 보였다.
“……그래서, 여유 시간이 사라졌으니 네 계획에 동참하라고?”
우주 너머의 기척을 느끼던 처용이 악의 종주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냥 다 파멸시키고 새로운 무한의 순환을 만들자고? 내가 정녕 동참할 것 같아!?”
처용이 악의 종주의 말에 반박하듯 소리쳤다.
1년의 시간이 사라져 버린 상황.
이 전쟁이 끝나는 순간, 무한의 순환이 시작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악의 종주가 벌이는 대파멸을 도와 이 우주를 멸망시켜야 한다?
처용은 절대 그럴 수 없었다.
무슨 수단이든 쓸 생각이지만, 악의 종주가 벌이는 짓만큼은 동의할 수 없었다.
“…….”
부정적인 처용의 태도에 악의 종주는 잠시 입을 닫았다.
본래라면, 무한의 순환이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자신의 계획에 동참하라고 말할 법했다.
그러나 악의 종주는 처용을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처용을 설득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처용이 의아함을 드러내며 인상을 찌푸릴 때.
“……네가 날 저지한다 해도, 비참한 운명이 널 기다릴 것이다.”
무언가, 생각을 마친 듯한 분위기를 보인 악의 종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내게 강제되었던 것과 같은 운명을 강요받을 것이다.”
앞으로 처용이 맞이할 비참한 운명을 예고하는 듯, 저주 어린 목소리.
하지만, 보통 대상을 증오하고 조롱하는 저주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끊임없이 고통받고 절규할 것이다.”
처용을 향한 동정과 안타까움이 일렁이고 있었다.
“안타깝구나…….”
그런 진심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웃기지 마!”
-지이잉! 콰아아!
처용이 거칠게 반박하듯 소리치고는 태극천체일도를 소환하며 신력을 내뿜었다.
“단절!”
-스릉! 촤아-!
태극천체일도의 칼날 끝이 하늘 위를 향하고 검은 우주를 가르는 금빛 선을 그려 내며 아래로 내리쳤다.
금빛의 칼날과 함께 처용이 돌진해 오자.
-지잉. 쿠구구!
악의 종주가 파멸의 검을 불러내며 아래에서 위로 올려 쳤다.
-콰쾅! 콰아아-!
멸천의 신력과 파멸의 신력이 맹렬하게 충돌하며 굉음을 자아냈다.
하늘을 멸하는 자와 파멸을 불러오는 자.
멸망을 불러오는 두 존재가 서로를 멸망시키려는 듯, 거칠게 충돌했다.
그때.
“……너는 지금껏 나를 저지하기 위해 들였던 노력의 보답을 받을 것이다.”
-쿵! 차캉! 촤아아!
악의 종주가 파멸의 검을 강하게 밀어 치며 말했다.
“너는 내가 준비한 최후의 수단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가 준비한 최후의 파멸을, 처용이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악의 종주.
뒤로 밀려난 처용은 태극천체일도를 고쳐 쥐며 칼날을 앞으로 세우고는.
“검성류 – 검의 비상, 개(改)!”
-우우웅!
멸천의 신력이 둘린 칼날 끝에 파마의 신력을 응축시켰다.
이윽고.
“섬멸(殲滅)!”
-파아아!
강렬한 황금빛이 타오르는 태극천체일도의 칼날 끝이 악의 종주를 향해 쇄도했다.
금빛 꼬리를 그려 내며 쇄도하는 파마의 칼날에.
-스릉. 타아아-!
악의 종주가 파멸의 검을 사선으로 세우며 막아 내었다.
파마의 힘이 더해진 멸천의 신력과 파멸의 힘이 충돌하자.
“천마신공 – 진파(震破)!”
-탁. 키잉.
처용이 왼손으로 칼자루를 가볍게 두들기며 강기를 퍼트렸다.
칼자루부터 시작해 퍼져 나간 강기가 옅게 울리며 칼등을 타고 나아갔다.
이윽고 칼날 끝, 파마의 신력이 응축된 금빛 칼날에 닿은 순간.
-지이이잉!
파마의 신력으로 형성된 황금빛 칼날 끄트머리가 강렬하게 진동하며 흔들렸다.
지진의 힘이 한 지점에 압축되어 폭발하는 듯한 광경.
한 곳에 힘을 집중시킨 결과.
-……쩌저적!
그 진동의 힘을 견디던 파멸의 검에 점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쩌적! 파창! 차카캉!
금이 가던 파멸의 칼날이 부수어지며 폭발을 일으켰다.
“하아압!”
-스르릉!
처용은 그 폭발력에 힘입어 태극천체일도를 더욱 강하게 내질렀다.
한 곳에 힘을 집중시켜 파멸의 검을 깨뜨리고 악의 종주에게 치명상을 입힐 기회.
하지만, 파멸의 검이 부서졌음에도 악의 종주는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지잉! 타앙!
왼손에 새로운 파멸의 검을 생성하며 앞으로 내질러 오는 태극천체일도의 칼날을 옆으로 밀어 쳐냈다.
신속하게 방어해 낸 듯 보였지만.
-차캉! 촤아아!
태극천체일도의 칼날을 완전히 쳐내지 못하고 오른쪽 어깨 부분에 금빛 자상이 그어졌다.
처용은 공격이 빗나갔음에도.
“결전기 - 태극천체진!”
-우웅. 스르릉!
뒤로 물러서지 않고 열두 개의 무구를 불러내며 공격을 이었다.
허공을 자유자재로 쇄도하는 열두 개의 무구들이 악의 종주를 향해 쇄도하자.
-쩌저적! 까가강!
악의 종주가 파멸의 힘을 모아 형성한 칼날들을 만들어 내며 사방에 퍼트렸다.
태극천체진으로 움직이는 열두 개의 무구들과 파멸의 칼날들이 허공에서 충돌했고.
“검성류 - 단절!”
“…….”
-샤악! 콰아아-!
처용의 태극천체일도와 양손에 파멸의 검을 쥔 악의 종주가 재차 충돌하며 칼날을 맞부딪쳤다.
양손에 파멸의 검을 쥔 악의 종주가 칼날을 교차하며 태극천체일도를 저지한 모습.
“……뭐 하는 거냐?”
악의 종주를 노려본 처용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치, 숨겨 둔 의도를 눈치채고 묻는 듯한 목소리였다.
처용은 파마의 신력을 진동시킬 때, 악의 종주가 쥔 파멸의 검을 비틀어 쳐내려 했었다.
검을 비틀고 칼날을 내질러 빈틈을 만들려는 것.
하지만, 파마의 칼날이 파멸의 검을 비트는 것에 그치지 않고 파괴해 버렸다.
단순히 처용의 힘이 강해져서?
3년 동안 끊임없이 수련한 결과이기에?
처용이 3년의 기간 동안 더욱 강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악의 종주를 힘으로 압도할 순 없다고 생각했다.
처용은 악의 종주가 지닌 힘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모든 성좌를 압도하고도 지친 기색 하나 없는 절대자.
그런 그가 고작 3년을 더 수련한 처용에게 압도당한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생각이냐!”
처용이 악의 종주를 노려보며 소리치자.
“……부족하다.”
악의 종주가 처용의 공격을 받아치며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아직 부족하다.”
처용에게 아직 부족하다고 말하는 알 수 없는 목소리.
그 말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처용이 인상을 찌푸렸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