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4화
야훼가 프로토를 완전히 몰아내고 할 일을 마친 듯, 그마저도 사라졌을 때.
“날 그냥…… 버리고 나갔어야지.”
엘리스가 처용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스스로 프로토에게 잡힌 엘리스는 처용이 상황을 이해하고 자신을 버릴 것이라 예상했었다.
자신은 악몽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일 뿐, 태초의 그릇을 품은 진짜 숙주는 레나였으니까.
즉, 가짜인 엘리스는 이제 사라져도 상관이 없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미안한데, 나 역시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가 아니라서 말이야.”
처용은 조금 전 레나가 엘리스에게 했던 대답과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엘리스의 의도는 파악했지만, 그녀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은 것.
“그리고 누가 멋대로 ‘집’을 나가 개고생하라고 그랬나?”
“크, 크크…… 이 녀석이 내 집이라…….”
이어지는 처용의 말에, 엘리스가 잠시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
“야훼는 말이야…….”
지금, 처용이 느끼는 의문을 알아채며 그에 대한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프로토를 막으러 나타난 야훼.
처용은 엘리스를 향해 말하면서도, 야훼가 사라진 장소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초신이 자신의 반복적인 업무를 대신하도록 만든 AI라고도 할 수 있어.”
빛의 신 야훼.
태초신이 공들여 창조한 선천적 신격이자, 태초신의 대리자라는 역할을 맡은 존재.
성운의 성좌들에게는 태초신과 가장 가까운 신격이라 불리기도 하는 존재였다.
성좌 중에서도 가장 냉철하고 가장 계산적인 성향을 지닌 신.
그가 보는 대상은 그 무엇이든 ‘도구’의 관점으로 보고 판단한다.
도움이 되는 도구이냐, 아니면 쓸모없는 도구이냐.
혹은, 당장 쓸데가 없어도, 훗날 필요해질 도구인가?
이것이 그가 만물을 판단하는 가장 대표적인 기준이었다.
“야훼는 냉철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태어난 거야.”
엘리스는 그런 야훼가 왜 그런 성향을 지녔는지를 이야기했다.
애초에 그는 냉철하고 계산적인 성향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다름 아닌, 그의 창조자이자 아버지인 태초신에 의한 영향이었다.
처용은 그런 야훼가 어째서 가장 완벽한 신격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자주 했었지만.
“태초신의 입장에서는 야훼만큼 일 잘하는 자식이 없는 셈이다.”
우주를 관리하는 신격으로서는 최적이라고 할 수 있는 판단력이었다.
냉철하고 이기적일 정도로 계산적이지만, 이 우주의 관리자가 갖춰야 할 가장 필요한 성향.
항상 야훼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던 처용도.
“태초신의 입장에서는 완벽한 놈이 맞겠지.”
레나의 말에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는 듯 답했다.
신명을 얻고 우주의 비밀과 가까워지니, 야훼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던 것.
다만.
“도와준 건 도와준 거고, 마음에 안 드는 건 마음에 안 드는 거다.”
그렇다고 하여, 야훼를 향한 시선이 좋아진 것만은 결코 아니었다.
-크흐흐, 자비의 대신 역시 그놈에겐 활용할 도구로 보였을 테니까.
처용과 생각을 공유하는 존재.
수라가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목소리를 흘렸다.
처용이 야훼를 싫어하는 이유는 회귀 전 보였던 그 냉혹함도 있었지만.
-네가 대신이 되었다 해도, 하계 출신임은 변함이 없다.
-하계종이면 하계종답게 조아리며 살아라! 여럿 피곤하게 만들지 말고.
먼 과거 신법재판소에서 벌였던 성운들의 만행.
그 만행에 가담하여 보살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만물을 도구로 보는 야훼의 입장은 이해하지만, 그런 태도에 공감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필요한 놈이겠지.’
처용은 수라의 말에 답하며 야훼에 대한 생각을 그만두고는.
“자, 집 나간 녀석도 다시 찾았으니, 이제 이 지긋지긋한 곳을 나가지.”
레나에게 힐링 스킬을 사용하고 있는 하워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악마들은 대부분 악몽 속에 가두었고 엘리스까지 되찾은 상황.
이제, 이 악몽 속에서 더 볼 일은 없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하워드가 처용의 말에 강하게 긍정하듯 답했고.
“빨리 나가자고.”
-우웅. 스르륵.
레나 역시, 엘리스를 향해 반투명한 에너지를 흘려보내며 말했다.
태초의 그릇에서 흘러나온 에테르가 엘리스를 감싸자.
-스스스……!
엘리스가 반투명한 영혼처럼 변하며 레나의 가슴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다시 태초의 그릇 속으로 엘리스를 이식시킨 것이었다.
엘리스가 다시 레나에게 깃든 것을 본 하워드는.
“조커.”
-파아아!
조커를 불러내며 가면을 씀과 동시에.
-우우웅.
검은 블랙홀을 형성하며 악몽을 빠져나갈 출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
처용이 악몽 속에서 엘리스를 막 찾기 시작했을 시점.
-콰아아아!
[크흡!]
[쓰러지지 마라!]
성좌들은 악의 종주가 쏟아 내는 파멸에 막아 내며 힘겨운 침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나마.
-촤라라! 촤랑!
신법재판소의 사슬이 파멸의 파도를 가장 앞서 저지한 덕분에, 성좌들의 부담이 조금 적어진 상황이었다.
신법재판소가 힘에 있어서 강력한 위력을 지닌 권능은 아니었지만.
-쿠구구! 촤라랑! 차캉!
악의 종주가 발휘하는 파멸과 같은 격을 지닌 권능이기에, 나름 유효한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파멸을 완전히 저지할 순 없어도, 어느 정도 상쇄해 보이는 모습.
악의 종주와 맞서는 성좌들의 부담이 조금은 적어진 상황이었다.
[야드의 잘못이 크다고 말하는 네 녀석에겐, 아직도 증오가 느껴진다.]
악의 종주는 가장 최전선에서 자신에게 맞서는 여래를 응시하며 말했다.
[스스로가 품은 과거의 증오도 떨치지 못하면서, 신법재판소를 온전히 다룰 수 있을 것 같으냐?]
지금, 악의 종주가 바라보는 여래에게서 느껴지는 감정.
성좌들과 함께 싸우는 그에게서 역설적이게도 성좌들을 향한 증오가 느껴졌다.
함께 싸우는 전우에게 증오와 원한을 가진 모습.
전장에 함께 선 이들에게 품어서는 안 될 감정이었지만.
[…….]
여래는 악의 종주의 말을 부정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 말이…… 어느 정도는 맞았음을, 아직 성좌들에 대한 원한을 끊지 못했음을 인정했으니까.
그 원흉이 태초신에게 있음을 자각하고 있음에도, 여래의 개인적인 원한은 또 별개였다.
과오를 범한 이들 역시 성운의 성좌들이기도 했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의 원한이 풀어진 건 아니지만, 상관없다.]
여래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개인적인 원한을 드러낼 정도로 어리석은 이가 아니었다.
게다가.
-미안합니다······. 자비의 대신.
-저희 역시 당신에게 잘못을 저지른 입장인데도······.
-그대들이 저지른 잘못을 자각하고 있다면…….
-저지른 잘못을 스스로의 손으로 씻을 기회를 준다라. 좋군!
과거 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전한 성좌들도 있었다.
주신이 살해되었음에도, 원한을 갖지 않고 성운의 잘못을 인정한 자도 있었다.
신들이 저지른 과오를 인정하고 그들을 질책한 이도 있었다.
구세대의 신들이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잃은 신법을 명예와 반성으로 되찾겠다며 노력하는 이도 있었다.
같은 성좌임에도, 오만함과 권위를 드러내지 않고 고귀함을 보인 이들이 있었기에.
[모든 선천적 신격들에게 과거의 업을 뒤집어씌우지 마라.]
신계를 휩쓸어 버렸던 혈선의 증오와 분노는 아주 조금씩 누그러졌다.
몇몇 차세대 신들이 보인 고귀함 덕분에, 선천적 신격들에 대한 편견 또한 옅어졌다.
여래가 신법의 존엄을 악의 종주에게 겨누며 말하자.
[그래 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다.]
-콰아아!
악의 종주가 파멸의 해일을 넓게 펼쳐 쏘아 보내며 답했다.
여래가 즉시 신법재판소의 사슬을 불러내 앞으로 펼치며 파멸의 해일을 저지하려 했다.
[소용없는 짓이다.]
-스릉. 촤아아!
그 모습을 본 악의 종주가 파멸의 검을 사선으로 내리치며 검은 선을 그려 냈다.
-차카캉-!
파멸의 검에 의해 신법재판소의 황금빛 사슬이 무참히 잘려 나갔다.
파멸의 파도를 가장 앞서 저지할 방어선을 무력화한 것.
여래가 다급히 신력을 끌어 올리며 신법재판소의 사슬을 다시 소환하려 했다.
하지만, 파멸의 해일이 이미 코앞까지 들이닥쳤기에,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그때.
[놈에게 같은 수법이 통할 리 만무하오.]
-스릉. 우우웅!
태무신이 신력을 응축시킨 언월도를 앞으로 겨누며 여래 옆에 섰다.
-콰아아!
[크흠!]
태무신의 언월도가 파멸의 해일 중심을 찌르며 아주 잠시 저지해 냈을 때.
[혈화난무!]
-스릉. 스릉. 콰아아!
방천극에 핏빛 폭풍을 휘감은 적무신이 파멸의 해일을 내려치며 가세했고.
[파공창!]
-샥! 콰아아!
창무신이 창날에 신력을 응축해 파멸의 해일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태무신을 포함한 세 명의 무신이 앞으로 나서며 파멸의 해일을 버티자.
-촤라라!
뒤늦게 여래가 소환한 신법재판소의 사슬이 솟구치며 파멸의 해일을 파고들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금빛의 파동이 파멸의 해일 안쪽에서부터 퍼져 나갔고.
-스스스.
거칠게 휘몰아치던 파멸의 힘이 점점 누그러졌다.
[강완! 아직인가!?]
그 모습을 본 적무신이 혈화난무에 힘을 집중하며 소리쳤다.
아직 나서지 않은 무신 중 한 명.
힘을 모으며 ‘강력한 한 방’을 준비하는 무신이 있었으니까.
[……3초!]
잠시 뜸을 들인 강완이 정신을 집중하듯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며 메시지를 전했다.
자세를 낮추며 주먹을 쥔 그의 오른팔은.
-쿠구구! 우드득!
강렬한 신력이 휘감기며 비대하게 부풀어 있었다.
평소의 세 배가 넘어갈 정도로 크게 팽창한 오른팔 근육이 돋보였다.
태산붕괴를 사용할 때보다도 더욱 강한 힘을 모으는 듯한 모습.
[흐아아압!]
-우득!
이내, 힘을 모은 강완이 주먹을 강하고 굳게 쥐며 기합을 내질렀다.
거칠게 휘몰아치던 신력이 오른팔에 스며들며 주먹 앞에 단단히 압축되었다.
그 모습을 본 이들, 태무신과 여래를 포함한 전방에 있던 모든 이들이 즉시 물러났다.
그 즉시.
[천지붕괴(天地崩壞)!!]
-후우욱! 타앙-!
포탄이 쏘아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강완의 주먹이 악의 종주를 향해 내질러졌다.
이번에 강완이 발휘하는 권능은 그가 주로 사용하는 ‘태산붕괴’가 아니었다.
태산붕괴, 태산을 무너뜨리는 것에 그치지 않은 더 강한 힘.
천지붕괴(天地崩壞).
하늘과 땅을 뒤흔들고 전방의 모든 적을 쓸어버리는 힘이었다.
-콰아아아-!
태산붕괴보다 적어도 세 배는 거대하고 강렬한 신력의 폭류가 악의 종주를 향해 쇄도했다.
거대하고 두꺼운 광선처럼 쇄도하는 천지붕괴의 힘이.
-파사사사!
잠시 저지되었던 파멸의 해일을 단번에 부수며 진격했다.
-스릉. 촤아아!
악의 종주가 눈앞에서 쇄도해 오는 천지붕괴를 향해 파멸의 검을 내리쳤다.
천지붕괴의 신력이 파멸의 검을 타고 좌·우로 갈라지며 사그라졌다.
파멸의 검이 천지붕괴를 저지한 듯 보였지만.
-쩌적.
돌연 파멸의 검에 날카로운 소리가 나며 균열이 일어났다.
파멸의 힘을 한 곳에 압축해 형성한 파멸의 검이 갈라진 상황.
[호오?]
그 모습을 본 악의 종주가 놀랍다는 듯한 목소리를 흘렸을 때.
-파차창! 쏴아아-!
파멸의 검이 부서지며 천지붕괴의 힘이 악의 종주를 휩쓸며 지나갔다.
강렬한 힘이 터지며 땅거죽을 크게 뒤집어 날렸고.
-콰아아!
그 힘이 하늘로 솟구쳐 오르며 강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크흐음……!]
천지붕괴를 사용한 강완이 붉게 달아오른 오른팔을 움켜쥐며 고통 어린 침음을 흘렸다.
권능의 힘을 한계 이상으로 끌어올려 내지른 반동이었다.
[자네는 뒤로 빠지게, 더 무리해서 힘을 쓰다간 신격이 무너질 것이야.]
신의가 즉시 강완에게 다가와 그의 오른팔에 침을 놓으며 후방으로 이끌었다.
강완은 신의를 따라 뒤로 빠지면서도 천지붕괴가 작렬하여 폭발하는 곳을 계속 응시했다.
아무리 악의 종주가 강력하고 거대한 적이라 해도, 천지붕괴를 정면으로 맞으며 휩쓸린 상황.
어지간한 신격은 단 한 방에 소멸시킬 법한 위력이었다.
단번에 처치할 수 없다고 해도, 분명 유효한 타격을 줬으리라 판단했다.
그러나.
[분명히 말했을 터-.]
천지붕괴의 폭발 속에서 악의 종주가 목소리를 흘렸고.
[그 어떤 위력을 지닌 권능일지라도, 내게 닿을 수 없다고 하였다.]
-파아아-!
파멸의 파동과 함께 폭발의 여파를 단번에 걷어 내며 악의 종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갑주 곳곳이 옅게 그어지고 갈라진 흔적이 보이긴 했지만.
-스스스.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파멸의 힘에 의해, 그 흔적마저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이걸 정면으로 맞았음에도……! 크흠!]
강완이 거의 멀쩡한 모습인 악의 종주를 보며 인상을 거칠게 찌푸렸다.
태무신을 포함한 성좌들 역시, 소리 없는 경악을 내비쳤다.
무심한 목소리를 흘린 악의 종주는.
[파멸의 나락.]
-스스스! 쿠구구!
천지붕괴의 폭발 속에서 은밀히 끌어모으던 파멸의 힘을 방출하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지금껏 그가 방출하던 파멸의 힘보다도 더욱 짙고 거친 파멸이 파도처럼 솟구치며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촤라라! 촤락!
여래가 즉시 신법재판소의 사슬을 소환하며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파차창! 차캉!
신법재판소의 황금빛 사슬은, 전과 다르게 파멸을 조금도 저지하지 못했다.
파멸에 닿는 즉시, 황금빛 사슬들이 파괴되며 먼지처럼 흩날렸다.
결국.
[역천부-.]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 여래가 남은 세 장의 역천부 중 하나를 손에 쥐었다.
그저 저장된 역천의 힘을 방출하는 게 아닌.
[깃들어라. 역천.]
그 힘을 신법재판소의 사슬에 부여했다.
과거, 천존에게서 신법재판소를 강탈했을 때와 같은 모습.
그러나.
[신법이 그 힘을 두 번 받아들일 리가 없지.]
악의 종주가 차가운 목소리를 읊조리자.
-파차차창! 차캉!
핏빛의 신력, 역천에 휘감긴 신법재판소의 사슬이 모두 부서졌다.
여래가 손에 쥔 역천부 역시 허무하게 사그라졌다.
[법칙의 권능인 신법은, 이제 역천과 섞일 수 없다.]
악의 종주의 말대로, 역천의 힘을 신법재판소가 거부한 듯한 모습.
그 반동으로 인해.
-파지직! 타앙!
여래의 손에 들려 있던 황금빛 망치.
신법의 존엄에서 전류가 튀더니 뒤로 날아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에 여래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고.
[끝이다. 원한을 버리지 못한 자여.]
-콰아아아!
파멸의 파도가 여래를 향해 쇄도했다.
그 순간.
[받아쳐라! 아이기스!]
-샥! 콰아아!
아테나가 아이기스를 치켜들며 여래의 앞을 가로막았다.
마치, 여래를 대신해 파멸의 힘을 가로막으려는 듯한 모습.
파멸은 성좌 여럿이 달려들어야 겨우 막아 내는 힘이었다.
심지어 지금의 파멸은, 이전보다도 더 깊고 강해진 상황.
그 힘을 아테나 홀로 가로막은 결과.
-쩌저적! 파차창!
빠르게 금이 가던 왼손의 방패, 아이기스가 금이 가며 순식간에 부서졌고.
[커-!]
-촤자자! 촤악!
아테나가 날카롭게 쇄도한 파멸의 칼날에 베이고 찔리며 적지 않은 부상을 입었다.
바로 눈앞에서 쓰러지며 뒤로 날아가는 아테나의 모습에.
[왜?]
여래가 저도 모르게 물었고.
[……미안합니다.]
그런 아테나의 입에서는 그저 미안하다는 대답만이 흘러나왔다.
[아테나!]
쓰러져 뒤로 날아가는 아테나를 헤르메스가 받아 내며 소리쳤다.
그 뒤로 올림포스의 치료 성좌인 아스클레피오스와 사하퀴엘이 다가왔다.
[……이런!]
아테나의 상태를 살핀 아스클레피오스가 인상을 거칠게 찌푸렸다.
파멸의 힘에 당한 상처 부위를 시작으로.
-파사사…….
점점, 파멸의 힘이 퍼져 나가며 그녀를 파괴하고 있었으니까.
[의미 없는 희생이다.]
악의 종주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흘리며 재차 파멸의 파도를 사방으로 쏘아 보냈다.
성좌들이 제각기 권능을 발현하며 파멸의 파도를 저지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콰아아!
쓰러진 아테나를 향해 쇄도해 오는 한 파멸의 파도 한 줄기.
[……역천부-.]
그 앞을 가로막은 여래가, 남은 두 장의 역천부 중 하나를 쥐었다.
[아귀룡의 분노!]
-크롸아아아!
거대한 핏빛의 용이 포효를 내지르며 나타나 파멸의 파도를 물어뜯으며 밀어내었다.
역천의 힘이 파멸을 잠시 밀어내는 듯 보였지만.
-쩌저적! 쩌적!
파멸과 힘 싸움을 벌이는 핏빛의 용이 점점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여래가 표정을 굳히고는.
[……역천부.]
결국, 마지막 한 장 남은 부적을 손에 쥐며 읊조렸다.
지금 자신이 물러서면 뒤에 있는 이들, 특히 아테나가 파멸에 흽쓸리기 때문이었다.
핏빛의 용이 절반가량 부서지고 여래가 마지막 역천의 힘을 발현하려는 순간.
-피이! 촤라라라-!
돌연, 여래의 앞에 금빛이 발광하며 신법재판소의 사슬이 벽처럼 솟구쳤다.
심지어, 겨우 저지하는 것에 불과했던 전과는 다르게.
-촤락! 촤라라! 파아!
악의 종주가 내뿜는 파멸의 파도를 모조리 몰아내었다.
갑작스러운 이변에.
[……!]
악의 종주가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의문을 표했고.
[……이건?]
여래 역시 의문을 드러냈다.
지금 발현된 신법재판소의 권능은, 자신이 발휘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스스.
바닥에 떨어졌던 황금빛 망치.
신법의 존엄이 허공에 떠오르더니.
-후우욱!
빠르게 허공을 날며 쇄도했다.
이윽고 질풍처럼 쇄도한 신법의 존엄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후우욱. 탁!
파멸의 공격을 받고 쓰러져 있던 아테나.
그녀가 힘겹게 들어 올린 왼손에 딱 잡혔다.
동시에, 신법의 존엄에서 일렁이던 황금빛이 아테나의 손을 타고 흘러 들어갔다.
-스스스.
황금빛 신력이 그녀의 몸을 좀먹던 파멸의 힘을 빠르게 누그러뜨렸고 이내 파멸을 몰아내었다.
그리고.
-우우웅.
정신을 잃었던 아테나가 금빛으로 타오르는 눈빛을 빛내며 고개를 들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