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홀로 계승자-689화 (689/726)

#689화

아테나와 토르를 보호하듯 나타난 검붉은 문자의 부적.

그 부적이 파멸의 검에 갈라진 순간 쏟아진 핏빛의 재앙.

[……역천?]

그 재앙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본 아테나가 떨리는 목소리를 읊조렸다.

수천 년 전, 신계를 파괴하며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재앙이었으니까.

아테나의 기억 속에 강렬히 남아 있는 그 핏빛의 폭풍이.

다시는 볼 수 없을 줄 알았던 재앙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아니, 최근에 그 재앙을 눈으로 한 번 더 보기는 했었다.

바로, 판데모니움에 갇힌 태초의 마수, 니알라 – 크타니드를 구할 때.

그 당시의 여래는 봉인되어 쓸 수 없다고 알려진 역천을 발휘했었다.

그리고 지금.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다시 역천의 권능을 발현한 여래가 악의 종주 앞에 나타났다.

[봉인된 것이 아니었나?]

[어떻게?]

다른 성좌들이 그런 여래의 역천을 보며 의문을 표할 때.

[……세 번 남았군요.]

아테나가 여래를 바라보며 눈치챘다는 듯 말했다.

이전, 여래의 역천을 다시 마주했을 때.

-역천의 신명을 봉인하기 전에, 따로 저장해 두었던 힘입니다.

그가 어떻게 역천을 발휘할 수 있었는지, 직접 들었으니까.

아마, 그의 왼손에 잡혀 있는 세 장의 부적이, 그 저장된 힘으로 보였다.

[본래는 천황을 잡기 위해 모든 걸 사용할 생각이었습니다만.]

여래는 아테나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때.

[……그런가? 천황이 당했군.]

핏빛의 용들이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악의 종주가 목소리를 흘렸고.

-콰아아아! 푸화아-!

파멸의 칼날들이 튀어나와 핏빛의 용들을 도륙 내며 폭풍을 걷어 내었다.

[남은 건 고작 세 번인가?]

조금의 상처도 입지 않은 악의 종주가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역천에 기습을 당했음에도, 조금의 피해조차 받지 않은 모습.

그 모습을 본 성좌들의 표정에 경각심이 일렁였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과거 여래가 발휘했던 역천이 어떤 위력을 지녔는지 잘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악의 종주는 그런 역천의 힘조차도 통하지 않는 존재였다.

[네가 역천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다 해도, 날 막을 수 없다.]

핏빛의 역천을 완전히 걷어 낸 악의 종주가 정해진 사실을 말하듯,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천만으로는 널 이길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여래는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악의 종주는 완전한 형태를 갖추기 전에도 역천에 피해를 입지 않았었으니까.

그 당시보다도 더 위협적이고 거대한 힘을 내뿜는 지금의 그에게 역천만으로는 피해를 주기 힘들었다.

하지만.

[역천으로만 맞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스르륵.

여래를 악의 종주를 차분히 관찰하며 읊조리고는 세 장의 역천부를 허공에 띄워 뒤로 물렸다.

동시에.

-스륵. 탓.

오른손에 하얀 문자가 빛나는 부적 여덟 장을 소환해 쥐었다.

그 순간.

[내리쳐라! 아스트라페!]

-피이! 콰르르릉!

샛노란 벼락을 휘감은 한 자루의 창, 아스트라페가 하늘 위에서 유성처럼 떨어져 내렸다.

-콰르릉! 콰아아!

악의 종주 머리 위로 정확하게 떨어지는 아스트라페가 뇌전의 폭발을 일으켰고.

[성화의 화염이여.]

지면에서 폭발하는 화염이 뇌전의 폭발에 섞여 들며 그 위력을 더 거세게 키웠다.

벼락과 화염이 악의 종주를 휘감으며 타오르듯 폭발할 때.

[솟구쳐라. 휘감아라.]

-쿠구! 콰드드-!

폭발하며 갈라지는 지면이 들썩이더니, 이내 길게 솟구치며 그 폭발을 휘감았다.

연쇄 폭발을 일으키는 화염과 뇌전을 흙벽으로 휘감아 가둔 듯한 모습.

[아버지를 끌어내릴 때 이후로, 이렇게 서로 합을 맞춘 건 처음이군.]

-후욱. 탁!

되돌아 날아오는 아스트라페를 잡은 제우스가 흙벽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만큼, 더 큰 일이 일어났으니까요.]

그런 제우스의 옆으로 올림포스의 대신급 성좌, 헤스티아와 데메테르가 나타났다.

그때.

[……이런!]

돌연, 폭발 소리가 들리는 흙벽을 노려보던 제우스가 경각심 어린 침음을 흘렸다.

-스륵. 차카캉!

그가 쥐고 있던 아스트라페가 짧게 점멸하더니, 검은 대낫, 스퀴테의 원래 모습으로 변했다.

스퀴테를 쥔 제우스가 신력을 내뿜으며 무언가에 대비하려 하기도 전에.

-촤아아!

악의 종주를 가둔 흙벽과 그 안에서 폭발을 일으키는 뇌전, 화염이 세로로 쩍 갈라지며 벌어졌고.

-지잉!

길고 얇은 칠흑의 선이, 주변을 가로로 크게 베며 지나갔다.

하필이면 가장 가까이 있던 제우스와 두 여신이 그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촤아아!

경악 어린 표정으로 허리가 잘려나간 채 쓰러진 세 명의 성좌.

대신급 성좌 셋이 허무하게 당해 버린 듯 보였지만.

-스르륵.

이내, 그들의 모습이 환상이었다는 듯, 연기처럼 흩어지며 사그라졌다.

-저벅. 탓.

상처 하나 없는 모습으로 걸어 나온 악의 종주가 환상처럼 흩어지는 그 모습을 보고는.

-스릉. 촤아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빈 허공을 향해 파멸의 검을 내리쳤다.

그러자.

-차캉! 촤자장!

거울이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허공이 반으로 갈라졌고.

[크윽!?]

-탓!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난 여신, 츠쿠요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악의 종주가 그런 츠쿠요미를 향해 파멸의 검을 사선으로 내리친 순간.

[생령의 수호자여!]

-탓! 쏴아아아!

츠쿠요미의 옆에 나타난 오시리스가 땅에 지팡이를 내려찍으며 모래 해일을 일으켰다.

-쿠아아!

모래 해일이 우람한 근육질의 골렘을 형성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탓! 쿠드드!

골렘이 우악스러운 두 팔로 파멸의 검날을 딱 잡아챘다.

악의 종주가 내리친 파멸의 검이 골렘의 손에 잡혀 아주 잠시 저지되었고.

-파사사사! 스릉! 쾅!

이내, 파멸의 기운에 닿은 골렘이 사그라지며, 뒤늦게 파멸의 칼날이 지면을 내리쳤다.

오시리스의 도움을 받은 츠쿠요미가 가까스로 몸을 피했을 때.

[열풍의 창!]

-슈욱! 콰아아!

호루스가 악의 종주 뒤에 나타나 손에 든 창을 내던졌다.

악의 종주가 파멸의 검을 내리치며 빈틈을 보인 순간을 노린 공격.

하지만, 호루스가 던진 창이 파멸의 기운에 닿자.

-파사사…… 까강!

창날에 휘감긴 화염 폭풍이 허무하게 사그라지며 창이 튕겨 나갔다.

[닿는 것조차도 불가능하다니……!]

호루스는 기습 공격이 가로막힌 즉시 뒤로 크게 물러나며 침음을 흘렸다.

다수의 성좌들이 추가로 나타나 악의 종주를 잠시 저지했을 때.

[으……! 이 정도로 지독할 줄이야.]

아테나와 토르 옆에 나타나 빛을 내뿜으며 인상을 찌푸리는 성좌.

새하얀 꽃과 깃털이 엮여 만들어진 화관을 쓰고 미카엘보다 어린 인상이 돋보이는 대천사.

네 쌍의 날개를 지닌, 미카엘과 같은 에덴의 다섯 하늘 중 한 명.

[저 사악한 기운에 너무 오래 노출되면, 저도 걷어 낼 수 없어요.]

회복의 대천사 사하퀴엘이, 아테나와 토르에게 일렁이는 파멸의 기운을 걷어 내며 말했다.

[제길, 미리 준비를 해 오지 않았으면, 아무것도 못 했겠군.]

그녀와 마찬가지로, 파멸의 힘에 노출된 무신들에게 침을 놓으며 말하는 성좌.

신의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성좌들을 좀먹는 파멸의 힘을 중화하며 읊조렸다.

이전, 검은 별들에게 기습당해 소멸할 뻔했던 무신전의 성좌, 패웅무신.

신의는 그 당시 처용과 함께 패웅무신을 치료하며, 파멸의 힘을 독자적으로 연구했었다.

그 결과, 신력을 담은 침술로 파멸의 힘을 어느 정도 중화시키는 방법을 터득했다.

다만.

[치명상만큼은 피하게, 저것에 제대로 당하면 나도, 대천사 아가씨도 회복시킬 수 없으니까.]

신의가 태무신과 다른 무신들을 향해 경고하듯 말했다.

파멸의 힘이 남기는 흔적을 어느 정도 걷어 내거나 중화하는 것만 가능할 뿐.

그 힘을 완전히 없애거나 치료하는 건 불가능했다.

[감사합니다. 사하퀴엘.]

아테나가 사하퀴엘의 회복을 받으며 그녀에게 감사를 전했다.

[아테나! 괜찮아?]

그런 아테나의 곁으로 헤르메스가 나타나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흘렸다.

이곳을 지원하기 위해 나타난 성좌들, 그들을 데려온 것이 바로 전령신 헤르메스였다.

아테나는 헤르메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고는.

[이곳엔 왜 오셨습니까?]

어느새 옆에 나타난 제우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올림포스로 돌아왔음에도, 아테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순순히 물러난 전 주신 제우스.

아테나는 왜 제우스가 다른 신들과 함께 전장에 나타난 것인지, 순수한 의문이 들어 물은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멋있는 애비 노릇 좀 하겠다면, 믿어 주겠느냐?]

제우스가 아테나를 향해 작은 미소를 보이며 답하자.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감사하다고 답하겠습니다. 전 주신.]

아테나는 제우스가 농담처럼 한 그 말이 나름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귀염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주신 같으니라고.]

제우스가 딱딱한 목소리로 답하는 아테나의 반응에 조금 섭섭한 목소리를 흘릴 때.

-콰아아아!

악의 종주에게서 뿜어져 나온 파멸의 힘이 폭풍처럼 몰아치며 주변을 휩쓸었다.

날카로운 파멸의 폭풍이 넓게 퍼지며 그 영역을 점점 넓혀 나가자.

[팔괘봉마진 - 억압!]

-스르륵. 화아아!

여래가 미리 소환해 둔 명환부로 팔괘의 진법을 그리며 파멸의 폭풍을 빛으로 휘감았다.

동시에.

[화염부, 광명부, 토류부.]

-스르륵. 스륵. 스륵.

세 종류의 자연부를 각각 여덟 개씩 더 소환하여 팔괘의 진법을 추가로 형성하고는.

[선법 – 파마의 화로.]

-화르륵! 콰아아-!

새하얀 불길을 일으키는 넓은 화로를 만들며 불기둥을 일으켰다.

원형의 화로가 파멸의 폭풍을 감싸 타오르며 저지하는 듯한 모습.

하지만, 아무리 여래가 선술로 형성한 파마의 불길이라고 해도.

-파사사……!

악의 종주가 내뿜는 파멸의 힘을 온전히 막아 내기란 불가능했다.

파마의 불길이 파멸을 맞아 점점 사그라졌고.

-쩌적. 쩍-!

견고하게 형성한 팔괘의 진법 역시, 이 가며 깨지기 시작했다.

그때.

[받아쳐라, 역뢰!]

사하퀴엘에게 회복을 받고 일어선 토르가 가장 앞장서 달려 나가며 벼락을 내뿜었다.

옆에 있던 아테나 역시, 토르를 따라 여래가 형성한 화로를 향해 신력을 내뿜었다.

파멸의 폭풍을 저지하는 벽, 여래의 선술에 힘을 보태는 모습.

그런 둘의 모습에, 다른 성좌들 역시 제각기 권능을 발현하며 힘을 보탰다.

그러나.

[너희들의 격은, 결코 내게 닿을 수 없다.]

-저벅. 탁.

앞으로 걸어간 악의 종주가 파마의 화로에 손을 뻗으며 읊조린 순간.

-파아아아……! 파창! 창!

여래가 형성한 파마의 불길과 팔괘의 진법이 단번에 깨져 나갔고.

[크윽!?]

[윽!]

힘을 보태던 성좌들이 모두 뒤로 밀려나며 침음을 흘렸다.

화로의 불길이 모두 사그라지며 파멸하자.

-콰아아!

가로막혀 있던 파멸의 폭풍이 솟구치며 성좌들에게 쇄도했다.

그 모습을 본 여래가 옆에 부유하는 검붉은 부적을 응시했다.

다가오는 파멸의 폭풍을 저지하기 위해선, 그만큼 강력한 힘을 사용해야만 했다.

다만, 이제 남은 역천부의 개수는 고작 세 장.

여래는 역천부를 보며 찰나의 순간 고민하다가.

[……‘격’이라.]

방금 악의 종주가 한 말을 떠올리며 읊조렸다.

이내, 역천부로 향하던 눈길을 거두고 오른손을 들었다.

-피이!

여래의 오른손에서 황금빛이 점멸하며 작은 망치가 나타나 쥐어졌다.

[그것이 핵심이었나?]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한 여래의 목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촤라라라!

황금빛의 사슬들이 나타나 파멸의 폭풍을 향해 쇄도했다.

여래는 남은 역천부를 쓰지 않고 신법재판소의 권능을 사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신법재판소의 사슬은 여래가 다루는 선술보다 그 위력이 높다고 볼 수 없는 권능이었다.

당연히, 악의 종주가 내뿜는 파멸의 힘을 저지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차카캉! 쿠구!

놀랍게도 신법재판소의 사슬이 파멸의 폭풍을 가로막으며 저지했다.

악의 종주가 언급한 ‘격(格)’.

그가 말한 격이란, 쉬이 말해 경지(境地)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하위 신격과 대신급 신격이 발휘하는 권능은 같은 권능이라 해도, 확연한 차이가 있는 법.

그 차이가 바로 신격의 경지, 즉 격의 차이였다.

악의 종주는 태초신과 동등하다고 할 수 있는 존재.

태초신보다 낮은 격의 성좌들이 발휘하는 권능으로는 악의 종주에게 격에 닿을 수 없었다.

하지만.

[파멸이 태초신과 동등한 ‘격’을 지닌 힘이라면, 신법재판소 역시 마찬가지다.]

신법재판소는 달랐다.

신법(神法).

우주의 규율과 법칙을 정립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명이자, 태초신이 직접 만든 권능.

악의 종주가 발휘하는 파멸과 동등한 선상에 놓인 권능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허나-.]

악의 종주는 여래가 깨달은 사실에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신법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다루지도 못하는 너는, 그 격을 온전히 이끌어 낼 수 없다.]

-쿠구구!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파멸의 힘을 더 끌어내 밀어내며 말했다.

-쩌저적! 쩌적!

파멸의 폭풍을 저지한 듯 보였던 신법재판소의 사슬에 점점 금이 가더니.

-파창! 차카캉!

무참히 끊어지며 터져 나갔다.

[그 누구도 신법의 진정한 힘을 이끌어 낼 성좌는 없으리라.]

-탓. 파사사……!

악의 종주가 부서지며 흩날리는 금빛 사슬의 파편을 손에 쥐며 말을 이었다.

[야드에게 실망을 안겨 준 네놈들은 그 힘을 다룰 자격이 없으니까.]

신법재판소와 관련된 과거의 비극과 진실.

그것을 악의 종주가 언급하자, 성좌들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그때.

[……그 원흉을 만들어 낸 존재는 태초신이었다.]

여래의 입에서 악의 종주가 언급한 진실에 반박하듯,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과거, 성좌들이 신법재판소로 저지른 만행과, 신계에 불어닥친 피바람.

그 피바람을 일으킨 장본인인 여래가.

[태초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벌어진 비극을, 이들에게 전가하지 마라.]

과거에 벌어진 비극을, 오롯이 성좌들의 잘못만이 아닌, 태초신의 잘못이 크다고 말했다.

신법재판소를 그 격에 걸맞지 않은 이에게 하사한 존재.

성좌들이 신법재판소를 남용했음에도, 그것을 끝까지 방관하기만 했던 존재.

결국, 신계에 피바람이 불어닥친 이후에야 뒤늦게 수습에 나선 존재.

신계에 벌어진 비극을 초래한 진짜 원인은 바로 태초신이었다.

여래가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하자.

-화아.

그의 손에 쥐어진 작은 황금빛의 망치.

신법의 존엄에서 황금빛이 짧게 점멸했다.

나 홀로 계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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