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홀로 계승자-693화 (693/726)

#693화

프로토(Proto).

순환의 포식자와 같은, 무한의 순환을 관장하는 존재.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닌, 법칙이자 현상에 가까운 이들이었다.

다만, 순리에 따라 움직이기만 하는 순환의 포식자와는 다르게.

프로토들은 지성(知性)이 있었다.

무한의 순환 과정에 문제가 생기거나, 이상 현상을 발견하면 유동성 있게 행동하는 존재들이었다.

순환의 포식자가 무한의 순환을 시작하고 집행하는 이들이라면.

프로토들은 그 과정을 감독하고 조율하는 관리자들이었다.

엘리스.

악몽으로부터 태어난 자아(自我).

본래, 악몽 속에서 만들어진 그녀는 악몽이 끝남과 동시에 사라졌어야 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진실을 깨달은 엘리스가 악몽의 통제를 스스로 벗어나 이변을 일으켰다.

즉각, 악몽에 개입하여 엘리스를 잡아냈고 순리대로 그녀를 없애 버린 줄만 알았었다.

그러나, 사라졌어야 할 엘리스는 계승자의 심상을 타고 악몽을 빠져나가 버렸다.

종국에는, 진짜 자신인 레나와 만나 그녀에게 깃들어 버렸다.

그로 인해 수많은 변수까지 발생한 상황.

하지만, 당장 엘리스를 회수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프로토들은 무한의 순환이 다가올 때가 아니면, 우주에 개입할 수 없는 존재들.

순리에 따라 엘리스를 회수하고 싶어도, 회수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다만, 악몽 속에서 유출된 데이터가 우주로 흘러 들어갔다는 명목으로 천천히 개입을 시도하고 있었다.

게다가 순환의 시기까지 점점 코앞으로 다가오는 상황.

이를 빌미로, 악몽부터 시작해 천천히 이 우주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탈주한 엘리스가 제 발로 악몽 속에 돌아왔다.

심지어.

-나를 빌미로 이 우주에 개입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녀는 프로토들이 자신을 빌미로 이 우주에 점점 개입하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런 프로토들을 막기 위해, 제 발로 돌아온 것.

이번 일의 수습을 맡은 두 번째 프로토는 순리에 따라 엘리스를 인도했다.

이제 악몽은, 엘리스가 최후를 맞이했던 과거를 반복시켜 그녀를 흔적도 없이 소멸시킬 것이다.

하지만, 그때가 머지않았을 순간, 계승자가 나타났다.

물론, 계승자가 나타났다 해도 상관이 없었다.

프로토는 명분과 순리대로 움직였고 그런 그를 막을 방법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촤아아!

계승자, 처용의 검격에 공간이 갈라지며 드러난 검은 우주와 금빛의 별들.

그곳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기류가 프로토의 앞을 가로막았다.

본래라면, 프로토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이 흩어지며 사그라지거나 튕겨 나가야 정상이었지만.

-탁.

프로토의 발길은 검붉은 기류에 가로막혀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불가능한 일일 텐데…….]

엘리스를 회수하기 위해 나선 두 번째 프로토.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경악이 일렁이는 목소리를 읊조렸다.

순전히 경악스러운 감정만 내비쳤다기보다는, 의문과 호기심 또한 드러내는 모습이었다.

그런 프로토의 반응에.

“아니, 가능하지. 이미 같은 방법을 쓰는 존재가 있잖아?”

-스릉. 우우웅!

처용이 태극천체일도를 쥐고 두 번째 발도를 준비하며 입을 열었다.

천칭의 조율자들을 저지할 방법.

악의 종주에게서 무한의 순환이라는 우주의 비밀을 들었을 때부터 처용이 했었던 고민이었다.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닌, 법칙과 현상에 가까운 존재들.

죽음과 파멸이라는 개념조차 통하지 않는 그들을 저지할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었다.

다만, 고민을 잇던 도중 떠오른 한 가지 의문.

악의 종주는 어떻게 천칭의 조율자들을 저지하고 그들을 견제해 왔는가?

그가 발휘하는 강력한 권능, ‘파멸’조차도 천칭의 조율자들을 없앨 수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수로 그들을 저지한 것인가?

그 해답은.

-네가, 네 손으로 새로운 ‘무한의 순환’을 만들려 한다는 것을.

처용이 악의 종주와의 대화를 통해 도출했었던 답.

-이 우주를 무한히 가둬 놓고 끊임없이 반복시키는 ‘시간의 감옥’이다.

악의 종주가 추구하는 진정한 목적을 간파했을 때 얻었던 답.

그 해답 속에 있었다.

새로운 무한의 순환을 어떻게 무슨 수로 만들려는 것인가?

그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이 우주 전체를 파멸의 기운으로 뒤덮여 멸망시키는 것.

우주가 멸망에 도래하면, 순리에 따라 이 우주가 다시 재생한다.

단, 순환의 포식자가 우주를 분해하고 프로토들에 의해 다시 재창조되는 것과는 달랐다.

정상적인 무한의 순환은 우주를 부수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

반면에, 악의 종주는 우주를 부수고 기존의 것을 다시 복구하는 개념이었다.

새로운 창조와 옛것의 복구, 이것이 차이점이었다.

당연히, 무한의 순환을 거스르려 하는 악의 종주를, 프로토들이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그러나 프로토들은 우주를 자신만의 방식대로 파멸시키고 재생시키려는 악의 종주를 저지하지 못했다.

그저 단순히 순환의 때가 되지 않아 우주에 개입할 수 없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검은 대지…… 파멸이 도래하여 멸망해 버린 세계에는 개입이 불가능한 것이겠지.”

처용이 짐작한 바를 읊조리며 말하자.

[…….]

그 말을 들은 프로토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침묵했다.

그러한 프로토의 반응에, 처용은 되려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이제야 명확히 이해가 된다.”

완전히 ‘파멸’의 영역이 된 우주 속 세계는, 오롯이 악의 종주만의 세계가 된다.

이 우주에서 분리된 독립적인 세계가 되었다고 볼 수 있기에, 프로토들이 더더욱 개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크 – 크타니드, 놈이 왜 이 우주 전체를 파멸로 뒤덮으려 하는지를…….”

[순환을 거스르려는 자가 쓰는 대처법인가? 그렇군.]

프로토가 처용이 말한 가정을 인정하듯 말했다.

우주가 속한 세계를 강력한 신명과 의지로 뒤덮어 독립시키는 것.

놀랍게도, 순환의 포식자와 프로토는 그러한 세계에 개입이 불가능했다.

독립되었다고 해도, 우주 내부에 속해 있었으니까.

지금, 처용이 사용한 방법 역시 이와 같았다.

-스릉. 우우웅.

스스로의 의지를 현실에 관철해 내는 권능인 태극천체일도.

그 권능이자 의지인 태극천체일도는 처용이 신명을 각성하자, 그 힘이 더욱 강해진 상황.

악의 종주가 파멸을 이용해 독립적인 공간을 형성한 것처럼.

-우우웅.

처용 역시, 태극천체일도를 이용해 공간과 세계를 독립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해당 공간에 징벌의 선고를 펼치는 것과 같았다.

비록, 세계 전체가 아닌, 공간의 일부만을 자신의 영역으로 독립시킨 것에 불과했지만.

“네놈 하나만을 저지하기엔 충분해.”

처용은 눈앞에 있는 프로토 한 명 정도는 충분히 저지할 수 있다 판단했다.

[이 또한, 순리에서 어긋나는 일이다.]

-스륵. 파지직.

상황을 파악한 프로토가 처용이 베어 낸 공간에 손을 대 보며 말하자.

“순리는 지랄, 그래서 어쩌라고?”

그 말에, 처용이 실소를 머금으며 답했다.

“이 우주가 인정한 내 신명, 멸천은 순리와 법칙을 부수는 자다.”

처용이 공간을 독립시키고 프로토들을 저지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

바로 처용의 신명인 멸천(滅天)이, 순리를 거스르고 법칙을 부수는 신명이기 때문이었다.

“네놈들 입장에서는 잘못 만들어진 계승자인 것 같은데, 나도 없애 볼 테냐?”

스스로의 신명을 들먹인 처용이 프로토를 쏘아보며 말하자.

[순리에 따라 태어났으면서도, 순리를 거스르려 한다라…… 혼란스럽군.]

두 번째 프로토는 혼란스럽다는 듯한 목소리를 흘렸다.

우주의 법칙을 거스르는 처용에게 용납할 수 없다는 듯한 분노보다는.

[지금껏, 이러한 경우는 일절 없었다.]

처음 발생하는 일이기에 혼란스럽고 또 흥미롭다는 듯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허나, 어떤 이유가 있든 간에, 악몽 속의 정보가 멋대로 날뛰는 일만큼은 간과할 수 없다.]

이내, 흥미로운 감정과 혼란스러움을 싹 지우고 진지한 분위기를 드러냈다.

-스륵.

프로토가 처용이 베어 낸 공간에 손을 얹으며 가볍게 손짓하자.

-스스스…….

태극천체일도가 만들어 낸 공간이 점점 희미해지며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 모습을 본 처용이 태극천체일도를 굳게 쥐며 프로토를 노려보고는.

“레나, 서둘러라.”

레나를 향해 서두르라 독촉했다.

“나는 지금……! 진짜 서두르고……! 있다고!”

엘리스를 붙잡아 뜯어내던 레나가 힘겨운 목소리를 흘리며 엘리스를 잡아챈 손에 힘을 더했다.

[고통을 자처하지 않는 게 좋다.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저벅.

고통을 견디는 레나를 본 프로토가 잔잔한 목소리를 흘리며 앞으로 한 발 다가왔다.

“태극천체일도-.”

-지잉!

처용이 그 모습을 보고는, 태극천체일도가 신력과 의지를 가득 담아 발도를 준비했다.

칼날의 윗부분이 살짝 드러나고 발도하기 직전.

-피이-!

돌연, 프로토의 앞에 강렬한 빛줄기가 나타나 폭발하며 터져 나갔다.

심지어 그냥 터진 것이 아닌.

-피이! 콰쾅! 콰아아아!

빛무리의 폭발은 처용과 레나, 엘리스, 하워드 쪽으로 퍼지지 않고 오롯이 프로토에게만 향했다.

[……이건?]

-키이이!

가만히 서서 쏟아지는 빛의 폭발을 갈라 내던 프로토가 의문을 표했다.

그가 힘으로 빛의 폭발을 갈라 내기보단, 빛의 폭발이 프로토에게 닿지 않는 듯한 모습.

그때.

-키잉! 파아아!

빛의 폭발 속에서 터진 더 강렬한 폭발과 함께.

[올 포 원!]

-후욱!

전신이 새하얗게 타오르는 누군가가 프로토를 한 손으로 밀쳐 내며 나타났다.

[흠?]

-타악!

놀랍게도, 빛이 일렁이는 손아귀에 의해, 프로토가 뒤로 크게 밀려나며 침음을 흘렸다.

처용의 태극천체일도조차도 고작 발걸음을 저지하는 것에 그쳤던 프로토를 크게 밀쳐 낸 모습.

그 모습에 처용이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움을 드러내고는.

“……빛의 신?”

이내, 프로토를 저지하고 밀어낸 이가 누구인지 알아보며 읊조렸다.

타오르는 빛이 뭉쳐져 만들어진 사람 형상의 실루엣과 그 주변에 일렁이는 형형색색의 오라.

그 육체에서 태양처럼 줄기줄기 뻗어 나가는 새하얀 빛의 기류들.

평소 야훼가 보이는 모습보다도 더욱 강렬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갑작스레 악몽 속에 강림한 야훼는 처용과 그 뒤에 있는 레나, 하워드를 응시하고는.

[…….]

마지막으로 인피니티 하이브 안에서 점점 빠져나오고 있는 엘리스를 응시했다.

하얗게 불타오르는 야훼의 눈동자가 잠시 엘리스를 바라보고는.

[아직 우주의 수명이 남았다! 어째서 함부로 개입하는 것이냐!]

프로토를 강하게 노려보며 소리쳤다.

[당장 물러나라! ‘천칭의 조율자’여! 이건 그대들이 정한 법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피이이!

야훼가 퍼트린 빛이 프로토의 주변을 감싸며 위협적으로 타오르자.

[넌 이 우주의 ‘최고 관리자’가 아니다. 내게 명령할 권한은 없다.]

프로토는 태연한 목소리로 야훼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가 말하는 최고 관리자란 다름 아닌 태초신을 의미하는 말.

이 우주의 태초신이 아니면, 프로토에게 강제적인 명령을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최고 관리자를 ‘대리할 권한’은 있지.]

야훼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반박하듯 말했다.

[악몽의 입구를 멋대로 개방한 것도, 악몽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 우주에 개입한 것도! 모두 법칙 위반이다!]

강하게 질책하며 프로토에게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는 야훼의 태도에.

[이 또한, 예상 밖이군.]

프로토가 흥미롭고 또 곤란하다는 듯한 목소리를 흘렸다.

[알았으면, 당장 이 우주에서 꺼져라!]

-스륵. 파아아!

이윽고 야훼가 프로토 주변을 감싼 빛을 강하게 터트리며 섬광을 일으키자.

[……이렇게 시간을 지체해 봤자, 의미 없는 발버둥일 뿐이다.]

-스스스.

그 섬광 속에 갇혀 점점 사라지는 프로토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무한의 순환은 다가온다. 그때가 머지않았으니…… 이번은 그냥 물러나지.]

마지막 말을 남긴 프로토가 이내 야훼의 빛 속에 완전히 휩쓸려 사라졌다.

판데모니움 내부를 환하게 밝히던 야훼의 빛이 점점 사그라졌을 때.

“흐아아-압!”

레나가 강한 기합을 내지르며 엘리스의 상반신을 끌어안고는.

-우드드드-!

인피니티 하이브에 박혀 있는 그녀를 완전히 뜯어내었다.

상반신의 아랫부분이 나뭇가지로 변한 모습.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보기 힘든 모습이었지만.

“어으…… 이런 무모한 녀석이……!”

엘리스의 입에서 자신을 구해 낸 레나를 향한 질책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말 잘 듣는 착한 아이가 아니라서 말이야……!”

숨을 몰아쉬던 레나가 그런 엘리스의 말에 반박하며 미소를 흘렸다.

엘리스는 고집을 부리는 자기 자신, 레나를 바라보며 옅은 숨과 미소를 흘리고는.

“당신에게는…… 내가…… 달갑지 않은 존재일 텐데…….”

고개를 들고 야훼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프로토에게 붙잡혀 있던 자신을 도운 것인지 의문을 표한 것.

그 질문에.

[허나, 필요한 존재지.]

야훼에게서 곧장 대답이 들려왔다.

[이 우주를 위해 너를 선택한 만큼, 네 쓸모를 다해야 할 것이다.]

우주를 위해 엘리스를 선택했다는 야훼의 대답.

“……그냥 잘 부탁한다고 하면 될 것을, 좀 이쁘게 말하면 어디 덧납니까? 대리자.”

엘리스는 그 대답의 의미를 알아들었다는 듯, 작은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놈들의 개입을 계속 막아 주시죠. ‘파멸’은 어떻게든 해 볼 테니.”

[…….]

이어지는 엘리스의 말에 야훼가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침묵하고는.

-피이이! 파아……!

터지는 빛과 함께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나 홀로 계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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