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6화
레나가 경각심을 드러내며 침음을 흘리고 처용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을 때.
[흠?]
[뭐냐? 저것은-.]
같이 블랙홀에 말려들었던 다른 악마들 역시, 수상한 기척을 감지하며 일제히 어느 한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괴한 무언가가 가만히 서 있었다.
호리병, 혹은 땅콩처럼 생긴 몸체에 두툼하고 긴 팔다리가 달린 모습.
머리로 보이는 윗부분에는 검은색과 붉은색의 물감을 덧칠해 그린 듯한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기괴한 형태의 석상, 혹은 골렘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내자.
[이 더럽게 못생긴 건 뭐냐?]
-쿵! 툭!
근처에 있던 악마들이 석상 곁으로 다가가며 손을 들어 올렸다.
이곳에 모인 악마들의 평균 크기보다 조금 큰, 대략 4미터가 조금 넘는 크기의 석상.
호전적인 악마들은 석상의 외형을 보고 우습게 여기며 그 석상을 손으로 두들겼다.
-탁. 타탁!
그저 두드리는 소리만 날 뿐, 골렘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자.
[비켜라.]
고위 악마 하나가 앞에 있는 악마들을 밀쳐내며 다가오고는.
-우웅! 까가강!
마기를 실은 손톱을 내리그으며 석상을 향해 공격했다.
바위는 물론, 어지간한 강철 갑옷은 단번에 갈라 버릴 만한 위력.
하지만.
-…….
석상의 겉면은 파괴되기는커녕, 조금의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그런 석상 총 다섯 개가 악마들 사이사이에 서 있었다.
악마들의 공격이나 건드림에도 진짜 석상처럼 아무 반응 없이 가만히 있기만 할 뿐이었다.
결국, 아무 반응이 없는 석상에 관심을 거둔 악마들이 다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몇몇 악마들은.
[변종!]
[죽여라!]
-콰아아!
엘리스 옆에 있는 처용을 알아보며 즉시 공격을 퍼붓기도 했다.
처용은 그런 그들을 가만히 응시하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악마들의 날카로운 손톱이 처용을 향해 쇄도하며 날카롭게 긁고 지나가자.
-까가강! 까강!
그 공격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가로막히며, 둔탁한 소음을 내었다.
처용은 전혀 움직이지도, 기운을 방출하지도 않았음에도, 피해를 받지 않은 상황.
[……무슨 일이?]
공격을 감행했던 악마들이 주춤거리며 침음을 흘리고는 다시 처용을 향해 공격을 내질렀다.
그때.
[모두 멈춰라. 소용없는 짓이다.]
대악마 중 한 명이 처용을 공격하는 악마들에게 명령하듯 입을 열었다.
[우리 모두와 저 변종에게서 알 수 없는 힘이 개입하고 있다.]
검은색과 푸른색의 깃털이 고루 섞인 부엉이와 비슷한 모습의 대악마.
판데모니움 서열 15위, 간파의 대악마 엘리고스가 처용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의 권능은 이명과 같은 간파(看破).
주변에 일렁이는 결계나, 상대의 공격, 혹은 능력을 파악하고 파훼하는 권능이었다.
[바알 님, 이 하계종과 저희들, 바알 님까지 알 수 없는 법칙에 얽매여 있습니다.]
엘리고스가 바알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조언하듯 말했다.
동시에, 자신의 다리 부분을 가린 깃털을 걷어 내고는.
-탁.
맹금류의 발과 비슷한 자신의 발목을 드러내 보였다.
정확히는 발목에 채워진 X자 형태의 고리를 바알에게 보인 것.
그런 엘리고스의 침착한 말에.
[…….]
바알이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며 자신의 왼팔을 들어 보았다.
-철컥.
어느새 자신의 손목에 걸려 있는 X자 형태의 팔찌.
-쿠구구!
바알이 거슬린다는 듯, 팔찌를 향해 어둠을 내뿜으며 부수려 했지만.
-타아!
팔찌를 으스러뜨리듯 뭉친 어둠이 단번에 흩어져 버렸다.
어둠으로 짓눌러 부수려 해도, 오른손으로 붙잡아 힘을 주어도 벗겨지지 않는 정체불명의 팔찌.
바알이 그런 팔찌를 잠시 내려다보고는 다른 악마들을 응시했다.
모두, 다리와 팔, 목 등에 같은 형태의 팔찌와 고리가 걸려 있는 모습.
심지어.
“이걸 이제 봤어?”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며 미소를 짓는 예언자와 처용의 팔에도 같은 팔찌가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엘리고스.]
바알이 불편함이 일렁이는 목소리로 엘리고스를 부르자.
[송구합니다. 바알 님. 제 권능으로는 파훼가 불가능했습니다.]
엘리고스는 바알이 묻고자 하는 말을 미리 파악한 듯, 답하기 시작했다.
그는 블랙홀 속에 말려들어 이 알 수 없는 공간에 빠진 순간부터 주변을 간파하기 시작했었다.
하지만, 무려 서열 15위의 대악마라 해도, 이 알 수 없는 공간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었다.
그나마 알아낸 사실은, 이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이 ‘악몽’이라 불린다는 것.
[같은 악몽의 ‘참가자’끼리 서로 공격할 수 없다. 이 법칙을 간파한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X자 형태의 아티팩트, 같은 ‘표식’을 가진 이들끼리는 서로 공격하거나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엘리고스의 말을 들은 바알이 인상을 확 찌푸리고는.
-콰아아아!
엘리스를 향해 손을 뻗어 강렬한 어둠의 파도를 내리쳤다.
피아식별을 가리지 않는 갑작스러운 공격.
그 공격에 엘리고스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섰고.
[피, 피해라!]
[말려들면 죽는다!]
주변에 있던 악마들 역시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서 도망쳤다.
다만.
“…….”
“…….”
공격 대상인 레나와 바로 옆에 있는 처용만 태연한 듯, 혹은 진지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침묵했다.
강렬하게 휘몰아쳐 오는 바알의 공격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그냥 가만히 있는 모습.
아무리 처용이라 해도 무시하지 못할 공격이 계속 쏟아지고 있었지만.
-콰아아! 촤아!
거대하게 쏟아지는 어둠의 폭포는 처용과 레나를 피해 갈라지며 흩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성가시군.]
-스르륵.
바알이 쏟아 내던 어둠을 모두 자신에게 빨아들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힘으로 이 알 수 없는 공간과 법칙을 모두 부수려 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는 모습.
[법칙을 부수는 권능을 지닌 네놈이 가만히 있었던 이유인가?]
바알이 침묵하고 있는 처용의 태도가 이해가 된다는 듯 읊조렸다.
신명을 얻은 처용과 제대로 싸워 본 적은 없지만.
-법칙을 비틀고 부수는 권능.
-혈선의 역천과 비슷한…….
옥황상제와 다른 순혈자들에게서 받은 정보를 통해, 처용이 대략 어떠한 권능을 지녔는지를 알고 있었다.
멸천의 신명, 법칙을 부수고 비트는 권능.
그러한 권능을 지닌 처용이, 자신을 속박하는 법칙을 부수거나 벗어나려 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지, 벗어나지 않는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침착한 모습을 보이며 가만히 있는 처용과 예언자는 이 알 수 없는 장소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바알은 서로 시선을 마주한 처용과 레나를 잠시 응시하고는 다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악몽, 그렇군. 이곳이 악몽이라는 곳인가?]
이 알 수 없는 장소가 어떤 곳인지 알아냈다는 듯 읊조렸다.
악몽을 언급하는 바알의 말에.
“……!”
레나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반응을 보였다.
그런 레나의 반응을 본 바알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신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정확히는 악몽의 가장 ‘심층’이다.”
지금껏 입조차 열지 않고 침묵하던 처용이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주변에 있는 모든 악마가 처용을 응시했고.
“……재수 없으면 이곳에서 다 같이 사이좋게 뒤질 거다.”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자신의 시선을 감춘 처용은 어느 한 곳을 계속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이 악몽 속에 들어섰을 때부터, 처용이 계속 응시하는 대상.
-…….
바로 땅콩을 닮은 기괴한 형태의 석상이었다.
조금 전부터 전혀 움직이지 않고 다른 이들처럼 아무런 공격 또한 받지 않는 석상.
처용은 경각심 어린 표정으로 계속 석상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순간.
[이번…… 게임…… 은?]
목을 긁는 듯 뒤틀린 목소리를 내는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부끄럼……쟁이…… 입니다.]
느릿느릿 알 수 없는 메시지를 전하는 시스템의 음성에, 악마들이 고개를 기울였다.
레나는 조심스럽게 처용을 응시했고.
‘……네가 나한테 신호를 줘.’
처용은 그런 레나의 시선을 느낀 듯, 여전히 석상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전음으로 말했다.
어떤 신호를 달라는 것인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아직이야.’
레나는 처용이 한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답했다.
[게임을…… 시작…… 합니다.]
-띠딩.
시스템의 메시지가 끝나고 짧고 간결한 종소리가 울리자.
[……예언자는 감시하고 변종은 무시해라.]
엘리고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른 악마들을 향해 명령하듯 말했다.
그 명령에 따라 외곽에 있는 악마들이 주변으로 흩어지며 드넓은 공동을 탐색했다.
자연스럽게.
-…….
처음에 악마들이 관심을 보이던 땅콩 석상.
그 석상을 관찰하던 악마들 역시,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모든 악마가 시선을 돌리고 단 한 명, 처용만이 석상을 응시한 순간.
‘……지금이다.’
레나가 처용에게 신호를 보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전음이 들려온 즉시.
-스르륵.
처용이 눈을 감으며 자신의 시야를 차단했다.
이윽고…… 공동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석상을 향하지 않는 순간.
-콰직!
무언가가 뜯겨 나가는 듯한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툭. 투둑!
누군가가 무릎을 꿇고 쓰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스르륵.
눈을 뜬 처용은 다시 자신이 바라보던 방향을 다시 노려보며 시선을 집중했다.
시야를 잠시 차단한 것이 아닌, 그저 눈을 깜빡였다고 할 수 있는 수준.
하지만, 그 짧게 눈을 깜빡인 찰나의 순간, 무슨 일이 벌어졌다.
[뭐냐?]
[왜 갑자기 나자빠지고-.]
악마들 역시,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돌렸다.
쓰러진 이들은 다름 아닌, 악마들이었다.
갑작스럽게 몇몇 악마들이 쓰러지자, 다른 악마들이 의문을 표하며 쓰러진 악마들을 응시했고.
[……무? 무슨 일이!?]
[이게 뭐냐!]
-스릉!
-콰드득!
그들을 본 순간, 일제히 경악을 내지르며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마기를 내뿜고 손톱과 칼날을 치켜들며 주변을 경계하는 악마들의 모습.
그들이 갑작스럽게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툭. 주르르……!
쓰러진 열 명의 악마들은, 모두 상반신이 뜯겨 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거대한 입과 날카로운 이빨을 지닌 무언가가 그들의 상반신을 단번에 뜯어먹은 듯한 흔적.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한 찰나의 순간에, 악마들이 당한 것이었다.
죽은 악마들을 응시한 바알 역시, 의문을 표하며 눈을 가늘게 떴고.
[도대체 무엇이?]
엘리고스 역시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읊조렸다.
대악마들조차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다는 듯한 모습.
하지만.
“…….”
아까부터 계속 석상을 주시하던 처용과 엘리스.
둘은 현재 사태에 대해 알고 있다는 듯,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처용은.
‘아주, 야무지게도 뜯어먹었군.’
어떤 존재가 악마들을 죽였는지, 아니 누가 그들을 잡아먹었는지 알고 있다는 듯 속으로 읊조렸다.
소리소문없이 악마들의 상반신을 뜯어먹은 존재는 다름 아닌.
-…….
아까부터 처용이 계속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석상이었다.
지금 그 석상의 얼굴, 찢어져 다물린 입이 그려진 부분에는.
-뚝. 뚜둑.
악마들의 살점과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전혀 움직임이 없었던, 전혀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석상의 입에서 떨어지는 악마의 피와 살점.
그 석상 근처에 있던 열 명의 악마들이 끔찍한 변사체로 발견된 상황.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는 그 전체적인 광경은 사뭇 기괴함을 자아냈다.
‘혹시, 지금이라면?’
상황을 지켜보던 처용은 땅콩 모양의 석상을 응시하며 속으로 읊조리고는.
-우웅.
눈에 신력을 집중하며 통찰의 눈을 사용해 보았다.
회귀 전, 악몽에 떨어졌을 당시.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정체불명의 석상, 아니 괴물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통찰의 눈으로 응시해도, 시스템 창은 오류가 난 듯, 여기저기 깨져 있는 상태로 출력되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하이테크 키메라 - ■■P / ?]
[등■ : ?]
[■징 : 멸망한 우주의 결전 병기.]
[우■의 종말을 대비■ 전 세■의 강자■■ 제물■…… 확인 불가.]
[악■에 오염■어 본래 정보■ 변이■■…….]
[확인 불가.]
어렴풋이나마 일부분이 보이는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멸망한 우주의 결전 병기?’
처용이 유일하게 명확히 보이는 문구를 속으로 읊조리며 말했다.
그리고.
‘이곳은 악몽, 악몽은 우주가 소멸하며 남은 잔여 정보를 버리는 쓰레기통…….’
악몽에 대한 정보를 곱씹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때.
-여, Bro. 무사한가?
돌연, 처용의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중성적이면서도, 장난기가 섞여 있는 목소리.
처용을 Bro라 칭하는 특유의 말투.
‘……조커?’
그 목소리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차린 처용이 놀란 마음을 감추며 속으로 되물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