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홀로 계승자-706화 (706/726)

#706화

잿빛 군도를 습격한 모든 악마가 사라지자.

“주군!”

-쿵!

스탈크가 메피스토에게 다가왔다.

잿빛 군도에 쳐들어온 악마들은 모두 몰아냈지만.

“……저들은.”

전투 도중 난입한 이들, 특히 예언자와 처용을 보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메피스토는 말없이 스탈크를 향해 손을 뻗으며 물러나라는 의사를 전하고는.

“……이유가 뭐냐? 예언자.”

엘리스를 바라보며 의문을 물었다.

어째서 자신을 도와준 것인가?

예언자와는 거래를 했을 뿐, 서로 동맹은 아니었다.

메피스토의 의문에.

“적의 적을 도와준 이유는 적을 방해하기 위함이지.”

엘리스가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 말의 뜻을 이해한 메피스토가 잠시 침묵하고는.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너와 난 애초에 적이었으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아.”

그런 메피스토의 반응에 엘리스가 한숨을 내쉬었고.

“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인가?”

진지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물었다.

정녕 아무것도 묻고 싶은 말이 없는지 묻는 그 말에.

“……클레핀은?”

잠시 침묵하던 메피스토가 클레핀의 안부를 물었다.

“아주 잘 지내고 있지. 처음엔 잘 서지도 못하던 녀석이 이제는 걸어 다닐 수도 있으니까.”

엘리스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흘리며 답해 주었다.

메피스토와 엘리스가 서로 거래를 맺은 구체적인 이유.

바로 그간 깨우지 못했던 메피스토의 연인, 클레핀 때문이었다.

그녀를 억압하던 아가레스로부터 분리해 안전하게 지켜 주기까지 하는 상황.

클레핀을 계속 돌봐주는 이상, 메피스토는 엘리스와 처용을 적대할 수 없었다.

게다가.

“메르핀도 같이 있으니까. 별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지금까지도 아무 일 없었고.”

엘리스가 메르핀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음기를 담아 말하자.

“으으…….”

메르핀이 메피스토의 눈치를 보며 불편한 침음을 흘렸다.

메피스토가 엘리스를 적대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가 바로 메르핀 때문이었다.

“메피스토 님…….”

눈치를 보던 메르핀이 메피스토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어두운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제 독단으로…… 잿빛 군도 공간의 제어권을 일부 넘겼습니다.”

메르핀은 공간을 다루는 악마, 그녀는 잿빛 군도를 관리하는 관리자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녀가 엘리스에게 공간의 제어권을 넘겼고 엘리스는 그 권한을 태룡전과 연결했다.

바로, 처용이 지닌 태룡전의 열쇠를 통해 만든 연결이었다.

판데모니움에서 분리된 잿빛 군도를 파멸시키려는 악의 종주와 바알.

그런 그들의 손아귀에서, 황룡이 잿빛 군도를 분리해 보호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덕분에, 잿빛 군도를 지켜 낼 수 있었지만, 성역의 권한 중 일부가 다른 이들에게 넘어가 버린 상황.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네 잘못은 없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메르핀의 말에, 메피스토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메르핀의 잘못은 조금도 없다는 메피스토의 말은 진심이었다.

진정 잘못한 자가 있다면.

“이곳을 책임져야 할 내가 더 강하지 못했던 탓이지.”

잿빛 군도의 주인, 이곳을 지키고 다스려야 할 군주.

즉, 자기 자신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했다.

“메피스토.”

엘리스가 그런 메피스토를 바라보며 입을 열고는.

“솔직히 말하지, 메르핀 때문이라도 난 너와 더 이상 대립하고 싶지 않아.”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했다.

시간이 되돌아가기 전, 악마들과 함께 악의 종주를 도왔던 학살의 마녀.

그런 엘리스와 가장 막역한 사이였던 이들이 바로 잿빛 군도의 악마들이었다.

엘리스에게는 그 기억이, 추억처럼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네 편에 서라?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메피스토는 그러한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메피스토의 말에.

“난 사라진 운명 속에서 형성된 인연을 버리고 싶지 않다. 내 고집이자 미련에 불과하지만…….”

엘리스가 한숨을 내쉬며 미련이 일렁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예언자가 내민 손을 잡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오.”

메피스토의 편에 서서 함께 싸운 대악마.

사음의 대악마, 벨레드가 메피스토를 향해 말했다.

“벨레드.”

메피스토가 의외라는 듯, 의문 어린 목소리로 벨레드를 부르자.

“세상이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까? 증오의 대악마여.”

벨레드가 그 의문에 답하듯 말을 이었다.

“그대가 이 판데모니움에 큰 변화를 불러왔던 것처럼, 이번 또한 큰 변화의 일종이지 않겠소?”

과거의 메피스토가 벌였던 큰 변화.

무려 삼천마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그 자리를 차지했던 일을 언급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 역시 변화를 맞이할 시기라는 것.

그런 벨레드의 진지한 말에, 메피스토가 침착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대들이 내민 손을 잡으면, 우리가 지상에 나갈 수 있나?”

벨레드가 엘리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뜬금없이 지상에 나갈 수 있냐는 말에.

“악마가 지상에 나가고 싶다고?”

처용이 경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악마가 지상을 활보하고 싶다는 말이 그리 좋게 들리지 않았으니까.

“악마들이 지상에 나가고 싶어 하는 이유는 다양하지.”

벨레드는 그런 처용의 부정적인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말을 이었다.

“뭐 대부분은 거대한 어둠을 따라 제 영역과 영향력을 더 퍼트리고 싶을 뿐이겠지만…….”

판데모니움을 나가려는 악마들은 모두 각기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개 중 대부분은, 벨레드의 말처럼, 제 영역을 넓히기 위해.

혹은 지상의 풍부한 자원을 집어삼키고 제힘을 늘리기 위함이었다.

가장 강력한 대악마인 바알을 따라 스스로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싶은 것이 일반적이었다.

벨레드 또한 다른 악마들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었지만.

“나의 경우는 ‘호기심’이다.”

그는 지상을 파괴하거나 악영향을 끼칠 생각은 없었다.

“그리 거창한 이유는 없다. 그저, 이 판데모니움에 오랜 시간 갇혀 있었으니, 밖을 보고 싶을 뿐이다.”

그저 단순히 감옥과 같았던 판데모니움을 나가고 싶은 것.

간접적으로만 보던 밖의 세계를 직접 눈으로 보고 싶은 것.

아주 단순한 이유였다.

“벨레드의 말은 사실이야.”

엘리스가 벨레드의 말을 믿어 주는 듯 말하고는.

“이렇게 말하고 싶진 않았는데-.”

메피스토를 향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만약, 오늘처럼 바알과 악의 종주가 잿빛 군도를 노린다면?

그때는 메피스토가 당하고 잿빛 군도가 어둠에 삼켜질 가능성도 있었다.

오늘만 해도, 메피스토 혼자 잿빛 군도를 지키기 버거워 보였으니까.

“오늘 같은 일이 반복되어서 네 녀석이 죽어 버리면, 난 더 이상 클레핀을 책임지지 않을 거야.”

“…….”

냉정한 엘리스의 말에, 메피스토가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침묵했다.

메피스토가 엘리스를 적대하지 않겠다고 약조한 이유는 오롯이 클레핀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당사자인 메피스토가 사라진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약조였다.

“한번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봐.”

엘리스는 생각과 고민에 잠긴 듯한 메피스토를 바라보며 말하고는.

“으음. 생각보다 멀쩡하군?”

-저벅.

조금 떨어진 곳에서 쓰러져 있는 대악마.

그녀의 성좌이기도 한 안드로말리우스에게 다가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 말에 만신창이 상태로 뻗어 있던 안드로말리우스가 꿈틀댔고.

“으어어…… 날 죽일 셈…….”

떨리는 목소리로 고통 어린 침음을 토해 냈다.

엘리스의 지시에 따라 바알의 공격을 막아 낸 결과, 거의 죽기 직전까지 도달했었다.

성좌를 방패로 쓰고 버려 버릴 듯한 태도로 보이기도 했지만.

“그럴 리가.”

엘리스는 안드로말리우스를 절대로 죽일 생각이 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직, 완성조차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죽일 리가 없잖아?”

바알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치게 만든 것은 다 계산된 행동이었다.

성좌로 선택한 안드로말리우스를 계속 위험한 곳에 내세우고 몰아붙여 그를 더 성장시키는 것.

이것이 엘리스의 목적이었다.

“내가 선택한 대악마이니만큼, 넌 더 강해져야 하니까.”

안드로말리우스를 더욱 강하게 굴리겠다는 엘리스의 말에.

“거기서 더 강하게 제련했다간, 완성되기도 전에 터질 것 같은데?”

처용이 바닥에 널브러진 안드로말리우스를 눈짓하며 말했다.

무구 제조에 비유하는 처용의 말을.

“대악마라는 재료가 쉽게 터질 리가 없잖아? 한계까지 두들겨 봐야지.”

엘리스가 잘 알아들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성좌이자 대악마인 안드로말리우스.

그런 그가 무구 제조를 위한 기초 재료인 강편 취급을 받고 있었다.

더 강하게 두들기고 더 강하게 제련하여 더 강한 무구를 만들기 위한 강편.

안드로말리우스는 당장이라도 따지고 싶었지만.

“크어…….”

이미 지쳐 버릴 대로 지친 터라 대꾸할 기운이 없었다.

엘리스에게 반박한다고 하여, 그녀가 유순하게 들어줄 리도 없었다.

결국, 반발심이 사그라들었고.

“이젠 모르겠다…….”

생각 또한 그만두고 포기하기 시작했다.

“……예언자의 선택을 받는 것도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군.”

벨레드가 그런 안드로말리우스의 모습을 보며 작은 측은함을 내비쳤다.

***

잿빛 군도의 일이 마무리되고.

-우우웅. 탓.

태룡전에 게이트가 열리고 처용이 돌아왔다.

다만.

-난 이곳에서 잠시 할 일이 있어.

엘리스와 니알라는 잠시 잿빛 군도에 남았다.

-메피스토는 나에게 맡겨.

메피스토는 자신에게 맡겨 달라는 엘리스의 말.

처용은 그런 엘리스와 그녀를 돕는 니알라를 믿고 잿빛 군도와 메피스토에 대한 생각을 그만두었다.

당장 처용에게 있어 중요한 일은 다름 아닌.

‘세계 헌터 회의.’

태민에게 요청한 세계 헌터 회의.

지구만이 아닌, 다른 두 세계까지 포함해 더욱 스케일이 커진 세계 헌터 회의였다.

처용이 세계 헌터 회의를 떠올리며 생각을 정리할 때.

[돌아왔구나.]

미륵이 잿빛 군도에서 돌아온 처용을 보며 말했다.

그런 미륵의 옆에는 아테나가 자리해 있었다.

처용이 잿빛 군도로 향했을 때, 태룡전에 방문한 듯 보였다.

“어쩐 일이십니까?”

[저승의 일이…… 대략 마무리가 되었으니까.]

아테나가 처용의 물음에 왜 자신이 이곳에 왔는지를 이야기했다.

가장 먼저.

[염라는 신법의 이름으로 처단을 내렸다.]

저승을 어지럽히고 성운을 배신한 배반자들을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부터 말했다.

검은 별을 만드는 데 일조한 저승의 대신급 신격.

아테나는 그런 염라를 신법 재판에 올려 그를 심판했다.

그 결과, 염라는 성좌의 자격을 몰수당하고 처형을 받아 소멸했다.

아테나가 판결했다기보다는 신법이 염라에게 소멸을 선고했다는 표현이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염라와 마찬가지로 그를 도와 저승을 어지럽혔던 신격들.

올림포스 소속의 두 성좌 역시 소멸의 판결이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후-.]

아테나가 답답한 한숨을 내쉬어 보였다.

“페르세포네의 판결에 문제가 있습니까?”

처용이 아테나를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묻자.

[숙부님이…… 스틱스의 맹세를 언급하고 감형을 요청하셨다.]

아테나가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재판 도중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해 주었다.

“스틱스의 맹세요?”

처용이 한쪽 눈썹을 크게 들어 올리며 말했다.

스틱스의 맹세, 혹은 스틱스강의 맹세.

올림포스에 있어 신명을 거는 약속과 동일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맹세였다.

한번 맹세하며, 반드시 지켜야 하는 약속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신명과 목숨을 걸고 주신과 성운에게 내려받는 그 어떤 명령도 거부하지 못하는 대신-.]

“페르세포네를 살려 달라 했군요.”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잇는 아테나의 말에, 처용이 뒷 내용을 짐작한 듯 말을 이었다.

[……맞다.]

짧게 침묵한 아테나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처용의 말에 긍정하고는.

-난…… 역시 미련한 놈이로구나.

페르세포네의 재판 당시, 하데스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읊조린 말을 떠올렸다.

하데스는 스스로가 미련한 자라고 말하면서 그 미련한 행동을 감행했다.

그는 제 정인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이건…… 따지고 보면 나의 잘못이다.

페르세포네가 저지른 죄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말을 이었다.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미련한 선택이라 말하고 싶었다.]

“흐음, 페르세포네가 같은 죄를 반복할 가능성은요?”

처용이 아테나의 말에 궁금한 듯, 가능성을 물었다.

바로, 감형을 받은 페르세포네가 같은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를 확인한 것.

[그럴 마음이 있다고 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아테나는 처용의 우려 어린 처용의 말에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하데스의 감형 요청을 받은 결과, 페르세포네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신법의 판결에 의해, 그녀는 영원히 저승에 봉사할 테니까.]

말 그대로 살아남기만 했을 뿐, 성좌의 직위와 자격을 모두 몰수당했다.

그리고 그녀가 무너뜨리려던 저승에 강제로 봉사하는 형벌을 받았다.

기간 없는 형벌, 말 그대로 ‘영원한 형벌’이었다.

게다가.

[보증을 선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는 서로의 생명이 연결되었다.]

죄인을 감형하는 대가로 받은 하데스가 받은 또 하나의 구속.

바로 죄인인 페르세포네에 대한 책임이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페르세포네가 소멸하면 하데스도 소멸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지…….]

둘 중 한 명이 소멸하면, 다른 한 명도 소멸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되었습니다. 그것 또한 어울리는 형벌이겠지요.”

처용은 아테나가 내린 판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테나가 내린 신법의 판결을 믿는 것이었다.

그 말에,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 아테나는.

[어째서 모든 세계의 대표들을 모이라 하는 것이냐?]

처용을 바라보며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러자.

“이전처럼, 아테나 님께는 미리 말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그런 아테나의 질문에 답하듯, 처용이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고.

[언제나 그랬듯, 너를 도와주겠다.]

아테나는 처용의 말을 다 듣지 않고도 알아들었다며 답했다.

그런 아테나의 협조적인 모습에 처용이 미소를 지었고.

“3년 뒤의 파멸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진짜 종말은 그 뒤에…….”

아테나에게 이 우주와 관련된 비밀을 말해 주었다.

나 홀로 계승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