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2화
지면에 추락하려는 로키를 받아 낸 토르가 다리를 땅으로 뻗으며 무릎을 살짝 굽히고는.
-촤아아! 탓!
발부터 시작해, 몸을 뒤로 누이며 지면에 착지했다.
로키를 감싸고 제 몸을 완충재 삼아 그를 받아 낸 모습.
[로키!]
토르가 다급한 목소리로 로키의 이름을 부르자.
[나, 나…… 손대지 마…… 형님.]
로키가 떨리는 목소리를 힘겹게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는 파멸의 힘에 당해 육체가 점차 파멸하는 중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토르마저 파멸에 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말하지 마라! 신력을 끌어 올리고 사악한 힘에 저항해라! 당장!]
-파지직! 파직!
토르가 로키를 좀먹고 자신에게까지 퍼져 오는 파멸의 힘에 저항하며 소리쳤다.
로키가 가망이 없다는 것을, 이미 이성적으로 알고 있었다.
토르는 성좌가 되기 이전에도, 전장에서 숱한 죽음과 비극을 경험한 전사였으니까.
그 누구라 해도, 강력한 치료의 권능을 지닌 성좌라 해도, 당장 로키의 부상을 치료하기엔 불가능했다.
그러한 사실을 이성적으로 자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럴 순 없다! 누가 여기로-!]
토르는 어떻게든 로키를 붙들고 있었다.
[의미…… 없는 짓이야.]
그런 토르의 모습을 본 로키가 한심하다는 듯한 미소를 보이고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것이었을까?]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를 읊조리며 한탄을 흘렸다.
후회하는 듯, 아닌 듯,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이 일렁이는 목소리.
로키는 삶의 마지막을 앞둔 시한부처럼.
[난…… 난 그냥…… 그냥…… 인정받고 싶었을…… 뿐이었어.]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말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로키의 말에.
[알아! 내가 다 알고 있다! 그러니까 더 말하지 마라!]
토르가 점점 흩어지는 로키의 몸을 붙들며 소리쳤다.
그러자, 로키의 입에서 재차 한심하다는 듯한 헛숨이 흘러나왔다.
자신은 성운을 배신하고 파멸시킨 배반자였다.
당장, 죽여도 할 말 없는 죄인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죽어 가는 상황.
적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달가워하며 처형을 집행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버텨라! 어떻게든……!]
무너진 아스가르드를 부흥시켜야 할 책임을 짊어진 성좌, 토르.
그는 성운의 배반자이자 동생인 로키를 어떻게든 살리려 하고 있었다.
로키는 자신을 붙들며 미련한 모습을 보이는 토르에게 다시금 옅은 한숨을 내뱉고는.
[미, 미안해…… 형.]
힘겨운 목소리로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상대를 높여서 부르는 형님이 아닌, 친근한 가족을 부르는 호칭인 형.
로키가 토르를 부를 때마다 하고 싶었던 말이자, 그동안 하지 못했던 단 한 마디였다.
스스로의 최후를 직감한 로키가 마지막으로 토르를 향해 형이라 불러본 것.
그런 로키의 마음과 생각이 전해졌는지, 토르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동시에.
-스륵. 탁!
로키가 오른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를 토르의 손에 넘겨주었다.
새끼손가락과 약지가 잘리고 넝마가 된 모습인 로키의 오른손.
그런 와중에도, 손아귀에서 끝까지 붙들고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우우웅.
점점 빛이 꺼져 가고 있는 녹색의 보석.
로키의 근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배반의 핵이었다.
배반의 핵이 토르의 손에 쥐어진 순간.
[나는, 나의 배반……은-.]
로키가 점점 흐릿해지는 정신을 바로잡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고.
[모두…… 토르를 위해서였다.]
배반의 신명 속에 깃든 마지막 권능을 발현했다.
-스르륵! 파아!
빛이 점점 사라지며 거무죽죽하게 변해 가던 배반의 핵이, 찬란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스르륵. 스륵……!
배반의 핵은 그 빛 속에 점점 녹아들며 토르의 손아귀 위에서 사그라졌다.
아니, 토르에게 흡수되는 것처럼 보였다.
배반의 핵에서 뿜어져 나온 빛도 토르를 향해 휘몰아치며 그에게 깃들었다.
동시에.
-파사사삭……!
미소를 지은 채 굳어 있는 로키가 점점 검은 잿가루로 변해 가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
그 모습을 본 토르가 로키를 붙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지만.
-파사사!
토르의 손이 닿는 순간, 로키가 모래성이 허물어지듯, 완전히 가루로 변하며 흩어졌다.
로키를 붙들고 있던 두 손에 검은 잿가루가 남아 흘러내렸고.
-스륵. 탁.
이내, 로키가 항상 등에 걸쳐 맸던 검녹색의 망토만이 쥐어졌다.
[아……!]
그 망토를 응시한 토르의 입에서 허무하고 상실감 어린 침음이 흘러나왔다.
그때.
-우웅.
로키 옆에 떨어져 있는 부러진 창대, 파괴된 궁니르가 허공에 떠오르더니.
-슈욱!
토르의 옆에 떨어져 있는 금이 간 망치, 몰니르를 향해 쇄도했다.
먼 곳에 흩어져 있던 다른 궁니르의 파편 역시, 허공을 날아오며 몰니르에 모여들었다.
몰니르의 갈라진 부분에 궁니르의 파편들이 달라붙자.
-차자작! 차작! 스르륵.
균열이 점점 사라짐과 동시에, 묠니르의 형태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토르 역시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지금껏 로키가 고이 간직하고 있던 힘.
아스가르드의 주신이었던 오딘, 그에게서 강탈한 주신의 권한이 토르에게 깃들고 있었다.
주신의 권한은 제 자리를 찾았다는 듯, 아무 부작용이나 반감 없이 토르에게 깃들었다.
토르는 로키가 전해 준 힘과 권한을 받아들이며 멍한 눈빛을 내비쳤다.
거대한 힘과 권능을 받고 있음에도, 허무와 상실감이 짙어 보이는 역설적인 태도.
그런 토르를 위로하듯.
-휘이이.
흩어진 로키의 검은 잔해들이 토르를 한 번 휘감으며 흩날렸다.
동시에.
-슈우우-!
빠르게 날아들며 누군가를 향해 나아갔다.
검은 잔해가 나아간 곳은 다름 아닌.
“…….”
조금 떨어진 곳에서 로키의 최후를 바라봤던 처용이었다.
그 순간.
-화아아!
처용의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며, 시간이 멈춘 듯 주변 일대가 정지되었고.
-스르륵!
백색으로 가득했던 주변이 점점 노을빛과 청록빛으로 변하며 새로운 환경이 나타났다.
“……조각상?”
처용이 순식간에 뒤바뀐 주변 환경을 둘러보며 읊조렸다.
해가 뉘엿뉘엿 지며 노을을 그려 내는 초록빛의 넓은 잔디.
그 위에 무수히 놓인 청동 조각상들의 모습.
-저벅.
처용이 주변의 조각상들을 관찰하며 앞으로 나아갔고.
‘의학의 신과 같은…… 로키의 심상인가?’
지금 자신이 들어온 이 장소가 어떤 곳인지 파악하며 읊조렸다.
동시에, 가장 가까이 있던 조각상을 응시하며 잠시 그 앞에 섰다.
조금 큰 체격의 남자아이, 그보단 왜소한 체격을 지닌 남자아이.
두 아이가 목검과 나무 방패를 들고 대련하는 듯한 모습의 조각상이었다.
진지한 대련이라기보단,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장난치는 듯한 모습.
‘토르…… 그리고 로키.’
조각상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한 처용은, 그들이 누구인지 단번에 파악했다.
큰 체격의 아이는 다름 아닌 토르.
왜소한 체격의 아이는 바로 로키였다.
처용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자, 다른 조각상의 모습들도 눈에 들어왔다.
이번엔, 서로 대련하던 둘 중 하나가 쓰러진 모습의 조각상.
놀랍게도 왜소한 체격이었던 로키가 큰 체격인 토르를 쓰러뜨리고 검을 겨누고 있었다.
동생이 형을 상대로 승리를 쟁취한 모습.
이윽고 로키가 쓰러진 토르에게 손을 내밀자, 그 손을 잡고 일어서는 토르의 모습이 보였다.
토르는 뛰어난 모습을 보인 동생에게 질투하는 것이 아닌, 대단했다며 칭찬하는 것 같았다.
어두운 감정이 일절 없어 보이는 우애 좋은 형제의 모습이었다.
처용 역시 성격 좋은 어린 토르의 모습을 보며, 작은 미소가 흘렸다.
하지만.
“…….”
앞으로 나아가던 처용의 얼굴에 점점 미소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퍽!
처용의 귓가에 울려오는 둔탁한 소리.
실제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처용에게는 누군가가 맞는 듯한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아니, 느껴졌다.
다름 아닌,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조각상.
“……오딘.”
갑작스럽게 나타난 오딘이 궁니르의 창대로 로키의 가슴을 후려쳐 쓰러뜨린 모습이 보였으니까.
궁니르에 얻어맞은 어린 로키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내비치며 쓰러졌다.
동시에, 시종들과 시녀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토르를 챙기며 물러났다.
그런 그들은 토르와 함께 뒤로 물러나며 로키를 향해 험악한 표정을 내비쳤다.
마치, 더러운 무언가를 바라본 듯, 혐오감이 가득 담긴 표정이었다.
오딘은.
-스릉.
쓰러진 로키를 향해 궁니르의 창날을 겨누고 있었다.
마치, 로키를 향해 경고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는 이내 사라졌다.
텅 빈 연무장 중앙에 혼자 남겨진 로키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조각상을 본 처용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시선을 돌려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전사가 된 토르가 검을 치켜들며 괴물들과 싸우는 모습의 조각상.
그런 그를 뒤에서 은밀하게 도와주는 로키.
큰 공훈을 세운 토르가 오딘에게서 묠니르를 하사받으며 성좌로 인정받는 모습.
반면에, 은밀히 토르를 도왔던 로키는.
-푸욱! 크허억!
궁니르의 창날에 가슴이 찔리며 처벌을 받고 있었다.
완벽하게 토르를 돕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앞에 나열되어 있는 이 모든 조각상은.
로키와 토르의 모습을 통해 보여 주는 아스가르드의 과거였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로키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어두운 과거사.
처용이 그런 조각상을 응시하며 지나쳐 갈 때마다.
-더러운 사생아가-!
-꼴에 주신님의 직계라고…….
-장난과 기만의 신명.
로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알 수 있었다.
정확히는 어떤 상황이 펼쳐졌는지, 머릿속에 절로 그려졌다.
지금 처용이 바라보는 조각상.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바닥에 부복한 로키를 노려보는 오딘의 조각상을 응시하자.
-도구로 태어났으면, 완벽한 도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딘이 로키에게 무어라 말했는지, 그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결국.
“……자식을 이따위로 취급할 거면-.”
더 보다 못한 처용의 입이 열렸고.
“싸지르질 말던가 이 미친 새끼야.”
오딘을 향한 욕이 튀어나왔다.
처용 역시, 이제 유리아라는 자녀를 둔 입장이었기에.
“선천적 신격이라는 놈들이 어째 위로 갈수록, 더 병신들이 따로 없어.”
제 자식을 도구로 취급하는 오딘에게 절로 혐오감이 치솟았다.
그때.
[남의 창피한 과거는 그쯤 보지 그래?]
처용의 귓가에 로키의 선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각상을 볼 때마다 들려오던 환청 같은 소리가 아닌, 진짜 로키의 목소리.
처용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며 고개를 돌리자.
[토르하고 감동적인 이별을 잘 마쳤나 싶었는데, 이게 뭐야?]
-저벅.
조각상들 뒤에서 모습을 숨기고 있던 로키가 처용 앞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대악마로 변하며 머리 위로 자라났던 뿔은 사라져 있었다.
아스가르드의 성좌였을 때의 모습.
처용이 그런 로키를 지긋이 바라보며 침묵하자.
[잘못을 뉘우치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해 주마. 계승자.]
로키는 처용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예측한 질문에 답하며 말을 이었다.
[내 삶에 후회는 없다. 아니…… 아닌가? 조금 후회하기도? 잘 모르겠네…….]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을 잇던 로키는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망할, 꼴에 배신자라고 이젠 나도 나를 모르게 된 건가? 쯧.]
이내, 탄식 어린 한숨을 내쉬며 혀를 찼다.
로키가 혼잣말을 하듯, 계속 말을 이을 때.
“장난과 기만의 신 로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면 처용이 입을 열며 말했다.
처용이 목소리를 내자, 로키가 하던 말을 멈추었다.
이윽고.
“아니, 동심(童心)의 길을 걷고 싶었던 자여.”
처용의 말이 이어지자.
[…….]
로키가 복잡미묘한 표정을 드러냈다.
처용의 말을 인정하지 못하며 반박하려다가 이내 체념한 듯 보였다.
동심(童心)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고 순수한 마음을 뜻하는 말.
장난과 기만의 신, 교활한 로키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어린아이처럼 애정을 갈구하는 자, 사랑받길 원했던 자.
당연히 받아야 할 애정을 받지 못해 점점 짓궂게 변해 버린 자.
끝내 곪고 썩던 상처가 터지며 가족마저 배반한 자.
마지막엔,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한 번 더 배반을 저지른 자.
동심은 로키의 짓밟힌 꿈을 상징하기도 하는 말이었다.
본인이 추구하고 싶었던 마음이었지만, 끝내 부서지고 만 마음.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처용이 오랜 시간, 기구한 삶을 살아온 신을 향해 물었다.
[…….]
그 말에, 로키가 복잡한 눈빛으로 잠시 침묵했다.
이윽고.
[……저 미련한 곰탱이 녀석, 감은 좋아 보여도 둔해 빠진 녀석이야.]
바로 옆에 있는 조각상, 토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 같은 놈한테 잘못 걸리면 멍청하게 사기당하기만 할 거야. 그러니까…….]
토르의 조각상을 바라보며 말을 잇던 로키가 잠시 말꼬리를 흐리고는.
[……형을 부탁해.]
옅은 미소를 지으며 토르를 부탁한다는 말을 이었다.
그 말에, 처용은 군말 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의외네.]
로키가 그런 처용을 보며 읊조렸다.
처용은 악마와 악신들을 상대로 한 치의 자비심을 보이지 않는 이라 생각했었으니까.
로키는 자신의 말을 들어준 처용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조크 – 크타니드가 지상에 강림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야.]
이내, 진지한 목소리로 처용에게 경고를 전하듯 말을 이었다.
중요한 정보를 이야기하는 듯 보이는 로키의 말에, 처용 역시 진지한 눈빛을 띠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네가 이기길 진심으로 바라지.]
-스르륵.
그 모습을 본 로키가 처용을 향해 손을 뻗자.
-후우우……!
조각상이 놓인 드넓은 잔디밭이 옅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 장소가 사라지려는 듯한 모습.
[절대로, 네가 아버지에게 한 마지막 말이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건 아니야.]
로키가 점점 사라지려는 조각 공원을 크게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처용이 오딘을 향해 일갈하듯 내뱉었던 욕설.
로키 본인은 부정하듯 말했지만, 그 목소리 안에는 짙은 후련함이 일렁이고 있었다.
자신을 대신해 분노를 표해 준 처용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그러니까. 멋대로 착각하지 말라고.]
로키는 마지막까지 그 마음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리고.
-슈르르륵!
흔들리던 주변 환경이 일그러지며 한 곳을 향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바로 로키가 손으로 가리키는 대상, 처용을 향해 모여들었다.
조각 공원과 로키가 한 지점에 뭉치며 처용에게 모두 빨려 들어가자.
-스르르!
주변 환경이 다시 백색으로 변하며, 천천히 처용이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동시에.
“……그런가?”
처용이 로키가 전해 준 정보를 머릿속으로 곱씹으며 읊조렸다.
나 홀로 계승자