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0화
처용이 디아블로와 결판을 지은 지 이틀이 지난 시점.
“어휴, 서두른 덕분에 빨리 끝났네.”
-툭.
깔끔하고 하얀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설녀들의 작은 카페, 빙설(氷雪).
중앙 테이블에 배치된 의자에 앉은 엘리스가 후련한 한숨을 내쉬자.
“그러게, 생각보다 빨리 마무리됐어.”
그런 엘리스의 맞은편에 앉은 처용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디아블로가 별다른 저항이 없던 게 이상했지만, 뭐…… 잘 해결됐으니 상관없지.”
“이제 끌어들일 만한 악마들은 다 끌어들인 것 같은데…….”
이어지는 엘리스의 말에 처용이 잠시 생각에 잠기며 읊조렸다.
메피스토부터 시작해 디아블로를 포함한 다른 대악마들.
엘리스는 악의 종주와 갈라선 악마들을 규합해 하나로 모으고 있었다.
처용은 그런 엘리스가 한 일과 과정, 그 방법과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악의 종주와 갈라선 대악마들을 모으는 겁니까?”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의문 어린 표정을 자아내고 있었다.
처용의 옆에 앉은 제시카가 엘리스에게 궁금한 듯 묻자.
“악마들을 규합한다라…….”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성자가 의문을 읊조렸고 바로 옆에 앉은 커맨더도 궁금한 듯한 분위기를 보였다.
“그래야 관리하기 편하니까.”
엘리스가 주변의 의문에 가벼운 목소리로 답하자.
“뭔가 이유나 목적이 있는 것 같군요.”
성자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솔직히, 악마들을 규합한다는 말이 그리 긍정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헌터들에게 있어 주적이라 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으니까.
엘리스는 그런 성자의 심정을 눈치챘다는 듯, 미소를 흘리고는.
“만마전(萬魔殿), 새로운 판데모니움을 만든다고 해야 할까?”
자신이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했다.
만마전(萬魔殿), 새로운 판데모니움.
그녀가 악의 종주와 갈라선 악마들을 규합해 만들려는 새로운 세계였다.
지금 판데모니움은 완전히 갈라져 던전화가 되어 버린 상황이었다.
그렇게 갈라진 판데모니움을 악의 종주와 바알이 다시 하나로 규합하는 중이었다.
문제는 악의 종주를 따르던 삼천마 중 둘, 메피스토와 디아블로가 그에게서 돌아섰다는 것.
그런 두 삼천마를 따라, 다른 악마들도 서로 갈라졌다.
엘리스는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뿐이었다.
“기왕 악마들이 완전히 갈라진 거, 악의 종주와 완전히 대립하는 구도로 만들어야지.”
-우우웅.
말을 이은 엘리스가 오른손을 들어 어둠을 끌어올리고는 검은 열쇠를 꺼내 보였다.
처용이 디아블로와 싸워 승리했을 때, 엘리스가 보였던 검은 열쇠.
만마전의 열쇠는 처용이 지닌 태룡전의 열쇠를 본떠 만든 신물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태룡전의 열쇠가 만들어진 방식을 응용하여 만든 것이었다.
태룡전의 열쇠가 황룡의 여의주, 태초의 심장 일부분을 분리하여 만들었다면.
만마전의 열쇠 역시 이와 비슷하게, 태초의 그릇의 일부분으로 만든 것이었다.
황룡과 니알라의 도움을 받아 만든 이 신물.
이 만마전의 열쇠가 지닌 능력은 다름 아닌 증폭이었다.
힘을 증폭시켜 확장하는 엘리스가 지닌, 어둠과 공간을 다루는 권능의 힘이 있었다.
그러한 열쇠의 능력으로, 엘리스는 새로운 판데모니움, 만마전을 형성했다.
바로, 기존의 판데모니움에서 뜯겨 나가 던전이 된 대악마의 성역을 서로 이어 붙인 것.
그렇게 또 다른 하나의 판데모니움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현재 판데모니움은 말 그대로 완전히 나누어져 갈라진 상황.
이는 바알과 악의 종주가 형성한 세력이 깎여 나간 것과 같았다.
그 깎여 나간 세력과 협력하여 아군으로 만든다.
이것이 엘리스가 추구하는 진정한 목적이었다.
“이렇게 하나하나 깔끔하게 정리해야, 추후를 도모할 수 있겠지.”
엘리스가 검은 열쇠에 박혀 반짝거리는 보석들을 보며 말했다.
추후를 도모해야 한다는 말에, 처용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진정한 파멸…….”
커맨더가 막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읊조렸다.
이곳에 있는 세 사람, 제시카, 성자, 커맨더.
그리고 그들의 성좌인 아테나, 야훼, 데우스 엑스 마키나.
이들은 모두 무한의 순환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처용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이들이라 판단하고 말해 준 것이었다.
물론, 태초신의 대리자인 야훼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는 순환을 관장하는 프로토들의 개입을 막고 엘리스를 도와주었으니까.
“동의합니다. 정리할 수 있는 일을 정리해야 차후를 기약할 수 있겠죠.”
제시카가 엘리스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말했다.
“제우스 님 일도, 뒤늦게나마 마무리되어서 다행입니다.”
“쓸데없는 말만 안 했어도 좋았을 텐데 말이야.”
제우스를 언급하는 제시카의 말에, 처용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아테나를 따라 태룡전에 방문한 제우스.
그는 과거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다.
딱 거기까지 했으면 아주 좋았겠지만…….
“크크, 둘을 엮으려 했었지?”
사정을 아는 엘리스가 처용과 제시카를 번갈아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리자.
“저도 ‘약혼자’가 있는 입장인지라, 많이 당황스러웠습니다.”
제시카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약혼자가 있다는 제시카의 말에.
“약혼자? 로스차일드 차기 가주 아니었나?”
처용이 전혀 몰랐다는 듯, 작은 놀라움을 드러내며 물었다.
제시카가 지닌 신분은 신의 신관만이 아니었다.
지구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차기 가주였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제시카는 연애와 결혼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한 처지였다.
하지만.
“저와 같은 세계 가문 출신입니다. 장남이 아닌 차남이고 저희 길드의 신관이기도 합니다.”
제시카는 약혼자가 있다는 것이 사실인 듯, 그 상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런 제시카의 말을 들은 처용은, 짧게 생각에 잠기더니.
“……스티븐?”
머릿속으로 막 도출해 낸 답, 자신이 생각한 인물이 맞는지 확인하려는 듯, 그 이름을 언급했다.
“가문 대 가문으로 약속되었던 약혼이긴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좋은 감정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제시카는 부정하지 않고 부끄러운 듯, 볼을 긁적이며 답했다.
스티븐 스틸러그.
스틸러그 가문의 차남이자 올림포스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의 신관.
올림포스의 방패라는 이명으로 유명한 헌터.
처용과도 나름 여러 번 마주쳤던 S급 헌터였다.
그가 바로 제시카와 가문 대 가문으로 맺어진 약혼자였다.
스틸러그 가문의 장남 역시 올림포스 소속 A급 헌터인 만큼, 가문의 명망이 높았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약혼식을 미룰까 하고 있습-.”
제시카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이 우주를 파멸시키려는 악의 종주와 전쟁 중이었다.
한가롭게 연인과 약혼식을 치를 때가 아니었다.
그 말에 성자와 커맨더도 안타까운 눈빛을 보냈다.
제시카의 입장이 이해가 되었으니까.
그러나.
“아니, 그런 이유로 미루는 것만큼은 반대다.”
처용이 단호한 목소리로 부정하듯 말했다.
그런 처용의 반응에, 모두가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항상 악의 종주를 저지하는 데 앞장섰던 처용이었으니까.
그런 그가 우주의 명운을 건 전쟁보다도 약혼을 우선시한다는 점이 의외였다.
“서로가 미래를 약속했으면,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무모하게 죽진 않겠지.”
처용은 의문을 표하는 제시카를 마주 보며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야스라가 그러던데, 얼굴도 보지 못한 ‘두 자식’을 두고 허무하게 죽을 생각 따윈 없다고.”
작은 미소를 지은 처용이 눈을 돌려 조금 떨어진 곳의 카운터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이 카페 내부를 관리하는 유일한 직원.
새하얀 눈과 같은 이미지의 여인, 이종족 중 하나인 설녀가 자리해 있었다.
그녀의 정체는 야스라의 연인으로 알려진 유카야였다.
처용이 그녀를 응시하자.
“정말입니까?”
“……진짜로!?”
제시카와 커맨더를 포함한 모두가 고개를 돌려 유카야를 바라봤다.
“……?”
조용히 카운터에 앉아 있던 유카야는 갑자기 쏟아지는 시선을 보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테이블 주변으로는 결계가 쳐져 있기에 그 어떤 말도 들을 수 없었다.
즉, 유카야는 처용을 포함한 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몰랐다.
하지만, 모두의 시선이 유카야의 얼굴이 아닌, 아랫배에 집중되자.
“…….”
상황을 파악한 유카야가 아직 티가 나지 않은 배를 두 손으로 감싸며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놀랍게도 유카야는 현재 야스라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그것도 무려 쌍둥이였다.
“……그랬었군요. 축하할 일입니다.”
“겨, 경사네요?”
사실을 확인한 성자가 미소를 흘리며 축하의 말을 읊조렸고 제시카가 얼떨떨한 목소리를 흘렸다.
그리고.
“또 하나의 비극을 축복으로 바꾸었네. 이것 또한, 네가 만들어 낸 변화겠지.”
엘리스는 신기하다는 듯, 처용을 바라보며 말했다.
회귀 전, 야스라는 설녀들도 구하지 못하고 이자나기 성운의 몰락과 동시에 죽었었으니까.
그런 그의 암울한 미래가 처용에 의해 바뀌었고 이는 새로운 인연과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같은 동료에게 살해당할 운명이었던 너 역시, 한처용 덕분에 비극을 벗어난 셈이니까.”
“그, 그랬었습니까?”
이어지는 엘리스의 말에, 제시카가 놀란 듯한 목소리를 흘렸다.
지금 엘리스가 하는 말은, 제시카가 본래 맞이했어야 할 운명이었으니까.
게다가, 같은 동료에게 살해당할 운명이었다는 예언자의 말이 제시카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지금 올림포스에 없는 놈들이 누구인지 자~알 생각해 봐.”
엘리스가 그런 제시카를 바라보며 말을 잇자.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제시카가 이해하고 납득이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올림포스에 없는 이들이라 함은.
“모건, 헤리스, 데이비드…… 제니퍼까지, 결정적인 순간에 제가 배신당했겠군요.”
제 정체와 야심을 숨기고 배신의 순간만을 기다려온 이들.
바로 성운을 배신한 성좌의 신관들을 의미했다.
제시카가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읊조리며 무거운 목소리를 흘리자.
“기계 장치의 여신을 지키지 못한 커맨더, 성녀의 죽음을 막지 못한 성자, 이 비극 또한 다 사라졌지.”
엘리스가 다른 이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 또한, 모두 회귀 전에 일어났었던 비극이었다.
하지만, 그 비참한 비극과 운명은.
“이젠, 완전히 사라져 버린 운명, 아니, 한처용이 부숴 버린 운명이랄까?”
처용에 의해 모두 바뀌었다.
같은 비극이 반복되는 것만큼은 저지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였다.
“모두 다, 네 덕분에 사라진 비극이네.”
“예언자가 그리 말해 주니, 내심 보람찬 기분이 드는군.”
처용은 엘리스의 말에 뿌듯함이 일렁이는 미소를 지으며 답하고는.
“혹시라도 식을 올리게 된다면, 미리 초대장이라도 보내.”
제시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간 아테나 님과 올림포스에게 받은 도움이 있으니, 축하 선물은 절대 섭섭하지 않을 테니까.”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다고 하여, 축복을 미루지는 말라.
처용의 말은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덕분에…… 용기가 생겼습니다. 감사합니다.”
제시카가 그런 처용의 말과 뜻을 알아들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지금껏 제시카에게 크고 작은 도움과 많은 가르침을 주었던 처용이었다.
덕분에 성운의 신관 중 최초로 신력을 각성하기까지 했다.
그런 처용이 말한 조언이었기에, 그 뜻이 더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다.
“절망이 눈앞에 다가온다고 해도, 희망을 놓지는 말아야지.”
처용이 제시카의 다짐 어린 태도를 보며 읊조리고는.
“그 희망을 쥐려고…… 어떻게든 발버둥을 쳐 봐야겠지.”
진지한 눈빛으로 생각에 잠기며 말을 이었다.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절망이라 함은, 악의 종주가 아니었다.
바로 무한의 순환, 이 우주의 진정한 파멸이었다.
처용은 무한의 순환을 생각하며 진지한 눈빛을 빛내고는.
“곧 있을 세계 헌터 회의에서-.”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앞으로의 계획을 언급했다.
이윽고 하루 이틀, 시간이 더 지나가자…….
처용이 요청한 세계 헌터 회의의 개최 당일이 다가왔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