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화
무림 세계에서 벌어졌던 전쟁이 종전된 지, 이틀이 지나갔다.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세계를 임시로 복구하긴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전쟁이란, 단순히 끝난 순간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다만, 세계를 지키기 위해 나섰던 모든 이들이 서로 원만하게 협조한 덕에, 큰 차질은 없었다.
천림맹에 속해 있던 무림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천림맹주에 의해 강제로 조종당했다지만, 그들 역시 악신들에게 가담한 이들.
그런 그들을 통제한 것은 다름 아닌.
-천림맹주는 내 손으로 처단했다. 그러니…… 이 이상 은원(恩怨)을 늘리지 마라.
제 손으로 친동생인 천림맹주를 처단한 검성이었다.
무림의 대소사에 직접 나서지는 않았던 그가.
-천교의 이름을 완전히 지우고 무림의 도의를 되돌리겠다.
살아남은 중원의 무림인들에게 선포하며 직접 나섰다.
덕분에, 무림맹의 잔재를 잇던 세가와 문파들도 다시 중원에 복귀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무림맹을 재건하여 전쟁의 여파를 수습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전쟁의 주역 중 하나인 처용은 지금.
“…….”
-탓. 저벅.
태룡사 상단의 둘레길을 걸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악의 종주를 저지했고 무림 세계를 구했다.
하지만, 단순히 세계를 구한 것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게 아니었다.
우주의 파멸을 몰고 오는 존재, 악의 종주를 끝장낸 것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시간이 되돌아갔다 함은, 내가 성공했다는 뜻이다.
-과연 그것이 사실이라 장담할 수 있는가?
성지쟁탈전이 잠시 중재되고 악의 종주와 황룡이 나누었던 대화.
-다른 이들은 모두 실패했다. 나만이 성공이라는 가능성에 도달했다. 그리고 해내었다.
악의 종주는 우주의 시간이 되돌아갔음을 알아챘다.
이에 경각심을 드러내며 시간이 더욱 촉박해졌음을 이야기했다.
바로, ‘무한의 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악의 종주가 이 우주를 파멸시키려는 궁극적인 목적이, 그 무한의 순환을 저지하기 위함이었으니까.
이제…… 이 우주에 남은 시간은 대략 4년.
황룡의 대답을 들은 악의 종주는 최후의 파멸을 예고하며 사라졌다.
3년 뒤에 다가올 최후의 파멸과 그 뒤에 다가올 무한의 순환.
그리고.
-천칭의 조율자들이라 해도, 우주의 시간을 돌릴 순 없다. 그대도 알고 있을 터.
천칭의 조율자들, 순환의 포식자와 프로토들도 할 수 없는 우주의 시간을 돌린 존재까지.
“……하.”
생각을 잇던 처용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금껏, 계획적으로, 또 즉흥적으로 사건을 처리해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답답함이 밀려왔다.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악의 종주가 예언한 최후의 파멸은 그렇다 쳐도, 그 뒤에 다가올 무한의 순환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푸는 것과 같은 답답함이 마음과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이어지는 생각이, 또 다른 생각과 고민을 만들고…….
끝이 없는 고리가 이어지는 것처럼, 답 없는 문제와 고민이 무한하게 이어졌다.
그때.
-탁.
태룡사 상단을 쭉 걸어 나가던 처용이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쏴아아.
처용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태룡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정자.
세계수가 자리한 곳 바로 옆, 태룡담의 폭포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정자였다.
태룡사에서 가장 경치가 좋다고 평가되는 장소였지만, 찾아오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은 곳이었다.
태룡사 상단은, 하단처럼 외부에 개방된 곳이 아닌, 허락받은 이만 드나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곳에는.
[흐음.]
폭포 아래의 경치를 바라보며 즐거운 미소를 짓는 이가 있었다.
처용은 누군가가 있는 모습에 발걸음을 돌리려 했지만.
[웬일로 이곳에서 자네와 마주하는군? 참으로 반갑구만.]
정자 안 나무 의자에 앉아 있던 이, 언문이 처용을 바라보며 반갑다는 듯 인사를 건넸다.
“……저도 그렇습니다.”
처용은 정자에 앉아 있던 이가 언문임을 확인하고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요즘은 이런 장소를 힐링 스팟이라고 부르더군? 세상에 참 재미있는 말이 많아졌어.]
언문은 경치 좋은 경관을 바라보며 말하고는.
-파삭.
붉은 소스가 발라진 튀김 하나를 나무 요지로 찍어 집어 먹었다.
그의 왼손에 들린 것은, 김말이 튀김과 떡볶이가 담긴 종이 그릇.
간단한 먹을거리를 들고 이곳에서 쉬는 듯한 모습이었다.
잠시 분식을 맛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린 언문은.
[고민이 많아 보이는 건, 내 착각인가?]
처용의 안면을 한번 살피며 물었다.
“착각이 아닙니다.”
그 말에 처용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지금조차도 심란한 마음과 고민이 계속되고 있었으니까.
[허, 그 무시무시한 존재와 단신으로 맞서 싸웠던 자네가 고민하는 것이라…….]
“이번만큼은……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으니까요.”
언문이 넌지시 흘리는 말에, 처용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리고.
“……악의 종주가 예고했던, 3년 뒤에 찾아올 최후의 파멸, 그게 끝이 아닙니다.”
잠시 고민하던 처용이 언문을 향해 입을 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룡과 악의 종주가 나누었던 대화.
무한의 순환과 이를 관장하는 존재들.
곧 다가올 진짜 종말 등.
지금까지 알아낸 것들을 이야기했다.
이 고민들의 종착점은 다름 아닌.
“지금까지는 힘으로라도 어떻게든 막았는데…… 솔직히 이건 답이 안 나옵니다.”
4년 뒤에 다가올 무한의 순환을 어떻게 저지할 것인가? 무슨 수로 해결할 것인가였다.
홀로 고민하던 처용이 우연히 만난 언문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이유는 별것 없었다.
그는 처용과 태룡사를 위해 지금까지 진심으로 힘써 준 이였으니까.
게다가 언문은 한반도에서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왕으로 불렸던 인물이었다.
대왕(大王)이었던 그라면, 지금 처용이 하는 고민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처용의 말이 쭉 이어질 때까지, 언문은 소리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는.
[자네는 참 책임감과 헌신이 강한 사람이야.]
작은 미소를 보이며 처용을 향해 칭찬 어린 목소리를 내었다.
“책임감은 몰라도 헌신은…… 아닌 것 같습니다.”
처용은 언문의 말에 일부분 동의하면서도, 마지막은 아니라 답했다.
회귀 전, 수호신이었을 때면 몰라도, 지금은 ‘헌신(獻身)’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헌신은 성자 같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말이었다.
적어도 처용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 다른 이들이 뭐라 해도 나는 자네를 그 누구보다도 이 세상에 헌신했다고 생각하네.]
언문은 처용이 그 누구보다도 헌신적이라 생각한다며 말을 이었다.
[지금 내가 보는 이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게 해 준 이가 누구겠는가?]
“……그렇군요.”
이어지는 언문의 말에 처용이 납득했다는 듯, 말했다.
언문이 말하는 헌신은, 이 세상을 지키기 위해 한 노력을 의미했다.
지금껏 처용이 막은 재앙들만 따져도 수두룩했으니, 그 노력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당사자인 처용 역시, 그 부분은 인정했다.
파멸이 도래하는 운명을 바꾸기 위해 기울인 노력은 모두 진심이었으니까.
[내가…… 문자를 만든 이유를 아는가?]
처용의 대답을 들은 언문이 잠시 생각하고는 왜 자신이 문자를 창조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후대에는 백성을 위해서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말에 처용이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을 이야기하자.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게 온전한 정답은 아니라네.]
언문은 역사적으로 알려진 사실이 전부는 아니라고 말했다.
[으음, 나는 조금 더 미래를 생각했었어…….]
그가 한반도만의 새로운 문자를 만든 궁극적인 이유.
조선이라는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도, 백성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난…… 내가 사는 이 한반도가 더 아름답게, 더 오래 남아 있길 원했네.]
가장 큰 목표는 한반도라는 세상이 오래도록 유지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도 백성도 모두 포용하는 한반도, 이 작은 세상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런 조선의 역사도 500년으로 끝나지 않았는가?]
말을 잇던 언문이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가 다스리고 사랑했던 나라, 조선.
과거 한반도에 세워졌던 나라는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뭐, 이 작은 땅에 세워진 국가가 500년이면 오래도 갔다지만…….]
언문은 자신이 다스리고 이끌었던 나라가 사라졌음에도.
그 흔적이, 이제는 역사 속에서만 존재함에도, 크게 상심하지는 않은 듯 보였다.
마치 이러한 일을 먼 과거부터 예상했었다는 듯했다.
처용은 그런 과거의 일을 이야기하는 언문을 신기한 듯 바라봤다.
언문이 사랑했었던 과거 한반도의 나라는 사라졌다.
하지만, 그에게 문자를 내려받은 백성들이 남아 있었고 그들이 모여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바로, 지금의 한국이었다.
그리고 언문이 태룡사에 완전히 합류했을 때.
-너 지금 말 다 했어!?
-여기서 한 대 치겠다?
-정숙! 정숙하세요!
헌터 협회의 대형 스크린에서 나오는 뉴스.
금배지를 단 국회의원들, 이 나라를 이끌어야 할 정치인들이 멱살을 잡고 싸우는 장면이 방송되었었다.
하필이면 그 방송이 나올 때, 언문이 그곳을 지나쳤고 그 광경을 바라봤었다.
그 당시, 옆에 있던 태민이 언문의 눈치를 봤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 서로 파벌을 나눠서 싸우는 건 한결 같구만. 허허.
언문은 국회의원들이 싸우는 장면을 보며, 너스레웃음을 흘렸었다.
후세대의 나라에서 관리들이 싸우는 광경을 봤음에도,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는 벼루와 서책이 날아다녔는데…….
과거를 회상하듯, 추억에 잠긴 듯 보이기도 했다.
한때 이 한반도의 왕이었으면서, 이제는 성좌가 되어 나타난 인물.
그는 무려 신이 되어 돌아왔음에도.
-난 이제 왕이 아니네.
한국에서 벌어지는 대소사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그저 세상의 위기에 앞장서 헌터들을 돕는, 성좌로서의 책무만 다하는 이였다.
그런 언문이.
[세상에 영원한 건 없는 법이야.]
사라져 버린 과거의 국가를 회상하듯 떠올리며 말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그 말에.
“…….”
처용이 복잡한 눈빛을 지어 보였다.
언문의 말은, 처용이 현재 이룬 모든 것들도 포함되는 이야기였으니까.
지금껏 이룬 모든 것이 허무하게 사라질 수도 있다는 말이기도 했지만.
[허나, 이 역사가 지워지고 더욱 아름다운 역사가 만들어질 수도 있지 않은가?]
언문이 기대감 어린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러한 세계를 꿈꿨고 문자를 만들었네, 그리고…… 이 아름다운 경치를 내 눈으로 보고 있지.]
한반도에 세워졌던 국가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지금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자리했다.
비록, 언문이 기억하는 과거는 사라졌지만, 더욱 발전된 모습을 자랑하는 새로운 미래가 만들어졌다.
즉, 현재 이루어진 것들이, 오랜 시간을 맞이해 사라진다고 해도.
[역사란, 사라지는 게 전부가 아니라. 새로운 토대이자 초석이 될 수 있다.]
더욱 아름답고 발전된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언문이 과거와 역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자, 처용의 복잡한 눈빛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리고.
[내가 자네의 고민에 명확한 답을 해 줄 순 없지만, 이 한마디만은 전하고 싶네.]
언문은 진지한 목소리로 조금 전, 처용이 했던 질문을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어떤 결과가 도래해도, 그 누구도 자네를 탓할 수 없다는 것이야. 탓할 자격도 없고.]
미래에 어떤 결과가 도래하든, 어떤 미래가 다가오든, 그 누구도 처용을 탓할 수 없다.
설사, 이 우주가 끝장나는 종말이 도래한다고 해도, 그것이 처용의 책임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언문은 처용의 고민에 대해 명확하고 명쾌한 답을 해 주지는 못했다.
그저 자신의 생각만을 이야기해 주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군요.”
처용은 언문의 말에 마음속의 짐이 덜어진 듯, 작은 미소를 흘렸다.
동시에.
“무엇부터 해야 할지 감이 좀 잡혔습니다. 덕분입니다.”
-탁.
밝은 표정으로 자리를 박차 일어서며 말했다.
처용이 정자를 나가 산 아래로 향하려 하자.
[이 뒷방 늙은이의 잡담에 어울려 줘서 고맙네. 하하.]
언문이 처용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처용은 자신을 응원해 주는 듯한 언문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하고는.
-탓!
태룡사의 하단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이사님, 세계 헌터 회의를 열어야겠습니다.”
라이센스를 활성화하고 태민에게 연락을 걸어 메시지를 전했다.
세계 헌터 회의를 개최해 달라는 부탁.
다만, 지금껏 열렸던 세계 헌터 회의와는 달랐다.
이전에는 지구라는 세계만 포함되었다면.
“에스라 대륙, 무림 세계도 포함합니다.”
이제는 이 우주에 속한 모든 세계를 의미했다.
처용은 지금껏 없었던, 이 우주에 속한 세계들의 정상들이 모여 나누는 회담의 장을 원한 것이었다.
-어…….
태민은 생각보다 스케일이 큰 처용의 요청에 잠시 당황했지만.
-일단, 처용 님의 뜻을 전하고 준비해 보겠습니다.
이내 알았다며 처용의 말에 답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