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홀로 계승자-695화 (695/726)

#695화

올림포스의 주신이자 정의의 여신인 아테나.

그녀의 손에 신법의 존엄이 잡혔고 신법의 신명이 깃들자.

[정의와…… ‘공정(公正)’의 여신.]

아테나는 제게 새로이 깃든 신명이 무엇인지 스스로 자각하며 읊조렸다.

그녀가 본래 지니고 있던 신명인 정의.

그 신명에 신법이 깃들고 이에 영향을 받은 결과.

공정(公正)의 신명이 발현되었다.

신법의 선택을 받은 아테나가 새로운 신력과 권능을 느끼며, 왼손에 쥐어진 작은 망치를 바라볼 때.

[놀랍군, 설마 신법의 인정을 받은 자가 나타날 줄은…….]

악의 종주가 아테나의 손에 쥐어진 신법의 존엄을 보며 입을 열었다.

현재 상황에 놀라움을 드러내는 악의 종주의 목소리.

그 놀라움은 진심이었다.

악의 종주는 그 누구도 신법의 선택을 받지 못하리라 예상했었으니까.

야드가 조치한 봉인이 풀릴 리는 없으리라 확신했었다.

게다가.

[야드와 가까운 자식들도 아닌, 먼 후세대의 신격이 선택받을 줄이야.]

아테나가 신법의 선택을 받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주 희박한 가능성을 뚫고 누군가가 신법의 선택을 받는다?

그 후보라고 해 봐야, 태초신인 야드와 아주 가까운 존재들이었다.

창조의 권능을 지닌 기계 장치의 여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

야드의 명에 따라, 오랜 시간 순혈 의회를 짊어졌던 태양신 라 등.

태초신의 직계 신들만이 그 희박한 가능성에 포함되었었다.

그러나 신법이 선택한 이는 태초신과 멀리 떨어진 후세대의 신이었다.

성운을 짊어진 주신들과 오랜 세월을 살아온 대신들에 비하면 미숙한 자.

[신법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다.]

악의 종주는 어째서 신법이 아테나를 선택했는지 의문이라는 듯 읊조리고는.

-스륵. 콰아아!

아테나를 향해 파멸의 파도를 쏘아 보냈다.

그녀의 앞에 있던 여래가 반응하기도 전에.

[신법은 나를 선택했지만…… 나는 내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벅. 피이!

아테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신법의 존엄에서 황금빛이 점멸하자.

-촤라라! 촤락!

다시금 신법재판소의 사슬이 솟구치며 파멸의 파도를 저지했다.

[이건 선택받은 나 자신을 낮추는 열등이나 만용이 아닌, 스스로를 냉정하게 판단한 내 생각이다.]

아테나는 신법의 선택을 받은 스스로가 신법에 어울리는 자가 아니라 말했다.

자신은 신법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녀는 지금조차도 스스로에게 계속 되묻고 있었다.

정녕 자신이 신법을 짊어질 자격이 있는가?

성좌들을 대표하는 가장 고귀한 자가 될 자격이 있는 존재인가?

어째서…… 신법은 자신을 선택했는가?

계속 되묻고 되물어도 명확한 답을 구할 수 없는 의문이었다.

[그런 네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악의 종주가 그런 아테나에게 의문을 물었다.

신법의 선택을 받았음에도 스스로가 자신의 자격을 의심한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도 없는 미숙한 신격이 어떻게 신법의 선택을 받았는지 의문이었다.

그런 악의 종주의 물음에.

[과분하게도, 이런 내가 신법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테나의 입에서 망설임 없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자신의 의무를 절대로 저버리지 않는 성향.

지금껏 성좌로서, 주신으로서 살아온 아테나의 고집이자 신념이었다.

신법이 왜 미숙한 자신을 선택해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미숙한 나를 선택해 준 신법을 위해서라도,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할 뿐이다.]

신법이 자신을 선택한 이상,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한다.

성좌들이 저지른 과거의 잘못을 청산하고 잃어버린 명예와 고귀함을 되찾는다.

더는…… 잘못된 관습과 과오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조치한다.

이것이 신법을 짊어진 아테나의 각오였다.

[신법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달라지는 것은 없다.]

악의 종주가 손을 앞으로 뻗으며 파멸의 파도를 거칠게 내뿜었다.

다시 신법재판소의 사슬이 솟구치며 파멸의 파도를 저지했다.

하지만.

-으드드!

악의 종주가 손아귀에 힘을 주며 파멸의 힘을 더 강하게 끌어올리자.

-우드득! 쩌적!

황금빛 사슬이 갈라지고 깨지며 점점 부서지기 시작했다.

악의 종주가 발휘하는 파멸을 온전히 버텨 내지는 못한 것.

[미숙한 너 역시, 신법의 진정한 힘을 이끌어 낼 수 없으리라.]

-쿠구구!

악의 종주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흘리며 아테나를 압박하자.

[……!]

아테나가 인상을 쓰고는 신법의 존엄을 강하게 쥐며 신력을 끌어 올렸다.

그때.

-저벅.

아테나의 옆으로 여래가 다가왔다.

지금 여래에게는.

-스스스!

짙은 핏빛의 기운이 요동치며 천천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신법이 새로운 고귀한 자를 선택한 상황.

그로 인해, 역천을 짓누르는 여래의 봉인이 풀린 것이었다.

비록 힘으로 파멸을 이길 수는 없었다고 해도, 그 어떤 권능보다도 파멸을 오래 버텨 내었던 힘이었다.

과거 신계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악명 높은 신명.

그 강력한 힘이, 드디어 오랜 구속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여래는 이제 아무 제약 없이 역천을 다룰 수 있음에도.

[…….]

손아귀에 모인 핏빛의 신력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짧은 침묵 끝에.

-탁.

마지막 한 장 남은 핏빛의 부적, 역천부를 양손으로 쥐었다.

지금 여래의 머릿속에는.

-야드의 잘못이 크다고 말하는 네 녀석에겐, 아직도 증오가 느껴진다.

-스스로가 품은 과거의 증오도 떨치지 못하면서…….

공교롭게도, 악의 종주가 비웃듯 던진 말들이 상기되고 있었다.

여래는 짙은 질책이 느껴지는 그 말을 그냥 떨쳐 버리지 않고.

[…….]

신법의 선택을 받은 아테나를 잠시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생각을 마친 여래가 차분한 눈빛을 보이고는.

[나는-.]

-으득.

마지막 남은 역천부를 강하게 쥐며 입을 열었다.

마치, 양손으로 부적의 양옆을 잡아 찢어 내려는 듯한 모습.

[역천의 신명을 걸고-.]

자신의 신명, 역천을 걸고 맹세하는 여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윽고.

[역천을…… 버리겠노라.]

스스로의 신명, 역천을 버리겠다는 말과 함께.

-촤아악!

양손으로 잡은 역천부를 제 손으로 찢어 버렸다.

그러자.

-파아아! 사아아……!

여래에게서 점점 흘러나오던 핏빛의 기류가 크게 한 번 솟구치더니, 이내 먼지처럼 사라졌다.

성좌가 스스로 신명을 걸고 자신의 신명을 버린 상황.

이 우주에서 단 한 번도 없었던 그 충격적인 광경에.

[…….]

파멸의 기운을 내뿜는 악의 종주도.

[무슨 짓을!?]

[……뭘 한 겁니까?]

파멸의 기운에 맞서던 성좌들도.

바로 옆에 있던 아테나도.

모두가 경악을 내비쳤다.

하지만, 정작 충격적인 일을 저지른 당사자.

[내게 깃든 타락을 버리니, 머리가 맑아지는구나.]

여래는 사그라지는 핏빛의 신력을 보며 후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그라지는 핏빛의 신력과 역천의 신명.

그 안에는 혈선이라 불리던 과거 자신의 증오와 분노가 담겨 있었다.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쌓고 쌓아 오던 어두운 감정들.

지금껏 해소할 수 없었던, 그 곪아 버릴 대로 곪아 버린 마음속 종양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부질없는 분노와 증오를 놓아 버리니, 마음이 가벼워진다.]

-파사사……!

여래는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이것이…… 진짜 마지막 조건이었나? 참으로 악독하군. 태초신…….]

경악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테나를 응시하며 읊조렸다.

정확히는 그녀가 왼손에 쥐고 있는 황금빛 망치, 신법의 존엄을 바라봤다.

마치, 역천을 버림과 동시에 무언가를 절로 깨달았다는 듯한 모습.

핏빛의 신력과 역천의 신명이 완전히 사그라진 순간.

-파아아아!

새로 신법의 선택을 받은 아테나에게서 강렬한 황금빛이 터져 나왔다.

[내게 깃든 분노와 증오를 놓아야만, 타인을 용서할 자격이 생기니라…….]

그 모습을 본 여래가 자기 자신에게 메시지를 전하듯 읊조렸다.

지금 아테나에게서 벌어지는 현상을 알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지금껏 신법을 짊어진 자로서-]

그런 여래가 진지한 목소리로 아테나를 향해 말을 이었고.

[정의와 공정의 여신 아테나를, 새로운 신법의 주인으로 인정한다.]

이내, 그녀를 새로운 신법의 주인으로 인정한다며 말했다.

신법의 봉인이 풀리기 위한 마지막 조건.

그것은 신법이 고귀한 자를 선택한다면, 지금껏 신법을 짊어졌던 여래가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 인정은 단순히 말이나 감정을 전하는 게 아니었다.

여래가 새로 선택받은 고귀한 자를 인정하는 진정한 방법.

그것은 다름 아닌.

신법을 가장 혐오했던 자가 각성한 신명.

우주를, 신들을 죽일 듯이 증오했던 선인(仙人)이 타락하여 거머쥔 힘.

역천(逆天)의 신명을 스스로 버리는 것이었다.

역천의 신명과 함께, 마음속에 응어리진 증오와 분노도 함께 내려놓는다.

이것이 신법의 봉인이 풀리는 마지막 조건이었다.

타락한 힘을 버린 여래가 아테나를 새로운 신법의 주인으로 인정한 순간.

-스스스!

아테나의 손에 들려 있던 황금빛의 망치, 신법의 존엄이 발광하며 그 형태가 조금 변하기 시작했다.

작은 망치의 모습에서, 망치 머리가 조금 더 넓고 긴 형태로 변한 모습.

마지막으로.

-츠즈즛.

넓은 망치 머리 중앙에 새로운 문양이 새겨졌다.

양쪽 균형을 맞춘 저울처럼 보이는 문양이었다.

신법의 존엄이 아테나에게 영향을 받으며 그 형태가 변했을 때.

[……신법 아래, 모든 것은 동등하고 공정하다.]

아테나는 신법에 깃든 힘.

정확히는 신법에 의해 각성한, 자신의 새로운 권능을 자각하며 읊조렸다.

그리고.

[……정의와 공정의 신으로서 선고한다.]

-스륵. 우우웅.

황금빛 파동을 퍼트리는 망치, 신법의 존엄을 치켜들고.

[파멸을…… 불공정하다고 판결한다.]

악의 종주를 향해 겨누며 손목을 까닥였다.

마치, 재판장이 판결을 내리는 듯한 모습.

신법의 존엄이 아테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며 판결을 내리자.

-파아아!

망치 머리 밑부분에서 은은한 금빛의 파동이 넓게 퍼져 나갔다.

황룡이 펼친 결계, 악의 종주와 신들이 벌이는 전장 전체를 감싸는 모습이었다.

이내, 악의 종주와 솟구치는 파멸의 파도에까지 금빛의 파동이 닿자.

[……!]

악의 종주가 눈을 크게 뜨며 당황스러움을 드러냈다.

하지만, 곁으로 보이는 변화는 없었다.

성좌들에게 몰아치며 그들을 압박하는 파멸의 파도도 그대로였다.

악의 종주에게서 휘몰아치는 파멸의 힘 역시 변화가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받아쳐라! 역뢰!]

파멸의 파도에 도망치던 토르.

그가 구석에 몰리지 않기 위해, 묠니르로 파멸의 파도를 후려치자.

-파지지직! 콰릉! 파아!

묠니르에 휘감긴 역뢰가 강렬하게 타오르며 파멸의 파도를 받아쳤다.

본래는, 파멸의 파도를 일부분만 받아쳐 궤도를 틀고 그 틈에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파멸의 파도를 완벽하게 쳐내 밀어낸 상황.

[……이건?]

전장의 변화를 느낀 토르가 놀라움을 드러내며 읊조렸다.

본래 파멸의 힘과 맞설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

파멸을 마주할 때, 절대로 거스를 수 없고 넘을 수 없는 벽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악의 종주가 언급한 ‘격’의 차이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 드높게 느껴지는 벽, ‘격’의 차이가 누그러진 느낌이 들었다.

비단 토르만이 아닌.

[적귀살 - 혈화난무!]

-차캉! 차카캉!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무신이 방천극을 크게 휘두르며 혈화난무를 펼치자.

-콰아! 파아아-!

붉은 칼날의 폭풍이 솟구치며 주변에 몰아치던 파멸의 신력을 일부분 걷어 내었다.

[……닿을 수 있다!]

그 모습을 본 적무신이, 작은 미소를 흘리며 읊조렸다.

토르, 적무신에 이어.

-차캉! 콰아아!

각기 파멸의 파도에 맞서던 다른 성좌들 역시, 전장의 변화를 체감하고 있었다.

거스를 수 없는 절대적인 힘과 같았던 파멸에, 어느 정도 저항이 가능해졌으니까.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만들어 낸 이.

[이제, 격(格)의 우위를 점할 순 없을 것이다. 파멸을 불러오는 자여.]

아테나가 악의 종주를 향해 신법의 존엄을 겨누며 말했다.

[공정(公正)이라…… 격의 차이로 인한 불합리함을 동등하게 만든 것인가?]

-스르륵.

악의 종주가 전장 전체에 일렁이는 은은한 황금빛을 손으로 쓸어 보이며 읊조렸다.

새로운 신법의 주인, 아테나가 전장 전체에 선포한 권능인 공정.

그 권능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기울어진 저울추를 균등하게 맞추는 힘이었다.

한쪽으로 치우친 불합리함을 서로 동등하게 다시 맞추는 것.

그것이 아테나가 신법재판소로 발휘하는 공정의 힘이었다.

새로운 신법의 재판장으로서, 악과 불합리함에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지.

오롯이 신법을 관장하는 자로서 공정함만을 갖고 판결하겠다는 그 의지가 발현된 것이었다.

하지만.

[허나, 동등한 격으로 만든다 해도, ‘힘의 격차’를 줄이지는 못했구나.]

악의 종주는 아테나가 발현한 신법의 권능을 보고도 개의치 않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동시에.

-쿠구구구!

파멸의 힘을 더 끌어 올리자.

[크흡!]

[물러나라! 무리하지 말고 대처해야 한다!]

파멸의 힘을 받아치던 성좌들이, 다시금 밀려나며 일제히 물러섰다.

아테나의 공정은, 파멸의 힘에 작용하는 드높은 ‘격’만 낮춰 다른 이들과 동등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악의 종주가 지닌 방대하고 거대한 기운은 변함이 없었다.

그저, 공격이 통하지 않던 상대에게 공격이 통하게 되었을 뿐, 그 상대가 약해진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니, 이제 시작이다.]

-저벅.

여래가 아테나와 나란히 서며 입을 열었고.

[정해진 운명이 뒤바뀌는 것은…… 지금부터다.]

-샥. 우우웅!

여러 속성의 힘이 일렁이는 자연부를 소환해 손에 쥐었다.

자연부를 손에 쥔 여래에게는.

-스스스.

조금의 탁함도 없는, 창공처럼 푸른 신력이 일렁이며 타오르고 있었다.

나 홀로 계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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