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홀로 계승자-707화 (707/726)

#707화

잿빛 군도의 일이 마무리되고 이틀가량 지나자.

-날짜가 잡혔습니다.

세계 헌터 회의의 개최일이 결정되었다.

기간은 바로 이주일 뒤.

장소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태룡사였다.

이번에 열리는 세계 헌터 회의는 기존보다도 더욱 규모가 커져 대규모 회담이 된 상황.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모일 수 있을 만한 장소는 태룡사 외엔 없었다.

이 우주의 중심, 태초신의 성지라는 명분도 있으니, 여러모로 자격이 충분했다.

그리고 대규모 회담의 날짜가 잡히자, 미리 태룡사에 방문한 이들도 있었다.

한국 헌터 협회 태룡사 지부.

그곳에 세워진 게이트에서 빛이 일렁이더니.

“이렇게 직접 와 보는 건 처음이군요. 신기합니다.”

-우웅.

동양인으로 보이는 단정한 차림의 남자와.

“와-.”

무림 세계의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색동옷을 입은 여아가 감탄을 표하며 나타났다.

“오랜만입니다. 역천군주.”

단정한 차림의 남자가 처용을 향해 정중히 인사를 전하며 미소를 지었다.

신사 같기도 했지만, 무대 위의 배우라는 모습이 더 어울릴 법한 몸짓.

“이제, 가면은 쓰지 않는 건가? 단장.”

처용은 그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보며 말했다.

무림 세계의 세력 중 하나, 암영단을 대표해 온 사람.

단장이라는 이명의 섀도우 헌터이자, 전 세계 가문 출신인 잭키 찬이었다.

“섀도우 헌터가 아닌, 암영단의 대표로 온 것이니까요.”

단장, 잭키가 어깨를 으쓱이며 가벼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때.

“저…….”

처용의 뒤에 있던 에블린이 잭키를 향해 목소리를 내었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 분위기.

“미안하지만, 흑사자는 같이 오지 않았다.”

잭키가 작은 한숨이 서린 목소리로 에블린을 향해 말했다.

그녀가 누구를 찾는지, 자신을 왜 불렀는지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에블린이 찾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그녀의 부친.

지금은 섀도우 헌터들, 암영단과 함께 하는 그들의 일원인 라이언이었다.

사실, 무림 세계에서 벌어진 전쟁이 막 끝났을 무렵.

-아빠!

에블린은 자신의 부친인 라이언을 마주했었다.

그때 역시.

-미안하다.

라이언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내가 같이 오자고 권유해 보긴 했는데…….”

잭키가 암영단을 대표해 태룡사로 오기 전, 라이언에게 함께 갈 것을 권유했었다.

그 역시, 라이언이 지닌 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만날 수 없다.

라이언은 고개를 저으며 이를 거절했었다.

“……그렇군요.”

이야기를 들은 에블린이 고개를 숙이며 침울한 분위기를 내비치자.

“너한테는 딱히 비밀도 아니니, 흑사자의 안부라면 얼마든지 이야기해 주마.”

잭키가 안쓰러운 미소를 지으며 에블린을 향해 말하고는 처용을 눈짓했다.

잠시, 에블린을 데려가도 되냐는 듯한 눈짓.

처용이 고개를 끄덕이자.

“난 이 성지를 들어만 봤지, 지리를 잘 모르거든 괜찮은 곳이 있다면-.”

잭키가 에블린과 함께 성지 하단의 도시, 태룡시가 있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처용은 에블린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고는.

“굳이 여기서까지 둔갑을 유지할 필요는 없다. 소백.”

잭키와 함께 이곳에 온 색동옷의 소녀, 소백을 향해 말했다.

소백의 정체는 어린 구미호.

그녀는 평소처럼 제 모습을 감추기 위해 평범한 소녀처럼 둔갑을 유지하고 있었다.

“여긴, 너 말도고 많은 신수와 이종족들이 거주하는 곳이니까.”

처용이 소백을 향해 말하고는 하늘 위를 올려다보자.

-후우-욱!

황금빛의 드래곤, 비크라가 날개를 펼치며 창공을 날아 지나갔다.

거대한 드래곤이 하늘 위를 날아 지나갔음에도, 주변 사람들은 잠깐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마치, 익숙한 일상이라는 듯한 모습.

“그, 그렇군요.”

-스르륵.

그 모습을 본 소백이 신기하다는 듯, 읊조리고는 주변에 일렁이는 기운을 풀었다.

평범한 여아의 모습이었던 소백의 머리에 쫑긋한 귀가 나타나고 네 개의 꼬리가 드러났다.

둔갑을 푼 소백이 해방감을 느끼며 기지개를 켜 보일 때.

“안녕? 오랜만이지?”

그런 소백에게 연아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그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소백이 연아를 알아보며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무림 세계에 갔었던 지구의 헌터들.

연아는 천교의 성좌들과 싸우기 전, 소백과 암영단을 도운 적이 있었다.

소백은 그 당시 만나 도움을 받은 것에 감사를 전한 것이었다.

“꼬리 만져 봐도 될까?”

“그건 좀…….”

소백을 안내하겠다며 그녀를 데려가는 연아의 모습.

그 외에도.

“오오. 이곳이?”

“다른 세계에 세워진 신의 성지라, 참으로 신비하군요.”

무림맹을 대표해 온 소림방장, 신승과 문파의 장문인들.

에스라 대륙에서 넘어온 각국의 사절단들.

각기 다른 세계에 살던 이들이 태룡사에 모여들고 있었다.

회귀 전에는 서로가 만나지 못했던 인연들이 대부분.

처용은 그 인연들이 서로 만나는 광경을 신기한 듯 바라봤다.

이 또한, 미래를 바꾸기 위해 노력한 결과의 산물이었으니까.

처용이 다른 세계의 방문객들을 바라보며 감회 어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역천군주.”

오늘 태룡사에 방문한 이들 중 하나, 제시카가 처용을 보며 다가왔다.

용건이 있는 듯한 물음에 처용이 그녀를 바라보자.

“아테나 님께서…… 저한테만 말씀해 주셨었습니다.”

제시카가 무거운 목소리로 작게 읊조리듯 말했다.

아테나가 말해 줬다는 그 말 한마디만으로.

“그런가.”

처용은 제시카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파악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 아테나에게 말해 주었던 이 우주의 비밀이 절로 떠올랐으니까.

이야기를 들은 아테나가 고심을 잇다가 제 신관에게 이야기해 준 듯 보였다.

둘은 평범한 신관과 성좌의 관계라기엔, 신뢰의 깊이가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제우스 님과 같이 오셨더군요.”

“올림포스 전 주신?”

이어지는 제시카의 말에, 처용이 의문을 표했다.

제우스가 아테나를 따라 이곳에 왔다는 것.

제시카는 아테나가 해 주었던 말 때문에, 제우스와 함께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이유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잠시 생각에 잠긴 처용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테나가 제우스와 함께 이곳에 올 만한 이유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스승님, 혹시 제우스가 와 있습니까?’

처용은 즉시 여래를 향해 전음을 보내며 물었다.

그러자.

[방금, 아테나와 함께…….]

즉각 여래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리고.

“……운룡전이라, 알겠습니다.”

-우우웅.

이어지는 여래의 말을 들은 처용이 읊조리듯 답하며 게이트를 열고는 그 안으로 진입했다.

“저도-.”

-탓.

그런 처용을 본 제시카 역시, 뒤따라 게이트 안으로 진입했다.

처용과 제시카가 다시 나타난 곳은, 조금 전 처용이 읊조린 장소인 운룡전.

그곳에서는.

[그…… 미안합니다. 자비의 대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제우스의 모습과.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앞에서 제우스의 사과를 받는 어린 여아, 보살이 있었다.

그런 제우스의 뒤에는 아테나, 보살의 뒤에는 여래와 미륵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많이 늦었다는 건 본인이 잘 알겠죠?”

보살이 눈을 가늘게 뜨며 어린아이 특유의 새침한 목소리로 말하자.

[……음?]

제우스가 의문 어린 침음을 흘렸다.

본래, 제우스가 기억하는 자비의 대신은 옅은 미소 외엔 잘 감정을 드러내는 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겉모습이 어려졌을 뿐만이 아니라, 감정 또한 다양해진 듯한 모습이었다.

[뭔가…… 많이 변했구려?]

“어린아이가 되었으니까요.”

무언가 많이 변했다는 제우스의 말에 보살이 답하자.

[그렇다면-.]

제우스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 순간.

[쓸데없는 잡담은 하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탁! 으득!

아테나가 제우스의 어깨를 강하게 잡으며 입을 열었다.

옅은 미소를 짓는 얼굴이었지만, 엄동설한처럼 시리게 읊조리는 목소리.

아테나의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목소리와 점점 강해지는 악력에.

[나, 난 그저 혹시 알레인이 어디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려고-.]

절로 자세를 숙인 제우스가 다급하게 말했다.

급하게 내뱉은 말이 하필이면 니알라는 찾는다는 말.

그 말에 아테나의 눈썹이 한번 꿈틀거리며 손아귀의 악력이 더 거세졌다.

그때.

[……니알라는 예언자와 함께 자리를 비웠습니다. 올림포스 전 주신.]

여래가 한숨을 내쉬며 니알라의 안부를 말해 주고는.

[사과는 받겠습니다.]

잔잔한 목소리로 제우스의 사과에 답해 주듯 말을 이었다.

[미안합니다.]

-탁.

아테나가 제우스를 잡던 손을 놓고 여래를 향해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자.

[나의 옛 분노는 역천과 함께 버렸으니, 괜찮습니다. 신법의 주인.]

여래가 후련함이 일렁이는 목소리로 답했다.

과거 벌어졌던 일에 대한 미련은 일절 없어 보이는 모습.

그런 여래의 편안한 목소리에, 아테나가 다행이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으, 그리 차가워서야 나중에 널 맞이할 반려가 있을지 모르겠구나.]

제우스가 손자국이 난 어깨를 부여잡으며 고통 어린 목소리를 흘리자.

[목적을 위해 반려를 맞이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아테나가 다시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그리고.

“과거의 일을 마무리하러 오신 게 맞았군요.”

처용이 아테나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과거 신들이 저질렀던 잘못을 인정하고 청산하겠다는 것.

앞으로 그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

신법의 선택을 받은 아테나가 한 다짐이었다.

그런 그녀가 제우스와 함께 태룡사로 찾아온 상황.

처용은 아테나를 잘 알기에, 이러한 상황을 예상했었다.

“뭐, 잘 풀린 것 같습니다만?”

[그래, 딱히 걱정할 부분은 없겠구나.]

여래가 처용의 말에 편안한 목소리로 답할 때.

[이렇게 마주하고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구나.]

제우스가 어깨를 풀며 숙였던 자세를 일으키고는.

[아테나에게 큰 힘이 되어 준 것. 정말 고맙다는 말부터 전해야겠구나.]

처용을 향해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갑작스럽게 사라진 제우스와 하루아침에 주신의 자리에 앉은 아테나.

그런 그녀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주었던 이들 중 하나가 바로 처용이었다.

제우스는 이러한 사실을.

-역천군주가 올림포스의 주신과 긴밀히 협력하는 것 같더군요.

판데모니움에 있을 때부터, 니알라의 신관인 하워드를 통해 들어 왔었다.

“저 역시, 악의 종주와의 싸움에서 도움을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처용이 제우스의 감사에, 이전의 도움을 언급하며 감사를 전했다.

제우스는 악의 종주와의 싸움에서 아테나를 돕기 위해 직접 왔었으니까.

그런 처용의 감사에 제우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는.

[그보다도, 자네 제시카를 어떻게 생각하나?]

처용의 뒤에 있던 제시카를 눈짓하며 물었다.

그 물음에, 처용은 제우스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눈치채고는.

“……저는 정인이 있습니다.”

짧게 침묵한 후,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명을 얻은 뒤로, 성좌들의 사고방식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랬기에, 이전의 야훼를 이해했던 것처럼, 제우스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올림포스의 전 주신, 최고의 신이라고도 불리는 제우스.

그는 분열되어 있던 올림포스를 통합시키고 전성기로 이끌었던 신이었다.

제우스는 어떻게 분열된 올림포스를 하나로 만든 것인가?

그 방법은 다른 성좌들과 혼인하여 동맹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제우스는 강력한 힘과 권력을 지닌 자신의 가치를 내세웠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분열된 성운을 통합하기 위해 스스로를 혼약의 도구로 본 것이었다.

혼약을 맺은 여신들, 올림포스의 안주인들이 된 이들을 성운의 주요 요직에 앉힌다.

동시에, 그 여신들의 자녀들도 성좌로 임명하여 성운을 이끌도록 만든다.

제우스를 중심으로 대가족을 형성한 통합.

이것이 과거 분열되었던 올림포스를 제우스가 하나로 통합한 과정이자 방법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 제우스가 개인적으로 추구하는 욕망이 섞이긴 했지만, 올림포스가 통합된 것은 사실.

그가 추구한 방법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그렇게 할 이유도, 마음도 없습니다.”

처용은 그런 제우스의 사고방식을 따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으음, 아쉽구만.]

단호한 처용의 말에, 제우스가 아쉽다는 듯 읊조렸다.

그의 입장에서는 ‘계승자’라는 이 우주 유일의 인간을 올림포스로 완전히 끌어들일 기회였을 테니까.

그때.

-삐빅. 삑-.

처용의 라이센스에 붉은빛이 점멸하며 알림이 울렸다.

붉은빛과 함께 빠른 템포로 울리는 알림 소리.

긴급 메시지나 통화를 보낼 때 울리는 알림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처용이 즉각 태민의 긴급 연락을 받자.

-무한한 공포의 대악마를 찾았다고 성자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태민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간결하게 이야기했다.

“디아블로가 나타났다고요?”

-네, 처용 님이 직접 오지 않으면, 주변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이어지는 태민의 사정 설명에.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가죠.”

진지해진 눈빛으로 처용이 답했다.

나 홀로 계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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