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화
처용이 헌터 협회에서 다른 세계의 방문객들을 맞이했을 때.
-화아아! 탓.
빛과 함께 성자와 교단의 고레벨 헌터들이 나타나 다급한 발걸음으로 나아갔다.
그들이 나타난 곳은 바티칸과 가까운 나라인 루마니아.
그곳에 성자가 교단의 정예 헌터들과 직접 온 이유는 다름 아닌.
-우우웅!
멀리서 봐도 불길한 기운을 넘실넘실 내뿜고 있는 검은 게이트.
대악마의 성역과 이어지는 블랙 게이트 때문이었다.
모든 블랙 게이트가 일시에 사라지고 갑작스레 다시 나타났다.
게이트를 처음 발견한 이들은 즉각 헌터 협회에 연락을 취했다.
그 결과, 가장 가까이 있던 성자가 급히 출동한 상황이었다.
“……다른 문제는 없습니까?”
성자가 블랙 게이트와 떨어진 곳에 대기하고 있던 루마니아 소속 헌터에게 다가가 말하자.
“그, 그것이…….”
헌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손을 들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은 바로 블랙 게이트.
더 정확히는.
‘……누군가가 있다?’
블랙 게이트 앞에서 검은 망토를 흩날리며 서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스스스.
먼 곳에서 바라만 봤음에도, 상당히 짙은 마기가 느껴지는 인영.
마인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대악마라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성자는 긴장감 어린 표정을 짓고는 조용히 기세를 끌어 올리며 전투를 준비했다.
그때.
“성자가 온 것인가?”
블랙 게이트 앞에 서 있는 인영에게서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스템을 거쳐 들려오는 목소리가 아닌, 사람의 것으로 들리는 목소리.
게다가, 그 목소리는 성자에게 있어서 익숙한 목소리였다.
“집행자.”
성자가 블랙 게이트 앞에 서 있는 이를 향해 나아가며 차가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게이트 앞을 지키듯 서 있는 존재.
상당히 강력한 마기가 느껴지는 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집행자였다.
집행자는 디아블로의 신관이기도 한 마인.
“……설마.”
성자가 그 사실을 떠올리며 불안한 목소리로 읊조리고는 블랙 게이트 주변을 관찰하듯 살폈다.
-치이이. 화륵.
검은 대지로 변한 땅 주변에 일렁이는 화염.
점점 가까이 다가갈수록 느껴지는 묵직한 열기.
성자에게 있어, 너무나도 익숙하고 머릿속에 각인된 기운까지.
“그 블랙 게이트 안에 있는 대악마는…… 디아블로!”
블랙 게이트 안에 있는 대악마의 정체는 다름 아닌 디아블로로 추정되었다.
성자가 공포심과 경각심이 일렁이는 목소리로 읊조리자.
“그렇다. 이곳은 무한한 공포의 대악마께서 계시는 성역, 영원히 타오르는 강과 이어진다.”
집행자가 성자의 읊조림에 대답하듯, 긍정하며 말했다.
성자가 강한 경각심을 내비치며 신력을 끌어 올렸다.
게이트 안에 존재하는 대악마는 다름 아닌 무한한 공포의 대악마, 디아블로.
그가 게이트 폭주로 인해 지상에 강림한다면, 대참사가 벌어지고도 남았다.
심지어, 지금 게이트를 지키듯 서 있는 이는 그런 디아블로의 신관.
집행자는 최강의 헌터인 처용과 유일하게 맞서 싸울 수 있는 마인이라 알려져 있었다.
아무리 성자가 신력을 각성했다고 해도, 지금은 방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성자가 빛이 일렁이는 신력을 내뿜자.
“성자님을 보좌한다.”
“방어 태세를 유지하고 절대 앞으로 나서지 마라.”
그를 성수의 기사들과 성역의 사제들 역시 긴장감을 내비치며 전투를 준비했다.
그때.
“이곳에서 너와 싸울 생각은 없다. 성자.”
집행자가 진지한 목소리로 경계심을 드러내는 성자를 향해 말했다.
성자와 교단의 헌터들이 적의를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상황.
그 모습을 본 성자가 신력이 일렁이는 눈동자로 집행자를 바라보고는.
“……진실이라고?”
이내, 그 말이 진실임을 확인하며 의문을 표했다.
진실의 마나로 파악한 사실과 집행자의 태도까지.
집행자는 진심으로 성자와 맞서 싸울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한 점은.
‘……부상?’
펄럭이는 로브 사이로 보이는 집행자의 몸 곳곳에 피가 묻어 있었다.
더 자세히 관찰하니, 몸 곳곳에 찢어지고 불태워진 흔적들도 보였다.
마치, 지금껏 격렬한 전투를 치른 듯한 모습.
하지만, 전쟁 도중 집행자와 마주하여 그와 싸웠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했다.
아니, 집행자는 무림 세계에서 벌어진 전쟁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성자의 머릿속에 또 다른 사실이 떠올랐다.
‘디아블로는…… 악의 종주에게 반기를 들었다.’
무한한 공포의 대악마, 디아블로가 악의 종주에게 반기를 들고 그를 공격했다는 사실이었다.
성자는 정리되지 않는 머릿속 생각에 인상을 찌푸리고는.
“당신은 마인으로서 교단에 피해를 입히고 무고한 이들을 공격했습니다.”
경계심을 거두지 않는 태도로 과거의 일을 언급했다.
그러자.
“이……! 그건 내가 아니었단 말이다!”
침착하고 진지한 태도를 보였던 집행자가 돌연 분노를 드러내며 성자의 말을 부정했다.
“그건 그 배신자 광대 새끼 그놈이 우리를 농락…… 제길!”
분노 어린 목소리를 토해 내던 집행자가 말을 끊으며 침음을 흘리자.
“……진실.”
그 말이 진실임을 파악한 성자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의문을 표했다.
그리고.
“……무한한 공포의 대악마께서 한처용을 찾으신다. 당장 오지 않으면-.”
분노를 가라앉히며 한숨을 내쉰 집행자가, 본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디아블로의 메시지를 전한 집행자는.
-우우웅.
블랙 게이트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모습을 감추었다.
성자는 그 모습을 본 즉시.
“커맨더, 지금 바로 태룡사에 긴급 연락을-.”
-띠릭.
커맨더에게 상황을 이야기하고 그를 통해 태룡사에 메시지를 전했다.
***
블랙 게이트가 발생한 장소에 성자가 도착하여 집행자를 만난 후, 곧장 처용이 도착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성자가 한숨을 내쉬고는 블랙 게이트를 바라보며 말을 마쳤다.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한 성자의 말에.
“그 누구도, 이 주변에 오지 못하게 통제하십시오. 성자.”
처용이 블랙 게이트를 노려보며 답하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집행자를 통해 처용을 찾은 디아블로.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도저히 파악되지 않았다.
어쩌면, 격한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 또한 존재했다.
그 여파가 게이트 밖으로까지 퍼지며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알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처용을 걱정하듯 잠시 침묵한 성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커맨더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성역의 사제들은 저와 신경 결계를 펼칩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듯, 헌터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피이. 지이잉!
블랙 게이트를 중심으로 반지름 100미터 정도 크기의 반투명한 백색 벽이 솟구쳤다.
헌터들과 함께 결계를 펼친 성자가 처용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스르륵.
처용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고는 블랙 게이트 안으로 진입했다.
-화륵! 화륵! 콰아아!
검은 화염이 나선으로 휘몰아치며 시야를 가렸고 들끓는 열기가 주변을 덮쳤다.
평범한 헌터는 절대로 버티지 못할 열기.
에스라 대륙 남부의 오지, 한낮의 대사막보다도 더욱 뜨거운 열기였다.
하지만.
-후욱! 화륵! 저벅.
처용은 느긋한 발걸음으로 휘몰아치는 열기와 화염을 견디며 나아갔다.
이윽고.
-파아아! 치이이-!
눈 앞을 가리던 검은 화염이 걷히며 새로운 장소가 나타났다.
새까만 대지와 곳곳에서 타오르는 화염.
갈라진 땅 사이로 흐르는 용암의 강.
게이트에 들어설 때보다도 더욱 강렬하게 느껴지는 열기까지.
평범한 생명체는 발조차도 들일 수 없는 장소.
“영원히 타오르는 강.”
처용은 끝없이 타오르는 이 장소가 어디인지 바로 알아보며 읊조렸다.
판데모니움에서 가장 척박하고 극한의 환경을 자랑하는 장소.
이곳은 다름 아닌 디아블로의 성역이었다.
처용이 불타오르는 대악마의 성역에 발을 들이자.
-쿠구! 쿠구궁!
지면이 흔들리며 잠시 진동하더니.
-쩌저적! 쩌적! 꾸르르-!
처용 앞의 땅이 갈라지고 용암이 차오르며 일직선으로 쭉 이어진 넓은 길이 나타났다.
마치, 그곳을 향해 걸어 나아가라는 듯한 분위기.
처용은 눈앞에 나타난 용암의 길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저벅. 치이이-!
태연한 발걸음으로 이글거리는 용암의 길을 밟아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처용이 나아가는 넓은 용암의 길 가장자리가 부글거리더니.
-슈륵! 슈르륵! 화륵!
머리 위에 뿔이 돋아난 드레이크의 모습을 한 악마들이, 용암 속에서 천천히 솟아오르며 나타났다.
우람한 덩치와 용암처럼 이글거리는 붉은 피부.
하나하나 상당한 마기와 열기를 내뿜는 악마들.
그들은 이 영원히 타오르는 강 중심부에서 살아가는 유일한 이들, 발록이라 불리는 악마족들이었다.
모두 디아블로를 따르는 악마들.
그런 그들은.
-…….
칩입자인 처용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적진 한복판에 들어온 처용 역시.
-저벅.
적의 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발록들을 무시하며 계속 나아갔다.
이윽고.
-치익! 치이익!
처용의 앞에 용암의 강이 일부분 들썩이며 다섯 단의 계단이 나타났다.
그곳을 밟고 올라가자.
-촤아아! 쿠구구!
넓은 용암의 길이 갈라지며 둥근 형태의 넓은 제단이 형성되었다.
용암이 식고 굳어져 형성된 현무암을 깎아 만든 듯한 제단.
그곳의 중심에는.
“드디어 왔군!”
-쿵! 스릉.
검은 옥좌 위에서 흉악한 도끼를 땅에 꽂아 쥐고 있는 대악마.
디아블로가 처용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처용은 자신에게 미소를 짓고 있는 디아블로를 잠시 바라보고는.
“꼴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리며 물었다.
지금 옥좌 위에 앉아 있는 디아블로의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으니까.
용암과 불길이 끝없이 타오르며 이글거렸어야 할 피부는 일부분이 식어 있었고.
-후두두…….
심지어 굳어 식어 버린 피부 일부분이 갈라져 떨어지기까지 하고 있었다.
다른 곳곳에도 갈라지고 베인 상처와 부서져 복구된 흔적들이 보였다.
척 봐도 낮지 않은 부상을 당한 듯한 모습.
게다가 지금의 디아블로는 이전의 디아블로가 아니었다.
그는 두 번째 모습을 개방한 것을 넘어서.
-차라리…… 딴 놈을 주고 만다!
엘리스에게 깃들어 있던 에테르를 흡수하여 부활한 상태였다.
즉, 이전보다도 더욱 강해진 상태라는 의미.
그런 디아블로에게, 과연 누가 심각한 부상을 입혔는가?
답은 하나뿐이었다.
“조크 – 크타니드와의 싸움에서 졌군.”
처용이 짐작한 바를 이야기하자.
“크하하! 운 좋게도…… 나는 다시 한번 살아남았다.”
디아블로가 처용의 말이 맞는단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림 세계에서 벌어진 크나큰 전쟁.
디아블로는 악의 종주와 바알에게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성지쟁탈전이 끝났고 모든 악마가 제 성역으로 추방되었다.
디아블로 역시 마찬가지.
그는 시스템에 의해 강제로 추방된 즉시, 악의 종주를 찾아갔다.
바알이든, 악의 종주든 끝내지 못한 싸움을 이어 가기 위함이었다.
이윽고 판데모니움의 중심주에서 악의 종주를 찾아내 싸움을 이어갔다.
하지만.
-콰아아!
결국, 디아블로는 악의 종주를 이기지 못했고 또다시 패배했다.
무너진 판데모니움의 중심부에서 추락한 그는 이제 영원한 소멸을 직감했었지만.
“영염(永炎)의 대악마라…… 정말로 ‘운’이 좋았지.”
그는 자신의 성역인 영원히 타오르는 강 중심부에서 다시 눈을 떴다.
엘리스에게서 에테르를 주입받고 부활한 디아블로.
그런 그에게 영염(永炎), 영원히 꺼지지 않는 화염의 힘이 생겨났다.
안 그래도 강력한 삼천마인 그에게 불사의 힘까지 생겨난 상황.
그러나 여타 다른 권능이 그렇듯, 영염 역시 완전무결한 힘은 아니었다.
-쩌적. 쩌저적.
아직 악의 종주에게 당한 부상이 회복 중이었고.
“이것 또한 나의 성역이 완전히 무너지면 끝이겠지.”
영염의 근원이자 중심부라 할 수 있는 디아블로의 성역이 파괴되면, 그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었다.
제 입으로 스스로가 각성한 힘의 약점을 언급한 디아블로는.
“오너라. 그래도 이 힘 덕분에 네 녀석과 다시 한번 싸울 수 있게 되었으니까.”
-탕!
도끼를 강하게 쥐며 투지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스릉.
처용은 부상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투지를 불태우는 디아블로를 응시하며 멸절을 꺼내 쥐었다.
디아블로는 심한 부상을 입어 상당히 약해진 상태.
지금이라면, 손쉽게 충분히 그를 소멸시키고도 남았다.
승산은 티끌만큼의 변수 없이 무조건 처용의 승리였다.
그러나, 처용은 승리가 확정된 싸움을 눈앞에 두고도.
-철컥. 우웅.
멸절을 집어넣으며 칼날을 거두었다.
동시에.
“……완전히 회복하는 데 얼마나 걸리나?”
침묵하고 있던 처용이 굳게 닫힌 입을 열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크흐흐. 네놈이 날 처치할 기회를 저버리겠다고?”
디아블로가 그런 처용의 행동에 의문이 일렁이는 미소를 보이며 묻자.
“얼마나…… 걸리냐고?”
처용은 그런 디아블로의 말에 답하지 않고 방금 했던 말을 반복했다.
지금 디아블로와 싸우면 승산은 백 프로, 무조건 처용의 승리였다.
하지만, 처용은 도저히 싸울 마음이 들지가 않았다.
아니, 지금 약해진 디아블로를 공격한다고 생각하니…… 뭔가 짜증이 솟구쳤다.
복잡미묘한 감정이 자존심을 긁어대는 듯, 말로 설명하기 힘든 기분이 들었다.
“날 얕보지 마라. 디아블로.”
처용은 굳은 목소리로 디아블로를 노려보며 말을 잇고는.
“네가 완전히 회복되면 다시 찾아오겠다.”
-우우웅.
디아블로가 완전히 회복되면 다시 찾아오겠다고 말하며 게이트를 열었다.
“그때, 원 없이 싸워 줄 테니, 기대해라.”
처용의 말은 서로가 온전한 상태에서 결판을 내자는 의미였다.
그러자.
“하하하하!”
디아블로가 게이트 속으로 사라지는 처용의 뒷모습을 보며 큰 웃음을 내질렀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