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2화
운룡전 내부에 신법재판소가 펼쳐지며 은은한 금빛이 일렁였고.
-화아아!
그 위로, 태양신 라가 순혈 의회를 펼쳤다.
금빛의 아우라 위로, 은빛과 푸른빛이 함께 섞여 일렁이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현상에 모두가 잠시 멍한 분위기를 드러냈고.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순혈 의회라고 했어. 분명히……!”
조금 전, 라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경악하기 시작했다.
점점 소란스러워지는 분위기 속에.
[태양신이 순혈자들의 수장이었다고!?]
[배신자였단 말인가?]
성좌들 역시 경악하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순혈자들이라 함은, 악의 종주에게 충성하는 성좌들의 비밀 집단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들이 얼마나 위험한 이들인지, 지금껏 무슨 일들을 벌였는지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같은 편이라고 굳게 믿었던 태양신이 순혈자들을 이끄는 자였다?
쉽게 믿기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순혈자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소수의 몇몇.
‘이게 무슨 말인가?’
‘내가 알기로 순혈 의장은…….’
검성과 무록이 서로를 눈짓하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분위기를 보였다.
루비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모두 처용을 통해 회귀 전 기억을 어느 정도 되찾은 이들.
그들이 기억하는 과거에선, 순혈 의장은 태양신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대부분 혼란스러움을 드러내고.
[이게 어떻게 된 것인가? 태양신!]
[그대가 정녕 배신자들의 배후인가?]
성좌들 역시 혼란과 경악을 드러내며 소리쳤다.
그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순혈 의장은 옥황상제였습니다.”
처용이 낮고 강한 목소리로 입을 열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런 처용의 목소리에.
[순혈 의장이 옥황상제였다고?]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성좌들과 사람들이 다시금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보였다.
동시에, 현재 상황에 의문을 품었다.
순혈자들의 배후이자 그들의 수장인 순혈 의장이 태양신으로 드러난 상황.
그럼에도, 처용이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 의아했다.
처용은 언제나 순혈자들, 배신자들에게 엄청난 적대감을 드러냈었으니까.
그런 처용이.
“혼란스러운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순혈 의회에 대해 명확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어서요.”
현재 상황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듯, 침착한 모습을 보이며 말했다.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조금씩 가라앉는 듯 보이자, 처용이 아테나를 응시했고.
[신법재판장의 권한으로 그대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
-탁. 스륵.
그런 처용의 시선을 받은 아테나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라를 향해 신법의 존엄을 겨누었다.
신법재판소의 주인이 라에게 진실만을 말할 것을 요구하자.
[신법의 신명 앞에 오롯이 진실만을 말하지요.]
라가 침착한 목소리로 진실만을 말할 것을 선언했다.
지금부터, 라는 신법재판장인 아테나의 말에 진실만을 답해야 했다.
거짓을 말하면 이전 천교의 이랑진군, 아니 흉수악신처럼 바로 들통나는 상황이었다.
[그대가 순혈자들을 이끄는 자가 맞습니까?]
아테나가 라에게 질문하자.
[태초신께서 ‘두 번째’ 순혈 의회 의장으로 임명한 자가, 바로 나입니다.]
라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
그 말에.
[……두 번째라고?]
[순혈자들의 수장도 신법재판장처럼 태초신의 임명을 받는 건가?]
다시금 성좌들에게서 소란이 일렁였다.
[첫 번째 순혈 의장은 누구입니까?]
이어지는 아테나의 질문에 소란이 멎었고 모두가 다시 라를 바라봤다.
그러자.
[이자나기 성운의 전 주신입니다.]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연 라가, 최초의 순혈 의장이 누구인지 밝혔고.
[……뭐, 뭐라고!?]
-쿵!
스사노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경악을 드러냈다.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으니까.
비단 스사노오만이 아닌.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 비밀이…….]
츠쿠요미 등 이자나기 성운의 성좌 모두가 당황스러운 분위기를 보였다.
이자나기 성운에 소속된 성좌들조차도 몰랐던 진실.
당연히, 다른 성운의 성좌들도 알 리가 없는 사실이었다.
물론.
“…….”
침착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처용과 여래를 포함한 소수.
라를 통해 미리 진실을 전해 들었던 이들은 제외였다.
[크흠, 순혈 의회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태양신.]
아테나가 목을 가다듬듯, 침음을 한 번 흘리고는 라에게 물었다.
그러자 소란이 일렁였던 회담장 내부가 잠잠해졌고.
[본래 순혈 의회가 가진 진정한 목적은 신법재판소의 견제입니다.]
라가 아테나의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다.
순혈자란 무엇인지, 순혈 의회가 어떤 목적으로 설립되었는지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나, 초대 순혈 의장이 초대 신법재판장과 손을 잡고 타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부터, 어느 시점부터 순혈 의회가 타락하기 시작했는지를 이야기했다.
라의 입에서 흘러나온 진실은 다름 아닌 수천 년 전에 있었던 일.
[그들이 노렸던 것은 자비의 대신과…… 미래의 가능성이 풍부했던 한 세계였습니다.]
복수심을 불태운 여래가 혈선이 되어 신계를 피바람으로 휩쓸어 버렸던 사건.
신계가 멸망 직전까지 도래했었던 그 대사건의 원흉과 관련된 진실이었다.
그 숨겨진 내막과 진실이 라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자, 성좌들 모두가 입을 벌린 채 경악을 드러냈다.
이전 세계 헌터 회의에서 처용이 한 폭로로 인해, 조금은 밝혀졌었지만.
[고귀한 임무를 받은 자가 어찌 그리 어리석은 짓을-.]
[……이해할 수 없다.]
더 깊고 어두운, 자세한 내막을 듣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진실을 듣는 성좌들 모두가 하나같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태초신에게 선택받은 가장 고귀했던 성좌들의 타락이 충격이었으니까.
[뭔가 작당한 느낌이 들긴 했었는데…… 그랬었구만.]
그 당시의 일과 연관이 있는 대신 중 하나, 제우스가 한숨을 내쉬며 읊조렸고.
[이건…… 변명할 여지가 없다……!]
이자나기 성운의 임시 주신 자리를 맡은 성좌, 스사노오가 어두운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이미 소멸해 버린 당사자들을 탓해 봐야 소용없지요. 우리 모두…… 그 일에 가담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진실을 이야기한 라 역시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장 드높았던 성좌들의 추악한 타락은 오롯이 그들만의 잘못이라 볼 수 없다.
그들의 명령을 이행하고 동조했던 성좌들 모두의 잘못이다.
그런 라의 말에.
[과거의 잘못된 방식을 계속 세습해 온 우리도…… 반성해야 한다.]
토르가 공감한다는 듯 말하고는 왼쪽 어깨에 걸쳐진 검녹색의 망토를 쥐었다.
그가 걸치고 있는 망토는 다름 아닌, 로키의 유품이었다.
성운을 배신하고, 토르를 위해 한 번 더 배신을 저지른 순혈자.
[신계의 피바람도, 로키도…… 다 우리가 어리석었기에 일어난 일이니까.]
토르가 그런 로키를 생각하며 자책 어린 목소리로 읊조렸다.
라에게 진실을 물었던 새로운 신법재판장, 아테나 역시 참담한 심정이었다.
순혈 의회에 대한 진실을 밝힐 것이라는 말은 처용에게 미리 전해 들었지만.
‘이런 내막이 있었을 줄은…….’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었다.
아테나가 참담한 심정을 억누르듯 눈을 한번 감으며 인상을 찌푸리고는.
[후, 그럼 어떻게 의장 자리를 되찾은 겁니까?]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라를 향해 물었다.
라는 악의 종주를 따르는 것을 거부했기에, 순혈 의장 자리에서 퇴출당했다.
그 뒤에 순혈 의장이 된 이가 바로 옥황상제.
악의 종주를 열혈이 찬양하고 신봉하던 타락한 악신이었다.
그런 옥황상제에게서 라는 어떻게 순혈 의장 자리를 되찾은 것인가?
[계승자 덕분이지요.]
라가 처용을 바라보며 답하자.
“멸천의 심판으로 옥황상제가 강탈한 권한을 몰수하고 본래 자격을 지닌 태양신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처용이 자신의 권능을 언급하며 말을 이었다.
멸천의 심판.
무려 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몰수하는 전대미문의 권능이었다.
신을 심판하는 절대적인 권능처럼 보였지만, 주어진 의무를 저버리고 타락한 신들에게만 쓸 수 있었다.
처용은 이 멸천의 심판으로 옥황상제가 지닌 순혈 의장의 권한을 몰수해 라에게 돌려준 것이었다.
“제가 마티엘의 자리였던 순혈자 Ⅸ의 자리에 앉았었습니다. 정확히는 의회에 ‘잠입’한 거였지만.”
[그 덕에, 저승을 점거하던 순혈 의회 일원 둘을 속여, 손쉽게 잡아낼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증언하는 처용의 말에 라가 말을 이었다.
그동안, 다른 이들은 알지 못했던 정황을 모두 이야기한 라는.
[마지막으로-.]
운룡전 내부에 모인 성좌들을 쭉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이 자리에 내가 모르는 순혈자들이 있을 겁니다.]
그녀가 바라보며 지목한 불특정 다수는 다름 아닌, 이 자리에 있을지 모르는 순혈자들이었다.
[순혈자는 성운의 스파이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 성운을 위해 암약하는 이들입니다.]
순혈 의회는 악의 종주에게 충성하는 성운의 스파이 조직이 아니다.
고귀한 자로 선택받은 그들의 역할은 성운을 위해, 더 나아가 세계를 위해 이름 없이 활약하는 자들이다.
이제, 다시 옛 고귀함을 되찾고 본래의 의무를 다할 때였다.
그리고.
[순혈자들의 은밀성은 유지될 겁니다.]
순혈자들의 은밀성은 그대로 두되.
[하지만, 앞으로도 순혈 의장의 정체만은 공개될 것입니다.]
그들을 대표하는 순혈 의장만은 외부에 그 정체가 알려진다고 말했다.
신법재판소를 견제할 순혈자들의 의견을 모아 전하는 대표자의 역할이었다.
[우리에게 신법재판소가 되돌아온 것처럼, 순혈 의회 역시 옛 고귀한 모습으로 되돌아오리라 믿습니다.]
차세대의 성좌들이 노력하여 신법을 되찾은 것처럼, 순혈 의회 역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이것이, 다시 순혈 의장이 된 라가 선언한 순혈 의회의 방침이었다.
“당분간은 제가 Ⅸ의 자리를 유지하면서 도울 생각입니다.”
[고맙구나.]
처용이 순혈 의장인 라를 지지하듯 말하자, 라가 감사를 전하듯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리고.
[신법재판소의 독재를 막고 견제할 수 있는 조직이면, 필요합니다.]
아테나 역시, 라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한 의견을 표했다.
그녀는 이제 신법의 주인이 된 신법재판장.
그런 그녀가 자신을 견제할 수 있는 조직의 재건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얼핏 들으면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지만.
[신법의 판결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니까요.]
아테나는 신법재판소가 유일무이한 권력을 가지는 것을 경계했다.
과거에 벌어졌던 전례를 반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그녀는 스스로가 지닌 권력에 대한 미련이나 욕망 없이, 진심으로 공정(公正)한 생각을 한 것이었다.
그런 아테나의 심정을 파악한 처용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순혈 의회에 대한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이제 3년 뒤에 찾아올 파멸에 대한 대비책 중 하나를 말해 보려 합니다.”
처용이 앞으로 있을 일들을 생각하고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전쟁 중에 많은 희생이 있었습니다. 사람도…… 성운의 성좌도.”
지금껏 벌어진 전쟁 속에서 일어난 피해를 언급하자, 잠시 어두운 분위기가 일렁였다.
피해 없는 전쟁이란 있을 수 없고 지금껏 많은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막대한 피해를 입은 성운도 있었습니다. 성운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말이죠.”
가장 막대한 피해를 입은 이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성역과 터전을 잃은 헬리오폴리스.
그런 그들보다도 더욱 막대한 피해를 입은 아스가르드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막막한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다.]
토르가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했다.
로키가 토르에게 주신의 권한을 돌려주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성운을 재건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특히 아스가르드 소속의 성좌들이 대다수 소멸한 것이 컸다.
남아 있는 이들이라곤, 헤임달과 티르를 포함한 소수에 불과했으니까.
토르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성운에 인력을 보충할 방법이 있습니다.”
작은 미소를 지은 처용이 토르를 향해 말했다.
소멸한 성좌들의 빈자리를 보충할 방법이 있다는 말에.
[어떻게 말인가? 아스가르드를 지탱할 성좌 후보가 있는가?]
토르가 의문을 표하며 물었다.
성운을 지탱할 성좌는 되고 싶다고 하여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신계인이 오랜 시간 수행하여 신력을 쌓고 성운에게 인정받아 그곳에 소속되면 하위 성좌가 될 수 있었다.
혹은, 신격을 지닌 이의 피를 물려받은 자식이 태어나면, 그 또한 성좌 후보였다.
아테나나 토르처럼, 차세대 성좌들이 이에 속하는 경우였다.
토르는 살아남은 아스가르드의 신병들과 발키리 중 능력 있는 몇몇을 선별해 성좌로 양성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말고도 성좌가 될 후보가 더 있다?
그런 궁금증이 일렁이는 토르의 말에.
“바로 옆에 있지 않습니까?”
처용이 토르의 옆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러자, 토르를 포함한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여들었고.
“……저, 저를 말하는 겁니까?”
이내, 토르의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자, 처용이 가리킨 성좌 후보.
토르의 신관인 루이스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흘렸다.
“자신만의 길, 찾았죠?”
처용은 당황하는 루이스를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뜬금없이 길을 찾았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물음이었지만.
“……그렇습니다.”
루이스는 처용이 한 말의 뜻을 알아들었다는 듯,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자신감이 일렁이는 루이스의 대답에, 처용이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인간 또한 성좌가 될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계획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